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머리 위에 꼿꼿이 박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술처럼 풍경이 색을 입는다.

밤길을 산책하며 부드러운 공기 속을 거닐다 갑자기 진공 상태로 던져진 것처럼 눈이 뻑뻑하다.

서울 하늘엔 스모그만 가득하단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하늘은 맑고 전날 내린 비로 나무들은 싱그럽게 반짝인다.

싱그러움은 내 몸까지 전염시켜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연못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자 무릎이 당겼다.

녹색 타일이 깔린 인라인 운동장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제법 서늘해진 바람

손바닥한 나무 그늘 아래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고 모든 것과 상관없어진 기분

눈을 뜨자 세상은 다시금 환해졌다.

느닷없이 밝아진 세상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었다.

분홍색 옷차림에 분홍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소녀와 아빠

여자 아인 몇번 인라인을 타봤는지 제법 자세가 나왔지만 영 불안한지 제 체중을 아빠에게 실었다.

허리를 굽히고 딸의 손을 잡아주는 아빠.

격려를 하다 약 올리다 한발짝 움직일 때면 칭찬을 해주다,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내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쉬던 꼬마가 날 힐끔거리며 쳐다보다 절대로 나 때문에 그런건 아니란 포즈로 엉거주춤 일어나 자리를 떴다.

 

여자 아이는 덥석 아빠를 끌어안고 더는 못하겠다며 투정을 부린다.

가끔 나도 덥석 네 시선을 붙잡고 투정을 부리고 싶다.

 

2008년 가을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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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수첩에 귀여운 그림 잔뜩 그려서 아기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헌데 나는 그림치인걸.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고 아기자기 귀여운 그림책이 필요해.

이것저것 찾다가 전에 한번 보고 여러가지 그림을 쉽게 그려본 게 생각난 '그려봐, 볼펜으로'

 

 

 

 

 

 

 

 

 

 

 

 

 

그래, 이거야. 사자 사자. 근 몇년만에 온라인에서 책을 사려고 폼을 잡는데 중고책이 보인다.

배송비가 있으니 판매자의 다른 물품을 보고 다시 돌아와 새 책이 좋다며 합리화하길 한시간 넘게.

혹시 몰라 근처 중고매장을 검색했더니 있다! 그럼 이번 주말에 서점에 가서 사는거야, 까지 정리를 한 게 어제 12시 즈음.

책이 꽂혀있는 곳까지 메모를 하고 절판된 김영하의 여행자 도쿄까지 챙기는 센스를 장착했는데

오늘 무심코 들은 이랑의 노래가 너무너무 좋은거다. 이랑의 노래는 CD가 아니라 음원으로 나왔는데 그게 하필 책이다. 그럼 가만 보자. 이것까지 사려면 결국 온리인으로 주문해야하네. 에잇! 자꾸 5만원이 걸려 도서관에 신청하려던 책들까지 장바구니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다. 내일 아기 데리고 외출도 하고 이제 곧 자야하는데 한번 당겨진 불은 꺼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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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들은 다른 사람을 보면 낯을 가리고 엄마를 찾는데 우리 아기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덥석 안긴다. 사람들은 아기보고 순하고 낯을 안 가리나보다란 말을 한다. 왠지 애가 탄다. 아기는 자신을 안은 새로운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적응이 됐는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고 한다. 옆에 있던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비웠는데 신경도 안 쓴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아기를 안고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있다. 아기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면 아기는 되려 내게 무슨 일 있었냐고 반문하듯 말끔한 얼굴로 방실방실 웃는다.

 

 

  아기는 생후 6개월부터 낯가림을 시작하고 주양육자와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아기는 낯가림은 커녕 주양육자인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한번은 이모랑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니까 문 앞까지 쫓아가 서럽게 울기도 했다. 나와 아이 사이의 애착이 문제란 생각이 든 건 그때쯤이었다. 다른 주양육자들이 아기가 자신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곤혹스러울 때 나는 정반대 고민을 했다. 처절한 인정투쟁의 시작이었다. 일부러 아기를 떨쳐놓고 밖에 나가는 척 하거나 다른 사람이 안으려고 하면 엄마 품이 좋았지란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기는 엄마의 절실한 바람과 다르게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잘 지냈다.

 

 

  그렇게 붕 뜬 애착을 유지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사람과 노는 아기 곁에 무심코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가 있는걸 확인하고 안심하는 아기를 봤다. 자세히 보니 내가 없는 곳에서는 ‘진짜 웃음’을 짓지 않고 행동도 조금 어색한게 눈에 띄었다. 엄마를 애타게 찾는 것만 애착이 아니라 어렴풋한 필요도 애착이란걸 조금씩 알게 됐다. 암,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만 애착이면 내가 너무 한스럽지. 발달의 시기는 있지만 아기마다 차이가 있다는걸 매번 되새김해야만 한다. 뒤집기 시기가 늦다고 신경쓰다 때가 되니 아기 스스로 뒤집던게 얼마나 됐나고 말이다.

 

 

  이렇게만 끝나면 기승전이 되는데 아직 결이 남았다. 앞에 글을 쓴 게 9월 즈음인데 돌이 다 되면서 조금씩 인지능력이 생기고 품안에 폭 안기기 시작한 아이는 맹렬하게 엄마를 찾는다. 놀다가 심심하면 음마음마, 조금 발을 삐끗해도 음마, 엄마가 안 보여도 음마, 계속 엄마를 찾는다. 화장실 문을 열고 소변을 보고 있어도 엄마를 찾는다. 숨바꼭질도 아닌데 계속 나를 찾고 아무것도 못하고 자기 옆에만 있으라고 한다. 자기 혼자 놀 때는 나를 껴주지도 않으면서 필요할 때는 곧 죽어도 꼭 옆에 있으란다. 흥칫뿡. 비로소? 애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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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혼자 활동을 하고?

- 아니요. 둘이.

- 네? 그럼 아기는?

- 저는 아기 돌보는 활동을 하죠.

 

  아기를 낳고 아기를 돌보면서 가끔 신랑만 경제활동을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말귀 못알아듣는 이에게는 수긍을, 알만한 사람이 그러면 공격적으로 '나는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경제 활동이지만 충분히 가치있는 '일'을 한다'고 얘기한다. 무얼 그리 공격적으로까지 얘기하나 싶고 나 혼자 자신하면 되는데 자꾸 알아먹게 알려주고 싶다. 돌봄/가사 노동도 인정해달라고 말이다.

 

 물론 아기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일의 양을 정하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사람들에게 감정노동을 하지 않고 실적이나 인정에 목맬 필요도 없다. 아기의 감정과 요구를 들여다보고 집안일도 요령껏 할 수 있다. 맞벌이 할 때와 다르게 집안일 구석구석 눈에 거슬리는 게 보이긴 하지만 대충 뭉개고 있어도 듣기 싫은 소리할 상사도 없다. 변수는 많지만 재량껏 실력발휘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직장에 다녔다면 하지 못했을 취미생활도 할 수 있다. 물론 아기와 함께.

 

 돌봄/가사 노동은 일의 특성상 반복적이다. 시지포스의 형벌 같다고 하면 너무 가혹할까. 매일 기저귀 빨래를 하고 적성에 맞지 않은 요리를 해야 한다. 한창 기어다니는 아기 손에 집안 먼지가 덕지덕지 붙는걸 보지 않으려면 물걸레질은 기본이고 아기가 따라오는걸 피해 청소기도 돌려야 한다. 이유식을 만들고 우유통을 소독한다. 아기를 씻겼는데 똥을 싸면 또 씻긴다. 장염에 걸렸을 때는 시간 단위로 씻겼다. 의무는 당연하고 현실적인데 보람은 추상적이고 항상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고 인식하고 맘을 먹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

 

 돌봄/가사 영역에는 살림을 잘한다거나 아기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식으로 성공적인 롤모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많긴 하지만. 개인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자식에게만 올인하면 공허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여성이 하는 일이라 가치는 저평가 되었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대기조처럼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더 강하게 ‘나도 활동을 하고 있다’고 어금니 깨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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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활동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주 힘든 활동이지요. 갓난 아기일 때는 엄마의 수면시간이 보장되지 않잖아요 ㅠㅠ
저는 아치를 응원합니다.

Arch 2016-08-19 22:44   좋아요 0 | URL
아구 감사합니다!
다락방처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막 설명해야하는 고단함이 있죠. ㅋ
 

 영화관에 다녀왔다. 동네에 있는 영화관이라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아기를 두고 영화를 보러 온 걸 놀랍게 생각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말한다.

아는 사람의 남자: 얼마나 영화가 보고 싶었으면

나: 가끔 보러 오는데요.

아는 사람: 혼자 오진 않았겠지?

나: 혼자 왔는데요.

 아기 아빠가 한밤중에 영화를 보러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거면서. 흥칫뿡!

 

 하정우와 배두나에 '끝까지 간다' 감독의 영화라 기대를 했다. 왠지 가다만 느낌. 끝까지 간다가 편집과 속도감으로 밀어부쳤다면 터널은 봉준호처럼 주도면밀하게 사회풍자를 하지 않고 생존으로 밀어부치지도 않았다. 게다가 끝은 허무했다. 영화 보기 전에 아기 아빠가 그거 다 꿈이라면서 초를 치는 바람에 어디 언제 꿈에서 깨나 생각하느라 영화의 리듬감도 놓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로 재난영화는 영화로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기대가 커서인지 실망스러웠다.

 

 집에 와보니 아기랑 아기 아빠는 잠들어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나니 공기가 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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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는 게 몇 시간이나 된다고 그걸 가지고 놀란대요들? -_-

Arch 2016-08-19 22:41   좋아요 0 | URL
ㅋㅋ 더 놀랄 일도 많은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