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엄마는 우리 어렸을 때 좋은 엄마였어? 우리한테 잘 했어?

- 아니. 그때는 살기가 힘들었잖아. 힘드니까 자꾸 술 먹고 아빠도 다른 여자 만나서 엄마 힘들게 하고. 그때 너네들한테 잘해준 게 없지. 밥도 잘 못챙겨주고.

 

 답을 예상하지 않았는데 덤덤한 대꾸에 먹먹해졌다. 고3때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살며 점심 급식으로 저녁까지 먹던 생각이 났다. 그때 난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거나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엄마는 원래 그래, 엄마도 어쩔 수 없어. 일찌감치 포기를 했다.

 

 엄마는 요새 부쩍 전화를 한다. 손주랑 영상통화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하소연을 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다니던 식당에서 나이가 많다고 잘리고 다른 식당으로 옮겨 일하면서 힘들다고 했다. 잇몸이 가라앉아 임플란트 비용으로 버는 족족 치과에 갖다 바치고 있다고도. 전화를 걸어온 엄마가 치과에 얼마 들어간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 엄마 그냥 나중에 이 다 빠지면 틀니하는게 낫지 않아?

- 너 낳고 나서 이가 시원찮더니 늙으니까 막 가라앉나봐.

 그날 비상금을 탈탈 덜어 엄마 통장으로 송금했다. 이 치료 잘하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자꾸 나 미안하게 하지마.

 

  전에 정말 돈이 없어서 다음달 방세도 못내서 어떻게 해야하나 쩔쩔맬 때 한번씩 엄마가 전화를 했다. 아빠가 음주운전에 걸렸거나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소리를 했다. 나도 힘든데 엄마는 어떻게 하나도 안 변하고 이렇게 약할까. 매정하게 전화를 끊다가도 걱정돼서 얼마 없는 돈을 송금할 때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직장에 다니고 수중에 어느 정도 여윳돈이 있을 때부터는 엄마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적으로 위로하고 얘기를 들어줘야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아빠의 잦은 무시, 근처에 사는 고모의 간섭, 누구누구한테 받은 서운하고 폭폭한 감정. 나는 엄마에게 강하게 대처하라고 얘기했다. 바쁘다며 나중에 전화한다 해놓고 다시 엄마가 전화할 때까지 까맣게 잊은적도 있다. 엄마는 그냥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 뿐인데.

 

 오랫동안 쌓인 화가 엄마 머리에 가득 차서 요새는 자꾸 뭔가를 깜빡 잊는다. 치매는 아니지만 그 과정 언저리까지 온 것 가같다. 깜빡 잊는 건 기억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나약함일 수도 있고 과거의 서운함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럽던 순간일 수도.

 

 통속적인거 정말 싫은데.

 딸을 낳아보니까 엄마 맘을 알겠다. 바라만 봐도 너무 예뻐서 눈 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딸을 낳고 나니까 그렇게 계속 나약하고 약해빠져서 딸 속을 썩이던 엄마 맘을 알겠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도 미워서 맘이 아프다.

 

 딸에게 정성을 다하는 맘의 반이라도 엄마를 생각하면 좋겠다. 그래서 엄마가 우리가 함께 해서 행복했던 시간들은 늦게까지 기억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