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양보해서, 성찬뿐인 해설집을 읽고 한국소설에 쌓인 편견 때문에 이 작품이 별로인건 아닌가란 자책을 했다. 평론가 말처럼 소설은 남성적인 문법을 구사해서 도리어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들여다보는건데 스토리며 탄탄한 구성을 기대한건 무리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게 한낯 치매걸린 노인의 몽상일 뿐이라는데 다른건 없냐고 묻는게 오버였을까. 기억이란 실존을 붙잡는 문장과 기억하지 못함을 상기하는 내용 사이를 보여주는 문체라...

 

 남성적인 문체, 간결한 문장. 그게 다다. 남성적인 문체라는게 단문과 짧은 문단으로 이뤄지는거라면 나도 하겠다. 그 남성적 문체. 김영하가 보여준 고유한 재치와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소설 전 작업 같아서 작가도 조금 쑥쓰럽지 않을까 싶어 작가의 말을 읽는데 아버지 얘기를 한다. 다 읽고나서야 된통 당한거 같은데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한국영화는 오직 한국영화인데 소설은 왜 그들만의 소설이 되는걸까.

 '나가수'가 망한 이유를 한국소설, 문학이 반면교사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이후로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한걸 보면 개선할 의지가 없거나 정말 자신들의 글이 대단하다고 믿거나 소수정예로만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의 피력인 듯.

 

 

 

 

 

 

 

 

 한동안 서재 분위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어느 지점의 김연수, 독특하려고 애쓰지 않는 여성 캐릭터와 김연수 같은(이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 김연수 같다)남자 주인공 때문에 그의 소설이 좋았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었고 한동안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 속 감성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나이 들었는지 김연수가 나이 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하지 못하고 계속 맴도는 느낌이 든다.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기 때문인지 할 얘기가 더 이상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참 소설 제목 같아 헷갈린 '사월의 미, 칠월의 솔'만 읽고 말았다.

 

 

 

 

 

 

 

 

 두권의 소설이 아무 위안도 되지 못하는 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왜 첫 소설이냐고 세번째 소설쯤 되면 첫째 둘째 소설까지 읽을 수 있는데 왜 고작 첫번째 소설이냐고 앙탈을 부리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을 읽을 때도 이랬다. 다음 작품 읽으려고 제목을 메모하고 구해서 읽었는데 이상하게 두번째는 읽히지 않았다. 요나스 요나손은 어떨지 두고봐야겠지만. 

 

 소설은 알란의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며 -소설은 들여다보는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계한 사람들의 면면과 일들의 단순함을 이야기한다. 명쾌한 게 없다고 이도 좋고 저도 좋은게 아니라 거대한 서사 속에서 개인의 의지나 생각은 간단히 생략한다. 그 생략함이 운명론적으로 흐르지 않는 건 책 속에 숨겨진 씽긋 웃게 만드는 구절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일 것이다.

 

 '예쁜 언니는 소비자들 중에는 의학적인 이유로 설탕물 12리터를 들이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논평은 삼갔다. 그런 윤리적인 지적을 하기에는 여기 둘러앉은 사람들보다 자기가 특별히 나을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의 수박은 조금 전의 통닭만큼이나 맛이 기막힌 게 사실이었다.'

 

 이 부분에서 어디서나 거침없이 자신의 (무)식견을 뽑냈던 나는 좀 쑥쓰러워지고 말았다.

 

 

 

 일테면 이런 것.

 

 출근길에 만나는 개의 이름은 사랑이다. 내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돼 사랑이가 애기를 갖더니 얼마 전에 또 이렇게 귀여운 꼬꼬마들을 낳았다. 보들보들 강아지를 매일 가서 보는 건 너무 좋지만 일년도 안 돼 또 아이를 낳는 사랑인 어쩌란 말인가. 시골에선 돈 되라고 강아지를 받는다는데 사랑이 아저씨도 그런게 아닌가. 평소에 아저씨랑 한담을 즐겼는데 수더분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동물학대를 한단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하자 언니는 그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래도 꼬꼬마 강아지는 귀엽고 사랑인 불쌍하고 아저씨에 대한 내 감정은 지랄 맞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저씨랑 얘기하다 사랑이가 동네 건달 개랑 연애하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 다행이다. 사랑이가 알아서 연애했으니까, 하고선 강아지들만 예뻐하면 좋겠지만 사랑이의 삶의 조건, 같은 개이면서 다른 개인 시골 개들을 생각하니 다시 또 착잡해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며칠 전 귤껍질을 버리러 센터 근처 풀밭에 갔다가 정구지 밭을 일구는 아저씨를 봤다. 지난해 부추를 여러번 끊어먹었는데 겨울 되면서 잊혀졌던 곳이다. 아저씨 왜 그러고 계세요. 아저씨는 당신 밭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당신도 몇번 부추를 먹었고 풀이 많으니까 밭을 일굴 뿐이라고 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고 안 해도 아무 문제 없는 일을 점심시간을 쪼개서 한다.

 

 처음 이곳에 내려와 남다른 포부와 열정을 갖고 이것저것 의욕적으로 일을 벌이다 어느날인가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나 지금 왜 이러는거지. 왜 이렇게 의욕적으로 덤비는거지. 선거로 바꿀 수 있는건 없으니까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자, 내가 잘하면 사람들도 같이 잘 할거야. 내 안에 과잉 의욕들을 걷어내고 보니까 다름 아닌 인정욕구가 또아리 트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나만의 의욕으로 되는 일은 자기만족 밖에 없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제자리에서 그냥 사는 사람들, 당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한테 배운다. 일상을 견디거나 즐기지 않고 자신의 당연함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보여준다는 의식이 없어서 더 아름답다. 사랑이네 아저씨가 폐지를 주우면서 바지런하게 사랑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권산이 아버지의 집을 당연히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티 다 내고 소문내면서 하는 일들을 묵묵히 제자리에서 해내는 사람들. 나도 그렇게 당연하게 살고 싶다.

 

 

 

 

 

 

 

 

 

 

 

 

 

  '글쓰기 공작소'의 이만교 말처럼 나는 그저 언젠가 리뷰를 멋지게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서재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만 갖고 사는게 만족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리뷰를 쓰겠다고 포스트잇을 뗐다 붙였다 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그저 이런 책을 내준 권산과 당연한 삶을 살아준 어르신에게 감사한 마음만 간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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