아! 사람들은 인생의 밭고랑에서

비밀스런 신의 섭리에 따라

순간적인 추곡처럼

싹트고 여물고 시들어 가고

그 뒤를 또 다른 이들이 좇아간다…….

그렇게 우리 덧없는 종족들은

자라나고 요동치고 들끓다가

조상들의 무덤으로 모여든다.

우리의 때도 곧 닥쳐오리라.

하여 손자들의 작별의 인사를 하며

세상에서 우리 또한 몰아내리라!

 

그러니 친구여, 아직 젊을 때

이 덧없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라!

나로 말하면 인생의 무상을 너무 잘 알아

미련도 애착도 없고

환영을 향해 눈을 감은 지 오래건만.

그래도 어쩌다 머나먼 미래의 희망이

내 가슴 뒤흔든다.

티끌만한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 서러우리라.

칭송을 위해 살고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원하는지 모른다

내 슬픈 운명이 찬양받기를,

단 한 줄의 시구라도

막역한 친구처럼 날 추억해 주기를.

 

누가 알랴, 누군가는 그걸 읽고 감동할지,

내가 지은 한 편의 시

운명의 비호를 받아

어쩌면 레테의 강물 속에 침잠하지 않을지.

어쩌면(달콤한 희망이겠지만!)

후세의 어느 무식쟁이가

내 유명한 초상화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시인이었대 하고 말할지!

 

 -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제2장>

 

 

* * *

 

 

 

 

 

 

 

 

 

 

 

 

 

 

 

 

 * * *

 

 

엊그제 친구가 죽었다.

고3때 한 반이었지만 졸업 후 자주 보지는 못했다.

그 녀석은 경찰대에 떨어지고 부산대 법대로 진학했다.

다시 만난 건 그 녀석이 서른 중반쯤 뒤늦게 사시에 합격하고 나서였다.

어디서 처박혀 내내 공부만 했던지 영 소식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졸업후 십수년 만에 만나서 니집, 네집 서로 찾아가기도 했었다.

 

서울 살이가 힘들다며 그 녀석이 안동으로 내려간 뒤로도 그럭저럭 보고 지냈다.

그러다가 차츰 뜸해 지더니, 나중엔 밴드로, 카톡으로 서로의 소식을 아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뜻밖에도 연초에 고교 친구 넷이 만나 저녁을 먹다가 그 녀석의 소식을 들었다.

 

"병두가 쓰러졌는데, 의식이 없다더구먼. 벌써 달포는 지난 모양이야."

 

그걸로 끝이었다.

그동안 참 열심히 살던 친구였는데 이렇게 황망히 가다니.

빈소도 찾아가 보지 못하고 이렇게 영영 자네와는 작별이라니.

너무 애통하구나,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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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3 0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3-15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오렌 님의 나이에 이런 소식을 접하면 안 되는 건데 말이죠.
죽음은 나이 순으로 찾아오지 않으니... 무엇보다 건강이 먼저예요.
스트레스 덜 받으려고 노력하고 운동하고 골고루 먹고 과로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야 해요.
저는 그래서 책을 예전보다 적게 읽고 글도 적게 씁니다. 오래 살려고요...

oren 2019-03-15 23:43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런데도 우린 천년 만년 살 것 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니 그게 문제죠.
그 친구도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애쓰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던가 봐요.
운동도 참 열심히 하며 지내길래 건강하게 사는구나 했는데 말이지요.
이토록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니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