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기생체 미래의 문학 1
콜린 윌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열두 권짜리 필립 K. 딕 걸작선이라는, 솔직히 말해서 한 예닐곱 권쯤에서 시장 호응 부족으로 중단되지 않을까싶었던 기획을 보란 듯이 계획대로 실천하여 이 회의적인 독자를 부끄럽게 한 폴라북스에서 (쉬지도 않고) 새로이 시작한 SF 시리즈, “미래의 문학첫 번째 작품. 실은 필립 K. 딕 걸작선만으로도 이미 까임방지권을 획득한데다 차후 출간될 미래의 문학작품 목록 또한 반갑기 그지없는 터라, 설령 이번 첫 작품이 좀 성에 차지 않더라도 장차 이어질 폴라북스의 분투를 응원하며운운하는 말로 적당히 둘러댈 마음까지 있었다. 그런데 작품마저 재밌으니, 다시금 부끄러울 뿐이다.

 

* * *

 

 하지만 폴라북스여, 예비 독자의 걱정을 이해해주시길. 출판사 소개만 읽었을 때는 반가움만큼이나 불안이 컸단 말이다.

 

20세기 환상문학의 거인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에서 영감을 얻은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의 기본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쓴 독특한 작품이다. SF와 호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읽는 재미'라는 현대적인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품격을 갖춘 걸작으로, 출간되자마자 유럽,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유사 작품의 창작을 촉발하였다.

 

 

벨리코프스키에서 구르지예프까지, 서양 은비학隱秘學과 유사과학을 총망라하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 의식의 무한한 잠재력과 양면성에 대한 윌슨의 신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무릇 저마다 자신이 내는 책이 훌륭하다고 주장하려 애쓰기 마련인 출판사들의 농간에 여러 차례 당해본 독자라면, 이 소개에서 불길한 흔적을 여럿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쓴이라거나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의 품격”, 혹은 신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같은 표현은 어쩌면 이 책이 소설인 척하는 장광설의 향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전율케 한다. 거기다 “‘읽는 재미라는 현대적인 목적에 충실하면서도라는 문구를 굳이 넣었으니, 이 예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혹시 피해의식이 심한 장르 팬이라면 “SF와 호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라는 표현이 마치 SF와 호러소설은 철학적 깊이를 포괄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하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의식이 그 정도라면 잠시 책은 덮어두고 자연을 벗 삼아 몸과 마음을 좀 다스리시는 것도 생각해 볼 법하다)

 

 더구나 이 책을 접하는 상당수 독자는 김상훈이라는 번역/기획자의 이름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그리고 아마 출판사와 번역자 자신도) 그렇지 않은, 김상훈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도 이 책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막강한 번역/기획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김상훈은 쿼런틴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처럼 한국의 많은 SF 독자가 ‘SF란 본디 이런 것이라며 숭앙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스타십 트루퍼스퍼언 연대기혹은 다이디타운, 또는 다아시 경 시리즈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퍽 가볍고 재미있는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와 출판사)를 배려하는 폭넓은 취향을 지니고 있지만, 가끔씩 오로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을 위해서 낸 듯한, ‘갈 데까지 간작품을 기획/번역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H. P. 러브크래프트 풍 공포/SF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가 갑자기 하염없이 우주로 날아가던() 그 소설의 지루함이 안겨준 형언할 수 없는 무정형의 공포는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니 아예 러브크래프트와의 혈연관계를 밝히며 시작하는 +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의 품격을 지녔다는 + 소설보다는 논픽션 작가/비평가로 훨씬 유명한 콜린 윌슨이 쓴 +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역/기획자 김상훈이 오랫동안 출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왔던! 정신기생체를 대하는 마음이 아주 편할 수는 없었던 것도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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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는 그랬다 치고, 그럼 어쨌든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인 지금은 정신기생체를 내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어 할 만큼 좋아하게 되었으니, 나는 기꺼이 다른 예비 독자들의 불안을 해소해줄 수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저 출판사 소개는 상당히 정확하며, 이 책은 손쉽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할 만한 외부적 사건보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 화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깨달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이란 모름지기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 등 단단한 물리적 실체에 바탕을 두고 뻗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 독자에게는 섣불리 권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계의 집후반부에도 엄연히 물리적 실체를 지닌 행성과 우주가,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나 없는 독자 다 나가떨어지기 전에, 비록 하염없이 이어지는 사변에 의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장황하거나 조잡스런 디테일에 매달리느라 늘어지지는 않으며, 사고의 전개 과정이 종종 당혹스러우리만치 과격한 통에 SF다운 장쾌감을 제공함과 동시에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폭소를 터뜨릴 만큼 웃기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굳이 이 작품을 어떤 분류 속에 집어넣자면 개그-사이비-철학 SF 정도가 될 터인데, 그 뻥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잘 치는 거다.

 

 더불어 그 뻥의 기저에는 (콜린 윌슨의 다른 저작에서도 꾸준히 전개된다는) 쉬이 눈 돌리기 어려운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인고 하니, 대체 왜 지금 이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류는 과거의 인류에 비해서 훨씬 분열적인 모습을 내비치며, 왜 자꾸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일에 쫓겨 살면서 자신을 연민하고 불행의 늪에 빠져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의식이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이 우울증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개개인의 신경증이나 인생 역정으로 돌리고 안주하는 대신 문제의 근원을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대라는 시대 자체로까지 확장해서 질문을 던져보곤 하던 독자라면, (혹은 지루한 일상의 분열과 우울 및 그 회복 방안에 대한 논의에 익숙한 온갖 인문사회학 전공분야의 학도들이라면?) 윌슨이 정신기생체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질이 그 외양만큼 무턱대고 과격하기만 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일상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침체와 자기연민/혐오를 아프게 파고들어 온다는 사실을 실감하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마침 그런 식의 어두컴컴함에 절어 있던 독자였기에, 그 어떤 과격한 전개가 이어지더라도 정신기생체에 대한 공포와 그에 맞선 분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는 거꾸로, 바로 그와 같은 굳건한 줄기가 있기 때문에 다소 황망하고 얄팍한 비약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디테일 부족이나 어설픈 망상의 소산물이라고 꼬집기보다는 오히려 SF 특유의 가슴 탁 트이는 도약으로 여기기도 했고. 외계 문명과 인류의 비밀수준의 음모론(?)과 순진하기 짝이 없는 국제 정세 묘사, 그리고 H. P. 러브크래프트 팬의 가슴을 한껏 부풀어 오르도록 했다가 완전히 엿 먹이는 작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윌슨이 서문에서 말했듯 이것이 구태의연한 러브크래프트 풍 소설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후계자라는 점도 인정해야만 하겠다.)조차 작품의 힘을 떨어뜨린다기보다는 그 막 나가는 걸음걸이에 어울리는 장식물처럼 여겨졌다고나 할까. 하여간 여러모로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SF다운 즐거움이 있는 SF였다.

 

* * *

 

 , 그리고 심지어 역자 해설마저도마치 심연 위의 불길2권 역자 해설의 심심함을 보상이라도 하듯재미있고 유익하다. 특히 콜린 윌슨 약력 읽다가 웃겨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필립 K. 딕 걸작선의 미친 작가 연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참 쓸모없는 디테일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생계유지라는 가혹하고 분열적인 일상의 조건에 가려져 있기 일쑤인 저 노동이라는 세계의 심연에서, 언젠가 다시 세상을 지배할 날만을 기다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팬심/애정/덕력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옛 존재들"이 아직도 얼마나 숭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일면을 목격한 듯한 기분.

 

 모쪼록 폴라북스도 그런 팬심/애정/덕력을 바탕으로 계속 독자를 즐겁게 해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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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3-02-1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스타십 트루퍼스](영화로 땜빵)와 연대기 같은 시리즈물을 빼면 저와 독서 편력이 일치하시네요. 김상훈 그리고 HPL 찬양도 제가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고. 원래 마이너한 분야일수록 팬심이 강력하죠. 여러 모로 비슷한 분을 만나 대단히 반갑습니다.

이 책은 우연히 레이더에 잡혔는데, 마침 대단히 적절한 리뷰가 달려 있으니 주저 없이 사겠습니다. 거듭 반가웠습니다. [이계의 집]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