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큼 못된 천사도 없지."

 - 셰익스피어, 「사랑의 헛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가와바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 『설국』이었다. 지금도 사정은 변치 않았다. 이 소설은 분량이 짧은 데다가 뚜렷한 플롯이 없을 정도로 스토리가 모호한 느낌이 들지만,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이한 매력을 지녔다. 그것은 눈으로 가득 찬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덧없는'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애틋하거나 허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쿄에서 놀러 온 무위도식하는 여행자에 불과한 시마무라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샤 신분의 고마코 사이에는 산골 마을이라는 비교적 좁은 공간과 짧은 틈새 시간밖에 없다. 그런 시공간을 매번 다양한 빛과 소리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이자 드넓은 우주의 일부분으로 능수능란하게 확장시키는 재주야말로 가와바타에게 특유한 재능이었다. 『설국』은 계절이 바뀌면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마는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헛수고'를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인 자연 공간에 대한 작가의 아름답고도 슬픔 가득한 묘사를 빼놓고선 결코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그만큼 설국의 무대는 아주 협소하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그곳 자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설국』은 일본에서만 특유한 게 아니라 작가에게서도 동시에 특유한 서정으로 가득하다. 일본 소설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단어들, 이를테면 게이샤, 기모노, 오비, 가부키, 유카타(浴衣), 다다미, 샤미센, 지지미 등의 용어만 들어도 그렇다. 가와바타는 특히 빛과 소리에 아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이 스무 자나 쌓이는 한적한 산골 마을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시점마다 매번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 눈 마을은 가을 한철엔 단풍객들이 더러 찾지만, 눈이 내리는 한겨울엔 온천욕과 스키를 즐기려는 여행객들로만 잠깐식 붐빌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통로는 기차였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처럼 소설은 독자들을 단숨에 눈의 고장으로 이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사뭇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홀로 여행 중인데, 기차가 멎자 아까부터 은연중에 그의 관심을 끌던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히고 (그녀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역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를 듣고 나서 시마무라는 그 처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갑자기 주인공의 내면 속으로 빠져든다. 서사는 잠시 뒤로 밀려나고, 어느새 습기 찬 기차 유리창에 비친 풍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독특한 미의식(美意識) 속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독자들에겐 생경스러운 것이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가지 그 거울은 없었다.

 

그렇다. 시마무라가 지금 기차를 타고 찾아가려는 눈 마을엔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가 살고 있었고, 지난 봄 등산철에 우연히 그 마을을 찾았다가 처음 만났던 그녀를 잊지 못해 이번에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시마무라의 건너편 좌석에서 병든 젊은 남자를 간호하는 처녀가 아까부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기차에 올라탈 때부터 내내 안색이 파리한 그 남자를 극진하게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그 처녀의 이름은 요코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12쪽)

 

기차가 그 신호소를 지나고 나서 30분쯤 뒤에 시마무라는 기차역에서 내리는데, 뜻밖에 요코 일행도 같은 역에서 내린다. 이제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한적한 눈 마을이 거의 전부다.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소설의 무대와 등장 인물은 거의 다 밝힌 셈이다. 그만큼 소설은 단촐하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로 일하는 여주인공 고마코와 눈 마을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의 아들과 그 아들을 간호하는 처녀인 요코가 등장인물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시마무라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 마을에서 반갑게 고마코를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정식 게이샤는 아니었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뚜렷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남자다. 한때는 일본춤을 연구하다가 서양무용 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서양무용에 관한 서적들과 사진을 수집하거나 서양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지난 봄, 산이 제일이라면서 혼자 눈 마을로 찾아와 산행을 즐기다가, 이레 만에 온천장으로 내려와서 게이샤를 불렀는데, 그 때 만난 여자가 고마코였다. 그녀는 샤미센과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에서 살고 있다. 정식 게이샤는 아니지만 큰 연회가 있는 경우 더러 부탁받아 춤 두어 가지만 보여주고 돌아오는 처지로 지내는 여자였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시마무라는 화들짝 놀라 앉음새를 고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9쪽)

 

둘이서 처음 만난 때는 신록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녀는 도쿄에서 동기(童妓)로 있을 때 몸값을 치르고 나와 일본무용 선생으로 성공할 작정이었는데, 겨우 1년 6개월만에 남편이 죽고 말았다고 했다. 나이는 열아홉 살이라 했다. 시마무라는 그녀와는 '친구 사이로 남고 싶으니까' 다른 게이샤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끝낼 수 있는 여자를 원했다. 그녀는 너무 깨끗했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를 다른 게이샤와 달리 생각했다.

 

소문을 들으니 고마코는 그녀가 묵고 지내는 선생님 댁의 아들이 장결핵을 앓게 되자 게이샤로 나서서 요양비를 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 댁 아들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간호사 지망생이던 요코는 바로 그 병약한 선생님의 아들을 데리러 먼 길을 다녀오던 터였다.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55쪽)

 

 

등산을 마치고 온천욕이나 즐기고 떠날 요량이었던 시마무라는 고마코라는 뜻밖의 여자를 만나 금세 친근한 말동무로 가까이 지내지만, '사랑의 헛수고'에 대한 자각 때문인지도 모를 묘한 자제심을 발휘한다. 고마코는 외지에서 찾아든 젊잖은(?) 시마무라에게 몹시 이끌리지만 더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결국 어정쩡한 상태로 기약없이 헤어진다.

 

정확히 199일 만에, 겨울이 되어 눈 마을을 다시 찾은 시마무라는 그 겨울의 풍경에 매료되고,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방을 들락거리는 고마코를 차츰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있는 남자가 외딴 시골 마을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갈래요」

 

「갈 필요 없어」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 하고 고마코는 고다쓰 위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70쪽)

 

 

맺지 못할 사랑 때문에 서로가 힘겨워할 때 이별 말고 무슨 해결책이 있단 말인가. 시마무라는 다음날 오후 3시 기차로 떠나기로 하였고, 고마코는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간다. 출발 시각 20분을 남겨 놓고 요코가 헐레벌떡 나타난다. 선생님 댁의 아드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전하러 온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요코와 시마무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고마코는 한사코 시마무라를 끝까지 배웅한다. '배웅'은 중요하다면서. 그녀가 동기 생활을 위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유일한 인물이 선생님 댁 아드님이었는데도.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75쪽)

 

 

시마무라가 다시 그 마을을 찾은 때는 억새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 사이에 선생님 댁 아들은 죽었고, 고마코는 거처를 다른 데로 옮겨서 여전히 게이샤로 일하고 있었다. 시마무라가 그 마을에 발을 디딘지도 벌써 3년째였고, 고마코가 그 마을에서 일한 지는 벌써 5년째였다. 요코는 결핵으로 죽은 젊은 남자의 무덤으로 성묘만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마코와 시마무라 사이는 한층 허물없이 가까워졌지만, 늦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시시때때로 내집처럼 시마무라의 방을 찾는 고마코의 발길은 늘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마을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었다. 나쁜 소문이 나더라도 그 마을을 떠나 딴 데로 옮겨 일하면 그만이지만.

 

어느날 문득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고백한다. "힘드니까 돌아가줘요. 이제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한테 올 때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이젠 남은 게 없어요. 이건 친구에게 빌린 옷이에요. 나쁜 애죠?" 라면서. 둘 사이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여러 장벽은 하나도 변하는 게 없었고, 둘은 차츰 또다시 이별을 예감하기 시작한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리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産)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133∼134쪽)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따돌리고 홀로 이웃마을을 구경하고 돌아온 날 밤, 마을에서 느닷없이 화재 경보 종소리가 울린다. 평소에 극장으로 쓰던 누에고치 창고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 영화 상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관에 머물던 사람들과 함께 불구경을 하다가 서둘러 화재 현장으로 내달린다. 그 와중에도,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대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142∼143쪽)

 

 

불길이 이는 쪽으로 달려가면서도 둘은 어디까지 함께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불난 곳까지 당신을 데려가면' 마을 사람들한테 놀림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길이 치솟는 고치 창고로 함께 내달리는 동안에도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전히 은하수가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발 밑이 땅으로부터 살짝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마무라는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하고 고마코에게 묻는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 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긴 고마코는 흐트러진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대여섯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싫어요」

 

시마무라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145∼146쪽)

 

 

서로 떨어진 채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타오르는 불을 구경하는 동안, 불길 속에서 여자의 몸이 '인형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고치 창고는 극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2층에 나즈막한 객석을 갖추고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여자가 실신한 채 아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추락한 여자가 요코라는 사실을 시마무라가 안 것도, 사람들이 앗 하고 숨죽인 것도, 고마코가 아앗 하고 외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요코는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 시마무라는 왠지 죽음은 떠올리지 않았으나, 요코의 내부에서 생명이 변형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 전인가,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일시에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쳐진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150∼151쪽)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리듯 달려들어 요코를 끌어안는다. 정신없이 울부짓는 고마코에게로 다가가던 시마무라는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떠밀려 휘청인다. 그때 발에 힘을 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시마무라는 쏴아 하고 은하수가 자신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흘러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설국』이라는 소설은 사실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를 떠올릴 만큼, 그 자체로 이미 비현실적이거나 일종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설국』은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의 배경이 된 온천장 여관에 머무르며 집필했고,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이어 쓴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만큼 플롯이 모호할 뿐 핍진성이 부족한 작품은 아니다.

 

한 번만 읽고서는 소설을 온전히 체감하기 어려워 잇따라 두 번째로 읽는 동안에, 가와바타 특유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절묘하게 혼재된' 느낌이 소설 속에 얼마나 알알이 박혀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어떤 비평가는 『설국』에 짙게 스며있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혼재된 느낌'을 두고 '성욕과 상실감 사이의 긴장'이 느껴진다고도 보았다. 본질적으로 '헛수고'일 수밖에 없는 남녀 사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로맨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눈의 고장'에서 펼쳐진다는 건 생각할수록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긴긴 겨울이면 스무 자씩이나 눈이 쌓여 기차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별천지로 변모했다가, 온갖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마는, 마법처럼 놀라운 힘을 지닌 새하얀 눈이야말로 '허무한 아름다움'의 상징일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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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2018-12-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가운 겨울날,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춥다는 것은 세상의 편견,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편견을 건너 글의 행간을 생각해봅니다.

그랜드슬램 2018-12-1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알고있는 게 과엔 본질을 뚫고 정확히 바라보는건지를오ㅡ?

그랜드슬램 2018-12-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맥주가 나오고 치킨이 준비되는 재건축 건물앞에서 한해의 무언가를 곱씹어 보는데 투명한것은 단 한가지뿐입니다.,터널을 지나 눈 다음에 나올 그무엇인가를 홀로 생각해봅니다. 문학이 아름다운건 이토록 다양한 각도로 보는 귀한 독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 ... 독서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죄송한 말씀은 취중이라 글에 두서가 없어서,미안하지만 이런 제가 조금 귀엽군요 글 감사합니다^^

oren 2018-12-10 22:45   좋아요 0 | URL
마침, 가와바타의 『설국』에서도 ‘두서없는 대화‘가 엄청 많이 등장한답니다. ㅎㅎㅎ
그리고, 취중댓글이라 그런지 느낌이 확실히 귀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