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서 장소와 환경이 중요하다는 작가들의 믿음은 유난스러운 예민함의 표현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 자신에게 필요한 환경, 기피할 환경이 작가 개인들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나는 세 개의 작업 공간을 갖고 있는 동료 작가를 안다(결코 그가 부유해서가 아니다). 그는 그날의 상태와 감정에 따라, 그리고 날씨 등의 현실적인 상황에 따라 작업 장소를 바꾸느라 항상 이동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작업 장소는 사방의 벽이 아닌 자연이다. 호숫가나 모닥불옆, 밤하늘의 별빛 아래, 그리고 비 내리는 날의 테라스. 그런가 하면 사람들로 인해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작가들도 있다. 전화 벨과 핸드폰, 방문객, 일상적인 접촉, 소음, 타인, 풍습, 인터넷 그리고 생활. 사실 어떤 작가들은 항상 어디론가 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무엇인가를 향해서, 그리고 무엇인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나는 그러한 이동의 열병과 글쓰기와의 관련성에 대하여 항상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들은 이 모든 추상과 추구의 조건을 현실의 어휘로 표현해야만 할 때 말한다. 「오직 글을 쓰기위해서」라고.

 

 
 



 
 


최근에 번역을 하면서 나는 어느 한 작가의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피부로 느끼는 경험을 했는데, 앞서 이미 두 번이나 그 책을 읽었을 때는 잘 감지하지 못했던 사실이므로 새롭고 신기했다. 제발트는 1980년 가을, 「삶의 장소를 바꿈으로서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극복해 보려는 희망 때문에」 이십오년 동안 살고 있던 영국의 도시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왔다. 왜 하필이면 아무런 연고도 없고 작가가 특별히 매혹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빈으로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작가는 전혀 독자들에게 설명할 의사가 없다. 빈에 머무르던 약 열흘 동안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커피하우스와 식당 말고는 그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웨이터와 식당 종업원 말고는 그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루종일 몸이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을 뿐이다. 한동안 제발트의 문장에 집중해서 번역에 몰두하던 나는 문득 이 여행기의 길고도 장황한 서두가 말하는 바가 오직 無임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를 표현하기위한 긴 묘사임을 알아차렸다. 그 여행기의 제목은 ALL'ESTERO 즉 「외국에서」이다.
외국의 도시에서 헛되이 전화 통화를 시도하는 일은 그 얼마나 공허한가, 하고 그는 썼다.
그가 빈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은 일생 동안 정신병원의 환자로 살았으며 의사의 권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시인 에른스트 헤르벡 단 한 명뿐이었다.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나 처음부터 세상과의 음성 의사소통이 힘들었던 사람.  

 

 


최대한의 無를 위해서 도시를 선택할 경우가 있다는 말을 나는 이제서야 이해한다. 뿌리내리지 않은 도시는 덜 지시적이기 때문이다. 환경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못박히는 행위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유롭게 하며, 정의되어버린 사람은 정의하고 싶어한다. 얼마 전 나는 페터 샤모니의 필름 『막스 에른스트』를 보았다. 샤모니는 예술가들의 포트레를 다룬 다큐 필름으로 유명한 독일 영화감독인데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대상으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der Künstler ist verloren, wenn er sich findet.
예술가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패배하는 겁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 곳으로도 가고 있지 않은듯이 보이고, 더구나 외국 땅이라고는 밟아보지 못했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리지도 않은 듯한 정주 작가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대부분 과거의 작가들, 오래전에 살았던 여자 작가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작가들, 소속된 작가들, 늙은 작가들, 가난한 작가들, 비전을 보는 수녀 작가들, 그리고 병든 작가들(에른스트 헤르벡이 여기에 해당한다). 천년 전 일본 헤이안 시대를 살았던 궁정 여관 세이 쇼나곤도 그러한 작가 중의 한명이다. 그녀는 거의 일생을 궁정 안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처음 읽은 쇼나곤 그녀의 글은 (현재까지는)나를 사로잡은 유일한 일본 문학이 되었다. 잠자리에서 짧게 끄적이는 이런 일본식 미쿠라노소시(베갯머리에서 쓰는 글)를 연상시키는 형태의 에세이를 쓴 현대의 작가들이 있는데, 요코 다와다나 예니 에르펜벡도 거기에 속한다. 

 

 

베를린을 산책하던 중에 나는 한 서점의 유리진열장 흰색 나무 서가에 가득한 - 책이 아닌 - 작가들의 사진을 보았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진도 있었다. 배우도 아닌 작가들의 포트레가 이토록 깊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생각하곤 한다. 유리창 뒤편에서 번득이며 반사되는 작가의 묘지. 작가는 사라지거나, 혹은 죽는다. 

 

 
너는 에두와르트 뫼리케를 읽어야 해. 하고 한 작가가 말했다. 그리고 헨리 밀러도 반드시 읽어야 해. 몽테뉴와 디드로도 그렇고. 옥타비오 파스 - 그는 뛰어난 동양학자였지 - 의 에세이와 헨리 밀러의 책들은 개인적으로 적극 권하고 싶어. 특히 네가 지금 베를린에 있는 이상, 클라이스트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또 한가지 첨부할 말은, 지금 쿠담 거리의 한 할인서점에서 부코우스키 시 전집을 10유로라는 놀라운 가격에 판매하는 것을 보았어.  

 


나는 문득 에르펜벡의 마지막 문장을 생각한다.           

  

 

당신들도 아마 이런 이론이 있다는 것은 한번쯤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작가란 언젠가 사라지.... 예니 에르펜벡 에세이집, 『사라지는 사물들』  
 

 

 



 


나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즉 책상에 앉아 그날의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책장에서 여러 권의 책을 꺼내서 책상 위에 놓아둔다. 설사 내가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는 물리적인 행동을 벌이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인 근접함만으로도 그날 나를 가장 많이 건드릴 것으로 예상되는, 혹은 기대되는 책들이다(그런데 의외로 이런 습관을 가진 작가들이 많음을 최근에 알게되었다). 루핀 꽃이나 촛불, 어떤 특정한 타인의 피부나 머리카락처럼 거기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 내가 고르는 그날의 리스트에는 독일책과 한국책이 반반 정도 섞여있다. 나는 다른 작가들의 리스트에도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어떤 책을 책상에 올려두는지 즐겨 묻는다. 글쓰기의 애인들이 누구인지. 그런 식으로, 서로 마주보면 대치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며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이자 원형이 되는 다른 사물 쌍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앵무새와 고양이, 막스 에른스트와 아리조나 사막, 이름과 포트레, 동굴과 트랜스, 그리고 도시와 無처럼, 읽기와 쓰기는 상징적으로 병행한다. 최근 내 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제발트의 여행 산문과 필립 라킨의 시집, 알렉산더 로브의 『연금술과 신비주의』 등이다. 하지만 내가 독일로 글을 쓰러 올때는 한국어 책들을 충분히 갖고 오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리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서 오래오래 읽을 수 있는, 빼어난 문어체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주의깊게 선별해야 한다. 이번 여름의 베를린 체류를 위해서 내가 고른 한국어 책은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이었다. 베를린의 방에 도착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개 벽을 마주보고 자리한 책상을 방 안에서 가장 넓은 조망을 갖는 자리, 즉 창을 마주보는 위치로 바꾸어 놓는 일이다. 그리고 책들을 책상에 올려둔다. 나에게 좋은 친구란, 좋은 리스트를 갖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것과 무관하면서 <좋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책상에 앉으면,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명명할수 없는 애정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미 육신을 갖지 않게된 작가들의 글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친다.     
사라지거나 죽는 일은 작가의 글쓰기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에 나는 속한다. 

 

  

책을 덮어도 소용없다. 여자를 떠나도 소용없다. 도시를 바꾸어도 소용없다. 직업을 포기해도 소용없다. 산을 올라도 소용없다. 바다를 건너도 소용없다. 국경을 건너도 소용없다. 비행기를 타도 소용없다. 꾸는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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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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