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밤에 위로가 되지만 계속 보기에는 좀 수다스럽고 자의식 과잉인데 애정결핍인 언니가 있다. 마침 언니랑 내 컨디션과 제반상황과 여건, 에너지가 기가 막히게 잘 맞으면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데 어쩌다 오늘이 그랬다.

 

 난 언니가 주변상황을 의식해서 큰소리로 말한다거나 전화통화를 크게 하는걸 안 좋아했다. 자기 과시 같고 내 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놈이(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놈을 붙일 수 밖에 없다.) 머리 아파서 상태가 메롱인데 언니는 계속 그 놈을 걱정하고 챙겼다. 마치 '자상한 아내' 역할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평소에는 참깨 볶는 것처럼 달달달 볶았는데 말이다. 사실 조금 떨어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은 그녀가 무려 2주만에 쉬는 날이었다. 남편과 꽃놀이를 가던가 같이 콧바람을 쐴 기대를 했을 것이다. 헌데 남편놈은 전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오늘 몸이 안 좋다며 아침부터 뻗대고 있는거다. 내 성질 같아선 바로 무시하고 차를 갖고 어딘가로 휙 떠나버리거나 대판 싸우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할텐데 언니는 걱정만 하고 있는거다.

 

 언니는 모처럼 쉬는 날을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저녁을 먹는데 남편놈이 술을 시켰다. 한나절 지나 좀 살만해지니 다시 술이 생각난 모양. 언니는 참았던 화를 쏟아내는 대신 침묵했다. 무덤 옆에서 밥을 먹는 것처럼, 젖가락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확인해야할 정도로 어색한 자리였다.

 

 전조는 여러 번 있었다. 남편놈은 상태가 멜롱이 아니어도 언니 말을 잘 안 듣는다. 한번은 언니가 정색을 하며 남편놈에게 말을 하길래 내가 물었다.

 

- 남편놈, 당신이 왜 언니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알아?

- 글쎄, 술에 취해 있어서.

- 아니. 그래도 되니까.

- 응?

- 그래도 되니까. 말 안 하고 상대방 답답하게 만들어도 언니가 풀어주고 다시 얘기할걸 아니까 그러는거라고.

 

 언니 이야기만은 아니다. 결혼 전에는 너스레라도 떨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 일상적으로 필요한 말을 하거나 듣는데도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방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체념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전략을 선택하는건 대개 생물학적으로 남성일 경우가 많다. 왜? 그래도 되니까. 여성이 더 소통을 잘하니까?

 

 아니.

 

 경청과 대꾸도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나는 내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은 욕구가 많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 누군가의 얘기를 잘 못듣는다. 좀이 쑤시고 흥미가 떨어진다. 일방적인 얘기를 들을 때는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하지만 최대한 들으려고 노력한다. 왜?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하니까. 소통 능력 운운하면서 무슨 화성에서 온 남자 찾고 하는데 간단한 예가 있지 않은가. 말대꾸조차 귀찮아하는 남자들이 상사한테도 그러느냐고. 상사에게는 감정이입과 요란한 리액션은 기본, 언제든 웃을 준비까지 되어있지 않나.

 

 언니의 남편놈이 언니를 상사처럼 대하란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성의는 갖고 있었음 좋겠다는거다. 그건 너무 기본 중 기본이라 설명하기도 입 아픈거니까. 미운 언닌데 오늘은 안쓰러워보였다.

 

 

 

 

 

* 비밀댓글 남겨준 분.

적어준 내용을 읽는데 맘이 훈훈해졌습니다.

대댓글이 안 달아지고 혹시나해서 방명록에 갔는데 자판이 영어로 나와서 (빌어먹을 알땡땡) 여기에 남겨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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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서 계단을 오를 때면 가방이나 손으로 엉덩이 부근을 가린다. 행여 속옷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요즘이야 짧은 속바지를 입어서 괜찮지만 그래도 ‘왠지’ 가려야할 것 같다. 왠지 가려야할 이유에 대해선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가리는 행위의 근저에는 ‘내가 짧은 치마를 입었지만, 그렇게 헤프게 속옷을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야.’란 생각이 깔려있다. 그렇게 불편하고, 귀찮으면 안 입으면 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짧은 치마를 입고, 치맛자락을 팔랑거리거나 조금쯤은 섹시해 보이는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걸 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불편한 점을 감수하는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가리는건 여자 맘인데, 지나친 배려라거나 불쾌한 친절로 보인다고 하는건 약과다. 자신을 잠재적 치한으로 몰았다고 억울해하니 말이다. 가리는걸 왜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기 위한 행위로 연결하는걸까? 여자들이 그렇게 오지랖은 아닐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내 옷 내가 가리고, 내 몸 내가 안 보여준다는건데. 입는 것도 내 맘, 보여주는 것도 가리는 것도 다 내 맘인걸.

  예를 들어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움직이면서 건든다고 가정을 해보자. 뭐지, 하고 뒤돌아볼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일. 하지만 여기에 성별이 개입되면 다르게 해석된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자한테 오해받고 있다고, 치한으로 몰렸다고 지레짐작 겁을 먹는다. 불편한 기분이 든다고, 아무 짓도 안 한 선량한 자신을 오해했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가해 망상 뺨친다.

  얼마 전 G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똥꼬치마’-지금은 삭제되었다.-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누가 볼 것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데, 여자들이 계단을 오르며 자기를 흘끗 쳐다보는게 불쾌하다 등등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었다. 정말 남자들은 그렇게 느낄까?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무엇을 입든 여자 맘이지만 속옷이 보일 때는 눈이 갈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걔중 평소에 기분이 나쁜걸 생리하는 것 같아 등등으로 표현해 내게 질문 공격을 당한 Ch는, 만약에 여자가 봤냐고 추궁하면 안 봤다고 우길거라고 얼굴이 벌개지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출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난 정말 궁금했다. 내 속옷, 내가 가리는거야를 넘어서 그토록 은밀하고 완고한 입장은 뭘지.

나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약간 불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고 내가 예뻐보여서 좋다.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와중에도 내 체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비난거리가 말풍선 모양으로 내 주위를 떠돈다. 신경쓰며 위축되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보다 좋은건 무시하기다. 무시면 간단하지만, 어찌나 견고한 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 재단하는지.

 가끔씩은 그저, 내 몸이고, 그 사람의 입장이고, 그 사람의 취향일 뿐이니까 너 하던대로 그냥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09년 아치 페이퍼

 

 캐치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언젠가 쓴 것 같아서 찾아보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요즘처럼 여성혐오가 본격적이기 전에 쓴 글인데 요즘 읽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금은 편한 바지, 편한 바지만 찾는데 그땐 그랬구나. 짧은 치마 입고 섹시한 느낌을 좋아했구나. 섹시한 느낌은 내 느낌인걸까, 누군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걸까. 지금은 생각이 복잡한데 글이 단조롭다면 예전엔 생각은 단순했지만 글은 촘촘했달까. 이게 다 출산의 영향인걸까.

 

 제시카 발렌티의 성적 대상을 읽고 있는데 번역 문제인지 작가가 은유적으로 글을 써선지 잘 읽히지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큰 코를 혐오했다고 한다. 작가에게 큰 코가 있었다면 나는 큰 엉덩이가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정말 엉덩이가 크다고 인식을 했을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아치는 엉덩이가 커서 아기를 잘 낳겠네'라고 했던가. 그때 나는 중학생인가 그랬을 땐데 다른 때 같으면 촌철살인? 같은 말을 곧잘 내뱉어서 발화 당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하게 윗도리를 내려 엉덩이를 가렸다.

 

 세상에나,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어른의 정신 상태는 대체 어떤걸까. 게다가 내가 아기를 낳을지 엉덩이로 이름을 쓸지 지가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나는 어렸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라 '아, 내 엉덩이가 정말 크구나.'라고 수긍하고 말았다. 얼마동안 엉덩이를 숨기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엉덩이 좌절감은 다른 신체부위? 칭찬으로 상쇄하다 유야무야 없어졌다.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내 몸을 미워하고 내 존재를 부정했던 경험, 여자들은 한번씩 있지 않을까. 오십이 다 된 언니들도 살을 빼고 피부를 좋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걸 보면 끊임없는 성적대상으로 본인 스스로를 자리매김한건 아닐까. 남자 꼬마들의 바지 앞섶을 보며 장차 섹시한 남자가 되겠네라던가의 훈수를 두지 않을걸 보면 말이다. 남자는 그냥 인간인데 여성은 대상화 된다.

 

 작가는 본인이 겪은걸 되물림 하기 싫어 간절하게 아들을 바랐다고 하는데 나는 딸을 바랐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충분히 걱정되고 염려됐지만 그럼에도 딸이었으면 했다. 내가 여자로 살면서 느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때때로 비참하지만 나 자신의 인식론적 자산이 되는 것처럼 내 딸 역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 딸이 성적 위험과 자존감의 위협을 최대한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페미니즘을 확장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자책할 정도로 창피함을 느끼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기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 다음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의 슬픈 역사라고 회한을 섞어 말하는 대신 같이 싸우며 성장할 것이다. 반성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하는거지 네가 하는게 아니라고, 스스로 자책감을 갖거나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널 사랑한다고, 꼭 얘기해줄거다.

 

 간만에 고양됐네.

페이퍼 재활용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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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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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유석의 에세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지당한 말을 풀어놓았는데 색다르거나 깊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무려 소설인데 (소설인가? 옴니버스형 단편소설?, 책소개에는 법정 활극이라고 되어있던데) 재미있다. 대립하는 입장을 천천히 들여다본 후 전형적이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편견과 상식의 그 어디쯤에서 줄타기를 한다. 등장인물은 마냥 히어로는 아니고 현실에 단단하게 발 붙이며 통통 튀거나 묵직하게 걷는 스타일이다. 주인공은 이상적인 답으로 돌진해서 쾌감을 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며 결정을 유보한다. 직업인으로서 판사가 최선을 다하는게 무엇인지 질문한다.

 

 미스 함무라비의 주인공은 여성인데 막강하다. 현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하면서 배반하는 캐릭터, 박차오름 판사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 돋는다. 정의롭고 씩씩한데다 PC한 인물이라니. 물론 박차오름의 정치적 올바름은 현실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 이슈에 화이팅 하지만 문화지체 현상을 겪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버겁다. 다수가 현실(누구에 의해 규정된) 적응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박차오름 판사가 겪는 고민은 깊어간다. 상대적으로 임바른 판사의 캐릭터가 약한데 관찰자 시점으로 일정 부분 상쇄한다.

 

 활극 중 한 부분.

 답이 안 날 것 같고 서로의 피해 정도도 경미한 사건에 조정을 권유하는 부분이 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당사자들을 보더니 박차오름 판사는 절대 조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는다. 그렇게 구비구비 이야기를 짚어가다 서로의 속내까지 풀어놓는데 그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소설가의 글이 아니라 현직판사가 있을 법한 일을 적은 것이라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법은 멀고 억울함은 지척이라 이렇게 선뜻 그 맘 읽어주는 대목만으로도 울컥해진거다.

 

  이 책은 흠집이 많지만 영롱한 빛이 나는 보석같다. 주인공들 이름이 살짝 구리고 이야기도 법정을 벗어나면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이 신선함은 떨어진다. 부장판사와 우배석 좌배석의 비기닝 부분은 살짝 낯간지럽고 서사의 이쪽 저쪽이 어색하다. 끼워맞추기 같고 허술한 구석도 많다. 하지만 맘을 끌어당기는 한 장면, 대사에 속절없이 반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책 좋다고, 주변에 소문내고 다닐 정도다. 결국 매력이란 건,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 하나가 너무 빛나서 아무 생각없이 푹 빠져버리는게 아닐까.

 

 나는 모두가 각자의 일에 대해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글이야 소설가가 제일 잘 쓰겠지만 사람들이 쉽게 재단하고 넘겨짚는 각자 일의 속성, 일의 시작과 끝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란 것 말이다. 문유석은 서툴지만 훌륭하게 자신의 일을 글로 표현했다. 판사들 이야기는 기록문 읽는 씬이 다일 정도로 지루하다고 했는데 그가 그리는 법정 활극은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처럼 장면이 그려지고 미스 함무라비 2가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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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 동화책을 읽고 잠시 투정을 부리다 토닥토닥하면 금세 잠 들거야, 란 게 내 시나리오였다. 살짝 꼼수를 쓴 걸 빼고는. 잠자리를 정돈하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아기가 바로 잠들 것처럼 보였다. 며칠째 목감기라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책 한권쯤 읽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냥 넘어간다면 나 역시 넘어가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어렴풋이 뭔가를 찾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나, 찾던 손길에서 짜증이 묻어나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버텨볼까, 아냐 그만하자 갈래에서 우왕좌왕하다 결국 빵하고 터졌다.

 

 부랴부랴 책을 대령하고 읽어도 고개를 젓고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한다. 나보고 누우래서 순한 양처럼 누웠는데 그게 또 맘에 안 들었는지 큰 소리로 운다. 다시 일어났더니 누우래고 누웠더니 짜증을 내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혹시 배가 고픈건지 물었지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낸다. 허. 가만히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잠투정이고 빌미는 내가 제공했다. 머리카락이 다 젖을 정도로 짜증을 내고 귀를 팍팍 긁어대고 내가 뭘 하든 맘에 안 들어했다.

 

 처음 시작은 책을 안 읽어준 것이지만 마음은 저도 모르게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 예전에는 밥, 잠, 지루함 항목으로 명확하게 호불호가 갈려서 필요를 채우거나 달래면 금세 울음을 그쳤다. 잠투정도 어느 정도 달래면 수긍을 했었다. 아기에게 복잡한 마음 생겼다. 엄마가 꼼수를 부린걸 안 걸까,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났을까, 낮에 엄마가 이모들 왔을 때 누군가 대신 아기 행동에 반응해주니까 좋다고 한 게 서운했을까, 낮에 충분히 눈 마주치고 놀아주지 않아서 화가 난걸까. 정말 단순한 잠투정인걸까. 아기 마음을 모르겠다. 엄마 품에 푹 안겨서 잠들면 좋겠는데.

 

 한참 울고 짜증내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아기를 안아서 토닥토닥 한 다음 눕혔다. 밖으로 나오니 아기 아빠는 핸드폰으로 오디션 프로를 보고 있다. 내 마음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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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몇달만에 일기장을 펴서 아기의 기행을 기록했다. 기행도 아니다. 전날 열이 있어 좀 피곤한 상태고  내가 자기 맘을 잘 읽지 못해 짜증이 났고 짜증이 났는데 잘 달래지를 못하니 부아가 난 것일 뿐. 기행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다. 계속 짜증내고 칭얼대고 드러눕고 내 얼굴을 때렸을 뿐이다. 간신히 밥을 먹는데 계속 매달려서 방에 데려다 놓고 나오는데 난리가 났다. 서로 맘이 잘 맞으면 좋은데 이렇게 한번씩 핀트가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이럴 때는 엄하게 얘기하는 것도 달래기도 안 통하고 그저 감기가 오려고 신호를 보낼 때 납작 엎드려야 감기가 순하게 지나가듯 나 죽었소 해야한다.

 

 사실 그동안 아기 돌보는걸 거저 했다. 아기는 작년에 열이 심해 병원에 간적이 있다. 열로 기운이 떨어질만도 한데 의사 양반 책상을 땅땅 두드리며 장난을 칠 정도로 유쾌했다. 아기는 장염에 걸려서 엉덩이가 짓물러도 가타부타 불편한 기색을 부리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다. 우유병 떼기 힘들다고 하는데 어제는 우유병, 오늘은 빨대컵에 줘도 꿀꺽꿀꺽 잘 먹었다. 엄마만 찾는 아기도 아니어서 누구한테 잠깐 맡기도 화장실 가거나 볼일을 봐도 문제가 없었다. 배고프거나 잠 올 때 빼고는 대체로 잘 놀고 잘 웃고 잘 먹었다. 물론 잘 싸기도 한다. 그래서 엄마들이 밥 먹기와 응가 문제로 고민을 할 때면 주저하면서 우리 아기는 안 그런데, 란 말을 내뱉곤 했다. 그땐 얄미운지 몰랐지.

 

 15개월 무렵부터 자기 의지가 생기고 의사표현을 하면서 '우리 아기가 달라졌다'. 무엇을 주든 잘 먹던 아기는 밥은 쏙 빼놓고 반찬만 골라먹는다. 자기 기호가 생겨 나가고 싶은 날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나가야만 하고 하고자 하는 건 꼭 해야만 한다. 하고자 하는게 거창한 것도 아니고 아기 바람을 들어준다고 당장 습관에 문제가 생긱는 것도 아니다. 큰 범위를 정해주고 그것에 반할 때만 선을 긋는다거나 원칙에 입각해 적절하게 타협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그게 쉽지 않다. 밥을 잘 안 먹다보니 다른걸 주고 배가 충분히 부르지 않으니 칭얼대고 그래서 다른걸 주니 또 밥을 안 먹고, 조금씩만 먹으니 응가도 안 하는, 계속 이 과정.

 

 처음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밥을 안 먹으면 치웠고 배가 허전해서 칭얼거리면 신나게 놀아줬다. 일은 잠시 미뤄두고 아기한테 집중해 반응하고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아기 머릿속엔 스위치가 있는 듯 방금까지 떼를 쓰다가도 번쩍 안아 목마를 태우면 방긋방긋 웃는다. 실컷 놀고 푹 자고나서 먹는 점심은 얼마나 꿀맛이겠는가. 자기 먹을 양을 다 먹고 기분이 좋아진 아기랑 꽃구경을 나갔다. 고양이를 보고 미끄럼틀도 탔다. 다시, 봄이다. 언제 다시 찬바람이 몰아칠지 모르지만 오늘 햇볕은 무척 따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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