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들어가지 않는 계정에 쌓인 일다 메일을 하나씩 읽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이 직접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매매 여성인지, 성노동자인지로 구분하는 논의가 얼마나 추상적인지를 느꼈다. 상황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성매매 양상과 감정, 제도적 요구사항이 다른데 단선적으로만 바라봤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책 입안자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어떤 입장이있는건 아니지만 20대 때 알바를 하며 성과 관련된 이런저런 고민을 했고

지금 역시 현재진행형 고민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한때는 성역할이 고정된거나 가부장제가 굳건한 이유를 접대문화에서 찾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여성의 범주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나누었고 명확하게 이쪽이 아닐 때, 경계에 선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마 상대방이 내 정체를 궁금해할 때 더 여러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창 데이트 폭력 이야기가 나오고 난 후 그 이야기를 엮은 책이 나왔다.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길들여지는 것도 폭력. 의식하지 못한채 나를 갉아먹는 고차원적인 폭력. 20대의 많은 날들을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에 빠져서 나를 제재하고 압박하는 것조차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었다. 혹은 이상한 거부감을 갖고 통념에 저항했지만 의식적으로는 낭만적인 사랑에 콕 박혀 이도저도 못하고 사랑중독자처럼 굴었다. 지금은 상대를 바꾸려는 내 속에 있는 폭력을 자꾸 인식하고 그렇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요새 내가 하는 짓거리가 꼭 그런 것만 같아서 자꾸 경계하게 된다.















 데이트 폭력에 대해 자전적으로 회고한 '7층'을 보면 나는 저렇게까지 극적으로 사로잡히진 않았다는 생각보다 나 역시 비슷한 형태로 길들여지고 길들이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 뭐 이런 통념에 대단한 각오로 저항을 했지만 의식할수록 더 옭죄는 관습적인 사고 같은 게 있다. 나 역시 자유롭지 않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a가 조금만 소홀해도 신경질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당당한 개인 어쩌고 하면서도 관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불안감을 상대에게 여과없이 분출하고 만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성기삽입 성폭력을 당한적은 없지만 성희록, 성추행 등은 흔하게 보고 듣고 겪어왔다. 그럴 때마다 피해자인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이 다르고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매번 달랐다. 서사적인 인간처럼 나이가 들수록 대응도 잘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도 있고 여전히 성희롱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들을 때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걸 센스있게 받아쳐야할지, 인상을 써야할지, 한방 먹여줘야할지.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074%C2%A7ion=sc1















 이 책을 읽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몸, 관계에 대해 힌트를 얻었다. 성적인 얘기를 하면 으례 수줍어하거나 눈을 딴데로 돌리거나 화제를 바꾸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대로 행동하면 그 사람은 그게 당연한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거고 난 그 당연함에 일조하는 것 아닌가. 아니아니, 이렇게 다단계로 복잡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평상시 여자들을 좀 떠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있던 언니가 자리를 뜨자마자 옆 사람에게 '쟤 가슴 진짜 크다, 몇일까.'이러는거였다. 공격은 훅하고 들어왔는데 그 대화에 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짧은 순간 초집중해서 한방을 생각해야 했다.

- 아치야, 그런데 너는 몇이냐. 그 왜 있잖아. 무슨 컵

- ...... (한방아 생각나라) 나는 부랄 컵이다. 그런데 네 길이는 얼마나 하냐.

하, 빵 터지고 말았다. 남자들끼리 동양 남자 사이즈를 찾더니 포경수술을 해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네 어쩌네하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좀 더 짖궂게 사이즈 운운하려다 꾹 참았다. 보기 드문 인내력을 발휘한 것.


 성희롱은 성별을 불문하고 일종의 권력에서 발생한다고 느낀 일도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란게 권력은 아니지만 좀 더 거침없는 면은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어리고 말수 적은 남자일 경우라면 더더욱. 한번은 어린 남자 사람이랑 얘기를 하는데 바지라인 끝에 팬티가 보이는거였다. 왠지 알려줘야할 것 같아 작게 말했는데 그걸 다른 분이 크게 전달했다. 하, 남자가 조금 당황한다. 나도 당황해서 이거 성희롱한거 같다며 나도 내 팬티 보여줄까란 얘기를 하고 말았다. 주위에 있던 분들이 그건 2차 피해다, 어쩐다 하면서 웃고 넘어갔지만 그 반응 자체가 성희롱이었겠구나 싶었다. 아포가토 사주면서 잘 지내자 어쩌고 했는데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대응도 좀 이상한데.


 얼마 전 예전에 스크랩해둔 자료들을 읽다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 생물학적인 여성 대통령을 밀어주자란 최보은의 주장에 대해 김규항이 '나른한 페미니즘'류의 글을 쓴걸 봤다. 김규항의 글은 나른했고 일다와 최보은의 글은 절절해서 맘이 아팠다. 메갈리안 언니들의 화끈한 미러링을 틈틈이 지켜보고 정희진의 책을 계속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고종석의 맨스플레인과 꼭 그렇게 맨스플레인이라고 단정지어야겠나란 싶기도 하고 페미니즘이 여성에 국한된 게 아니라 다양한 지점까지 아우르는거라면 그 정의는 무엇일까란 생각도 해본다. 


 나는 페미니스트란 해시태그가 한창 유행일 때는 SNS를 하지 않았고 지금은 하지만 굳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내리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는 꼴통 페미니스트 소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지금은 나를 어떤 지향으로 정의하는게 가당키나 싶은 맘이어서, 페미니즘은 지향의 운동이지 정의내리는 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해시태그는 페미니스트라는걸 드러내는 것만큼 여성의 목소리, 힘을 보여주자는 운동 성격이었던 것도 모르는바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관련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생각과 정리를 하고 나의 대응을 점검하는 건 즐겁다. 헷갈리고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지만 페미니즘과 그 저변의 생각들을 읽다보면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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