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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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많은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10∼12쪽) 

 

 

 * * *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찌기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2쪽)

 

(나의 생각)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던 풍경이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이었다. 그곳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장소였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눈싸움 장소였다. 추운 겨울에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기엔 너무나 따분한 날, 거기선 개구장이 녀석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훔쳐 낸 성냥불로 불장난도 치곤 했다. 어른들처럼 몰래 잎담배를 말아 피워보기도 했다. 내가 입대하기 전까지 살았던 고향 마을 우리 집에는 30여 년 전에 우리 식구가 서울로 떠나올 때 이웃 마을에서 이주해 온 그 식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눌러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옛날에 우리 집이었던 그 집을 찬찬히 둘러 보고 오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옛날 우리 집이었던 그 집 안으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 집은 이미 남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미 30년 이상이나 남의 집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남의 집으로 남아 있을 그 집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슬프기보다는 안타깝고 아련한 느낌부터 맛본다. 내가 한 때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 다른 낯선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 * *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짓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ㅡ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13쪽)

 

(나의 생각)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를 바라보는 느낌은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게 아닐까. 한 해 동안의 고된 노동이 비로소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기서 무언가를 불에 태울 정도로 한결 여유롭다는 느낌부터 들지 않는가. 고요한 한밤중에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들려 오던 '컹컹' 개짖는 소리 또한 슬프기보다는 뭔가 아련한 느낌부터 먼저 떠오르는 소리가 아닐까. 그 개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짖는 지와는 상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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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oren 2019-01-01 13:45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