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절판


다들 열성적으로 채웠다. 그러더니 번쩍 일어나서 다른 트레이를 잡았다. 현장 주임이 내 뒤로 걸어왔다.
-자
그는 나를 가리켰다.
- 이 사람은 벌써 생산량을 맞추고 있어. 두번째 트레이를 반이나 했잖아.
나는 아직 첫번째 트레이를 하는 중이었다. 현장 주임이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하는 건지 감이 오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다고 하니 느긋하게 하기로 했다.-86쪽

한편 조이스와 제라늄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내가 버틸 수 있는 한 2백만 번은 해야했다. 조이스와 파리떼와 제라늄. 나는 야간 근무로 열두 시간을 일했고, 조이스는 낮 동안에 어떻게든 한번 하려고 나를 주물러 댔다. 그녀가 손으로 해주는 동안 나는 졸다가 깨다가 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든 하긴 해야 했다. 이 불쌍한 여자는 미쳤으니까.-87쪽

새 두마리가 새장 문을 보았다. 저것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까, 못할까. 저 조그만 머리들이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음식과 물이 여기 있긴 한테 저 열린 공간은 뭘까? 빨간 새는 훨씬 더 오래 망설였다. 새는 초조하게 새장 바닥을 거닐었다. 결정하려니 머리 터지겠지. 인간이건 새건 모든 것은 이런 결정을 해야 한다. 어려운 게임이다. 그래서 이 빨간 새는 서성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노란 햇빛, 윙윙나는 파리떼,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개, 무엇보다 하늘, 그 모든 하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빨간 새는 철사 쪽으로 풀쩍 뛰어 올랐다.
3초.
휙!
새는 사라졌다.
피카소와 나는 빈 새장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잉꼬쪽

미국 전역 사무실에는 일종의 놀이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이 지겹거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로맨스 놀이를 하는 거지. 대부분 시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가끔은 부수적으로 한두 번 붙어먹기도 하지. 하지만 그때도 볼링이나 텔레비전, 신년 파티처럼 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식이야. 그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상처받지 않을 거야. 내 말 알겠어?-조이스에게쪽

그동안 잰코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 자식은 나를 죽이고 있었지만 나는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때까지 거쳐 온 다른 직업들을 떠올려 보았다. 매번 미친놈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나를 좋아했다.-162쪽

그날은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요일이었다. 페이의 친구들 몇몇이 놀러왔는데, 소파에 앉아서는 자기들이 정말로 위대한 작가라는 둥, 이 나라에서 최고라는 둥 떠들어댔다. 그들 작품이 발표되지 않는 이유는 오직 작품을 투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들 말로는 그랬다.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커피를 마시고 킥킥거리면서 도넛이나 뜯는 처지들이 생긴 대로 글을 쓴다면 작품을 보냈든 처박아 놓았든 별로 달라질 바가 없을 것이다.-184쪽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이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191쪽

<존스톤을 물에 빠뜨리자는 계획을 말하는 모토>
모토는 똥구멍부터 눈썹까지 활짝 웃었다.-231쪽

어쩌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난 아이 양육비도 내야 하고, 술값, 집세, 신발, 양말 따위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중고차라도 있어야 하고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무형의 필수품도 필요하다.
여자들이라든가.
아니면 경마장에서 보내는 하루라든가.
그렇지만 모든 것이 위태롭고 빠져나갈 출구가 없으면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우정 사업 본부 건너편 거리에 주차를 하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길을 건넜다. 회전문을 밀었다. 자석에 끌려가는 철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232쪽

별로 달라진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깊은 바다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특수한 유형의 잠수병이었다.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게 없었다. 새장 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 올랐던 것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사직 후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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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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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서재에서 김중혁 붐이 일었다. 그때 나는 김중혁이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거야'라는 생각에 그의 책을 읽지도 않고 그의 유머에 담뿍 빠져들었다는 식의 글을 쓴적이 있다. (아치, 대체 왜) 기대보다 껄렁해서 재미 없었던 '대책 없이 해피엔딩'과 그의 단편집에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의 면면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력한다고 좋은점이 찾아지진 않았다.


 사람들이 김중혁을 웃기다고할 때, 나도 웃기는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나 홀로 소주 한병씩 들이키며 달을 본건 아니고 우연히 이 책을 봤다. 단박에 그의 글이 좋아진건 아니지만 김중혁이란 사람이 궁금해졌다. 취미로 카메라를 사면서 이런 글을 쓰는 40대의 한국인 남자 말이다.


씀씀이의 규모를 생각하면 마땅히 싸구려 렌즈를 사야 했지만, 그리고 사진 실력을 생각하면 싸구려 렌즈조차 과분한 것이었지만, 나는 기어코 고급 기종의 카메라 렌즈를 사고야 말았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평생 동안 좋은 붓을 질릴 정도로 써봤기 때문일 것이라 확신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붓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평필이 된 것이라 추측하며, 돈을 지불했다.


 다단계의 합리화와 그 합리화를 뻔뻔하게 수긍하지 못하는 미세한 균형감. 나와 다른 사람의 글이 좋아 열광 할망정 공감할 수 없는건 동 떨어진 어떤 세계는 내가 죽었도 깨나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남다은이 <감독, 독립영화를 말하다>에서 김곡(영화를 시나리오가 아닌 이미지로 인식하는 방식)과 인터뷰를 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계급 지향이나 사회적 지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글들을 읽을때면 다름에서 오는 긴장감이 좋지만 이해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김중혁은 살짝 다르다. 누구처럼 모르는 노래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누구처럼 미묘한 감성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책을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다.


 김중혁은 빈 수레의 삶을 지향한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늘 그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산다기보다는 항상 요란하니까. 요란하고 분주하고 시끄럽고. 그 덕분에 김중혁의 글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잔치가 됐다. 말하자면, 소문난 잔치. 거기 먹을 게 있으려나? 아니, 이 책에 건질 게 있으려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추천사니 이렇게 쓸 수밖에. 건지겠지, 뭐라도 건지겠지. 마음이 착잡하다.


 애석하게도 김연수의 추천사는 이 책의 백미다. 이 책의 온도는 딱 이 정도 같다. 이 정도의 유머와 이만큼의 빈틈. 김중혁의 발명과 그라는 사람의 이야기. 조목조목 따지고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인식이 없는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한민국 40대 남자의 현실인식이라면 꽤나 낭만적일텐데 다른 나라의 아우라 강한 소설가들에 비하면 평이하다. 공감은 가되 작가의 태도에 푹 빠질 정도는 아니다.


사람들을 하나의 단위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자 주위가 달라 보였다. 저 사람은 어떤 단위로 쓸 수 있을까. 잘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홍길동이라고 치자)을 단위로 쓰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야, 나 오늘 밖에 나갔다가 38길동이나 걸었잖아. 죽는 줄 알았지 뭐야.


 물론 이런 깜찍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말 '종종' 보인다. 뭐라도 되겠지라며 태평한 생각을 하다간 이곳저곳을 떠돌다 객사할 것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모두가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덤벼도 누군가는 낙오되는 시스템이라면 한가하게 잡담나누는 것도 방법 같다. 김선우의 책을 읽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해봤다. 하고 싶은게 없으면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는거다. 실패자들의 벤치마킹이 이뤄지고 너도나도 실패해보겠다고 경쟁을 한다면? 먹고 사는 문제를 공동체가 해결해준다면? 그리고 그리고......


 뭐라도 되겠지, 빈수레 김중혁의 글에선 건질만한게 없다. 안타깝게도 그와 나는 취향이 다르다. 다만 그의 책을 읽고나니 한가한 생각들,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요란한 빈수레다. 





사족: 책이 좋다는 글은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데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글은, 좋아하는 사람이 다수인 작품에 대해선 뭐라고 말해야할지 애매하다. 책 읽는게 다인 독자랍시고 평점을 매기는게 미안하고 같잖지만 별세개를 줬다. 최근 G씨의 에세이를 읽다  뒷목 잡고 쓰러질 정도의 언해피함을 느낀터라 상대적으로 이 에세이가 괜찮아 보였다. 출판사에서는 별로인 에세이를 이름값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름값 못하는 에세이' 같은 페이퍼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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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든 G씨...는 누굽니까?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봐요.

Arch 2012-03-27 14:35   좋아요 0 | URL
아휴, 다락방. 비판은 아주 섬세하고 조목조목 수긍가게 해야하는데 제가 그럴만한 소질이 없어서 실명 쓰는걸 망설였어요. G면 김씨는 아니겠죠? 이럼 다락방이 다 알겠구만.

다락방 2012-03-27 15:09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2012-03-27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7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3-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G씨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가 아니라 알 것 같아요 ㅋ
저는 아치님과는 달리 <뭐라도 되겠지> 정말 좋게 봤답니다. 그러니가 초반부에는요.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와 이 사람 정말 대책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했어요. 복잡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답니다. 억지로 뭔가 하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이 시간들을 즐기는 그만의 방식이 좋아요. 물론 딱히 건질 것이라고는 없는 책이라고 저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치고 심심할 때 지하철에서 읽기에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Arch 2012-03-27 15:58   좋아요 0 | URL
진짜요? G씨가 뭐라하면 어쩌죠!

저도 편했어요. 너무 편해서 강박처럼 책을 끝까지 읽던 것도 잊고 2/3쯤 읽다 그만뒀지만. 책을 읽고 뭔가를 남겨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 책을 안 좋아하는거라면 그건 좀 아니다란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정도 강박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책쯤이야란 콧방귀도 뀌고 싶지만 난 그렇게 대찬 독자가 아니니 살짝 물음표만 동동.
술술 잘 읽히고 가끔씩 귀여운 부분은 있었어요. 그럼요!

비로그인 2012-03-27 22:09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2/3쯤 읽다가 덮었어요. 누구라도 그래도 되는 책인 거 같아요 이 책은...
작가님이 좀 실망하시려나... 아마 알고 쓰셨을 거에요 ㅋㅋ

Arch 2012-03-28 09:59   좋아요 0 | URL
그래도 혹시 이 글과 댓글을 본다면 속상할 것 같아요. 아마 안 보겠죠?

2012-03-27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선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워야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전제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랑하는’ 문제로 파악하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건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랑스럽다는 말에 함축된 의미는 통속적이며, 인기가 있다는 것과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 둘째, 사랑은 ‘대상’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이다. 세 번째 과오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 속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여기서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여기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서로 사랑하기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배우려면 삶이 하나의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론을 습득하고, 실천에 익숙해져야 한다.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의 절실한 욕구는 분리되어 있는 경험으로부터 파생되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객관적인 삶을 초월하여 편안함을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분리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와 성적인 극치감을 들 수 있다. 부족 내에서 공동으로 행해질 때 이러한 방법에선 불안 혹은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한 미덕으로까지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에 의해 선택될 때는 (알코올, 마약 중독) 당사자는 죄책감으로 고민한다.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강도가 너무 강하며, 전인격에 걸쳐서 일어나고, 오래 지속하지 않고 주기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황홀경만으로는 분리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극치감의 극점에 일치의 양식이 있다. 집단과의 일치는 분리감을 극복하는데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조하려는 욕구를 알지 못한 채 사소한 차이로 자신의 개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선 그마저도 어렵다. 일치를 달성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창조적인 활동’이 있다. 인간은 창조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세계와 일치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사무원의 작업 과정에서는 노동자에게 창조적인 경험이 주어지기란 어렵다. 일치의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에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종류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가. 공서적 합일(미성숙한 형태의 사랑)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생물학적인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수동적인 유형은 매저키즘으로, 능동적인 형태는 사디즘으로 나타난다.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합일로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며,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원래 ‘주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삶이 표현되기 때문에 받는 것보다 더욱 즐거운 것이다. 준다는 요소 이외에도 사랑의 적극적인 성격은, 배려,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또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로 자발적인 행위다. (요나서의 요나 이야기) 존경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고를 통한 지식은 심리학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필요조건이다. 즉 자신을 객관화하여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각주에서 심리학적인 지식을 ‘사랑의 행위를 통해 완전한 지식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지식의 대용품이 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2.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어머니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수동적이고 무조건적이다. 획득하거나 만들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이며 유아적이다. 아버지는 은혜에 따라 사랑을 준다. 아버지는 세계에 대한 길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유재산에 따른 조건이 붙은 사랑이고, 순종이 주요 덕목이며 보상을 바란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모계와 부계 신앙과 관련해서 비슷한 설명이 나옴)

3. 사랑의 대상 

 사랑은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며, 성격의 방향이기 때문에 자신을 빼놓고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의지며 결단, 판단, 약속으로 실현되기에 일시적인 육체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다. 자기애는 타자와 자기의 관심을 양자택일할 수 밖에 없는 이기심과는 구별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바람직한 선이란 무엇인가란 신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신을 숭배하는 인간의 성격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인류의 발달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자연과의 원초적 합일을 희구하면서 동물을 숭배하는 토템에서 시작해 자신이 만든걸 숭배하고 자기가 만든 신에게 인간의 모습을 부여한다. 신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 차원으로 발전한다. 여성적인가, 남성적인가. 혹은 인간이 성취한, 그가 만든 신의 본성과 그 신에 대한 사랑의 본질을 결정하는 성숙도가 그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태도로 인해 근본적 차이가 발생한다. 역설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은 최고의 실재를 나타내지만 인간의 정신이 모순 속에서만 실재를 지각하는 것이므로, 신에 대해서는 어떤 적극적인 전술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고를 통해 해답을 찾아내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세계를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행위 속에, 일체성의 경험에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에 의해 역설 논리학은 심층적인 경험으로 표출된다. 사고가 아닌 행위에 강조점을 둔 역설 논리학은 관용과 인간 개조에 대한 강조를 가져왔다. 역설적 사고는 관용과 자기 변혁을 향한 노력을 가져왔다. 

사랑과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그 붕괴

  현대 서구 문화에서 서구 문명의 사회 구조와 거기서 야기된 정신이 사랑의 발달에 필요한 것인지 알아봐야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자유 원리와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규제자로서의 시장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과 물품이 노동력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 체제는 현대인의 성격 구조에 깊은 영향을 준다. 자본이 중앙집권화 될수록 개인은 개성을 상실하고 기계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별 마찰없이 지내며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기호가 표준화되며 예측 가능하길 바란다. 상품화된 개인은 자신의 생명력을 소비와 투자 대상이라는 한정된 관계에서 경험하며 동료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고독을 깨닫지 못하도록 수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완충제를 제공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동 인형은 결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 상품’을 교환하고 공정한 계약을 희망할 뿐이다. 개인은 사랑과 결혼에서 팀의 정신과 상호 관용을 강조함으로써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그릇된 사랑은 신경증, 우상 숭배적인 사랑,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의 개념은 소외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에 적합한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종교는 사업을 하고 있는 인간을 돕기 위한 자기 암시와 심리요법과 손을 잡는다. 사랑과 정의, 진리에 있어서 신과 하나가 된다기보다는 신을 사업상의 동반자로 삼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실천

 사랑의 실천을 위한 훈련은 전생애에 걸쳐 정신 집중과 인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정신 집중은 혼자가 되는 걸 의미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을 갖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사랑하는 능력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은 자아도취를 극복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며 이성의 배후의 정서적 태도는 겸손이다. 사랑하는 능력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과 탄생, 자각의 모든 과정을 필요로 하며 이때 신념이 요구된다. 신념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확실성과 견고함,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한 내면적인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인 활동인 ‘활동성’과 공정성의 윤리(이웃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만일 사랑이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에는 중요하고도 철저한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같은 변혁의 방향을 암시할 따름이다. 

* 모성형에서 부성형으로 사랑을 나누고 부성형의 사랑이 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성별 역할을 도식적으로 나눴을 뿐이라고 봄.
* 역설적 논리학에 따르면 일체성의 경험이야말로 사랑이 도달해야할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결론도 두루뭉실하고 수련을 통해 도달하는 사랑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
* 심리학적 지식은 도구로 이용할 뿐이라고 했는데 에리히 프롬이 입증하려고 하는 사랑이란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비슷하지 않을까.

더 읽어보면 좋을 책

* 사랑, 그 혼란스러운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철학, 심리학, 생물학, 뇌과학, 동물학, 사회학, 문화인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사랑에 질서를 부여함.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에세이
* 개선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사랑이란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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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이거 보고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넣었거든요. 책 링크 좀 걸어주면 안되요? 순전히 아치님 덕에 사게 되는건데 땡투 하고 싶어서요.
[사랑, 그 혼란스러운]을 읽다 포기하고 방출한 저로서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잘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Arch 2012-02-22 13:35   좋아요 0 | URL
ㅋㅋ 다락방님~ 리뷰에는 책이 안 들어가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사랑, 그 혼란스러운 보다 별로였는데... 적극 추천 목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운 페이퍼를 어떻게 살린담.

다락방 2012-02-22 13:46   좋아요 0 | URL
아..리뷰에는 책이 안들어가는군요!!!!!

Arch 2012-02-22 14:01   좋아요 0 | URL
다른분께 양보할게요. 아까워라...
이럴때 짠하고 다락방님께 다른 책을 추천하면 좋으련만.

다락방 2012-02-22 14:32   좋아요 0 | URL
안살래요.. ㅎㅎ

Arch 2012-02-22 14:34   좋아요 0 | URL
ㅋㅋ 재미있다. 다락방은 책 줄인대매~

머큐리 2012-02-2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선문에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있었군요... 읽었는데 나는 왜 지나쳤을까요...^^;;

Arch 2012-02-22 14:07   좋아요 0 | URL
섬세한 묘사가 아니었나, 우선 의심 먼저 하고.
몇년 된거라 생생하진 않지만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쩌면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라기보다는 뭐랄까, 연인 사이의 감정의 진폭, 흐름, 혹은 심리게임에 홀딱 반했죠.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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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규석이 좋다. 최규석 덕분에 나 자신의 궁상스러움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럴듯함을 꾸미려는 맘을 조금쯤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는 그가 가진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최규석만큼은 '그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작품 중 아직까지도 습지생태보고서와 대한민국 원주민은 참 제일 좋다.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그가 가장 잘하는 이야기를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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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2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2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2-2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포토리뷰엔 너무 아치 감상이 적어요!!

Arch 2012-02-22 15:31   좋아요 0 | URL
포토리뷰에선 원래 포토만 보여주는거에요. 나름 혼자 독단적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음.

다락방 2012-02-22 16:11   좋아요 0 | URL
그런거 아니야!! 아치는 빵꾸똥꾸! 바보에요!!!!!!!!!!!!!!!!!!!!!!!

nada 2012-02-22 19:28   좋아요 0 | URL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우리 조카 말투 같아요.ㅋㅋㅋㅋㅋ

Arch 2012-02-23 09:21   좋아요 0 | URL
다락방이 애기라 그래요.

뭔가를 적고 싶긴 한데 사족 같아 다 지워버렸어요. 특히 저 장면들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건 참 어렵더라구요.
 
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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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니콜라 콘스탄티노, <젖꼭지 코르셋>, 1999

현대미술의 곡예에 단련된 오늘날의 관람객들은 웬만한 도발에는 뒷목을 잡지 않는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니콜라 콘스탄티노의 <젖꼭지 코르셋>도 멀찌감치 서서 보면 약간 아리송한 작품에 불과하다. 미술관에 웬 란제리? 생뚱맞음에 방심하다가, 코르셋을 입은 토르소를 약 1.5미터 정도 근접하면 질겁하게 된다. 고급 핸드백에 쓰이는 타조 가죽쯤으로 보였던 코르셋의 소재가, 실은 인피-의 모사품-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젖꼭지 코르셋>은 수많은 유두로 뒤덮인 사람의 피부로 제작한 상상의 코르셋이다.
콘스탄티노의 고국은 식육 산업과 피혁 산업이 성한 아르헨티나다. 그녀의 초기작은 육식을 위한 도축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먹고 입는 과정에는 살생이 도사리고 있다. 콘스탄티노는 눈에 보이지 않고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짐짓 모른 체하는 삶의 카니발리즘적 속성을 환기시킨다. 죽은 사람의 가죽으로 바느질된 드레스와 구두는, 패션이 희구하는 영원한 청춘과 성적 매력의 꿈에 불길한 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궛전에 속삭인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뱀을 노래하다
도르예 커스텐 신노, <봄날의 쾌활한 뱀>

김혜리가 쓴 뱀에 대한 글은 꼭 읽어봐야한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 다시 감추다
다니엘 아르샴, <시트>, 2007

흔히 자연의 맞은편에 놓여 무기적인 영구불변함의 표상으로 치부되는 건축물도 따지고 보면 한정된 삶을 산다. 그들은 녹슬고, 늙고, 숨 쉬며, 진동한다. 우리가 집이 살아 있다고 실감하는 때는 역설적으로 집을 오래 비운 연후다.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첫 발을 들여놓으면 빈 집은 쾨쾨한 황폐의 냄새를 피운다. 한동안 어지르고 때 묻히지 않았으니 말끔해야 마땅할 텐데, 웬일인지 후줄근하고 시들어 있다. 그제야 집과 내가 날숨과 들숨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안다. 어쩐지 훈훈한 깨달음이다.
<시트>는 순백의 벽을 웅크린 사람의 몸에 친친 감긴 침대 시트로 바꾸어놓는다. 1미터가 조금 넘는, 사람보다 작지만 일반적인 인형보다는 큰 어정쩡한 크기의 인체 모형은 관람자가 감각하는 공간의 스케일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고, 그저 벽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느리고 고된 섬광
야마시타 기요시, <불꽃놀이>

야마시타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 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자연, 자라면서 이지메가 따라왔다. ... 고흐에게 꿈틀거리는 필적이 있었다면 야마시타에겐 손으로 일일이 뜯어낸 종잇조각이 있었다.
야마시타의 색종이 조각은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민들레 꽃잎 같다. 연약하지만 조밀하게 서로에게 몸을 의탁해 단호한 형태를 이룬다. 불꽃놀이를 포착한 사진과 회화는 흔하지만, 야마시타의 ‘하나비(불꽃놀이)’연작이 특별한 이유는, 섬광의 이미지를 가장 느리고 고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역설이 거기에 있어서일 것이다.



거울 앞의 ‘몽롱한 집중’
에드가르 드가, <머리 빗기> 1892~96

이부자리 정돈, 커피 끓이기, 단추 채우기, 이메일 확인...... 날마다 절반쯤 무의식중에 해내는 일들이 있다. 정신은 잠가둔 채로 감각만 열어 수행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호흡 요령이나 걸을 때 팔다리를 내미는 순서를 일일이 인지하지 않는 현상을 좀 고도화시킨 버전이랄까. 그렇다고 이 반자동적 행위들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덜하냐면, 그렇지 않다. 다음 정차 역까지 데려다주는 철로의 구실을 떠올려보자. 아침저녁으로 거울 앞에서 여자들이 보내는 일정한 시간도, 예의 ‘몽롱한 집중’의 순간 중 하나다.
몸치장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무장이다. 치장하는 여성은 본인의 섹슈얼리티를 디자인하는 중이며 순수한 즐거움에 겨워 제 외모가 남에게 미칠 영향을 점검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몰입, 흔들림 없는 응시와 세밀하게 조율된 터치, 어쩌면 그들의 손가락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런 식으로 만져주었으면’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옷을 입었건 벗었건, 그 정경에는 가까이 지켜보기만 해도 볼이 달아오르게 하는 관능성이 조용히 흐른다. 일부 문화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연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말 묘사된 실낙원
노먼 록웰. <도망자>, 1958

도망자라곤 했지만, 그림 속의 꼬마는 가출한 것이 분명하다. 빨간 보자기에 주섬주섬 싼 허술한 보퉁이가 홧김에 꾸린 여장임이 한눈에 보인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한 책 배가 고파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섰으리라. 동네 순경과 주방장은 어린 도망자의 행색에 모든 걸 눈치챈 듯 사연을 묻는다. <도망자>가 ‘가출’ 삽화라면, <집을 떠나며>는 ‘출가’의 이미지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이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묵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각자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넋을 빼앗겼고,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모닝 포스트>의 표지로 쓰인 이 두 일러스트레이션의 작가는 노먼 록웰이다.



노먼 록웰, <집을 떠나며>, 1954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조앤 이어들리, <아이들, 글래스고 항>, 1955

빈민가 아이들을 그린 이어들리의 작품에서 전후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국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미학을 연상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 참상을 보라!” 식의 지적은 없다. 곤궁한 일상을 영위하며 매일 아침 다시 끓어오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재미난 일을 찾아 골목으로 뛰쳐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일일이 불평하지 않는 강건함과 기묘한 스토이시즘이 있다. 삶의 특정 시기에만 열렸다 닫히는 인간 정신의 특별한 구역,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귀여움과 연민이 아니라 차라리 존경이다.



그림이라는 쿠션
에드워드 아디존, <작은 책방>의 삽화, 1955

뛰어난 삽화들은 내가 아는 한, 타임머신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훌쩍 안아 올려 잃어버린 낙원의 오후로 데려다준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배를 깔고 누워 읽었던 동화책 속 이탤릭체 외래어들의 이국적 유혹, 점자처럼 뒷면에 배긴 조판활자의 자국을 더듬는 간지러움, 새로 산 문고판의 빳빳한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달콤한 통증을 한꺼번에 부활시킨다.
삽화가의 재능은 화가의 그것과 통하지만 다르다. 삽화는 무엇보다 ‘작은 그림’이고 삽화가는 작게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다. 문장이 독자를 유혹해 상상세계의 문턱을 넘게 하면, 삽화는 그 안에 안락하게 처박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마치 <피너츠>의 라이너스가 자라서도 떼놓지 못하는 푸른 담요와 같다. 에드워드 아디존의 그림은 쿠션과 같다. 회화가 우리를 눕게 한다면 그의 삽화는 우리를 기대게 한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미지를 잔뜩 거느린 요즘 어린이들도 동화의 삽화에 매료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미완의 드라마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 연도 미상

소녀는 예뻤다. 마을 남자아이들이 그렇게 속삭였고 거울도 확인시켜주었다. 자신이 철저히 낯선 사람 앞에서만 수줍음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으로 런던행 열차 삼등칸에 오르던 날, 봄바람이 약속했다. 오늘이 너의 남은 생을 통틀어 가장 초라하고 추운 하루일 거야. 앞으로는 점점 더 양지바른 날이 찾아올 거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열정을 내보일 틈을 좀처럼 주지 않았다. 극작가가 점심을 먹는 두시간 동안 찌는 듯한 오디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화장은 녹아내리고 마음은 무너졌다. 한때 스캔들을 염려하는 배우로 살아갈 날을 상상했지만, 이제 그녀는 가끔 윤기 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서라도 애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양과 희망의 결핍으로 거칠어진 머릿결과 말라붙은 표정을 쇼윈도에 비추어보며 여자는 읊조렸다.
“난 무인도에 가더라도 시선을 끌지 못할 거야.”
최악의 고역은, 마음의 바닥을 아무리 긁어봐도 한 줌의 자긍심조차 그러모을 수 없는 순간에도 도도한 표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순간 자기 안의 마지막 광채가 스러진다는 걸 알기에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순진한 열망의 정원
앙리 루소, <꿈>, 1910

궁핍한 가정환경 탓에 일찍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억울함을 품고 살았던 루소는 아카데미 화가들의 사실적인 묘사력을 몹시 동경했다. (줄자로 모델을 재서 비율을 계산하고 물감을 피부에 대보고 색을 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세상이 ‘소박파’라는 브랜드를 붙여주고 명망 있는 화가들이 “당신의 투박함을 소중히 간직하라”고 조언하자, 루소는 자신의 천진하고 순박한 페르소나를 예술적 인정을 위해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용했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손아귀에 들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 남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자신의 예술과 삶의 의미를 증명해야 했던 가난하고 나이든 화가였던 것이다.
실제 열대 식생과 어긋나는 루소의 밀림 풍경화는 화가가 꿈꾸는 동물과 식물을 하나씩 집어놓고 싶어서 가꾼, 환상의 정원이다. 기술적 역량의 한계를 일축하고 가진 모든 파편을 그러모아 무엇인가 표현하려는 자의 긴급함, 아는 것들을 조합해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자의 순진한 열망이 그 정원을 교교히 밝힌다. 루소의 마지막 작품<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망을 이룬자의 포만감이 서려 있다.



아파서 나는 아프다
알브레히트 뒤러, 제목 미상, 1512~13 또는 1519

함께 느낄 수 없음은 둘째 치고, 고통은 그 양과 질을 의사소통하기도 어렵다. 이에 온갖 직유와 은유가 총동원되어 ‘뼈를 에이는 듯한’, ‘하늘이 노래지는’ 등등이 난무한다. 니체와 같은 학자는 자신의 통증에 ‘개’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애견처럼 충성스럽고 끈덕지고 뻔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고통의 표현이 까다로운 또 하나의 까닭은 그것이 ‘번진다’는 점에 있다. 육체의 고통이 진전되면 몸의 나머지 부분도 덩달아 욱신거리기에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통증의 진앙을 가리키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인간은 아파할 뿐 아니라 자기가 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는 동물이다. 요컨대 고통은 언어를 거절한다. 비명과 신음이 차라리 명쾌하다.
뵐플린은 뒤러의 예술적 약점으로 열정의 결핍과 근엄함을 꼽은 바 있다. 확실히 십자가 수난처럼 처절한 소재를 다룬 뒤러의 작품에서도 괴로움의 묘사가 인체와 배경, 사물의 정확한 형상을 향한 관심을 능가하는 걸 보기 힘들다. <여기가 아프다>에서 뒤러는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전혀 표현하지 않고 있다. 다만 통증이 발생한 지점을 추정해 가리킬 뿐이다.
이상하게도 고통을 묘사하고 나름대로 호소하는 그 냉정한-거의 쓸쓸하기까지 한- 태도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불타는 듯 준엄했던” 이 르네상스의 대가는, 아마 고통은 궁극적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이라고 진즉 판정한 게 아닐까? 그리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온전히 체계화할 수 없는 영역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기로 작심한 게 아닐까?



LOVE & D.I.Y
이주요,,2005

얼핏 보아도 이주요의 오브제들은 ‘간신히’ 기능한다. 여기서 ‘간신히’라는 부사는, 고통과 불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완화하되 쾌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의미한다. 어쩌면 그것을 절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상에 흘러다니는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내가 감당할 만한 몫을 짊어지지 않으면 누군가의 어깨에 과한 짐이 얹힐 거라는 묵시적인 가정, 이주요의 여린 작품에서는 그런 단단한 윤리적 속살이 만져진다.



사랑한 후에
피에르 보나르, <남과 여>, 1900

<남과 여>는 섹스 직후의 정적을 그린 작품이다. 화폭을 단호하게 이분한 버티컬 스크린을 중심으로 왼쪽 침대에 앉아 있는 여인이 마르테, 오른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보나르다. 많은 사람들은 <남과 여>를 정사 후 급속히 냉랭해진 남성과 엷은 후회에 젖은 여성을 묘사한 그림으로 읽는다. 그러나 좀 더 귀를 귀울이면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따스한 햇볕에 감싸여 보드라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마르테는 스스로를 나른하게 해방하고 있다. 고개 숙여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반면 어둠 속에서 옷가지를 집으려는 남자는 허무하고 불안해 보인다. 우리를 향해 노출된 그의 이목구비는 주변의 음울한 적색에 먹히고 있으며, 벗은 몸을 그린 붓질은 뭉그러져 화가가 주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나르는 2년 전부터 비슷한 침실 그림을 그렸으나 <남과 여>에 이르러서야 두 인물 사이에 ‘벽’을 쳤다.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섹스의 환상이 썰물처럼 물러난 후, 남과 여 사이엔 다시 바리케이드가 내려와 있다.



몇주 동안 이 책을 읽으며 모처럼 내가 독자여서 참 행복하단 생각을 했더랬다. 김혜리는 인터뷰집 말고도 일기든 그림에 대한 얘기든 어떤 글이든 써주면 좋겠다란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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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2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