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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전화
일디코 폰 퀴르티 지음, 박의춘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그렇군요. 하지만 원래 제 이름은 호프만입니다. 닥터 호프만
- 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저는 휩시입니다. 코라 휩시
-네 알고 있어요. 자료에 있어요.
-네 물론이죠. 미안합니다. 저는 에에 어떠세요. 제 말은, 다시 좋아지셨는지요? 물의를 일으켜 정말 미안합니다. 
 닥터 다니엘 호프만이 나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친절한 눈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안하게 단단해진 직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 생각했던게 뭔지 알아요? 왜 바닷가재를 들고 화장실쪽으로 달려갔어요? 거기 분위기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아니면 화장실에서 바닷가재를 먹는게 신조인가요?
  맙소사! 그걸 어떻게 설명하란거야! 몇마디 말로.
 나는 죽도록 설명을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제기랄.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성기와 접촉까지 한적이 있으니.
 나는 '버터바른 빵을 가진 청소부', '계급투쟁', '마르크스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 우물거리며 음미하듯이 천천히 그를 관찰했다.
 푸른 눈에 진한 색깔의 머리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손은! 그런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몇가닥의 검은 털이 그의 흰 셔츠 칼라 안에서 밖을 빠끔히 내다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가슴에 털이 나 있다는 증거다. 나는 가슴에 털이난 남자를 좋아한다. 배꼽 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어지다가 그곳에서부터 다시 털이 많은 중요한 부분으로 넓어지는 이 가슴 위의 검은 성을...... 좌우간 그렇다. 
 - 어쨌든 대단히 미안해요.
 나는 내 어지러운 보고를 끝냈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마치 정신병원에서 후견인에게 자신이 완전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위험한 정신병자를 바라보며 짓는 웃음과 같았다.
  

  몇가닥의 검을 털이 빠끔히 밖을 내다보다니. 이 구절을 보고서야 정신없이 이어지던 이토록 수다스럽고 사랑스러운 소설의 정체를 눈치채고야 말았다. 작가는 전화를 기다리는 여자 얘기를 할 것처럼 멍석을 깔아놨지만 실은 독자들이 코라 휩시라는 유머 감각있고, 생동감있는 여성을 사랑하게 만드려는 의도를 가졌다. 의도를 알아버렸는데도 책은 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듯 모를듯 감질맛 나는 닥터 호프만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앞으로 이 두사람은 첫만남의 오해를 풀고 사랑하게 될까 역시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책을 손에 잡는 순간 순식간에 쉼없이 읽어내려갔다는거다. 속독의 반대편에 느림독, 잡다하게 여러권 읽기, 그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인 독서 습관에 비춰봤을 때 손에 꼽을만한 몰입이었고, 몰입의 만족감은 컸다. 

 이 책에서 여자들은 대체 왜 전화를 기다리고,(직접하면 되잖아의 반대편에 상대방의 맘에 확신을 갖으려는 맘이 도사리고 있다) 왜 상대와의 첫 섹스 후 그 시기와 분위기, 오간 말들에 대해 분석을 하고, 분석의 와중에도 전화가 안 온다면 슈퍼 컴퓨터에 버금가는 속도로 낱낱히 다시 재분석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나와 비슷한 코라를 통해 내가 병적인건 아니었구나 정도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위안은 아주 훌륭한 소통의 방식인지라 그녀에게서 위안을 받으며 금세 그녀의 행동에 응원을 보내고-그렇다고 먼저 전화하라고 부추기는 맘이 전혀 없는건 아니다.- 대체 이 미스터리한 호프만이란 작자의 말과 행동을 코라와 같이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분석은 분석대로 감정이입의 완벽한 일치를 자아내고, 코라는 코라대로 나처럼 좌충우돌하며 그녀의 사랑 얘기의 첫장을 펼치게 된다. 전화만 오면 되는데가 애초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면 갈등의 해소, 즉 전화가 온 것으로 책이 끝났느냐, 글쎄 그건 스포일러 전문인 나로서도 쉽게 밝힐 수가 없다. 어떻게 되는걸까,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거야, 소설을 읽으면서 누구나 한번쯤 책장을 움켜쥐고 애가 타는 그 순간을 어떻게 방해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기다린다는 행위가 수동적인가?  굳이 사랑의 단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다리는 것 안에 잠재된 가공할만힌 고통과 흥분과 좌절의 정서를 모르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 안에 갇힌 사랑의 에너지는 기다림마저도 황홀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수동적이란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양태만으로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게다가 능동적인 처신으로 코라가 먼저 전화를 했다면 이토록 감질나게 맛있는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능동적인 것만이 수는 아니고, 수동적인 것이 무찌르자 뭐뭐류가 될 수 없는 것은 관계야말로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유동적으로 변모하는 코라와 호프만의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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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피를 뽑으려다 철분이 부족하니 시금치를 많이 먹고 오란 소리를 들었다. 시금치는 너무 새파래선 겨울에 구해질까 싶어  교보문고에 들렀다. 시금치 말고 철분이 든 음식에는 뭐가 있을까 찾아보자란 생각이었지만 망망대해의 서점에서 영양소를 검색할 마음은 싹 달아나고 말았다. 대신 바닥에 앉아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케치를 한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림 실력이야 뻔하니 몇번 그리다 소재도 창의력도 고갈되고 손은 손대로 아파 눈을 들어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아주 또렷한 그림이 떠올랐다. 

 여자 아이가 열심히 교과서를 쳐다 보고,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장면. 그 장면은 에로틱하기보다건강했고, 더군다나 학구적이었다. 무슨 시험을 공부하는 것 같은데 답을 묻던 여자 아이가 콘돔은 꼈냐고 물었던 기억도 났다. 내가 이 책의 구절을 어디서 봤더라. 정혜윤. 아, 발레 그래, 발레. 그 다음은 뭐였더라?

 맘이 급해져 도서 검색대에서 책을 검색해 위치를 확인했다. 에세이 코너로 달려가 정혜윤의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했다'를 펼쳤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한 이미지는 변영주의 책 이야기에서 발레교습소 얘기가 나오며 인용되었던 구절이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뜬금없는 구절이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인연이 되면 꼭 만나자고 약속해서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았던 책. 빅토리아의 발레. 그녀는 내게 어떤 발레 동작을 보여줄까? 어, 그런데 저기 두꺼운 패딩 잠바를 걸쳐입고 건들거리는 녀석은 누구야?  

 성 안토니오의 축일에 대통령은 일반 수감자의 사면을 발표했다. 책은 작은 천사 앙헬이 감옥에서 풀려나며 시작된다. 앙헬은 사면에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며 간수에게 이를 갈았고, 간수는 앙헬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라며 무기징역인 마린이란 사람을 붙인다. 그 다음에 나온 인물은 베르가라 그레이. 칠레에서 알아주는 금고털이꾼으로 수감돼, 공범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죄로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는 나가기만 하면 자기 몫의 돈을 찾아 아내에게 모두 바치고, 집에 들어서는 것 밖에 바라는게 없었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의 첫 얼개를 접하면서 책을 살까말까 고민이 됐다. 두 명의 출소자가 한건을 할 것 같았고, 둘 중에 하나는 왠지 엉킨 실타래의 끝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넋나간 해피엔딩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내가 만약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하지만, 표지가 무척 예뻤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지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를 믿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빅토리아 폰세를 만나지도 않았는걸.  

 앙헬은 빅토리아를 만난다. 여느 연인처럼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상투적인 만남이었지만, 청춘에게는 사랑하는 순간의 하루하루가 감동이고 숙명인지라 빈털털이 앙헬은 빅토리아와 그녀의 가난까지도 사랑한다. 그녀가 학업을 포기하려하자 기억력이 비상한 앙헬이 시험 공부를 같이 한다. 발레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빅토리아와 앙헬을 죽이려는 마린. 공범이었던 친구가 자신의 돈을 날려먹은걸 알고, 마지막으로 한건을 생각하는 베르가라. 그리고, 앙헬이 빅토리아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위해 힘이 되어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들이 얽히면서 소설 읽는 재미를 주는 한편, 앙헬이란 친구가 우리식대로의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자기식의 삶의 개척하는 면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칠레 정권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단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나 기사가 아닌 야설을 쓰는 칠레의 신문의 행태는 점잖게 호박씨 까는 누구의 뒷태와 닮았단 생각도 들었다.  

  빅토리아의 발레가 인도 소설 Q&A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건 소설 속 주인공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란 것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길에서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어둡고 초췌한 인상의 누구지만 어느 순간, 이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봤는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환하게 웃을 것이다. 주인공은 무채색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옆으로 한발짝 다가온 누군가가 되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민다. 취향 따위는 마린의 개에게 던져주란 말을 내뱉었을 법한 겁없으면서도 한없이 여린 앙헬이 바로 당신에게도 손을 내밀 것이다. 그때는 서슴없이 잡아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장을 다 읽을때까지 그 손을 놓지 말길.  

 한탕을 위한 과정은 초라할 정도로 짧게,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은 낯설게, 마지막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못읽을 정도로 저릿하게.

 제목의 에드워드 호퍼는 아마 책을 읽은 사람만이 앙헬과 나눠가질 수 있는 비밀이 될 것이다. 한창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공백기가 생겼을 때 나를 북돋아준 한 줄. 앙헬이 한 말이었기에 그 구절이 더 와닿았을거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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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4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경우이다. 그런 상황은 그것이 내포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이나 그 파생 작용에 의해 내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사랑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 불행의 몸짓조차 되찾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불행의 능동적인 행위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그리하여 나는 동시에 자신이 피해자이며 가해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173p 동일시 현상

 이 한 구절을 적어놓고 한 달이 지났다. 다시 책을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었나 싶게 새로운 구절을 마주할 때마다 이 책을 감히 도서모임의 선정도서 후보로 올린 똥배짱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읽어내려가는 구절마다 다시 생생하게 다가오는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쓴다,
이건 곧 사랑한다란 말과 같다.
나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견디니까.

 자기 계발서의 변종인 연애 계발서의 최대 장점은 공감 능력이다. 그 이상은 없고 그 이하의 경계 아래에서 발버둥치는 것 뿐이다. 가끔씩 주는 위로 말고는 연애 계발서는 왜 내가 사랑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는지, 대체 사랑이 뭔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연애의 잔기술과 어떻게 하면 케이스별로 연애 강자가 될 수 있는지, 어떤 식의 것들이 먹힐 수 있는지에 대한 지루하고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싱싱함까지 바라는건 무리지만 레토르트 식품의 겉봉을 뜯어놓은 채 판매하는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처음 구절로 돌아가자면 아마도 일반적인 연애서라면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선택해야한다는 둥의 흰소리를 늘어놓을게 뻔하다. 하지만 바르트는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게 나를 사랑하는 다른 누군가의 맘 덕분에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의 질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피해자인 다른 누군가의 처참한 모습이 곧 나이고, 그런 면에서 자신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모든 입장에서 고통을 받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책 속에 자신을 대입시켜 자신의 일인 것처럼 환호하는 작자들을 무지하다고 했지만, 난 이 구절에서 정녕 내가 봐버린, 사랑이란 권력관계의 모순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건 공감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정확한 인식이었고, 전부는 아니었지만 전부일 것처럼 번들거리는 예민함이었다.

 살갗이 벗겨진,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 사랑에 관한 한 그것은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지, 깃털로 감싸인 사람이 아니다. 127p 
  나를 감싸고 있는 깃털들은 나를 따뜻하게 보호할망정 날 수 있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차라리 살갗이 벗겨진대로 고통에 찢겨지고, 상처가 아물새도 없이 다시 살갗이 벗겨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데도 애무를 받을 때면 되살아나는 살갗에 환호한다. 그 짧은, 마약 같은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쓰라린채로 지내야한다. 살갗이 벗겨진 상태는 곧 익숙해져 이젠 자신이 그토록 각성없이 무감각하다는 것조차 느끼질 못한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61p 기다림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으면 기다리기를 멈춰야하는데도 나는 붙박힌 듯 의자에 파묻혀 그를 기다린다. 그를 기다리며 바르트처럼 걱정과 슬픔 분노와 좌절을 경험한다. 나는 기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걸 알았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능동적으로 기다림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게 아니다. 아, 이런 단언조차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약간의 금지와 많은 유희, 욕망을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는 내버려두는. 마치 당신에게 길은 가리켜주지만, 같이 따라나서겠다고 고집부리지 않는 저 친절한 원주민들처럼. 184p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그는 나를 가만히 놔둔다. 그는 자신의 일상의 테두리를 지키며 나를 만난다. 그는 나에게 관계의 중독성을 심어준 후 마치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하게 우리 사이를 관망한다. 그는 저 친절한 원주민들처럼 계속 친절하기만 할 것이다.

 기호: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면, 어떤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갖지 못한다. 기호의 불확실성 286p
 그는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나는 그의 행동이나 표정, 어투, 그가 하는 말을 죄다 도마에 올려놓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말은 처참하게 해지고 너저분해지지만 내가 원하는 어떤 기호도 발견할 수가 없다. 오로지 나를 향해 웃어주는 순간에 감격해 기호들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 안정을 취한다. 잠시 후 나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맹렬함으로 기호를 분석하고, 나를 흔들기 시작할 것이다.

 바르트의 단상들은 나와, 나의 경험, 내가 했던 연애와 하고 있는 연애, 앞으로 할 연애, '어쩌면 사랑'에 대한 풍부한 담론을 제공한다. 사랑의 단상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텍스트를 바탕으로 바르트가 강연했던 것을 묶은 책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소스에서 시작해 바르트의 시각을 풀어놓았다는 편이 책에 대한 설명에 더 근접할 것이다. 바르트의 단상을 바탕으로 나 역시 서툰 해석을 시도해보았다. 이건 순전히 사랑의 단상의 저열한 리뷰에 불과하다는걸 아마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리뷰는 책을 위한 한편의 헌사가 아닌, 이런 너저분한 리뷰를 읽느라 버린 눈을 책으로 보상해버리고 싶은, 정말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목적이 큰 리뷰가 되겠다.(갖다 붙이기는)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내 경우에는 바르트의 유머가 한몫 했다고 본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피로, 사랑하는 사람의 피로는 어떤 문학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사랑을 하는데 피로하다니. 그런데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피로 앞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지는건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는 것에서부터 사랑의 광기에 빠진 사람을 그 누구도 구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 난 널 사랑해란 말에 대응하는 대답없음에서 느껴지는 절망까지. 절망스럽지만 그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유머로 봐버리는건 잔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텍스트일 뿐인 책을 비통하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의 내면화라는 과오를 저질러버리는걸. 유머 코드는 책의 진도뿐 아니라 책과 거리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대안이 아닌 필수였다.

 바르트는 고통을 예감하고 그보다 더한건 없을거란걸 느끼지만 자신이 광기에서 벗어나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찰나적인 감각이 자신에게 주는 최대치의 도취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아직까지는 내 것만이 아닌 다정함에도 명랑한 강아지처럼 급하게 꼬리를 흔들거란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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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6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7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절판


요새 가끔 생각하는데, 난 빨리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할아버지...
할아버지 중에서도 조용하고 사려깊은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 말이야. 내 몸에서 늙은이 냄새가 좀 난다고해서 노골적으로 싫은티를 내는 손자는 아니면 좋겠어.-25쪽

그렇게 혼자 살다가 또 어느날, 외로움의 정도가 지나쳐버리면 어떡하지? 어느날 말이야... 방바닥에서 밟힌 치약을 보면서 끝없이 서러워지면 어떡하지? 바퀴벌레조차 없는 방에서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모르겠어.
(의수) 내가 있을게.-61쪽

하안거, 여름에 벌레들이 성할 때 잘못해서 밟아 죽이까봐 돌아다니는 것을 삼가했다지? 탁발이라도 나가야하면 지팡이 끝에 방울을 달아 벌레를 조심시켰다지? 아니야! 그건 인과율의 노예가 된거야. 선업과 악업을 구별하고 악업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벌벌 떠는 그건...... 내세를 위한 종교적 집착에 불과해! 보통의 인간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만용일 뿐이야.-111쪽

새벽 세시에 전화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설령 누군가와 통화가 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190쪽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200쪽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궁상도 있는 법이다.-204쪽

세상사는 일이 짜증스러워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막막해질때쯤 그리고 혼자서는 도저히 그러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힘들 때 주변 사람들이 한번 이런식으로 나서주는거지. 몸으로 하는 불꽃놀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이 서글픈 상식의 지욕 안에서 버텨나갈 수 있게 해주는거야. 자네 표현대로라면 비열한 타협에 동참하는 것이겠지만, 흐흐.-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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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에센스] 서평단 알림
경제학 에센스
한진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재테크 열풍과 별개로 사람들은 경제에 관심이 많다. 경제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소비생활이나 생활수준을 명확한 지표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를 다루는 경제학에도 관심을 갖을 수 있지만 왠지 도표가 나오고 어려운 경제학 용어로 기를 죽이는 학문이란 선입견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경제학 콘서트나 괴짜경제학 등의 책으로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 책 '경제학 에센스'는 우리가 일상에서 저건 왜 이럴까 궁금했던 점들을 단서로 경제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해준다. 이런 책의 강점은 어려울거란 부담을 경감시키면서 세상을 경제적인 시선으로 본다거나 경제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고틀을 제공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책은 기회, 매몰 비용의 문제나 비교우위, 거래의 원리, 공공재에 대한 경제학의 원리에 대해서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을 해준다. 특히 부제목을 잘 정했다. 왜 구내식당의 밥값은 교직원과 학생이 차이가 나는 걸까? (왜 학생들보다 비싸게 자장면을 먹어야 하나) 좋은 중고차는 꿈도 꾸지마, 경제학이 궁금해하는 것들 등 한번쯤 읽어서 나쁠 것 없고 유용한 내용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교과서처럼 쉽게 설명하지만 저변은 좀 더 넓은 부분도 맘에 든다. 또한 애인과 결별 여부를 선택해야하는 경우에는 과거란 매몰비용이기 때문에 고려의 측면에 넣어선 안 된다는건 지극히 경제학적인 측면이었지만 흥미로웠다.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쳤던 사례들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쉽게 적용이 가능한 점도 이 책의 강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너무 많은걸 다루다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 책의 경우가 딱 그렇다. 내용을 보완하려고 에세이 형식을 빌려왔는데 예시 뿐 아니라 사적인 얘기까지 드러난다. 나는 경제학에 대한 내용을 알고 싶은거지, 이 책을 쓴 저자의 사적인 경제 생활이나 어떤 가족관계를 갖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물론 이 역시 저자가 쉽게 풀어쓰다보니 예화를 든거지만 예시는 지루했고, '선량한 경제학 교수'의 이미지가 강해 좀 민망하기도 했다.

 게다가 개념이 나오고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굳이 해결책을 찾으려고 얘기를 하다가 그만 모두가 잘하면 되지 않느냐, 정부가 잘 해야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두루뭉실하게 하고선 끝을 맞는 것이다. 비교우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은 다른 것에 비해 비교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에 경제학을 가르친다며

 

   
  경제학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며, 아무도 또는 아무것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님처럼, 경제학은 우리 모두를 품어주는 따뜻한 사랑의 학문이다. 144p
 
   

로 맺는다. 모든 챕터가 일률적으로 이런건 아니지만 거의 이렇다. 괜히 이분의 이력과 관련해 미국에서 공부해서 청교도주의적인 도덕관념 때문에 이러는건 아닐까란 저열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공공재의 얘기를 하면서는 아프리카 지역의 코끼리 멸종을 막기 위해 사적소유권 개념을 도입했다. 말하자면 코끼리를 사냥하는걸 무조건 단속하는 것보다 사냥권을 줘서 보호 하에 사냥이 가능하도록 한다는데 있다. 이를 통해 그 전보다 효과적으로 코끼리의 개체수를 늘려갔다는 얘기이다. 이 얘기를 하면서 공공의 소유는 국가를 통해 독과점 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란 논의를 진행시킨다. 여기까지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다. 사람들은 특히 난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의 기본적인 내용만 습득하고 말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거라고 본다. 그래서 문제의식 다음의 명백한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이 고민하는 부분이 진행될 수 있는 화두가 좀 더 던져지길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일정량은 미리 해소시켜주고 친절하게도 '이건 정부가 효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이민가는 사람도, 해외로 나가는 기업도 없게 해야한다.'로 끝내버린다. 좋은게 좋은거다란 식이다.

 더군다나 저자의 어떤 관점도 보이지 않는다. 시장에서 가격은 무죄란 주장을 하면서  가격은 합리적인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거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주장도 가격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말이다.<중략>가격은 경제의 현실을 반영할 뿐, 한 개인의 주머니 사정을 반영하지 않는다(제6장의 마지막, 한번 더 생각해보기)란 말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나 싶으면 그건 또 아니다. 알쏭달쏭 경제학처럼 저자의 관점도 알듯말듯하게 만든건 비유의 표현인지, 관점이란게 없는건지, 관점이 다른 독자의 반감을 줄이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쉽게 풀어쓴 경제학 얘기에 과도한 기대치를 갖고 본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그건 이 책의 소임도 아니고, 저자가 의도했던 것도 아닌데 분석틀이 달라지다보니 혹평이 된 것 같다. 서평단으로서 처음으로 쓰는 서평인데 이런 식이라 다음부터는 서평단 신청하기도 낯부끄러울 따름이다. 칭찬 일색의 주례사 서평을 지향점으로 삼은건 아니지만 야심차게 책을 기획해서 출판하며 그들 나름의 노고에 빚-무료책이란 얄팍한 빚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중소 출판사의 어려움은 알고 있다.-을 져놓고 말이다. 

 이 책을 구입하시려는 분이 있다면 나의 의견과는 별개로 평소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경제학적 의미가 궁금하고 다른건 엄두도 안 나 기초적인 경제학 개념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면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란 점을 참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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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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