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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피를 뽑으려다 철분이 부족하니 시금치를 많이 먹고 오란 소리를 들었다. 시금치는 너무 새파래선 겨울에 구해질까 싶어 교보문고에 들렀다. 시금치 말고 철분이 든 음식에는 뭐가 있을까 찾아보자란 생각이었지만 망망대해의 서점에서 영양소를 검색할 마음은 싹 달아나고 말았다. 대신 바닥에 앉아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케치를 한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림 실력이야 뻔하니 몇번 그리다 소재도 창의력도 고갈되고 손은 손대로 아파 눈을 들어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아주 또렷한 그림이 떠올랐다.
여자 아이가 열심히 교과서를 쳐다 보고,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장면. 그 장면은 에로틱하기보다건강했고, 더군다나 학구적이었다. 무슨 시험을 공부하는 것 같은데 답을 묻던 여자 아이가 콘돔은 꼈냐고 물었던 기억도 났다. 내가 이 책의 구절을 어디서 봤더라. 정혜윤. 아, 발레 그래, 발레. 그 다음은 뭐였더라?
맘이 급해져 도서 검색대에서 책을 검색해 위치를 확인했다. 에세이 코너로 달려가 정혜윤의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했다'를 펼쳤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한 이미지는 변영주의 책 이야기에서 발레교습소 얘기가 나오며 인용되었던 구절이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뜬금없는 구절이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인연이 되면 꼭 만나자고 약속해서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았던 책. 빅토리아의 발레. 그녀는 내게 어떤 발레 동작을 보여줄까? 어, 그런데 저기 두꺼운 패딩 잠바를 걸쳐입고 건들거리는 녀석은 누구야?
성 안토니오의 축일에 대통령은 일반 수감자의 사면을 발표했다. 책은 작은 천사 앙헬이 감옥에서 풀려나며 시작된다. 앙헬은 사면에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며 간수에게 이를 갈았고, 간수는 앙헬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라며 무기징역인 마린이란 사람을 붙인다. 그 다음에 나온 인물은 베르가라 그레이. 칠레에서 알아주는 금고털이꾼으로 수감돼, 공범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죄로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는 나가기만 하면 자기 몫의 돈을 찾아 아내에게 모두 바치고, 집에 들어서는 것 밖에 바라는게 없었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의 첫 얼개를 접하면서 책을 살까말까 고민이 됐다. 두 명의 출소자가 한건을 할 것 같았고, 둘 중에 하나는 왠지 엉킨 실타래의 끝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넋나간 해피엔딩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내가 만약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하지만, 표지가 무척 예뻤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지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를 믿기로 했다. 게다가 아직 빅토리아 폰세를 만나지도 않았는걸.
앙헬은 빅토리아를 만난다. 여느 연인처럼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상투적인 만남이었지만, 청춘에게는 사랑하는 순간의 하루하루가 감동이고 숙명인지라 빈털털이 앙헬은 빅토리아와 그녀의 가난까지도 사랑한다. 그녀가 학업을 포기하려하자 기억력이 비상한 앙헬이 시험 공부를 같이 한다. 발레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빅토리아와 앙헬을 죽이려는 마린. 공범이었던 친구가 자신의 돈을 날려먹은걸 알고, 마지막으로 한건을 생각하는 베르가라. 그리고, 앙헬이 빅토리아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위해 힘이 되어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들이 얽히면서 소설 읽는 재미를 주는 한편, 앙헬이란 친구가 우리식대로의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자기식의 삶의 개척하는 면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칠레 정권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단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나 기사가 아닌 야설을 쓰는 칠레의 신문의 행태는 점잖게 호박씨 까는 누구의 뒷태와 닮았단 생각도 들었다.
빅토리아의 발레가 인도 소설 Q&A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건 소설 속 주인공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란 것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길에서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어둡고 초췌한 인상의 누구지만 어느 순간, 이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봤는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환하게 웃을 것이다. 주인공은 무채색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옆으로 한발짝 다가온 누군가가 되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손을 내민다. 취향 따위는 마린의 개에게 던져주란 말을 내뱉었을 법한 겁없으면서도 한없이 여린 앙헬이 바로 당신에게도 손을 내밀 것이다. 그때는 서슴없이 잡아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장을 다 읽을때까지 그 손을 놓지 말길.
한탕을 위한 과정은 초라할 정도로 짧게,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은 낯설게, 마지막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못읽을 정도로 저릿하게.
제목의 에드워드 호퍼는 아마 책을 읽은 사람만이 앙헬과 나눠가질 수 있는 비밀이 될 것이다. 한창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공백기가 생겼을 때 나를 북돋아준 한 줄. 앙헬이 한 말이었기에 그 구절이 더 와닿았을거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