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신간을 읽다  재미있어 서재에 소개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혹시 누군가 내가 알리고 싶은 내용을 미리 적었을 것 같아 얘기했을 것 같아 리뷰랑 페이퍼를 읽다 왠지 뿌듯. 내가 공감한 내용을 적어놓은 글들이 있다.

 

 

 

 

 

 

  호주의 유명한 정치평론가 애너벨 크랩의 <아내가뭄>은 서문부터 재미있다.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신랄한데도 재미있는 버전인데 정희진 선생님의 황송할만한 추천사 때문에 읽고 싶어 안달날 정도였다. 책에서 한부모에 대응하는 단어로 부모가 아니라 두부모라는 용어를 쓴달지, 여자에게 유독 아내가 없는 이유를 가뭄으로 표현한 부분이 좋았다. 호주식 유머?도 간간히 섞여 있다. 무해한 유머의 매력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지금 식당에 있는 남자들 중에 집에 아내가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오고, 마룻널 틈에 낀 고무찰흙을 백만 번쯤 파내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아내가 있는 남자들은 오후 2시 45분이 주는 어렴풋하지만 늘 존재하는 신경의 압박을 받을 필요가 절대 없다.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내가 있으니까. 나는 식당에 있는 여자들을 둘러봤다. 여자들의 정신이 약간 다른 데 팔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그저 내 상상일까? 아니면 제대로 본 것일까? -서문 중에서

 

 서문을 지나며 여러 통계자료를 인용하면서 약간 속도감이 떨어진다. 어쩌면 서문에서 할말을 다 한건지도 모른다.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경제활동을 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건 페미니즘의 성과지만 여자들이 부담하는 가사/육아노동은 하나도 나눠지지 않았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남자들의 가사분담은 성에 안차며 여전히 곁다리로 생색내며 거드는 느낌이다.

 

 언제쯤 집에 있어도 경치 좋은 펜션에 놀러갔을 때처럼 한가한 시선으로 집을 둘러볼 수 있을까. 집에 있으면  a의 눈에 안 보이는 더러움과 때와 손볼 곳이 보인다.그 모든 일을 하자니 성가시고 적성에도 안 맞는다. 모른척하자니 계속 눈에 보인다. 결국 나는 울화통이 터져 자주 밖에 나가게 된다. a는 한다고 하는게 딱 성의를 보이는 수준일 뿐 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도 요샌 레벨업된 상태라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 자기 할 일을 찾긴 한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협박과 자포자기, 설득과 망연자실이 한몫했다.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전문 코치인 니콜 슈타우딩거의 책. 책 제목에서 무슨 내용인지 다 상상이 갔지만 생각보다 통쾌하다. 고구마 몇개 먹은 것처럼 답답한 상황에서 말문이 막혔던 경험 다수 보유자로서 막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책에선 재치있게 받아치기, 아이러니로 대응하기, 온화하게 웃으며 넘기기 등 실전에서 쓸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나왔다. 물론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 자신있게 사는 것이지만.

 

 나는 언제가부터 화장을 안 해서 이제는 거의 안 하고 머리카락도 귀찮아 컷트로 잘랐다. 시골이라 가능한 삶일지 모른다. 도시였다면 외모품평에 자기검열, 상대와 비교까지 스스로 탈탈 털었을테니. 나는 지금 이 상태가 좋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밖에 나갔다 손질 안 한 머리를 보고선 '촌년 같잖아'라고 무심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윽하게 바라보며 웃거나 재치있고 시원한 한방을 날렸을텐데 그냥 수긍하면서 '촌에 사니까 촌년이죠' 하고 말았다.

 

 나란 사람은 하나의 정체로 규정되는게 아니라 여러 관계를 통해 재정립된다. 엄마일 때의 나와 글을 쓰는 나, 도서관에 민원을 제기하는 나, 기타를 치면서 노래할 때의 나는 성질뿐 아니라 감정과 기분도 각기 다르다. 그래서 내가 속한 환경과 만나는 사람이 중요하다. 하지만 또 내가 중요하다. 윙? 내가 어떤 환경에 있고 무슨 말을 듣든 나는 나 자체로 괜찮은 사람이니까, 란 자신감이나 자기애. 그런데 촌년이란 말에 휘둘리는걸 보면 난 아직 나를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건가? 아니면 너무 훅 들어온걸까. 어느 자리에선 내가 그 사람처럼 훅 들어가는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게 내 역할인가.

 

 그런데 왜 페미니즘 책들, 이렇게 분홍분홍한거냐.

새빨갛거나 파랗고 노란, 흰색이나 검정색은 못쓰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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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의 정기검진을 따라갔다.  a 혼자 와도 되건만 수면 내시경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a는 아프고 난 후 이런저런 짜증과 잔소리가 많아졌다. a가 꾹 누르고 있던 성격의 결함은 아프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가족들은 a의 눈치를 봤고 a는 너무 당연하게 아픈 사람의 특권을 누렸다. 간간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는걸 토로하는 방식으로 투정을 합리화했다. 24시간 가까이 굶은 a는 추어탕을 먹자고 했다. 뚝배기에 밥이 나와서 누룽지를 먹을 수 있는 남원 추어탕집이었다. a는 위를 절제했기 때문에 식단과 식습관을 조절해야한다. 더군다나 금식을 한 후인데 욕심껏 많이 먹는다. 나는 묵묵히 a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a의 고정관념과 습성, 고집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는 a와 단둘이 있을 때 조심스럽다. 완충제 역할을 할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로 양보없이 끝까지 밀어부치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난히 긴장하고 있었나보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쪽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휴지통을 엎질렀다. 쓰레기들이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굴러왔다. 평소 때라면 아이구 하면서 같이 수습했을텐데 아이씨가 나와버렸다. 빵모자를 눌러쓴 무표정한 아줌마는 맨손으로 휴지를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사이 아줌마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버렸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거나 휴지를 같이 주울 틈도 없이 황망하게 쓱 지나가버렸다. 이게 다 a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다가 a랑 부딪히지 않으려고 말을 아낀 내탓 같기도 해서 맘이 엉켜버렸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화자가 '나'가 아니라 3인칭 시점이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복잡다단한 주인공과 작가가 겹쳐져 읽힌다. 두권을 연달아 읽으며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 많던 싱아~'의 주인공의 맘처럼 적어보고 싶다란 생각을 했는데, 졸속이 되고 말았다. 엄마와의 애증과 가족들을 객관적이다 못해 이거 나중에 당사자들이 읽으면 어쩌나 할 정도로 집요하게 사람의 다양한 면들을 징그러울 정도로 보여주는 글. 모처럼 미소지니가 드물었던 소설. 박적골의 뒷간 풍경과 자연의 싱그러운 묘사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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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만한 길이의 글까지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계간홀로를 발간한 저자 이진송을 믿는 마음까지 더해지면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내 맘 내가 다 이해할 정도.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다 아는 이야기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이야기, 좀 더 깊어져 머리를 퉁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페미니즘 교양서라고 할만한 책은 거의 읽었다. 물론 읽었다고 해서 단박에 어떤 성찰과 각성, 무게감이 생기진 않는다. 정희진 선생의 사유나 우에노 치즈코의 치열함에는 못미친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여혐에서 파생하는 이야기와 '빨간약을 먹은 후 보이는 자트릭스'까지 다 해부하고 미러링은 기본이며 원본을 뒤집고 전복하는 텍스트가 넘친다. 한참 전 이슈나 평이한 시각은 쉬이 김이 빠지게 마련이다. 혼자인게 존재론적으로 '넘나' 당연하고 명절이면 남자나 결혼 타령하는 친척들에게 데이트나 결혼비용 대줄거 아니면 관심을 끄라며 퉁을 주던 나로선 연애하지 않을 자유의 주장이 새롭지가 않았다. 

 

 

 

 

 

 

 

 

 아동 개념에서 페미니즘 이론과 프로이트까지 언뜻 들어본 이야기지만 제대로 접하지 못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번역이 잘 됐거나 작가가 쉽게 쓴걸까. 아기를 돌보며 틈틈이 본거라 맥락을 추리진 못하지만 (맞다, 아기 운운은 핑계다)  시간내서 다시 읽고 싶은 책.

 

 

 

 

 

 

 

 얼마 전 페북 팔로우 중 한분의 포스팅에서 'The Mommy myth'란 책의 구절을 봤다. 구구절절 공감한데다 모성신화란 말은 자주 쓰는 말 아닌가. 당연히 책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다. 수전 J. 더글라스의 배드 걸 굿걸은 있는데 세상에나 모성신화는 없다. 너무나 읽고 싶은데. 원서로 읽다가는 조금 읽고 집어던질게 뻔한데. 세상에나. 출판사에 이 책 번역해주면 안 되냐는 메일을 보냈다. 배드걸 굿걸을 출판한 글항아리 출판사는 물론 최근 페미니즘 책을 출판하는 곳에 막, 메일과 메시지를 보냈다. 광기의 아치 같음. 12시 넘어서 이랬으니. 꼭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내가 완전 홍보요정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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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됨을 후회함 - 모성애 논란과 출산 결정권에 대한 논쟁의 문을 열다
오나 도나스 지음, 송소민 옮김 / 반니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됨을 후회함’이란 책은 아기를 낳고 어떠한 형태로든 후회를 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다.

 

 출산이란 말은 당위의 언어다. 아기를 낳지 않으면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아기 없는 삶은 불완전하다고 여겨진다. 개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은 천차만별이지만 출산에서는 예외가 없다. 게다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저출산이 큰 사회문제인냥 선동하니 ‘가임기 여성’의 자리는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진다. 행자부의 가임기 지도가 사회적으로 큰 반감을 가져온 것은 비단 생각의 저열함 뿐 만이 아니다.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 경력단절, 사회로부터 소외, 아기 키우기의 어려움에 대해선 아무런 대책 없이 모든 짐을 여성에게 전가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낳은 후 생기는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아기와 함께 바뀐 삶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당위만 넘칠 뿐 왜 그래야하는지의 고찰은 사라졌다. 아기와 함께 생활하며 부족한 수면시간과 별도리 없이 올인해야 하는 육아, 경력단절과 무질서해진 일상에 대해 말해야 한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모든 게 미지수였는데 낳고난 후에는 ‘해야한다’는 명제만 존재한다. 수유는 어떻게 하고 잠은 어떻게 재우고 놀이는 월령별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해져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육아의 고충을 위로하고 서로를 지지할 뿐 공식적으로 육아가, 아이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나눈 다음에는 꼭, ‘포기각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붙여야 한다.

 

 

  사랑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밥을 먹는 모양만 봐도 배가 부를만큼, 꼭 안으면 어떻게 될까 세게 안지 못할 정도로 사랑한다. 아기를 사랑하는만큼 육아로 분열된 자아가 혼란스럽다. 이렇게 집에 있다 뒤처지는건 아닐까는 초보적인 단계다. 감정노동의 집약체인 육아는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피곤해서 쉬고 싶어도 아기랑 놀고 아기에게 반응해야 한다. 집안일 하는 틈틈이 아기의 안전과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아기가 와다다 다가와 의미 없이 부딪혀서 얼굴이 얼얼해도 괜찮다고 웃어야하고 밥을 잘 먹지 않아도 화를 내면 안 된다. 외출이라도 한번 하려면 바리바리 짐을 챙겨야 한다. 유모차에 잘 앉아있는 날은 매우 드물어 안거나 업어야만 한다. 외출 목적은 흐릿해지고 그저 바깥바람 한번 쐰 것에 만족한다. 아기는 순한 편이고 대체로 떼를 쓰지 않는데도 그렇다.

 

 

  개인적인 고충이 만만치 않은데 사회의 압박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육아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엄마됨’을 강조한다. 아기의 특성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면서 애착관계를 형성하라고 한다. 부모와 관계형성에 따라 아기의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질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한편으로는 아기 데리고 다니는 엄마를 맘충이라 비하한다. 맘충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하는걸 방치하는 엄마를 일컫는다. 애비충은 어디 있으며 아이들이 맘껏 뛰어놓을 수 있는 장소는 어디 있는지  한심할 뿐이다.

 

 

 어떻게 사회는 태연하게 출산과 육아를 여성이 마땅히 해야할 일로 떠넘겼을까. 비용면에서 이러한 접근은 효율적이었다. 결국 전전긍긍하는 엄마만 남을 뿐 세상은 휙휙 돌아가고 저출생은 더 가속화될 것이다. 갈아먹을 노동력이 줄어서 그렇지 저출생이 나쁜 건 자본가와 국가의 입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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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직 무언가로 결정되지 않았을 때, 내 정체성을 밝히기 어려웠을 때. 세상은 늘 물음표였다. 나는 늘 나를 설명해줄 단 한장의 명함을 갖고 싶었다. 미래가 어서 결정되고 모든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늘 했었다. 그래서 사소한 말, 질문에도 상처받았다. 나도 무언가를 한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아 말로 내뱉기 어려웠다. 그 무언가를 그렇게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 어서 모든게 끝났으면 좋겠다라고만 생각했다.

 

 그때는 깊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글이 술술 나왔다. 좋은 글은 아니었지만 쓱쓱 술술 글이 나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게 확정적이고 안정적이며 맘까지 편한데 글이 안 써진다.

 

- 선생님, 어떻게해야 독창적인 글을 쓸 수 있나요. 선생님은 세계와 부딪혀야 자신만의 글이 나온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상태가 괜찮거든요. 아기를 낳고 사는걸 꿈 꾼 건 아니지만 아기를 좋아하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맘이 편안해져요. 이런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저는 세계와 부딪힐 일이 없는거고...

 

- 아치님, 지금 행복한거죠?

 

  선생님은 팔아먹고 팔아먹어도 우물처럼 마르지 않는 상처가 있어야 (독창적인)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치유되지 않고 만족감이 없는 잡념 상태, 피가 멈추지 않는 부위 말이다.

 

 그 부위가 예전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나였다면 지금은 남들도 나도 정의내릴 수 있는 나로 바뀐걸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나.

 

 순간 정적이 흐르고 아이의 소요와 요구에 귀를 막고 싶은 지점. 지긋지긋하게 내 일이 된 집안일, 병든 아빠를 무시하고 감정을 지워내고 싶을 때,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서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 안쓰럽지만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타인, 지방을 축척하는 나의 섹스파트너, 지방의 악습과 폐쇄적인 일처리. 진동하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추이를 지켜보고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는 순간.

 

 없는건 아닌데 격렬하게 나를 소진시키며 일말의 쾌락을 가져다줄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 시덥잖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지금 상황이 너무 적절한걸까. 그동안 너무 혼란스럽고 괴로웠으니까 이건 나에게 주는 오후 4시의 한가함 정도일까. 그동안 뭐가 고통스러웠나. 그런게 있긴한가. 마르지 않는 상처, 퍼내도 새로 차오르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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