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옥찌들이 우르르 일어나 부산하게 왔다갔다 했다.

뭔가 했더니 학교에서 받고 만든 카네이션을 엄마한테 달아준다고 그런 것.

엄마라 좋구나 이랬는데 민이 남은 카네이션 하나를 나한테 달아줬다.

무려 카네이션 세개를 다른 크기로 접은 카네이션 종이다발이었다.

 



 
 
카스피 2013-05-08 20:49   댓글달기 | URL
ㅎㅎ 카네이션의 넘 멋지네요^^
 

 버스 정류장에 어르신들이 많이 뵌다. 반갑게 인사드렸더니 내 주위를 둘러싸며 소속과 싹수 검사를 한다. 성실하게 답변했더니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 하 ㅂ 격인가요? 같이 사는 분이 분명 나를 교회 데리고 나올거라는 할머니의 단언에 잔뜩 쫄았지만 씽긋 웃었다. 제1 원칙, 어르신들 말씀에 토달지 않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건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내가 옳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합리적인 접근보다 이곳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한다. 그 바탕에서 지역분들을 이해할 수 있다, 고 누군가 얘기해주셨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한가로운 잡담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그놈 하나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스무고개처럼 말씀을 하신다. 그놈이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고 빙 돌으라면 돌면 된단다. 주체는 그놈이니 그놈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래도 운전기사인가 보다.

 

- 북한이 잘못 생각했다니까. 가네들이 부러워서 그러는겨. 그놈도 있고 테레비도 접었다 폈다 하니께 부럽지 않것어. 쪼매만 있으면 테레비를 들고 다님서 볼 수 있것당게

(할아버지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하, 본래 성질대로 했다면 이것저것 참견하고 훈수 뒀을텐데, 살짝 아쉬웠다.

 

 분명히 버스 시간표를 숙지했다. 헌데 어제는 조금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선 막차가 7시쯤이니까 어쩌고 하면서 터미널 사진 찍고 해찰을 부리다 2분 차로 버스를 놓쳤다. 헉. 구간별로 시간표가 있는게 아니라 종점별로 있는터라 착각을 했던거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갖고 다닌다. 어른들이 버스가 많이 다닌다고 해서 맘을 놓아선 안 된다. 대부분 한시간에 한대 정도 있다는 소리니까. 이동해야할 일이 많은 사람들은 버스 시간표에 맞춰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나도 차를 살 생각을 했다.

 

 중고차를 사면 큰 부담은 없겠지만 차유지비며 보험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이 안 나왔다. 이곳으로 이사온건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며 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씀씀이가 늘어나면 곤란할 것 같단 생각도 있었다. 더불어 이곳의 모든 일상을 여행화 하려는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풍경에 닿는 접점이 넓을수록 좀 더 깊고 크게 알 수 있을거란 계산도 있었다. 과연 내 깜냥이 '더 깊고 크게'에 닿을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금욕주의는 아니고 그냥 내가 할 수 있을만큼만 궁상떨 정도는 아니게 살고 싶은데 남들은 궁상으로 보면 어쩌나 싶다 내가 남들 눈을 그리 신경 안 썼으니 괜찮겠다 싶다가도 한번씩 버스를 놓치면 또 어쩌나란 걱정도 들고 하는 오락가락한 상태이다.

 

 근무 이틀째

 업무를 인수인계할 분은 다른 일로 출장 중이고 뭔가 일은 벌어지고 나는 뭔가 해야할 것 같은데 감을 못잡고 심부름만 하고 있다. 업무 분장도 없고 단체별 연락처도 없다. 맨땅에 헤딩, 같이 하는 헤딩이면 힘이라도 나겠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분들도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데면데면한 상태. 역동적이고 매순간 보람된 일을 할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왠지. 아냐아냐(자아분열?) 우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책도 읽고 사람들 얘기도 들어봐야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낮에 있었던 뿌듯한 일 하나

  대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다. 의심쩍은 시중 도시락 대신 이곳 지역 협동조합에서 마련한 점심을 먹었다. 협동조합이 생긴지 얼마 안 돼 그릇이 별로 없어 일회용품을 썼다. 예전 같으면 많은 쓰레기가 그냥 버려지는걸 보고만 있어야했는데 지금은 종이는 종이대로 분리수거를 했고 컵도 다른 곳에서 급하게 얻어와 종이컵을 안 썼다. 누구 하나 아치 너는 왜 유난을 떠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너무 바쁘다) 대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도와주고 감사합니다, (잘못 버리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니 힘이 났다. 분리수거 열심히 해도 이 지역에선 폐지를 수거하지 않아 한꺼번에 쓰레기를 가져간다는게 함정.

 

  돈 때문에 택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다.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좋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좋다. 직장을 견디거나 어떤 일들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아도 되고 주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첫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아치가 아치에게 얘기해본다



 
 
치니 2013-05-04 10:50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아치 님!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라니, 좋습니다 좋아요.
저는 차를 사는 쪽으로 한 표. ㅎㅎ 주로 집에 두고 버스만 탄다 하더라도 있으면 왠지 급할 때 (막 아프다거나 ㅠ) 써먹지 않으까요.

Arch 2013-05-06 13:51   URL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무슨 강 같은게 흐르는 것 같지만 아직은 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겨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왠지 지금은 좀 이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는 곳과 직장을 옮기면서 사람들과  담담하지만 어색한 인사를 했다.

 

 실없는 농담과 무리수 대신 항상 건강하고 잘 지내란 인사를 건넸다. 부침이 많았고 사연이 있었던 관계들. 좋은 기억만 담고 가라는 말처럼 맘이 가벼워지면 좋겠다. 이십대의 나는 직장을 옮길 때 터무니없이 설렜다. 집에서 멀어지고  조막만한 조카들과 멀어져도 망설이지 않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기대는 했었다. 지금은 서먹하다. 후련할줄 알았는데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2년 넘게 출퇴근을 한 길과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과 아직 반납하지 않은 도서관의 책들. 내 자리는 깨끗이 치웠는데 자꾸 뭔가 더 남은 것 같고 아직 덜 끝난 것 같다. 내일은 알람없이 푹 자도 되는데 소속있는 휴일과 다른 기분이 들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에서 별말 아닌데도 가슴에 콕 박혔던 말이 있었다. 바로 '직장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내 전부'란 말이었다. 책에서는 그 전부인 회사가 저지르는 악행을 보고한다. 퇴근 후 여가 시간을 악착같이 찾아쓰려고 했고 병가와 잦은 '집안일'을 핑계로 땡땡이치기도 했지만 회사는 내 전부였다. 힘들 때는 이깟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모멸감을 느껴야되겠냐며 가슴을 탕탕 쳤지만 돈 때문에 회사를 다녔던건 아니었다. 명함 때문도 아니고 일에 대한 자긍심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새로 배워나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회사 덕분에 눈치가 초큼 늘었고, 형식을 중시하는 집단의 명암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에서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의 리듬에 맞췄다.

 

 발판이며 손거울,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고 나오며 사진기를 꺼냈다. 햇살이 아래서 유리창이 빛나는 건물이 쨍. 사진을 남겼다. 안녕.

 

 이틀 정도 쉬고 부랴부랴 이삿짐을 챙겼다. 포장을 하네, 마네 하다가 왜 나는 이런 잡동사니를 껴안고 있나 싶은 자괴감에 휩싸이다, 정리되는 양을 봐가며 배짱을 부렸다가 내일 하고 말지하며 술먹고 뻗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캐리어에서는 당장 입을 옷이 아닌 실내용 옷과 펜만 무더기로 쏟아졌다. 아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자 도시에선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던 별들이 여름도 아닌데 쏟아질듯 많이 보였다. 정말 이사했구나 싶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한건 아니고 된장국에 취나물로 아침식사를 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침 독서를 하고 버스 도착 시간보다 20분 먼저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분을 뵈었다. 인정이 넘치고 수더분한 시골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인사 정도만 하고 그 뒤로 묵묵부답이었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전입신고를 물었더니 내가 못알아듣는다고 판단했는지 대뜸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다. 좁고 조용한 동네, 우리 아빠 이름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동네, 나는 잘할 수 있을까.

 

 동네 멍멍이랑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얘는 손을 턱 내 가슴팍에 걸친다. 무게감과 감촉이 낯설면서 익숙하고 거침없으면서 수줍다. 순진해서 이름도 순진이인 멍멍이

 

 

 

 일상을 전시하듯 펼쳐놓는건 좀 아니지만 오늘은 첫날이고 '사람은 쉽게 안 변하는 법'이니 오늘 아침 출근길 사진도 살짝 올려본다.

 

 

 

 

 

 

 

 



 
 
노이에자이트 2013-05-01 17:32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보니 개는 덩치가 큰 순둥이 같습니다.리트리버 종인가요?

Arch 2013-05-02 15:49   URL
네. 집에서 미니핀 키웠을 때는 몰랐는데 개가 원래 순한 동물이란걸 새삼 느꼈어요. 미니핀은 자아가 강하고 성질 있거든요.

2013-05-02 01:32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13-05-02 17:03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이 페이퍼 좋아요. 일상의 온기가 느껴져요. 저는 아치님의 일상, 전시회로 보고 싶은데.

Arch 2013-05-06 13:52   URL
네꼬님, 저야말로 네꼬님 페이퍼 보면서 기분이 좋은걸요. ^^
 
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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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이 책이 최고 육아서만은 이 책이 최고/육아서를 자기계발서로 본 관점을 반성한다. 육아서는 방법론과 실천론을 단편적으로 답습하는게 아니라 어떤 철학을 갖고 어떻게 아이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 기대가 높았는데 기대치를 웃도는 내용을 담고 있다.


 
 
Arch 2013-05-01 11:12   댓글달기 | URL
또치님 덕분에 알게 된 책. 고맙습니다.
 
인생학교 | 섹스 -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 인생학교 1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미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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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강추 포르노에 빠져있거나 한번쯤 외도를 꿈꾼 사람, 결혼의 조건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 보통은 죽지 않았다. 사랑의 기초에 나왔던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이고 집요하게 `섹스`에 대해 말한다. 낭만적 사랑과 결별, 섹스에 대한 편견, 자유와 안정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까.


 
 
Arch 2013-04-26 13:51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추천하는게 맞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