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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 송
질 르루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그럴 때 그 글은 자기 자신과 나누는 긴 대화, 신부 앞에서 털어 놓는 고해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그때 글쓰기란 무슈 프로이트 혹은 마드무아젤 프로이트 앞에 마련된 카우치에 눕는 것과도 같은 행위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즉시 본론으로 향하는 것, 즉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 그리하여 지옥 불에 끊임없이 달구어지다가 때때로 천 볼트짜리 감전을 통해 기쁨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저 부분을 읽으며,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참으로 교묘하게 자신을 표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얄미울 정도로.
작가의 그러한 기교는 독자인 나에게 읽는 동안 누군가와 계속 실존 커플이었던 피츠제럴드와 젤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했으면서도 결국엔 그들보다는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후세의 어느 프랑스 소설가의 작품을 위해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스콧이 자신의 언어를 훔쳐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던 젤다처럼, 작가는 스콧과 젤다의 삶을 훔쳐 자신만의 소설을 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건 작가가 남자라는 점이다.
그런 그가 여주인공 1인칭 젤다의 시점으로 소설을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솜씨가 가증스러울 정도로 대단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에 빠진 시니컬한 여류 소설가가 쓴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문장들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저자, 그들이 쓰는 말로는 작품의 아버지. 이 표현은 글쓰기가 남자들의 일이라는 선언이다. 글쓰기는 남자들의 신성한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라는 말은? 이 말은 남자들의 새끼를 배고, 먹이고, 똥을 누이기 위해서만 쓰인다.』
『남자들은 자신에 대해 말한다. ‘고통 받고’ 있다고. 그 고통이란 지극히 섬세하고 낭만적인 것이며, 바로 자신들이 비범하고 탁월하다는 걸 보여주는 표시라고들 한다. 그런데 우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해진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만 하면, 그건 히스테리이고 정신분열 증상이므로 격리해서 가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 소설은 다른 작가들에게 기교적인 측면에서 많은 영감을 줄 만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개인적으로 이런 느낌은 얼마 전 읽은 ‘책 도둑’이란 소설에서도 받은 바 있다.)
어떤 소설에서나 양념 노릇을 하는 단어놀이 유희는 물론이고, 소설의 구성 면에서 이야기 시간을 공간이동과 더불어 독특하게 배열한 방법이라든가, 대본과 같은 대화 삽입, 그리고 작가 자신이라 할 만한 인물을 끝에 등장(실제 작가에 대해 잘 모르는 이상 이것 또한 논픽션일까, 픽션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시키는 세련된 연출 방법 등, 같은 소설이라도 다른 소설들과 차별을 두고자 노력한 작가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고나 할까.(재미있는 예로 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 영감은 우선적으로 옮긴이가 받은 듯 하다.)
소설 속에 작가는 이런 문장을 삽입해 놓고 있다.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건강법이란 바로 경계를 넘어가보는 일이야. 과도함, 극단을 추구하는 거지.』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글로써 스스로 저것을 추구했다는 느낌을 준다. 실존 인물들에 대해 가차 없는 픽션의 칼을 들이 대는 것으로써.
사실 이 정도면 아무리 픽션일지언정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할지라도 아무 할 말이 없지 싶은 것이 이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을 쓰는 자로서의 어쩔 수 없는 그런 죄의 업보를 애써 숨기지 않는다.
글이야 혼자 쓰지만 그것을 쓰는 이상 타인의 삶을 침범 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들의 이기적인 업보를 말이다. 표현이야 어떻게 하든 세상 그 누구보다 타인들의 삶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소설가로서의, 그리고 그 대가로 타인들의 삶을 늘 존중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작가로서의 업보를.
그런 점에서 아래 옮겨 놓은 부분은 어쩌면 이런 소설을 쓴 작가로서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으나 독자의 입장에서 나에게는 그가 모든 소설가를 대표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중년의 젤다가 어느 작가 지망생에게 쓰던 답장에 담겨져 있었다. ‘거짓과 진실’을 오가며 쓴….
『“…한 가지는 알아요. 작가가 글을 쓰자면 모든 것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은 소설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경험과 현상을 해석해서 언어로 옮기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이 헌신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내가 젊은이라면 계속 밀고 나가 어떻게든 그 소설이 출판된 기회를 얻겠어요. 그런 다음 작품이 이미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등에 없고 주위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기다리겠어요.”…그 학생이 앞으로 도 순수하기를, 갈망으로 조바심치기를,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경험 없는 젊은이가 품기 마련인 최악의 환상들과 맞닥뜨리지 않기를 바랐다. 어찌되었든 당신은 용서를 구해야만 할 거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 글을 쓴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할 날이 오고야 말걸. 글을 쓴다는 것은 실례거든.』
어쨌든 논픽션 소재를 픽션으로 연출하면서 기막히게 훌륭한 줄타기 묘기를 선사한 작품이다. 어떤 표현들은 독자의 입장에서조차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 작가는 더한 드라마를 더해준 것이다.
더불어 작가가 엮은 논픽션으로서의 삶과 픽션으로서의 문학의 연결고리가 끝까지 튼튼하다. 작가의 말까지 다 읽어야 이 소설을 다 읽었다 할 만큼.
마지막으로, 앞서 이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다른 작가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소설이라고도 했는데, 만약 여성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시점으로 이런 소설을 쓴다면 어떤 작품이 되어 나올까 궁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