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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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송이버섯의 상품화 회로를 길잡이 삼아 그에 연루된 다양한 배치(또는 연결망)를 명민하게 탐색한, 여러모로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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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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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노고운 옮김, 현실문화, 2023)는 이제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이 망쳐놓은 세상에도 어떻게 생명이 자라나고 생존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탐색한 민속지다. (보통은 작가거나 신문 기자, 편집자인) 눈 밝은 독자들이 이 책의 존재를 알아보고는 기꺼이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고 있다.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잠식당해 죽어가는 지구’라는 이미지에 절망하기보다, 폐허가 된 산업비림 속에서 더욱 잘 자라는 소나무와 공생하는 송이버섯(트리콜로마 마쓰타케)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인간 대 비인간, 문명 대 자연이라는 이분법을 가로지르려는 서술이 그 어떤 대안보다 희망적으로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지은이는 ‘협력적 생존’이라는 말로 독자들을 송이버섯의 세계로 이끄는 데 성공한 듯하다).


많은 독자가 지적하듯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내부이자 외부인 ‘주변자본주의적(pericapitalist)’ 장소가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해방적인 공간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송이버섯이 보여주듯, 인간이 인위적으로 생산할 수 없고 자본주의적 생산 회로에 편입될 수 없는 생명체라도 자본주의라는 ‘번역 기계’를 통해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이야기한, “언뜻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이지만 “형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인 변덕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인)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채집인으로서, 중간 구매자로서, 수출업자로서, 또 도매상과 소매상으로서, 마지막으로 최종 소비자로서 소나무-송이버섯의 연합 또는 ‘배치(assemblages)’에 개입하고, 그 자체로 송이버섯의 상품화 회로라는 배치의 일부로서 움직인다[비록 최종 소비자의 손에서는 ‘선물(gifts)’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애나 칭은 그 과정을 특정한 도덕감정 없이 되도록 담담하게 기술하며, (도나 해러웨이와 마릴린 스트래선과의 지적 연결망 속에서) ‘패치(patches)’ 또는 ‘패치성(patchiness)’이라고 부르는 ‘부분적인 연결(partial connections)’의 배치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세계 끝의 버섯>은 내용적으로 이종간 얽힘(interspecies entanglements)을, 형식적으로 학제간 연구를 다루지만 여전히 인류학적 저작으로 남아있다. 이는 송이버섯 채취에 연루되어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미국 오리건주의 미엔인과 몽인 등을 비롯해, 버려진 숲에 개입하는 일본의 마쓰타케 크루세이더스, 중국 윈난성의 츄슝이족 등)의 생활을 노련한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보는 대목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때 여러 인간과 비인간, 공식적 지식과 비공식적 지식을 가로지르는 것은 지은이가 여러 차례 강조하는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불안정성(precarity)’이다. 지은이의 관점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잠식당했다고 느낄 때, 바로 이 두 가지 조건이 이 책의 부제인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물론 단일한 진보의 서사를 거부하는 지은이는 마르크스에게서 ‘소외’ 개념만을 뽑아내려 할 뿐, 어셈블리지 이론 같은 동시대 이론적 담론의 자장 안에서 작업한다. 그렇기에 애나 칭은 ‘인식(cognition)’이 아니라 ‘알아차림(noticing)’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 할 만한 불확정성과 불안정성은 지금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여기서 나는 지은이가 ‘알아차림의 기술’이라고 칭한, 진보에 대한 서사 없이 현재를 직시하는 태도를,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여전히 불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유효한 ‘인지적(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기술(techniques of cognitive mapping)’로 바꿔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 책을 ‘포스트휴머니즘 인류학’의 표본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을 넘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버섯을 건넬 순 없지만, 나를 따라 이 프롤로그 서두의 시에서 예찬한 ‘가을 향기’를 음미해보길 바란다. 이 향기는 일본에서 매우 귀히 여기는, 향이 진한 야생 버섯인 송이버섯 냄새다. 송이버섯은 가을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 냄새는 여름의 풍요를 상실한 슬픔을 환기시키지만, 가을의 날카로운 강렬함과 고조된 감수성 또한 불러일으킨다. 전 지구적 진보의 풍요로운 여름이 끝날 때, 이러한 감수성이 필요할 것이다. 가을 향기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부재하는 보통의 삶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 책은 20세기에 안정성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던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나보다 앞서 많은 분석가가 이미 그러한 꿈을 분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그런 꿈에 기대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 같이 알고 있다고 여겼다. 이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대한 비판 대신, 그런 발판 없이 사는 삶에 상상력을 동원해 도전해보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송이버섯 진균이 갖는 매력에 마음을 연다면, 송이버섯은 우리를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호기심이야말로 불안정한 시대에 협력해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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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비지배 - 마키아벨리의 <군주> 읽기
곽준혁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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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준혁의 <지배와 비지배: 마키아벨리의 <군주> 읽기>(민음사, 2013)는 부제대로 마키아벨리의 <군주> 또는 <군주론>을 장별로 해설하는 책이다. 마키아벨리 전공자인 지은이는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주>를 깊이 있게 읽어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에게 <로마사 논고> 또는 <정략론>으로 알려진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열 권에 대한 강의>(<강의>)와 <전술론>, <피렌체사>, 희곡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등을 주석으로 삼고 여러 연구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군주>를 꼼꼼하게 독해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군주>에 대해 받는 인상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거칠게 말해 <군주>는 ‘오독을 고의로 불러일으키는 텍스트’ 또는 ‘오독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서두에서 제안했던 분류법에 따라 군주국을 분류하지 않았고, 서술에 있어서도 모순과 아이러니를 곳곳에 노출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교황이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하면서도, 교황(특히 당시 교황의 가문이었던 메디치가)에게 이탈리아를 구원할 가능성이 주어졌다고 말할 때 절정에 이른다.


지은이의 독해를 따라가다 보면 마키아벨리가 정말로 <군주>를 메디치가에 헌정하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워진다(잘 알려진 대로 장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군주들의 음모를 폭로한 인물로 상찬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지적대로 마키아벨리를 ‘악의 교사’라고 부르는 게 정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냉혹하다. 사랑받는 게 어렵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고, 최대한 경멸과 증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미움을 전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지은이가 정당하게 파악했듯이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군주와 (독재자의 고대적 표현으로 간주되어온) 참주 사이의 구분도 <군주> 속에서는 흐릿해진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혐오스럽기까지 한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이러니와 이율배반으로 가득한 <군주>,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군주>는 통일 이탈리아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불가능을 가능케 할 우연 또는 돌발을 희망한 마키아벨리의 수사 전략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그람시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내린 ‘조숙한 자코뱅주의자’라는 평가는 이 대목에서 ‘조숙한 루소주의자’라고 바꿔도 좋을 듯하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루크레티우스)의 독자, 고대 원자론의 신봉자인 마키아벨리는 운(포르투나fortuna)을 극복하는 군주(와 인민)의 역량(비르투virtu)조차 운에 얽매여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탈리아를 통합할 만큼 강하지 않지만 분열시킬 만큼의 힘은 있는 교황과 그의 가문이라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결의다.


<지배와 비지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지은이가 J. G. A. 포칵이나 퀜틴 스키너 같은 지성사가(특히 케임브리지학파)의 관점과 달리, 마키아벨리를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라 이기적 개인을 중심에 둔 새로운 공화주의자라고 해석하는 대목이다. (키케로가 대변하는) 정직과 신의 같은 공화국의 미덕이 아니라 ‘새로운 군주’의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관점이라는 해석이다.


‘오독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텍스트’ <군주>는 바로 그 오독 가능성 때문에 끊임없이 읽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가 <군주>에서 ‘현대의 군주’로서의 정당을 끄집어낸 것은 <군주>가 새삼 대단해서라기보다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 독해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을 터이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생산적인 오독’으로 보인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를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의 계보에 넣은 것도 같은 방식의 오독이다. 피렌체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쓰인 <군주>는 마키아벨리에게 ‘실패한 자소서’였지만,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군주>는 바로 그 아이러니 때문에 여전히 강력한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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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하는 겁니다 - 일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말투와 목소리
이규희 지음 / 서사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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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장황하게 말해놓고 어딘가 찜찜할 때마다 펼쳐본다. 일머리 만큼이나 중요한 말머리를 키우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 담겨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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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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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지구사적 흐름으로 살피면서 ‘제3세계‘로서의 역사적 기억을 객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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