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의 고양이 - 고양이를 사랑한 젊은 예술가를 만나다
고경원 글.사진 / 아트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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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양이란 동물이 지닌 예술적인 매력’에 대해서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양이의 다채로운 털 빛깔과 무늬만큼이나, 작가들이 매료된 고양이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런 고양이의 숨겨진 매력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작업실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책상 하나, 방 한 칸만 있어도 멋진 작품이 탄생되는 모습을 보면서, 작업실이란 단순히 돈과 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마음먹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주는 기쁨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랑스런 모습뿐 아니라 생로병사까지도 함께 겪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 순간을 어떻게 책임지고 견뎌갔는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어떤 것인지,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그 순간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경원, 책을 내며」에서

말없이 다정한 나의 '고양이 삼촌' 일러스트레이터 유재선

신비로운 고양이 왕국의 창조자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캣

박활민이 만든 고양이 그림 액자를 하나 집어 들고 쌀집고양이를 나선다. 액자에는 갑갑한 삶에서 탈출구를 찾는 사람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고양이 스승님의 말씀이 적혀 있다.

당신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불안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당신의 삶을 죽이는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게 싫어하는 불안을 누가 당신에게 주었는가?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다면 불안은 평생 당신을 따라다니며 삶을 망칠 것이다.

쫓기듯 불안한 삶을 사는 한국의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뭇 여유로운 다르질링 고양이들의 매력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때부터 틈틈이 그곳의 길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돌멩이에다 고양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전통 자수와 목각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찾아왔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는 일에는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력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르질링에서 보낸 시간을 ‘인생 방학’이라고 불렀다. 인생에서 드물게 찾아온 선물 같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금속공예가 신유진의 고양이의 추억 담은 나만의 장신구

노란 줄무늬 고양이 동식이,
"동식이는 집에 있는 남자 고양이들 중에서도 덩치가 좀 작고, 다른 애들에 비하면 꼬리도 못생기고 약해요. 하지만 겉으로는 덩치가 커 보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서, 이렇게 커다란 옷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을 표현해봤죠."

길고양이 찍는 '찰카기 아저씨' 생활 사진가 김하연

화가 성유진의 작품.

<불안한 식욕> 고양이인지 털 뭉치인지 모를 커다란 얼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손은, 토하고 싶어도 토해지지 않는 마음속의 지옥을 그대로 보여준다. 먹은 것을 반복해서 토해내는 심리의 밑바탕에는 자기 부정과 혐오감이 깔려 있다. 상습적으로 구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토해낼 수 없으므로 한때 자신의 몸과 하나였던 것, 즉 먹은 음식을 토해낸다. 이들이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행동은 제 살을 허물어내는 자기 학대에 가깝다.

성유진의 그림에서 반복되는 구토의 이미지는 자학과는 다른 정화의 의미를 지닌다. 우울증에 걸려 폭식과 구토를 경험한 적이 있는 작가는, 자신의 몸이 속한 불안한 세계를 보타로스로 규정하고, 그 세계를 토하듯 몸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평안을 되찾으려 한다. 보타로스란 몸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닥없는 지옥, 타르타로스가 조합된 개념으로, 무저갱처럼 깊은 마음의 심연을 뜻한다. 사람이 싫다면 헤어지면 되고, 몸담은 곳이 싫으면 떠나면 되지만, 정작 무서운 건 마음이다. 마음이 나를 베고 찌른다 해서,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므로.

도예가 김여옥의 작품

인형작가 이재연
<어린 왕자를 만나다> 비스크, 혼합재료, 2010

같은 작가의 작품.
어린왕자에서 나온 노란 뱀과 장미

화가 신선미의 <당신이 잠든 사이 6>

작가가 만들어낸 개미요정들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되찾아주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신선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어 개미요정의 활약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줄어든 주스를 보고 의아해하거나 사라진 물건을 찾아 온 집 안을 뒤질 때도 그것이 개미요정의 소행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 깨어있을 때도 사람들이 개미요정을 보지 못하는 건, 그들이 이미 상상의 세계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 어른이기 때문이다. 헌데, 어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개미요정도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은 피할 수 없다.

<진퇴양난> 장지에 채색, 30*130cm,2007

설치 미술가 김경화의 <굿모닝>전, 부산 대안공간 반디 설치 전경, 2008

유희성과 체험성이 강조된 작품을 주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린이 체험전시의 단골 초대작가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게 2004년이었다. 하지만 대도시 서울은 홀로 부산에서 올라온 작가에겐 냉담한 도시였다. 며칠 동안 사람들과 말 한마디 할 겨를 없이 보낸 날도 있었고 4.5평짜리 원룸에서 지내다 보니 갑갑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 자신만 따라가지 못하는가 싶어 무력감이 들때면, 작업도 다 포기하고 그만 부산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밤이 되면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산책을 나서는 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때마다 눈에 밟혔던 동물이 길고양이였다.
“낮에는 못 보던 고양이가 밤이 되면 보이는거예요. 안쓰러워서 부르면 도망가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길고양이와 나를 자연스럽게 동일시했던 것 같아요. 도시라는 곳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늘 했거든요.”

화가 안미선의 작품

“제가 본 완두는 늘 어딘가에 갇혀 있는 고양이였어요. 가끔 산책을 시키면 무서워하고 나가는 걸 꺼려하지만, 늘 집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면서 동경하는 것 같았고요. 완두는 봄을 참 좋아했어요. 빌라에 살 때 화단에 꽃이 많았는데, 완두는 늘 거길 내다보면서 나비나 벌이 보이면 잡으려고 헛발질을 하는 거예요. ...... 제가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지만 성격상 하지 못했던 일,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마음의 한 부분을 고양이로 표현하게 된 것 같아요. 안전한 곳만 찾아 숨는 완두지만, 언젠가는 자연 속에서, 또 더 넓은 세상에서 거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실크에 혼합재료

펠트공예 인형작가 권유진

작가는 그 사이에 동네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으로 살고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면 길고양이의 삶에도 눈이 가고,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용기를 내어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 뛰어들었다가 병들어 죽는 고양이들을 보며 상처입기도 하고, 버려지는 고양이들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한다. 때로는 ‘왜 그들의 삶에 개입했을까’ 후회도 하지만, 결국 다시 마음은 그들을 향할 수 밖에 없다. 혼자의 힘은 미약하기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어떤 고양이의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길고양이에게 다시 손 내밀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만드는 모헤어 인형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권유진에게서 본다.


책을 읽다보면 취재하고 기획한 글에서 자료조사 업적을 전시하는 구태를 심심치 않게 본다. 상대방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의 세계를 보는게 아니라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글의 생동감을 떨어뜨릴 때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취재와 사전 조사의 절차를 밟되 과하거나 부족함없는 글솜씨로 자신이 본 세계를 얘기한다. 아마도 고경원이 고양이 취재 전문 작가란 점과 고양이처럼(고양이가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고 사려깊게 취재원과 고양이, 작업실을 대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경원의 글과 사진은 누군가의 작업실만 구경하고 나오려는 발길을 그 장소와 사람들, 고양이 곁에 머물게 한다. 글이며 사진, 구성까지 군더더기없이 잘 빠졌다. 야무지고 끈기있는 그녀의 손에서 다음엔 어떤 책이 나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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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가 참 다채롭네요. 귀엽기도, 신비롭기도, 아름답기도 해요.
또 다른 야무지고 끈기 있는 책이 나오길 기대해봐야겠네요 :)

Arch 2011-09-26 19:43   좋아요 0 | URL
그동안 여러 기획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처럼 단단하고 읽을 맛 났던건 오랜만이었어요.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길고양이에게까지 맘이 미치는 부분들은 아릿하고 좋았어요.

알로하 2011-09-2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선미씨 작품은 참 고와서 좋아해요. 고양이는 매니아가 참 많은 거 같네요. 저도 이 책 술술 넘겨만 봤는데 흥미로웠어요~ㅋㅋ

Arch 2011-09-29 09:40   좋아요 0 | URL
그냥 술술 봐도 좋고 읽어도 좋았어요. 신선미씨 그림, 저도 좋았어요.
예술가와 고양이는 뭔가 어울리는데 개와 예술가라던가, 소와 예술가 이런건 좀 안 어울려요. 히~
 
이태원 주민일기
나난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1년 3월
절판


이태원 주민들이 모여 일을 냈다. 일이 아니라 책을 낸게 맞지만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내는 일은 드물테니 '일'을 냈다란 말이 더 적확할지도.

길가에 있는 식물에게 화분을 만들어주는 나난의 나난 가드닝, 출장요리사인 장진우의 움직이는 식당, 홍민철의 사랑의 현장검증, 할머니의 경쟁자이자 길종상가 박길종의 버려지는 물건들을 쓸모있게 만드는 법, 1px라는 친환경 홈페이지를 분양하는 목정량의 이야기(http://2tw.1px.kr/), 집이 부숴지기 전에 스튜디오로 바꾼 사이이다의 사진, 이태원에 서서 자신이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을 찍은 곽호빈의 이태원 쇼 룸, 황애리의 판소리 에듀케이션, 퇴근길에 이태원 사람들을 만난 이해린. 지금부터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제목만 봐도 기분이 좋다. 나도 주민하고 싶어요, 손을 번쩍 들고 싶다.

이 사진은 나난의 16번 가드닝, 사슴의 얼굴

18번 가드닝, 잔디 벅스

누군가 숨어있지만 다리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눈에 다람쥐가 보이니까 다람쥐를 그리는 것이다.' 24번 가드닝

가드닝을 하는 나난의 인터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6시쯤 일어나 준비하고, 가드닝을 시작해요. 작업에 정해진 시간은 없고, 다만 배가 고프고 사람이 많아지면 돌아와요....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도구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요.

- (이태원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영향을 주는 친구들과 가깝게 산다는 게 제일 좋아요.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도 보기 힘들었을 텐데. 아프면 샤브샤브도 해주고, 문서를 출력해주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유기적인 환경이 되어주는 거죠.

공기 나쁜건 우리나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집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따기인 곳이지만 그래도 서울에 살고 싶은건 나난의 말처럼 유기적인 환경이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의 경쟁자, 박길종은 이태원에 버려진 것들을 가지고 쓸모있는 물건을 만든다. 좌식 의자를 주은 박길종은 의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햇살이 뜨거웠던 여름날 만났었는데 서늘한 가을이 돼서야 친해졌다.
특징: 인체공학적인 디자인과 짙은 갈색. 철제 다리가 뭍어 있기도 하고 다리가 없을 땐 좌식용으로도 쓰임. 추석에 부모님 집에서도 발견됨. 왠지 일식 집에 가고 싶기도 함.


아이디어는 둘째치고 곳곳에 박길종만의 (푸흡)유머가 숨겨져 있다. 선풍기보다 따뜻한 조명은 선풍기 받침을 가지고 가로등을 만든건데 그 속엔 이런 얘기가 담겨있다.

손목시계를 풀어서 시계 전용 받침대에 올려 놓는 걸 상상하면서 만들게 되었다. 왠지 양조위가 그 역할을 하면 어울릴 것 같다.
내일 할 일: 괜히 양복을 입고 머리를 넘기고 양조위 흉내를 내보자.

왠 양조위? 그런데 나도 목공까지는 아니고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었을 때 꼭 저랬다. 내가 만든 것에 이따만한 의미나 재치있는 한마디를 보태고 싶었다.

할머니의 경쟁자, 박길종은 킷토스트의 일요일 사장이다.

'킷-토스트라는 토스트 가게의 원래 이름과 공간은 그대로 두고, 용도만 변경한 프로젝트 숍이에요. 가구, 독립 출판물, 가방, 음반, 문구 등 학교와 사회에서 배웠던 모든 것들을 이용해 만들어 팔고 있어요. ..네명이서 하루씩 사장을 해요. (이건 내가 막연하게 꿈꾸던 다수 사장체제)'

직접 홈 스튜디오를 만들어 친구들을 기록해주고 싶어서 진행한 사이이다 홈 스튜디오. 면으로 된 천을 벽과 천장이 만나는 부분에 나사로 고정하고 아래 부분은 책을 쌓아 고정시킨다.

용산구 한남동 주민 이베르,

강남구 청담동 주민 김지나의 사진

사이이다는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 유기견 보호소,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골 스튜디오라는 이름과 내용으로 계속하여 어디든지 가고 싶다고 한다.

입체적인 슈트를 만들어서 입체적인 사람에게 입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 방식을 좋아한다는 곽호빈. 자신의 옷을 좋아하는 시간의 멋을 아는 그들을 이태원에 세워봄.

그때 공간이 주는 힘과 포용력과 함께 그 입체는 완성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슈트를 입기란 참 어려운데 사진 속 남자들은 참 멋지다. 이태원이란 공간이 주는 힘일까.

건축가 백지원은 이태원이 왜 인기있는가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지루한 거죠. ...모든 동네가 천편일률적이잖아요. 처음에야 그게 좋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스토리가 다 비슷비슷하니까 조금만 지나면 금방 재미없어져 버리고 식상해진다고요. 근데 이태원은 아주 많은 다양한 콘텐츠가 공존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에서부터 인도, 이슬람, 미국까지. 이건희 회장에서부터 달동네 주민까지. 제 생각에 이 동네는 네버엔딩이에요.'

'이태원 주민일기'는 알차다. 하지만 '이태원 주민일기'란 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핫하고 (뭐가 뜨겁다는건지) 시크한(정말?) 장소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협찬 잡지 같은 컨셉이 좋다는건 아니다. 사진으로 소개한 몇몇 컨셉은 재미있었지만 책을 쓴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과 예쁘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책 편집은 마이너스였다. 서로 알만한 사람들끼리만 보면 좋을 것 같은 부분(사랑의 현장검증은 정말 별로였다)도 적지 않고 책으로 읽을만큼 의미없는 지점도 있다. 이 책은 아주 좋은 시도를 끝까지 살리지 못한 것 같다. 좀 안일했달까.

하지만 빈집에서 커피 로스팅을 하고 밴드 주자였다가 이제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마트의 사장이 있는 이태원, 이태원 사람들 이야기는 앞으로도 더 듣고 싶다. 입체적인 슈트와 입체적인 공간 이태원이 만나서 벌어지는 일들도 궁금하고 길종상가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도 궁금하다.
http://1px.kr/ (길종상가는 여러가지 일을 한다.)

시시콜콜함과 혹여 떠오를 '나는 이렇게 재미있어요'와 대비되는 나의 권태로움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사는 이야기를 자꾸 듣고 싶은건 힌트를 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toilet의 레이가 '인생은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것의 연속'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느긋하게 견딜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지도. 그런 방법 따위는 없다고 생각 안 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하는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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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08-29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토 리뷰쓰기는 참 어렵구나.

Forgettable. 2011-08-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컴터로 아치 서재에 오니 분위기가 바뀌었네요 :)

Arch 2011-08-29 15:13   좋아요 0 | URL
뽀~ 레이아웃이 왼쪽으로 갔고 서재이미지만 바꿨는데. 아, 광고도 하는구나. 많이 바뀌었네. 요새 별일이 없어서 이러고 있어요.
 
좋은 여행, 나쁜 여행, 이상한 여행 - 론리플래닛 여행 에세이
돈 조지 지음, 이병렬 옮김 / 컬처그라퍼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 중에 괜찮은건 드물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개의 책만 해도 분별없거나 맥락 없이 뒤죽박죽이니까. 가끔 가다 특출 난 누군가의 글이 돋보이긴 하지만 한권의 책을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뭔가 아쉬울 때가 많다. (한겨레 인터뷰 특강은 나름대로 선전하고, 현장감과 밀도감 있는 글이 맘에 들지만-비슷한 기획으로 프레시안이 기획한 불량사회와 그 적들도 있다.) 아무래도 쓰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는 출판사의 요청에 못 이겨 주제나 기획에 맞는 글을 써야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러 명이 경험한 여행에 대한 책은 어떨까. 에세이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여행 책을 좋아하지만 괜찮은 여행 책은 드물다. 그래서 괜찮은 여행 책을 발견할 때마다 작고 예쁜 보물을 찾는 것 같다. 어떤 장르라고 말하기 애매한 여행 에세이류 중에서 괜찮은 책은 독자층이 얇을테고 그렇다면 ‘괜찮은 여행 책’을 찾아낼 확률도 다른 것보다 낮을거 아닌가. 그럼 나의 발견은 꽤 희소성 있지 않을까란 김칫국. 물론 이런 얘기는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세계적인 전문 여행 작가들과, 세계적인 여행가이드북 론리플래닛 홈페이지에서 후원한 여행 수기 공모 대회를 통해 응모한 작가들의 여행기를 엮은 책은 길 위의 모험과 우연한 사건들에 관한 이 31개의 여행담 속에는 쓴 웃음이 나는 것에서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이야기까지 모든 영역의 유머가 담겨 있다. 장소와 주제, 어조 모두 천차만별이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여행에서 얻는 큰 보물은 우리를 웃게 만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알라딘 책소개 중>

 이 책엔 여행을 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만치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을 처음 집었을땐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을 때처럼 ‘얼마나 나를 웃기나 한번 보자’란 심보였다. 우연찮게 랜덤으로 펼친 챕터마다 재미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장소의 여행담을 들을 때마다 정말 이런 곳도 있나 싶어 자꾸 갈증이 났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못 갔다. 걔중엔 좀 지루한 글도 있고 어디에서 웃어야할지 모르겠는 부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역시 여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건 이러저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까.

 하지만 이런 부분들, 누군가의 경험과 스치듯 짧게 기록되는, 그래서 결국은 몇백개의 단어 중 하고 싶은 말은 한줄 정도 밖에 안 되는 여행서를 넘어서는 이런 구절 앞에선 속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간단히 말해, 황량한 땅 끝 마을에 오면 나는 늘 섹스를 하고 싶다.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노란 잡종개와 ‘수브마리노스(핫초콜릿의 일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밀은 작은 포일에 싸인 초콜릿에 있지.” 엉덩이를 땅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듣는 개에게 남편은 강의를 하고 있었다.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들을 넣고 아주 적당한 속도로 저어줘야 한단다.”

 “우리 방에 가서 할까?” 나는 물었다.

 남편과 개 둘 다 내 존재를 잊고 있었던 듯 깜짝 놀라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개는 관심 없는 듯 낑낑댔다.

“그거 좋지.” 남편은 말했다. 남편에 대해 내가 늘 감탄하는 한 가지는 시간과 날씨에 구애 없이 이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한다는 것이다.

 '빗나간 여행 계획은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 사람들과 이어주고 어떤 상황으로 당신을 몰아간다. 그렇게 당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중에서>' 로또 같은 여행을 기대하는걸까. 이번은 반반이었지만 아마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여행 책을 읽을 것 같다.

  p.s 정말 이 책의 정체는 뭘까 싶어 다시 책을 뒤적이는데 앞에 있는 구절만큼 통통 튀는 누군가의 여행담이 넘쳐나는거다. 어떤 이야기는 좀 심심해, 저건 좀 더 밀어붙여야했어. 라고 했지만 여행병 걸려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다. 글이 아니라 그저 여행담으로는꽤 괜찮은 책이란 결론.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 총잡이와 함께하는 묻지마 프라하 시티투어, 사파리에서 사자가 아니라 코끼리와 잠을 잔 사연, 후지산에 오른 바보들, 화장실만으로도 여행기를 만들 수 있는 더그 랜스키의 씁쓸한 유머 챕터, 요리의 카오스 법칙, 원정대의 별명짓기 놀이, 히피 남자들과 함께 살다 위장결혼에서 진짜 결혼까지 하는 ‘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삼촌 덕분에 더없이 즐거운 버몬트 주 여행(그 장소를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여행은 참 괜찮은 방식), 죽으라고 고생한 에티오피아 여행기, 펜과 양을 맞바꾼 사연, ‘카펫 말이’ 놀이(나도 해보고 싶어!), 말뿐인 바탐방의 쾌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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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2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저 분홍색 인용구 읽을 때, 아치, 내 생각 나지 않았어요? 어쩐지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들을 넣고 아주 적당한 속도로 저어줘야'하는 그 음료, 내가 마셔 보고 싶어요. 마시자마자 눈을 감게 될, 그러니까 황홀함에 취하게 될 그런 음료가 될 것 같아서요. 아, 나는 여행책은 정말 별로라 인데, 아웃오브안중 인데, 이거 읽어볼까요, 말까요?

Arch 2011-07-20 17:58   좋아요 0 | URL
글을 다시 써야할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이 책에는 멋쩍은 듯 개에게 저런 조리법을 설명해주는 남자를 보는 듯한 몇몇 풍경이 있거든요. 그걸 다 살리지 못했어요.
의외로 다락방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해남이 생각났달까.(유먼데..ㅡ,.ㅜ;)

나는 다락방을 좋아하지만 우리 취향은 그리 맞지 않아요. 그래서 난 추천 못하겠어요. 게다가 이번건 반반이니까 더더욱. 그렇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어떻게 보면 단편소설 같아요. 그 점은 추천. 추천 역시 반반? ^^

다락방 2011-07-20 18:18   좋아요 0 | URL
나는 '그거 좋지'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아요.

승주나무 2011-08-0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정체를 모르는 책은 무서워서 잘 안 읽게 되는데, 아치님의 모험심이 항상 부럽습니다. 예전부터...

Arch 2011-08-05 10:57   좋아요 0 | URL
크~ ^^
 
왜 날 좋아하는거야?
마담 보베리 - 세미콜론 그림소설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포지 시먼스 글.그림, 신윤경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어제 눈이 빠지려고 하는데도 끝까지 다 읽은 (책 한권을 끝까지 다 읽은게 얼마만의 일인가) 책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너무 괜찮은 만화책 '푸른 알약'을 낸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나온 '마담 보베리'가 바로 그 주인공. 그린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여성주의 글을 쓰는 분이 언급한 책인데 책을 읽고 나니 감상이 전염되듯 '과연 사람을 안다는건 어떤걸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에서 마담 보봐리를 빵집 주인이 지켜본다면 어땠을까. '마담 보베리'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한게 아닐까 싶은 만화책이다. 빵집 주인 주베르는 영국 여자인 보베리가 자기 마을로 올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몸매나 얼굴, 취향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 보베리 때문이다. 주베르는 보베리의 삶을 소설 속 여주인공의 것처럼 상상하고 소설에서 벌어진 비극을 막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보베리는 소설 속 보봐리 부인과 비슷한 사람일까. 겉으로 보이는 면은 그럴지 모르겠다. 어쩌면 희극도 비극도 아닌 죽음까지도 닮았는지도. 하지만 보베리는 소설 속 보봐리처럼 단순명쾌하지 않다. 보베리는 애인과 헤어지고 찰리와의 관계에서 희망을 찾다가 서로의 진면목과 자신이 바란 시골생활의 지리멸렬함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는 여자다. 바람을 피우며 자신이 좀 더 너그럽고 남편의 아이들에게도 다정함을 보일 수 있어  활력을 얻는 여자이며 바람의 상대인 애송이 에르베가 갑작스럽게 결별 통보를 했을 때 그전 이별처럼 무너지는 대신 자신을 좀 더 추스릴 수 있는 여자이다. 기분을 낸다며 과소비를 한 덕에 밀린 카드빚은 집을 팔고 일을 더 많이 하는 식으로 정리 할줄도 아는 여자인거다.

 내가 인상깊게 본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보베리 부인의 맘 상태와 쓱쓱 그린 듯 보이지만 촘촘한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림이었다. 활자형 인간인 것도 아닌데 만화를 볼라치면 그림도 봐야지 글도 읽어야지 정신이 없었는데 이 책은 정말 푹 빠져서 한쪽 분량의 글을 읽은 다음 눈을 쉬게 하려고 그림을 보는식이어서 그 조합이 꽤 괜찮았다. 과장하지 않고 그렇다고 성의없는 것도 아닌 그림은 글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 소설적인 묘사를 제대로 보여준다.

 소설은 사람과 삶, 생각에 대해 거대하지만 조밀한, 세세하게 뻗었나 싶으면 중간은 과감히 생략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 삶과 인물은 모종의 일관성을 보여야할 숙명을 갖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개연성 있는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나갈 때 납득하기 때문이다. 주베르가 보바리 부인으로 재구성한 보베르 부인의 경우, 주베르가 바라는건 소설 줄거리와 비슷할 뿐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잘 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을 일관성있는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데다 모험이나 일상이란 말을 섣부르게 들이밀 정도로 구분이 안 되는 상황, 단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해본적이 있다거나 납득할 만하다면서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말로 내세울 수 있는게 뭐가 있단 말일까.

 좋아졌다, 싫어졌다, 어떤 감정일까, 내 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밀당을 해야만 긴장이 생기는 연애에서 진정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보베리 부인의 생각은 어느 소설 속 인물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킨다. 책의 일정 부분이 보베리 부인의 일기를 통해 이야기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토록 사소한 서술은 소설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주베르가 소설을 통해 보베리 부인의 삶을 재구성한다면 나는 어떤식으로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까. 줄리언 바지니의<가짜 논리>에서는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오이디푸스니 일렉트라 컴플렉스 등의 얘기를 꺼내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건 엉터리란 얘기가 나온다. 결국 주베르의 촌극을 비웃었지만 내가 그렇지 않닸단 법은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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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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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은 세계에 관한 확실한 앎을 원했다. 러셀이 꿈꾼 완벽한 우주는 철두철미하게 합리적이고 확실한 앎을 약속했다. 그는 유클리드 정리에서 본 확실성에 매료되지만 그 당시 수학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들과 순환적인 정의들이 널려있는 난장판이었다. 강력한 논리학, 그게 없었다. 게다가 게오르크 칸토어의 무한은 인류의 정신을 압박해온 관념이었다. 무한은 수학의 내면이 허약하단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즈음 버트란트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생각해낸다. 그리스 시대의 에우불리데스가 말한  ‘여러분,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와 비슷한 자기 언급이 포함된 명제가 그것. 이 역설은 ‘집합’이 공통 속성을 통해 정의된 집단이란 생각뿐 아니라 논리학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수학의 토대는 무엇일까. 그 토대를 증명하기 위해 러셀은 화이트 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불가능하며 ‘논리학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라는 신념은 이제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전진하는 것은 러셀에게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오직 ‘멍청해지기’를 통해서만 겉보기에 자명한 장벽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운 실재를 명확한 지도로 환원, 실재를 더 단순한 것들로 대체해 논리학이 더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실재와 지도를 혼동하기, 광기의 완벽한 정의를 제공할 뿐이었다.

 1911년 러셀은 프레게 소개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형을 역설의 침입을 막는 수비대로 봤다. 예컨대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자는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는다’ 이때 이발사는 누가 면도해주냐는 역설에서 이발사의 계급을 나눌 경우 이 명제는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문적으로 논증 다듬는 일을 맡겼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진리의 본성에 관해 러셀이 암묵적으로 품어온 가장 기초적인 전제에 의문을 품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실재의 부분 각각이 기호로 대체, 기호들이 그것들 간의 실제 관계에 맞게 재결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관계는 언어에 의해 매개된다고 봤다.

 비트겐슈타인: 논리학은 언어의 형식, 철골 구조가 건물 속에 들어 있듯이 논리학은 언어 속에 있다. 그러나 철골 구조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러셀이 논리학의 토대를 창조하려다 실패한 원인은 논리학의 본성 자체에 있다. 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논리학을 보여주는 것만 가능하다.

 러셀: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는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이다.

 비트겐슈타인: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이다.

 이 둘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러셀은 지난 20년간 항진명제를 생산하는 기계<논리철학논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세계를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은 여전히 옛날과 똑같이 격정으로 가득 찬 달걀이고 그 달걀에서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오믈렛이 만들어진다.’ 러셀은 세상 밖으로 나가 인간성을 개조하려고 교육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런 즈음 괴델은 러셀의 저작 ‘수학의 원리’에서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명확하게 진술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다. 모든 참인 논리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고 모든 거짓 논리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한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 전제이지만 증명할 수는 없었다. 러셀은 노력의 중심에 공허가 있음을 깨닫는다. 러셀은 감정과 애매함이 두려워 논리학에 끌렸는지도 몰랐다. 러셀이 증명하려고 했던 최초의 전제, 즉 수학의 토대를 찾는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물론 러셀이 추상 언어로 수학을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세우려고 노력한 과정에서 나온 강력한 방법들은 수학에서 유효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핵심은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것. 괴델로 인해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란 결론에 도달한 논리학은 컴퓨터의 개발로 ‘어디까지 증명할 수 있나’란 과제 앞에 놓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책을 읽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책 정말 재미있다’란 감상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하나마나한 감상을 굳이 글로 쓰고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로지코믹스’를 다 읽고 나서 단박에 든 생각은 역시 ‘이 책 정말 재미있다’였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란 낯뜨겁고 뻔한 감상도 생각났다.

 러셀의 강연을 시작으로 책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그리스 비극에서 이야기가 배울 점, 러셀이 ‘토대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등은 독자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 이야기들은 유기체처럼 연관되어 있다. 복잡한 구조가 혼란스럽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게 했다. 각각의 발언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효과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곧 토대를 찾아서 떠났지만 결국 토대를 찾을 수 없었던 이 책의 여정과도 닮았다.

 ‘왜’라는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도 좋았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단편적인 이론만 훑는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했는지 진득하게 따라가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다. 본격 철학책은 너무 어려워 철학의 엑기스를 뽑았다는 요약서나 연대기적 주요 사상을 소개한 책들을 읽으며 철학적 사고를 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진작 로지 코믹스를 읽었어야 했다. 이 책은 어렵기로 유명한 책들의 해설서라도 읽고 생각의 흐름을 잡고 싶게 만드니까. 여전히 나의 책 읽기는 해설서를 읽고 원작을 이해하려고 낑낑대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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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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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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