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에 이사를 했다. 도배 바르고 장판 까는 것만 끝낸 상태에서 가구 없이 며칠을 집에서 지냈다. 장판을 바닥에 붙이려고 쓴 접착제 냄새에 머리가 띵하고 집은 여전히 낯설었다. 전기매트에서 눈을 뜬 아침은 우중충했다. 왜 나는 늘 어떤 계획도 계획일 뿐이란 각오로 사는걸까. 가구 들여놓고 좀 정리가 되면 짐들을 옮겨도 좋으련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 걸까.

 

 가스 밸브도 연결되지 않아 두유를 먹고 출근했다. 읍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안 먹던 김밥을 먹게 할 정도로 맛있는 김밥집에서 김밥 먹을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어스름한 아침에 불빛을 반짝이는 김밥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김밥집에 들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을 주문하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책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멍하니 있으니 아저씨 움직임이 보인다. 쌀쌀한 날씨라고 가스불을 켜놓고 김밥을 싸는 아저씨. 아줌마한테 말귀 잘 못 알아듣는다고 혼나기 일쑤인 아저씨. 그런데 아줌마보다 김밥을 더 잘 싸는 아저씨. 아저씨가 하던 단무지 포장을 마저 끝내고 김밥을 기다렸다.

 

 김밥을 먹는데 웬걸,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게다가 이게 뭔가. 여러가지 재료로 푹 우린 육수에 끓인 오뎅국 아닌가. 오뎅에서 냉장고 냄새가 나긴 했지만 국물은 정말 최고였다. 너무 자주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말이지만(굴라쉬 브런치 어디에선가 이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따다.) 오뎅국 맛이 지친 내 맘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먹으면서 닝닝하지 않고 먹고 나서도 깔끔한 오뎅국. 아저씨가 끓여주신 오뎅국. 하, 이 집 수제비도 맛있는데. 그러고 보니 김치랑 깍두기도 직접 담궈서 맛있는데. 그런데 아줌마는 메뉴를 세개로 줄여버렸다지. 손님들이 세명 와서 제각각 세개를 다 시킨다고. 바쁜데 얌체 같이 그런다고. 그땐 아줌마가 참 무서웠는데 언젠가 수제비를 곱절로 더 주셔서 거침없이 친근해졌다.

 

 암튼

 접착제 냄새를 싹 날릴 정도로 든든한 오뎅국을 먹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사랑이 애기들 보고 조금 더 걸어가는데 얼마 전에 이사를 온 누렁 강아지가 보인다. 입 주변이 까매서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가 쫄래쫄래 나를 따라온다. 다른 때 같으면 줄에 묶여서 멍멍이라고 부르면 두발로 서서 아는척을 했는데 오늘은 어떻게 돌아다니는게냐. 멍멍이는 그런 물음 따위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여기저기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다닌다. 멍멍이 집에 거의 도착했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 친구다. 날씨가 추운데 왜 혀까지 내밀고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는거지.

 

 강아지 주인은 강아지 끈이 풀려서 돌아다니다 차에 치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짜증나 죽겠다고 했다. 죽인 개를 치우는 게 귀찮아서인지 복날에 팔아버릴 개가 죽어버려서 속상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쫄랑쫄랑 뛰어다닌다. 요즘도 아침마다 그 강아지를 본다. 혼자 남은 강아지는 전처럼 친구랑 아웅다웅하면서 노는 대신 짧은 끈에 매달려 바둥거린다. 추운 날에는 톱밥이 뿌려진 건물 구석에 코를 박고 있다가 '멍멍이' 이러면 목 아픈줄 모르고 반가워한다.



 
 
2014-03-0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성찬뿐인 해설집을 읽고 한국소설에 쌓인 편견 때문에 이 작품이 별로인건 아닌가란 자책을 했다. 평론가 말처럼 소설은 남성적인 문법을 구사해서 도리어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들여다보는건데 스토리며 탄탄한 구성을 기대한건 무리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게 한낯 치매걸린 노인의 몽상일 뿐이라는데 다른건 없냐고 묻는게 오버였을까. 기억이란 실존을 붙잡는 문장과 기억하지 못함을 상기하는 내용 사이를 보여주는 문체라...

 

 남성적인 문체, 간결한 문장. 그게 다다. 남성적인 문체라는게 단문과 짧은 문단으로 이뤄지는거라면 나도 하겠다. 그 남성적 문체. 김영하가 보여준 고유한 재치와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소설 전 작업 같아서 작가도 조금 쑥쓰럽지 않을까 싶어 작가의 말을 읽는데 아버지 얘기를 한다. 다 읽고나서야 된통 당한거 같은데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한국영화는 오직 한국영화인데 소설은 왜 그들만의 소설이 되는걸까.

 '나가수'가 망한 이유를 한국소설, 문학이 반면교사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이후로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한걸 보면 개선할 의지가 없거나 정말 자신들의 글이 대단하다고 믿거나 소수정예로만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의 피력인 듯.

 

 

 

 

 

 

 

 

 한동안 서재 분위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어느 지점의 김연수, 독특하려고 애쓰지 않는 여성 캐릭터와 김연수 같은(이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 김연수 같다)남자 주인공 때문에 그의 소설이 좋았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었고 한동안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 속 감성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나이 들었는지 김연수가 나이 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하지 못하고 계속 맴도는 느낌이 든다.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기 때문인지 할 얘기가 더 이상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참 소설 제목 같아 헷갈린 '사월의 미, 칠월의 솔'만 읽고 말았다.

 

 

 

 

 

 

 

 

 두권의 소설이 아무 위안도 되지 못하는 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왜 첫 소설이냐고 세번째 소설쯤 되면 첫째 둘째 소설까지 읽을 수 있는데 왜 고작 첫번째 소설이냐고 앙탈을 부리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을 읽을 때도 이랬다. 다음 작품 읽으려고 제목을 메모하고 구해서 읽었는데 이상하게 두번째는 읽히지 않았다. 요나스 요나손은 어떨지 두고봐야겠지만. 

 

 소설은 알란의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며 -소설은 들여다보는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계한 사람들의 면면과 일들의 단순함을 이야기한다. 명쾌한 게 없다고 이도 좋고 저도 좋은게 아니라 거대한 서사 속에서 개인의 의지나 생각은 간단히 생략한다. 그 생략함이 운명론적으로 흐르지 않는 건 책 속에 숨겨진 씽긋 웃게 만드는 구절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일 것이다.

 

 '예쁜 언니는 소비자들 중에는 의학적인 이유로 설탕물 12리터를 들이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논평은 삼갔다. 그런 윤리적인 지적을 하기에는 여기 둘러앉은 사람들보다 자기가 특별히 나을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의 수박은 조금 전의 통닭만큼이나 맛이 기막힌 게 사실이었다.'

 

 이 부분에서 어디서나 거침없이 자신의 (무)식견을 뽑냈던 나는 좀 쑥쓰러워지고 말았다.

 

 

 

 일테면 이런 것.

 

 출근길에 만나는 개의 이름은 사랑이다. 내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돼 사랑이가 애기를 갖더니 얼마 전에 또 이렇게 귀여운 꼬꼬마들을 낳았다. 보들보들 강아지를 매일 가서 보는 건 너무 좋지만 일년도 안 돼 또 아이를 낳는 사랑인 어쩌란 말인가. 시골에선 돈 되라고 강아지를 받는다는데 사랑이 아저씨도 그런게 아닌가. 평소에 아저씨랑 한담을 즐겼는데 수더분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동물학대를 한단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하자 언니는 그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래도 꼬꼬마 강아지는 귀엽고 사랑인 불쌍하고 아저씨에 대한 내 감정은 지랄 맞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저씨랑 얘기하다 사랑이가 동네 건달 개랑 연애하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 다행이다. 사랑이가 알아서 연애했으니까, 하고선 강아지들만 예뻐하면 좋겠지만 사랑이의 삶의 조건, 같은 개이면서 다른 개인 시골 개들을 생각하니 다시 또 착잡해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며칠 전 귤껍질을 버리러 센터 근처 풀밭에 갔다가 정구지 밭을 일구는 아저씨를 봤다. 지난해 부추를 여러번 끊어먹었는데 겨울 되면서 잊혀졌던 곳이다. 아저씨 왜 그러고 계세요. 아저씨는 당신 밭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당신도 몇번 부추를 먹었고 풀이 많으니까 밭을 일굴 뿐이라고 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고 안 해도 아무 문제 없는 일을 점심시간을 쪼개서 한다.

 

 처음 이곳에 내려와 남다른 포부와 열정을 갖고 이것저것 의욕적으로 일을 벌이다 어느날인가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나 지금 왜 이러는거지. 왜 이렇게 의욕적으로 덤비는거지. 선거로 바꿀 수 있는건 없으니까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자, 내가 잘하면 사람들도 같이 잘 할거야. 내 안에 과잉 의욕들을 걷어내고 보니까 다름 아닌 인정욕구가 또아리 트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나만의 의욕으로 되는 일은 자기만족 밖에 없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제자리에서 그냥 사는 사람들, 당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한테 배운다. 일상을 견디거나 즐기지 않고 자신의 당연함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보여준다는 의식이 없어서 더 아름답다. 사랑이네 아저씨가 폐지를 주우면서 바지런하게 사랑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권산이 아버지의 집을 당연히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티 다 내고 소문내면서 하는 일들을 묵묵히 제자리에서 해내는 사람들. 나도 그렇게 당연하게 살고 싶다.

 

 

 

 

 

 

 

 

 

 

 

 

 

  '글쓰기 공작소'의 이만교 말처럼 나는 그저 언젠가 리뷰를 멋지게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서재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만 갖고 사는게 만족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리뷰를 쓰겠다고 포스트잇을 뗐다 붙였다 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그저 이런 책을 내준 권산과 당연한 삶을 살아준 어르신에게 감사한 마음만 간직할 뿐.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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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나는 착한 아이였다. 좋게 말해 평범한거지 삐딱하게 말하면 존재감 없는, 특색 없는 아이였다. 시골학교에서는 그럭저럭 성적이 나왔지만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러던 중 운 좋게 반에서 10등 안에 든 적이 있다. 사람 좋아보이던 담임은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브라보콘을 사주셨다. 담임이 무섭지 않아 반 아이들이 제멋대로였던 반이어서 10등 안에 든 10명은 영웅처럼 반을 구할 책임을 맡았다. 그 후로 10등 안에 든 적이 없어 다시 브라보콘을 먹지는 못했다. 다음 시험에서 성적이 잘 나온 아이들은 또 브라보콘을 먹었을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성적, 스펙, 입시’가 지금처럼 살벌할 정도로 강조되지 않았던 그때에도 성적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아야할지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 잠깐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그런 세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경험 외에는 학교에서 난 대체로 평범한 축에 속했다. 10시까지 명목 뿐인 자율학습을 하기 싫어 ‘튀었다’가 손가락이 가느다란 물리 선생에게 손바닥을 맞은 게 유일한 일탈이었다. 대놓고 자고 대놓고 소란스러워서 애들이 살짝 밀어둔 아이가 있었고 잔다고 선생에게 분필로 맞았던 내가 있었다. 교실 붕괴 전이었지만 따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사이에선 대놓고 무시당하는 선생이 있었고, 과외를 안 받아 ‘그 선생’의 수업이라도 열심히 들어야 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청춘의 입을 통해 청춘 담론의 새로운 시각뿐 아니라 세대론에 대한 질문을 던진 엄기호가 이번에는 교사를 통해 학교를 들여다봤다. 사람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교육문제를 지탄하면서 정작 학교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우리는 학교에 무엇을 바라는걸까. 엄기호는 <우리 교육>과 하자센터, <오늘의 교육>을 오가며 만난 학교가 끔찍했다고 한다. 이 사회 전체가 더 이상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란 진단까지 내릴 정도였다. 교육이란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만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연속적 과정이지만 지금은 낯선걸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 됐다는거다.

 

  저자는 ‘냉소와 비난 사이의 교육은 사회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로 갇혀 있다. 교육과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드는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며 고립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 책은 교사들의 움직임만으로는 학교의 위기, 수업붕괴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인문학적으로 찾아나선다.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해결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그동안 사람들을 계몽하고 신분을 상승 시키는 역할을 상실했다. 배울수록 무지해지고 맹목적이 된다. 학교는 국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과 시장논리에 충실한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관이 됐다. 이제는 신분상승 도구가 아니라 중산층 이상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으로서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학교는 동질적으로 똘똘 뭉친 배타적인 공간이며 타자성을 적대하는 공간이라 왕따와 자살 같은 학교 폭력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진단마저 나온다.

 

  입시교육은 수업붕괴를 초래했다. 공부하는 애들은 전략적으로 챙겨 들을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을 판단한다. 널브러진 애들은 그동안 편한 학생들이었다. 예전에 나처럼 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몸과 교실과 수업이 요구하는 몸이 불일치 되면서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어졌다. ‘착한 학생’은 알려면 많은 수고로움을 끼치는 존재이자 안전관리의 대상으로 전환돼 관리가 필요한 존재로 전환됐다.

 

  자살과 학교폭력이 심해질수록 학교는 학생을 교육하거나 성장시키고 훈육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역할을 떠맡게 됐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은 ‘성적’만이 아니라 ‘마음’이 되었다. 대다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관리자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게 됐다. 학교폭력 담론 이후 제기되는 안전에 대한 강박은 이른바 ‘착한 학생’에 대해서 학교를 그저 ‘육체적 생명’을 돌보는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그렇다면 이런 학교의 역할 변화는 교사와 교무실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교실이 아수라장이 되는 동안 그 문제에 관해 가장 열심히 토론하고 대책을 숙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할 교실은 왜 침묵에 빠졌을까. 예전에 부당하거나 반교육적인 요구를 교무회의 시간에 벌떡 일어나 거부했던 ‘벌떡 교사’들은 요새는 자신의 벌떡이 다른 교사에게 민폐가 될까봐 부담감을 느낀다. 비정규직이나 초임교사에게 그 일이 돌아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론의 장은 진리가 아니라 의견이 존중될 때 살아있는데 벌떡 교사들은 교무실을 토론과 협력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들 자신의 소신을 진리화함으로써 토론 자체를 봉쇄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며 느끼는 무력감은 학생들이 겪고 있는 일이 교사 자신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것일수록 심해진다. 완전히 낯선 존재에게서 느끼는 무력감인 것이다. 이럴 경우 그 교사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동료교사들 뿐이다. 이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함께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들의 대화 주제는 잡무나 성적 같은 기술적인 일들 뿐이다.

 

  수업을 하는 자로서 교사 정체성도 흔들리긴 마찬가지다. 근대의 기획인 자아실현은 ‘내’가 그 어떤 것에도 통제되거나 억압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내 삶을 기회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실험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전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다음 경험을 해석하고 그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것이 경험의 갱신이자 성장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맡은 업무의 기계적인 분담은 교사의 성장을 방해하고 경험을 단절적인 것으로 만든다.

 

  민주화 이후에도 교사가 자기 수업을 기획하지 못하게 된데에는 역설적으로 교사 개개인의 전문성을 중시하면서 책무성을 강조하는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고 한다. 책무성의 강조는 교사의 다양성과 창조성 보장이 아닌 획일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무성은 곧 평가로 연결되고 책임추궁을 당할 개연성을 열어놓기 때문에 누구든 책임질 일을 안 하려는 경향이 팽배해진다.

 

  학생의 성장과 미래에 대해 공동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공동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책무가 강조되면서 무책임한 사회가 돼버렸다. 전시 행정과 책임회피식 책임구성을 학교폭력과 학생의 죽음으로 적나라하게 오점을 드러냈다. 학교는 책무를 안 지려고 사건이 학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고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상담 등의 모든 일을 했다는 증거를 서류로써 보여준다. 학생들에 대해 책임지려는 교사들은 점점 더 바쁘게 되고 바쁜 만큼 ‘독박’을 쓰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흔히들 교사를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직업의 객관적 안정성과는 상관없이 평가를 잘 받지 못하면 교사들도 퇴출될지 모른다는 탈락에 대한 공포가 팽배하다. 이전에 교사의 능력은 오랜시간 축적되는 경험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유연하게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가에 따라 측정된다. 평가기준을 내면화시켜 주체들의 개인 역량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성과사회는 모든 것이 대상화되고 개인이 노력한 결과물로 이해된다. 노동의 성과가 개별화되면서 성과는 돈이 아니라 한 사회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는 방식이 됐다. 성과로 개성이나 자아가 드러나며 성과가 공공성을 대체한다. 성과로 평가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열심히 하려고 나서지 않으며 이는 교사들의 순응으로 나타난다.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으로 귀결된다. 개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취향만 남게 된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집착한다. 교육에 대한 견해 차이는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문화적 차이나 취향의 문제로 순치되어야 한다. 정치적 차이는 토론과 논쟁으로 조정되지만 문화적 차이는 관용과 개성의 존중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실에서는 자신이 하는 질문이 질문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아는 학생만 질문할 수 있다. 교실에서 질문이란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이지,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기회가 아니다. 교실에서 모르는 자, 즉 ‘타자’로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타자성에 근거한다. “선생님,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환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교사들은 다시금 둥그렇게 모여앉아 토론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냉소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다름/차이를 만남과 부딪힘의 상대로 바라봐야 한다. 학생들은 교사를 개별 교사가 아닌 교사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교사 전체를 통해서 만난다. 교사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에 의해 어떤 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그런 학생들을 배제하는 공간임이 보여야 비로소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할 수 있다.

 

  교육현장은 지금 진퇴양난의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 해서는 해결되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 위험해질 뿐이다. 따라서 내재적으로 생산되는 위험을 언어화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압력이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학교와 교육의 위기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런 전체 환경의 한 부분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위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학교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의 운명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유대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유대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찰을 통해 위험을 감지해야 한다. 위험이 새로운 결속과 연대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적극적인 자각과 소통이 필요하다. 위기관리 능력의 회복이란 소통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는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시간과 속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토론과 숙의의 과정을 반기지 않는다. 성과사회로 변모한 학교가 새로운 제도나 대책을 도입할 때마다 위기에 대한 정책 혹은 대안이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킨다. 교사들은 이런 위험이 초래하는 고통을 개인 차원에서 공유하는 것을 넘어 위험에 대해 성찰하고 결속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우정이 정치를 가능하게 하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 삶의, 경험의, 이야기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행된 소위 교육개혁은 교사들을 개별화하고 단절과 자기단속을 심화시켜왔다. 학교는 직급별로 분할되고 신분제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다. 교육개혁은 끊임없이 교단을 ‘진정한 교사의 일’과 ‘그를 보조하는 업무’로 분할하면서 노동을 위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전교조와 교육운동이 ‘진정한 교사의 일’이라는 진정성 정치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진정성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려면 ‘함께 거부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비정규직 교사들은 관리자에게 인격 전체가 구속되고 통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교사에게 잡무가 전가되면서 정치적 결속의 기초가 되는 평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아렌트가 플라톤의 초기 저작을 거론하며 말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해 철저히 논했다는 것,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결과”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결론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대화가 아닌 이런 대화”가 우정의 대화이며, 우정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에 대한 이런 대화로 구축” 된다. 취향을 고유하는 사적인 친밀감으로서의 우정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평등한 이들의 우정이 정치를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학교가 망하더라도 가르치는 교사가 아직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본다.

 

   ‘닥쳐라, 세계화’에서 세계화는 그 진의와 성찰과는 별개로 삶이 글로벌하지 않아 여전히 피부로 와닿지 않고 청춘 담론도 청춘에서 살짝 비껴나 실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취향과 문화적 차이가 아닌 정치를 살리는 것,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는 말에선 현재 상황과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었다.

 

  지금 일하는 곳에는 늘 맛있는 곳, 좋은 곳에 대한 얘기만 하는 분이 있다.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여기에 왜 있는지 정도는 공유하고 각자의 고민을 털어놨으면 하는데 그분과 얘기 할 때면 그게 쉽지 않다.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거나 사적인 영역을 털어놓는게 익숙하지 않다며 배척한달까. 이분은 그렇다치고 다른 분과는 전혀 소통할 맘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전 조직의 경험을 통해 의례적인 관계라도 지속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놓고 몇 번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반응을 접하자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한 사람을 가르치는 정도의 중대함까진 아니지만 주민주도의 활동을 도모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곳에서도 소통이 안 되고 우정을 나누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모니터 속 페이스북 친구들과는 소통하지만 모니터 밖, 전혀 다른 타자들과는 대화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소비와 문화, 취향을 통해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다음에 정치적인걸 얘기하고 싶은걸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사적 친밀감보다 일을 통한 관계가 더 편하고 취향보다 조직의 목적과 자발적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편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엄기호의 책은 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준다. 안개로 꽉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성큼성큼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가 안개에 가려진 사물들을 대면하는 일. 그의 책이 쉽지 않지만 늘 반가운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성폭력에 맞서다 - 사례·담론·전망
이미경 외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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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원하는 몸 되지 않기, 몸을 다르게 쓰기. 그동안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다 생긴 일이야`로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위로하는데 그쳤다면 이 책은 성폭력이 일어나는 판을 바꾸기를, 성폭력 피해자에게 생존자로서 살아가길 부탁한다.


 
 
 

* 처음엔 낙엽인 줄 알았다.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줄 알았다. 떨어진 낙엽이 다시 우수수 나무에 붙는걸 보고서야 그게 낙엽이 아니라 참새라는걸 알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근처 정미소에서 벼를 실어나르다 떨어진 낟알을 주워먹는 거였다. 도로가여서 차가 오면 대장쯤 되는 참새가 신호를 보내는지 한꺼번에 피했다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봐도 미처 차를 피하지 못한 참새가 보였다. 낟알 하나 더 먹거나 잠시 해찰을 했을까, 차가 너무 빨랐을까. 낟알, 많지도 않은 낟알 주위에 죽은 참새 몇 마리가 누워 있다.

 

* 어제 저녁에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기 고라니를 봤다. 차가 오면 피해야하는데 잘 모르는 아기 고라니는 불빛을 보고 도로로 나왔다. 다행히 차에 부딪히지 않았다. 놀랬는지 버스 근처에 웅크리고 있어 운전기사가 클랙숀을 한번 눌렀다. 고라니는 폴짝폴짝 뛰어서 풀숲으로 달려갔다. 아기 고라니가 다시는 불빛을 보고 도로가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차를 타고 다니다 죽은 동물들을 본다. 동물들은 겨울이라 먹이를 찾아서 내려오거나 이동하다 차에 치인다. 아침 저녁으로 눈 맞추며 ‘예쁘다, 예쁘다’ 했던 강아지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 자리에는 빈집이 덩그러니 남겨져있고 빈 그릇이 엎어져 있다. 부디 목줄이 너무 짧아서 답답하지 않은 곳으로 갔으면. 추운 겨울을 지내느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우리 개들과 몇주 동안 산책이라고 할만한 것 하나 하지 못했다.

 

* 다른 집 닭 밥을 챙겨주고 있다. 옥수수 사료는 아닌데 싶지만 닭이 뭘 먹는지 몰라 사료만 주다가 왕겨를 깔아주면 좋다, 야채를 먹는다는데란 얘기를 듣고 추수하고 남은 배추도 뜯고 왕겨 대신 잡초 마른걸 넣어주었다. 잡초를 부리고 옮겨놓고 배추도 열심히 먹는다. 닭들이 마당에서 땅 파먹고 풀 뜯어먹고 지내면 좋으련만.

 

 

* 

 

‘내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을 읽다 과연 이즈음 내 영혼이 깨어난 순간은 언제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생기로 볼이 빨갛게 물들고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 추파를 던지며 잃을 것 하나 없는 사람인척 하거나 뭔가에 몰두해 끼니를 잊는 일. 곰곰이 생각하니 요즘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인척 하거나 굳이 열정을 가장하는 것보다 30대의 나다움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20대 때는 종잡을 수 없는 게 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고 나를 채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20대를 보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회피였고 언젠가 댓가를 치루기 위해 유예된 고민이었다. c와 얘기를 하다 지금의 나다움을 과장해서 무례하고 서툰걸 나답다고 느끼는건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분명한 나다움은 찾기 힘들겠지만 ‘나’는 누구인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내 영혼은 그렇게 깨울 것.

 

* 하나의 페이퍼로 쓸 얘기들을 뭉쳐놓으니 감정도 상황도 주제도 통하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 지난번 워크숍 때 눈이 와서 일정이 늦춰졌다. 따뜻한 방안에서 뒹글거리려다 오랜만에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가 눈을 뭉쳐서 굴렸다. 맨손으로 눈을 뭉치는 분이 있는가하면 자기 장갑 ‘맨손’에게 주고 눈을 뭉치는 분도 있었다. 왜 이렇게 이타적이야. 자갈이 자꾸 달라붙었지만 얼추 눈사람 모양을 만들었다. 숯과 나뭇가지로 이목구비를 만들어야는데 보이지 않는다. 코를 둥글게 깎는가하면 입을 구멍처럼 뚫는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재료를 마련해 쓱싹쓱싹 만든 눈사람.

 

 대부분 반응이 '와, 눈사람이다.'가 아니라  '저게 뭐야.'란 게 함정.

 

 

 

 



 
 
다락방 2013-12-26 10:24   댓글달기 | URL
눈사람은 입에 지푸라기를 물고 있으니 솔직히 좀 당나귀 스럽네요. ㅋㅋㅋㅋㅋ

Arch 2013-12-27 13:22   URL
코가 너무 주먹코예요. 당나귀, 진짜 그렇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