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스터전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8
시어도어 스터전 지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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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8백 쪽에 달하는 시어도어 스터전 작품집이라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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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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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으로는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 『화재 감시원』을 읽었다. 코니 윌리스의 작품 중 이런저런 상을 수상한 단편 열 편을 묶은 『The Best of Connie Willis』를 번역한 책으로, 여기에는 다섯 편만 수록돼 있고 나머지 다섯 편은 최근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여왕마저도』에 수록돼 있다.

코니 윌리스는 영미권 SF의 거장 중 하나고, 여기 실린 작품들이 수상한 상은 모두 SF계에서 명망 높은 상이며, 뒤표지에는 "가장 유쾌하고 수다스러우며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SF"라는 문구가 실려 있지만, 사실 딱히 SF 단편집이라고 강조하여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이건 SF의 외연과 내포를 엄격히 규정하며 '진정한 SF'를 고집하는 순수주의자의 시비는 아니다. 그저 『반지의 제왕』을 SF라고 부르려 애쓰지 않듯, 이 단편집에는 굳이 SF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작품들도 있다는 얘기일뿐이다.

「리알토에서」는 과거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으나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아 읽지 않았던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리알토 호텔에서 열린 양자 물리학회에 참석한 물리학자가 진지한 학구열을 품고 어떻게든 열성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려 하지만 온(미시?)우주의 기운이 이를 방해하는 요절복통 코미디이니 처음 읽을 때 쉬이 집중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렇게나 말이 안 되는 난장판을 벌인 다음 그게 양자역학의 상태라고 끼워 맞추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는데, 책을 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며 좀 더 집중해서 들여다보았더니 보기보다는 한결 짜임새 있는 작품이었다. 훈훈하기 그지없는 작가 사진과 더불어 이 작품을 맨앞에 배치한 건 코니 윌리스의 성정을 안내하기 위함이었을까. 사람들의 고집, 눈멂, 무책임함, 무신경함, 자포자기, 과민, 염려가 빚어내는 불통의 현장을 한숨 쉬거나 비웃지 않고 그래도/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인간의 조건처럼 바라보는 넉넉함이 있다. 문득 홍상수 영화가 생각난다. 하하하.

그래도 이런저런 SF에서 접한 정도 외에는 양자역학에 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자역학을 다룬 책을 읽고 싶었는데, 누군가 『빛의 물리학』을 추천하기에 바로 주문했다.

「나일강의 죽음」은 코니 윌리스가 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포 소설이다. 하지만 공포 소설로 분류한다고 해도 그 공포는 역시 코니 윌리스 스타일의 수다와 불통을 통해 전달된다. 평범하고 시끌벅적했던 주변 풍경이 평범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 조금씩 낯설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면서 불안이 쌓여가는 공포. 다만 공포를 끌어내는 데에 몰두한다기보다는 공포로 갈까 유머로 갈까 이상함 속에서 심상함을 볼까 심상함 속에서 이상함을 볼까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작중 상황을 한두 가지 감정이나 상황으로 규정하고 해석하지 않으려는 이 무정형의 상태 자체를 공포로 볼 수도 있겠지. 그런 방식도 나쁘지는 않다. 꼭 두려움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꼭 공포 소설로 분류할 필요도 없고. 다만 후기에서 코니 윌리스가 공포물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하고 있는 터라, 공포물의 여러 양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으스스함보다는 엉뚱함이나 당혹감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리알토에서」에 이어 「나일강의 죽음」을 읽은 뒤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이나 그 영화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중 언급되는 〈두 세계 사이Between Two Worlds, 1944〉도 검색해 보았으나 미국에서 영어 자막 없는 워너아카이브콜렉션 DVD로만 나와 있어서 근시일 내에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짧고 단편다운 단편이다. 작가는 세계의 한 장면을 도려내어 느닷없이 내민다. 독자는 거꾸로 그 한 장면을 더듬어 가면서 서서히 세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상황처럼 보이던 풍경은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벌어진 비일상적인 상황이었음이 드러난다. 책장을 넘기면서 무심하게 혹은 석연찮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마음에만 담아놓고 지나쳤던 부분들의 의미가 뒤늦게 쏟아져 들어온다. 소란스러움은 덜하지만, 다 읽은 다음 「리알토에서」나 「나일강의 죽음」을 돌아보면 크게 보아서는 같은 방식이구나 싶다. 코니 윌리스도 후기에서 언급하듯 〈환상특급〉 등의 TV 단막극이 자연히 떠오르는데, 다만 막상 영상으로 옮긴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법한 작품이다.

「화재 감시원」은 『시간여행 SF 걸작선』을 통해 읽은 뒤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눈물 줄줄 흘리면서 청소년다운 극단주의에 사로잡혀 '이걸 읽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라고 생각한 끝에 마침 당시 명절을 맞아 집에 와 있던 사촌 동생에게 권했으나 다 읽고도 별로 감동한 얼굴이 아니라서 내심 실망했던 부끄럽고 우스운 기억도 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위력이 막강해서, 기차 안에서 눈물을 줄줄 쏟았다. 게다가 작품마다 딸려 있는 작가 후기 중에서도 「화재 감시원」의 후기가 가장 아름답고 강렬해서 감동 두 배. 시간여행을 다룬 SF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 테고, 그 이전에 역사학도들이 꼭 읽어줬으면 한다. 역사학의 연구 대상인 과거가 데이터 이전에 타인의 삶이라는, 매우 당연하지만 실감하기는 어려운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내부 소행」은 과거 《판타스틱》에 「디벙커는 유령을 믿지 않아」로 소개됐던 작품이다. 원제가 "Inside Job"이었구나. 굳이 다른 제목을 붙였던 잡지 편집부의 고충도 이해하지만, 책으로 내면서 원래 제목을 찾아주어 고맙다. 명랑한 맛은 사라졌으나 다 읽고 나면 「내부 소행」이야말로 적절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최면, 초능력, 심령술, 지적 설계론, 기타 의사과학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을 폭로하는 회의주의 잡지의 편집장과 조수가 과학적 사고의 근간을 뒤흔드는 막강한 적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인데, 마음씨 좋은 코니 윌리스도 어떤 종류의 멍청이들에게는 가차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혈액형과 사상의학의 나라에 사는 독자로서 소재 자체에서 청량감을 느낀 데다 작심하고 만든 듯한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고 할리우드 이야기도 잔뜩 쏟아져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을 바탕으로 한 다른 작품도 있으면 좋을 텐데. 다만 영화 애호가로서는 배우 셜리 맥클레인의 오랜 팬이었던터라 맥클레인이 점성술을 신봉하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그런 헛소리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얼굴로 연기하시는 분이 어쩌다가.

그나저나 지금 《판타스틱》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는데, 《판타스틱》에 실렸을 때도 킬디가 롭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편집장님"으로 불렀는지 모르겠다. 반말 아니었나? 워낙 근사하고 당당한 캐릭터라서 반말이었다고 잘못 기억하는 건가? 롭과 킬디는 발행인/편집장/고용주과 직원/고용인의 관계고, 또 존칭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둘의 관계가 사실상 동등하다는 게 전해져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편집장님"이라는 호칭이 나올 때마다 살짝 생각이 옆으로 새어 나갔다.

이번에 처음 읽은 작품인 「리알토에서」, 「나일강의 죽음」,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모두 두 번씩 읽었다. 책을 읽자마자 다시 읽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셋 모두 두 번째 읽을 때 더 좋았다. 처음 읽을 때는 인물과 사건과 서술이 수다스럽고 혼란스러워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힘을 쏟았던 모양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자잘한 표현이나 문장의 배치가 세심하고 교묘함을 알 수 있어 작품이 한결 탄탄하게 느껴졌다. 이번이 두 번째 감상이었던 「내부 소행」도 마찬가지.

아작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출간한 세 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고 가장 자주 다시 읽게 될 듯하다. 코니 윌리스는 이전에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장편 『둠즈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도 좋아했지만, 분량도 분량이고 시간여행 SF에 익숙하지 않다면 수다에 묻혀 길을 잃기 쉬워 보여 주변에 권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 절판의 길을 걸었고. 이제 좀 더 권하기 쉬운 책이 나와 기쁘다(이미 한 권 선물로 써먹었다). 모쪼록 코니 윌리스 팬이 늘어서 장차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자, 인제 『여왕마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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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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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미스터리 팬과 사회파 미스터리 팬을 통합한 이론의 여지 없는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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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파커 시리즈 Parker Series 1
리처드 스타크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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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박찬욱 감독이 과거 영화잡지 《KINO》에서 꼽은 컬트 영화 베스트 10 목록을 좇다가 존 부어맨 감독, 리 마빈 주연의 초현실주의 하드보일드 필름 누아르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를 보게 되었고, 덕분에 리처드 스타크/도널드 웨스트레이크라는 작가의 파커 시리즈에 관해서도 알게 됐다. 그 후 멜 깁슨이 주연을 맡은 〈보복Payback, 1999〉 극장판도 보았고, 2006년에 브라이언 핼겔랜드 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살려 다시 편집한 〈보복〉 감독판도 보았고, 만화가 다윈 쿡이 스타크의 원작을 그래픽 노블로 옮긴 파커 시리즈 세 권도 전부 보았다. 그렇게 여러 재해석을 거치며 11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스타크의 원작을 정식 한국어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됐다. 저작권 개념이 희미했던 시절 출간한 일본어판 중역 『인간 사냥』을 개정 노력 하나 없이 가격만 올려 재간한 후 지금껏 팔고 있는 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기다린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또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인기 얻기 쉽지 않을 이 시리즈를 새로 출간해 준 알에이치코리아에 깊은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며 스타크의 원작 읽을 날을 손꼽아 기다린 딴에는, 사실 이 이야기의 설정이나 줄거리 자체에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파커라는 악질 프로 범죄자가 어느 날 아내와 동료에게 배신당한다. 그 동료는 어느 범죄 조직과 관계하던 중 실수를 저질러 빚을 갚아야 했고, 이를 위해 파커를 배신했다. 그런데 일이 정리되고 시간이 흐른 후, 총을 맞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파커가 다시 돌아와서 복수를 감행하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자기 돈 내놓으라며 혼자서 범죄 조직 전체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재미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별반 새로울 것도 없다. 파커 외에 딱히 돋보이는 인물도 없다. 그나마 파커 자체도 빛나는 개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1년에 한두 건 정도 팀을 꾸려 일감을 해치우는 독립 사업가다. 계획한 일을 철저히 해내기는 하지만, 딱히 완벽주의자나 프로 중의 프로라는 식으로 칭송받지는 않으며, 독특한 범행 수법이나 버릇도 없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번 돈을 펑펑 쓰며 논다. 어떻게 노는 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하는 꼴로 보건대 술 마시고 섹스하는 수준의 유흥을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가까운 인간관계도 없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사랑했다고는 하는데, 과연 그것도 사랑일까 싶다. 취미 생활도 없고, 지병이나 기벽이나 외모상의 특징도 없다. 성형 수술로 얼굴을 바꿔야겠다는 결심마저 아무렇지 않게 한다. 파커는 구체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개념들의 집합처럼 보인다. 모든 금기와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극악무도한 악당이라는 개념.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파커를 '반영웅'이자 '나쁜 남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차라리 비(非) 영웅, 비 인간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부정성은 결코 독자를 잡아끌 만한 특질은 아니다.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로 묶이기 쉬울 트래비스 맥기나 잭 리처, 심지어 마이크 해머와 비교해 보면, 파커가 매력이 없는(non-attractive) 음(-)의 캐릭터임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 부정성이 역으로 매력이 된다고 말한다면 역시 말장난처럼 들리려나? 실체가 인간적이지 않은 어떤 힘, 자연물에 가까운 어떤 재난이 인정사정없이 육박해 들어오는, 순수한 벡터의 쾌감. 어떤 지'점'이 매력적이라기보다는 점이 가차 없이 이동하며 긋는 선의 움직임이 매력적이다. 파커는 무엇보다도 행동주의자이며, 스타크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찾아내고 혼쭐을 내는 파커의 계획에는 무릎을 칠만한 독창성은 없다. 스타크는 대신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커의 행동을 꼼꼼히 따라감으로써 보기 드문 활력을 불어넣는다. 파커와 스타크는 정체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목표가 숨어 지내는 곳으로 추정되는(그런데 심지어 독자는 목표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건물을 감시하는 대목조차도 잠복 감시의 나른함이나 망상과는 거리가 멀다. 파커는 끊임없이 상황을 파악하고, 가정한 상황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긴다. 창가에 가만히 앉아 건너편을 감시할 때는 담배가 액션을 만든다. 담배가 다 떨어져 창가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조차 위기가 되며, 위기가 역으로 파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움직임을 촉발하고, 움직임 끝에 다음 상황이 발생하고, 다시 다음 행동이 이어진다. 김봉석이 서문에서 파커가 "진짜 남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이라는 수식어구는 보기보다 더 정곡을 찌르고 있다.

스타크는 여기에 시간과 시점의 생략 및 변환을 더한다. 챕터와 챕터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한다기보다는 과격한 생략을 끼워 넣어 독자를 화들짝 놀라게 하며 서사를 가속한다. 직선 일변도로 내달려도 좋을 이야기를 크게 네 덩어리로 나누어 놓고 결정적인 전환점에 이르렀을 때 구두점을 탕! 찍은 다음 시점을 바꾸거나 시계를 거꾸로 돌려 긴장을 유발한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회상 장면은 앞으로 나아가던 이야기를 일시 정지한 다음 뒤로 돌아가는 속성이 있어서 맥이 빠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스타크에게는 그토록 방향성이 뚜렷한 서사 속에서 느닷없이 시점을 바꾸거나 시간을 뒤로 돌리더라도 속도가 느려지거나 진행이 멈춘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어째서일까. 특정한 시점, 특정한 인물의 매력을 중심으로 사건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체 이야기가 너무나도 단순명료한 덕분에 오히려 다소간의 변주를 환영하게 되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사냥꾼』은 파커 이상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서술자의 화법 자체가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무슨 모더니즘 소설스러운 자의식을 갖추고 겹겹이 틀을 짜고 자신을 가리켜대지도 않는데 말이지.

그리하여, 이번에도 '과연 이런 이야기를 또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려나' 하며 집어 들었다가도 결국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고 말았다. 불쾌하고 폭력적인 쾌락보다는 오히려 상쾌한 뒷맛을 안은 채로. 유일한 불안이라면 역시 그래 봐야 이런 식으로 파커 시리즈를 대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테고, 이런 소설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을 리도 만무하니 시리즈의 전망이 밝지 않아 보인다는 정도다. 뒷날개를 보아하니 적어도 시리즈 세 번째 작품까지는 계약한 듯한데, 과연 그 뒤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알에이치코리아가 마이클 코넬리도 내고 제프리 디버도 내고 빈스 플린도 내고 존 르 카레도 내고 심지어 제임스 엘로이도 내는 등 하여튼 근성 있는 출판사인 건 맞는데, 그리고 최근에는 『마션』으로 돈도 좀 벌었을 테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의 생명력은 역시 불안하다. 오랫동안 파커를 기다려온 사람들, 리처스 스타크/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다른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 흥미가 생겨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한 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장 있을 때 좀 잘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참, "헌터"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나와서 정말 기쁘다. '세련미'를 추구한답시고 빤히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을 굳이 영어 독음 표기하는 저열한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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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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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를 결합하며 홍콩의 역사를 관통하는, 올해 최고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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