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이 있어 출근해놓고 알라딘 페이퍼창을 열었다. 내일로 일을 미루면 월요일 회의는 형편없어질테고, 형편없는 회의를 고민없는 참석자 탓으로 돌리고 까마귀 먹은 아치마냥 왜 회의가 제대로 안 되는거냐며 고민을 할 것이다. 오늘 일을 다 마무리해서 회의가 계획한대로 진행되지 못한 책임도 내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맘의 준비를 해야겠지만 하, 말랑말랑한 노랫소리도 들리고 5시간 내내 끙끙대며 원고를 쓰고 어쩌고 하느라 뭔가 툭 좀 풀어졌으면 좋겠어서  다짐에 딴청부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 엊그제 좋은 공연 이야기를 해놓고 소소한 진행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원고를 썼다. 담당 기자님과 얘기를 하다보니 기획을 추진한 공무원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이란 얘기를 들었고 지역사회에서 뭔가 새로운걸 해보려면 담당 공무원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애를 써야한다는 사정도 들었다. 나는 뭐, 그런 일 예사로 하는데 싶다가도 행여 내 글에 그 분이 맘 상할까봐, 그래서 에잇 이딴 공연 다 필요없이 다른 직원들처럼 할테야라고 맘 먹을까 기사를 수정해서 다시 보낸다고 했더니 벌써 수정했다는 기자님.

 

 기자님도 자신이 쓰는 기사에 따라 누가 뭐라고 할까, 내가 제대로 보는걸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배짱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다. 배짱을 남용하면 함부로 객관을 들이미는 사람이 되겠지만 내가 보기에 기자님은 그래보이지 않는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일 정도로 유연하고 어떻게 그 나이까지 여전히 꼿꼿할까 싶을 정도로 성격이 곧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여러 의견을 듣고 수용해서 판단하는 면도 있다. 다만 나와 비슷하게 사회성이 좀 빠지는 면이좀 있다. 하긴 여기서 사회성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회성이 좋아 사회가 편했으면 굳이 시골로 안 들어왔을거란 기자님 얘기에 묘하게 설득됐다.

 

 

* 오늘의 성과

 아침부터 공사를 한다고 차를 빼고 어쩌고 난리도 아니었다. 오늘 방문객들이 좀 많았지만 대충 차를 다 뺐는데 한 차가 안 빠져서 공사하는 분들이 애를 먹었다. 몇번 강당을 찾아갔는데 번번히 실패만 하다 차에 적힌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당연히 없는 번호라고 나와서 010으로 바꾸고 1부터 9까지 수를 넣어서 전화를 했다. 4,6,9를 넣다 안 되겠어 1부터 천천히 시작했는데 3에서 받았다. 강의듣다 내려오는 분께 한참 찾았다며 칭얼거렸는데 다행스럽고 뿌듯해선지 콧소리가 커졌다.

 

* 어제 딴 지역 축제 구경을 갔다. 여느 축제와 다를바 없었지만 오밀조밀한 기획이 돋보였다. 특히 동물농장이라고 꾸려놓고 대충 동물들만 데려다놓는 게 아니라 볏짚도 깔고 왕겨도 갖다놓고 하는 등 여러모로 신경쓴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토끼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보들보들 예뻤는데 풀까지 오물거리니 완전 꺅꺅이었고, 뽀송뽀송 병아리들도 너무 귀여웠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만지고 싶어하고 급기야 만지고 털썩 놓는걸 보고 '그건 병아리야!'라고 막 혼내고 싶었다.

 

 새끼 멍멍이와 새끼 고양이가 같이 있는 우리에서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새끼 멍멍이는 놀고 싶고 까불고 싶어서 고양이들이 움직이면 따라다니고 발로 장난을 치는데 새끼 고양이들은 히스테리한 남자처럼 입을 악 벌리며 공격태세를 취했다. 멍멍이는 자다 일어난 아치처럼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고 고양이는 슬그머니 움직였다. 풀이 죽은 멍멍이가 가만히 있다 고양이가 빠르게 움직이는걸 보고 또 달려들어 같이 놀자고 했다. 고양이는 뮝미 표정으로 시큰둥했다 멍멍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다시 '이것이!'란 표정으로 멍멍이를 혼쭐냈다. 잠깐 있었는데 이 과정이 3번은 반복됐다.

 

 

* 이 페이퍼를 쓰면서 가장 걸린건 내용보다 문장이었다.

이오덕 선생님이 '예끼'하면서 혼낼 것 같은 수동형, 피동형 문장들과 호응이 잘 맞지 않은 말들.

어디에선가 이오덕 선생님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하면 좋다고해서 언제나 그렇듯 '이것만 읽으면 글을 잘 쓸거야, 노래를 잘할거야, 그림을 잘 그릴거야' 최면에 휩싸여 사놓기만 한 책.

 

  긴장을 풀려고 쓴 글이었는데 다시 긴장된다.

왜 문장은 쓸수록 나아지지 않는가.

 



 
 
 

* 하우스콘서트 서울기타콰이엇 공연을 봤다. 무대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 자체도 신선했고 기타 주법이며 손가락 움직임을 눈 앞에서 지켜보니 신기했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기타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레미송에 신이 나서 예전에 조카랑 외웠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자작곡의 제목만으로 전해지는 음악 분위기와 감정들을 느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획과 공연이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 시골은 문화소외 지역이라고 하지만 문화가 꼭 공연만 있는건 아니라 그동안은 적적함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자체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어슷거리는 이야기들이 문화라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 하는 일이 재능을 가진 분들을 접하고 함께 궁리하는 일이라 내 경우에는 오히려 도시에서보다 문화가 풍족해졌다. 게다가 흔한 말로 책 몇권은 됨직한 사연을 가진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니 부족한건 세렴됨이요, 아쉬운 건 주류의 문화 같은 것 정도였다. 오랜만에 흔히 문화란 말에서 떠올리는 정형화된 공연을 접하니 그 나름대로 즐거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a의 핸드폰에서 가사를 찾아내 도레미송을 불렀다. '도'는 암사슴~ 레는 떨어지는 햇살, a가 부끄러워 저만치 도망쳤다.

 

 

                           야옹

 

* 워크숍을 빙자한 술자리에서 기타를 좀 칠줄 아는 사람이 기타를 집어들었다. 연가나 바위섬 같은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탁했는데 맨 나오는게 김광석 노래였다. 감정에 심취한 연주자의 '서른 즈음에'가 나왔다. 잘 부르는 노래도 아니었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툭, 눈물이 났다. 나는 내가 청춘이고, 내 청춘이 조금씩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나이는 몇인지 알되(가끔 까먹기도 하지만) 별다른 인식을 하면서 살지 않았다. 어려보인다거나 늙어보인다는 남들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흘렸다. '나는 나'라는 것보다 무감각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나이답지 않다거나, 나이보다 어쩌고란 덧붙이는 말에 우쭐한적은 있었지만 역시 무감했다.

 

 나이가 들든 하루하루 해내야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잘하고 싶은 맘, 조금씩 아픈 어깨, 뭐 이런 것. 그래서 '서른 즈음에'의 어떤 것이 이렇게 맘을 아프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무감하게 살아도 되는지, 이대로도 족한지에 이르자 다시  툭, 눈물이 나왔다. '기다려줘'를 목터져라 부르는 사람에게 왜 시간을 주지 않고 다그쳤는지도 생각했다. '일어나'란 노래가 나오자 부흥회처럼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런 결론이 필요하지 않은 술자리에서 나라 잃은 백성들처럼(이 표현은 짠하면서 적절하다) 먹고 마셨다. 

 

 

 

 

 *

 

 

 

 

 

 

 

 

 

 

 

 

 

 어깨가 아팠다. 운동을 하거나 병원 가는 대신 책을 집어들었다. 수술과 물리치료로 통증을 치료하는데 문제의식을 갖은 의사가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돌볼 수 있다는 입장에서 쓴 책. 자신의 세계에 빠져 글을 쓰거나 강압적이지 않게 몸의 원리와 통증의 원인을 다뤘다. 이 책을 읽는다고 단박에 아픈 어깨와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나은 건 아니다. 요가를 시작했고 자기 전후로 스트레칭을 한다. 30대가 넘어서면서 안 아픈데 빼놓고 다 아프다. 20대 때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바 없음에도 왠지 그 시절 젊은 몸에 대한 아련함 같은 게 생기는 계절이다.

 

 

* 평상에서 까치발을 해가며 짖는 멍멍이.

시골에는 멍멍이가 많다. 멍멍이들은 좁은 철장에 갇혀있거나 짧은 끈에 묶여있다. 며칠동안 밥을 안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초췌한 멍멍이도 지 주인이 나타나면 꼬리가 안 보일 정도로 흔들어댄다. 안쓰럽고 속상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속상하고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 오늘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슬슬 단풍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요즘 내가 일하는 곳에서 컨설팅을 받는데 모든 것을 수치화한 데이터를 갖고 있어야 정보로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감각적으로 단풍이 조금씩 들기 시작한다는 말보다 전체 산의 20%가 단풍이 될 때부터 단풍철이란 수치화된 정보. 좋아하는 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역량이 자라는 것이고 관계 속에서 나를 투영하고 부딪히면서 쌓아가는 건 성장이라고. 자꾸 일로 우회하는 건 관계맺음의 고단하고 피곤한 과정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일생의 목표가 성장인 나는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침묵한다. 대화할수록 이해한다기보다 오해한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의 말이 먼저다. 자신이 처음 갖은 씨앗 생각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만날수록 답이 안 나오지만 이렇게 만나고 사귀면서 조금씩 서로가 할 수 있는 것, 양보되지 않는 부분등을 파악한다. 어렸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거나 고민하기보다 혼자 있길 좋아해서 여전히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혼자 심각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 상처받는다. 하지만 첫 마음, 이거 하나 믿고 계속 밀고간다. 그리고 조금씩 재미있다.

 

 

 



 
 
뷰리풀말미잘 2014-09-26 13:40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아치님 페이퍼를 그냥 넘어갈 수 없지. ㅎㅎ 구텐탁! 글도 마을도 아름답군요.

다락방 2014-09-26 20:14   댓글달기 | URL
가끔 소식 전해줘요 아치.

Arch 2014-09-27 11:01   댓글달기 | URL
자주 소식 전할게요. 일기 대신 페이퍼 모토로!
 

  출퇴근 길에 마주쳤던 개의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아’라고 부르면 눈꼽이 잔뜩 낀 얼굴을 내밀며 꼬리를 흔든다. 사랑이는 아이들을 네 번 낳은 베테랑 엄마고 함부로 사람들을 타고 오르거나 무턱대로 짖지 않는 점잖은 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가 있던 자리에는 흙과 돌이 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주인 아저씨는 군에서 공사를 한다고 사랑이가 살던 곳을 비워줘야 했단다. 아저씨 땅이 아니라 군 땅이니 어떻게 할 수 없긴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나게 큰 흙산을 만들어버렸을 때는 무척 놀랐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언뜻 본 공사 안내 표지판에는 물을 끌어올리는 공사를 진행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보다 쾌적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었다.

 

  과연 그 물을 끌어올려 전기세 들여가며 분수를 돌리고 밤에는 촌스러운 조명을 밝힌다고 관광객이 올까? 취지부터 잘못됐다. 언젠가 지역 경제의 중요성에 관한 강의에서 춘천 닭갈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춘천에는 닭갈비가 유명하다. 맛있기도 하지만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관광객은 한때지만 그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야만 가게도 영업이 되고 맛도 유지가 되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지 않고 밖을 향한 관광을 위한 공사란 첫걸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원래 계획한 것이니 그냥 밀어붙여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공무원은 주민 의견을 모아서 집행할 뿐인데 주민들 뜻과 상반되거나 무리한 일로 예산을 써도 책임지는 일이 없다. 계획이 방만해지고 무책임해지는 일이 허다하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넘겨짚는 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무모함과 방식의 야만성, 성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라면 넘겨짚는 얘기가 그리 억지만은 아닐 것 같다.

 

  군의 땅을 무단점유한 아저씨가 권리를 행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저씨가 방귀 꽤나 뀌는 지역 유지였다면? 지역 유지가 아니어도 한가닥 성질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랬더라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했을까 싶다. 물론 이건 ‘떼쓰기’ 밖에 안 된다. 옳은 일도 아니고 추천할 방법도 아니다. 하지만 왜 국가권력은 이렇게 떼쓰기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행사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사를 간 사랑이는 낯선 환경에 많이 긴장한다고 들었다. 밤마다 늑대처럼 구슬피 울며 주인 아저씨를 속상하게 한다. 아저씨는 주변에서 개 울음소리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개를 치워달라는 얘기가 있다며 혹시 사랑이를 키울만한 곳이 없는지 묻는다. 그럴만한 장소가 없어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다.



 
 
 

 한달 전에 이사를 했다. 도배 바르고 장판 까는 것만 끝낸 상태에서 가구 없이 며칠을 집에서 지냈다. 장판을 바닥에 붙이려고 쓴 접착제 냄새에 머리가 띵하고 집은 여전히 낯설었다. 전기매트에서 눈을 뜬 아침은 우중충했다. 왜 나는 늘 어떤 계획도 계획일 뿐이란 각오로 사는걸까. 가구 들여놓고 좀 정리가 되면 짐들을 옮겨도 좋으련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 걸까.

 

 가스 밸브도 연결되지 않아 두유를 먹고 출근했다. 읍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안 먹던 김밥을 먹게 할 정도로 맛있는 김밥집에서 김밥 먹을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어스름한 아침에 불빛을 반짝이는 김밥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김밥집에 들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을 주문하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책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멍하니 있으니 아저씨 움직임이 보인다. 쌀쌀한 날씨라고 가스불을 켜놓고 김밥을 싸는 아저씨. 아줌마한테 말귀 잘 못 알아듣는다고 혼나기 일쑤인 아저씨. 그런데 아줌마보다 김밥을 더 잘 싸는 아저씨. 아저씨가 하던 단무지 포장을 마저 끝내고 김밥을 기다렸다.

 

 김밥을 먹는데 웬걸,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게다가 이게 뭔가. 여러가지 재료로 푹 우린 육수에 끓인 오뎅국 아닌가. 오뎅에서 냉장고 냄새가 나긴 했지만 국물은 정말 최고였다. 너무 자주 써먹어서 너덜너덜해진 말이지만(굴라쉬 브런치 어디에선가 이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따다.) 오뎅국 맛이 지친 내 맘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먹으면서 닝닝하지 않고 먹고 나서도 깔끔한 오뎅국. 아저씨가 끓여주신 오뎅국. 하, 이 집 수제비도 맛있는데. 그러고 보니 김치랑 깍두기도 직접 담궈서 맛있는데. 그런데 아줌마는 메뉴를 세개로 줄여버렸다지. 손님들이 세명 와서 제각각 세개를 다 시킨다고. 바쁜데 얌체 같이 그런다고. 그땐 아줌마가 참 무서웠는데 언젠가 수제비를 곱절로 더 주셔서 거침없이 친근해졌다.

 

 암튼

 접착제 냄새를 싹 날릴 정도로 든든한 오뎅국을 먹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사랑이 애기들 보고 조금 더 걸어가는데 얼마 전에 이사를 온 누렁 강아지가 보인다. 입 주변이 까매서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가 쫄래쫄래 나를 따라온다. 다른 때 같으면 줄에 묶여서 멍멍이라고 부르면 두발로 서서 아는척을 했는데 오늘은 어떻게 돌아다니는게냐. 멍멍이는 그런 물음 따위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여기저기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다닌다. 멍멍이 집에 거의 도착했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 친구다. 날씨가 추운데 왜 혀까지 내밀고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는거지.

 

 강아지 주인은 강아지 끈이 풀려서 돌아다니다 차에 치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짜증나 죽겠다고 했다. 죽인 개를 치우는 게 귀찮아서인지 복날에 팔아버릴 개가 죽어버려서 속상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수염난 것처럼 생긴 강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쫄랑쫄랑 뛰어다닌다. 요즘도 아침마다 그 강아지를 본다. 혼자 남은 강아지는 전처럼 친구랑 아웅다웅하면서 노는 대신 짧은 끈에 매달려 바둥거린다. 추운 날에는 톱밥이 뿌려진 건물 구석에 코를 박고 있다가 '멍멍이' 이러면 목 아픈줄 모르고 반가워한다.



 
 
2014-03-0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성찬뿐인 해설집을 읽고 한국소설에 쌓인 편견 때문에 이 작품이 별로인건 아닌가란 자책을 했다. 평론가 말처럼 소설은 남성적인 문법을 구사해서 도리어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들여다보는건데 스토리며 탄탄한 구성을 기대한건 무리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게 한낯 치매걸린 노인의 몽상일 뿐이라는데 다른건 없냐고 묻는게 오버였을까. 기억이란 실존을 붙잡는 문장과 기억하지 못함을 상기하는 내용 사이를 보여주는 문체라...

 

 남성적인 문체, 간결한 문장. 그게 다다. 남성적인 문체라는게 단문과 짧은 문단으로 이뤄지는거라면 나도 하겠다. 그 남성적 문체. 김영하가 보여준 고유한 재치와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소설 전 작업 같아서 작가도 조금 쑥쓰럽지 않을까 싶어 작가의 말을 읽는데 아버지 얘기를 한다. 다 읽고나서야 된통 당한거 같은데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한국영화는 오직 한국영화인데 소설은 왜 그들만의 소설이 되는걸까.

 '나가수'가 망한 이유를 한국소설, 문학이 반면교사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이후로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한걸 보면 개선할 의지가 없거나 정말 자신들의 글이 대단하다고 믿거나 소수정예로만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의 피력인 듯.

 

 

 

 

 

 

 

 

 한동안 서재 분위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어느 지점의 김연수, 독특하려고 애쓰지 않는 여성 캐릭터와 김연수 같은(이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 김연수 같다)남자 주인공 때문에 그의 소설이 좋았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었고 한동안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 속 감성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나이 들었는지 김연수가 나이 들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하지 못하고 계속 맴도는 느낌이 든다.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기 때문인지 할 얘기가 더 이상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참 소설 제목 같아 헷갈린 '사월의 미, 칠월의 솔'만 읽고 말았다.

 

 

 

 

 

 

 

 

 두권의 소설이 아무 위안도 되지 못하는 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집어 들었다. 이 책,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왜 첫 소설이냐고 세번째 소설쯤 되면 첫째 둘째 소설까지 읽을 수 있는데 왜 고작 첫번째 소설이냐고 앙탈을 부리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을 읽을 때도 이랬다. 다음 작품 읽으려고 제목을 메모하고 구해서 읽었는데 이상하게 두번째는 읽히지 않았다. 요나스 요나손은 어떨지 두고봐야겠지만. 

 

 소설은 알란의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며 -소설은 들여다보는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계한 사람들의 면면과 일들의 단순함을 이야기한다. 명쾌한 게 없다고 이도 좋고 저도 좋은게 아니라 거대한 서사 속에서 개인의 의지나 생각은 간단히 생략한다. 그 생략함이 운명론적으로 흐르지 않는 건 책 속에 숨겨진 씽긋 웃게 만드는 구절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일 것이다.

 

 '예쁜 언니는 소비자들 중에는 의학적인 이유로 설탕물 12리터를 들이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논평은 삼갔다. 그런 윤리적인 지적을 하기에는 여기 둘러앉은 사람들보다 자기가 특별히 나을게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제의 수박은 조금 전의 통닭만큼이나 맛이 기막힌 게 사실이었다.'

 

 이 부분에서 어디서나 거침없이 자신의 (무)식견을 뽑냈던 나는 좀 쑥쓰러워지고 말았다.

 

 

 

 일테면 이런 것.

 

 출근길에 만나는 개의 이름은 사랑이다. 내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돼 사랑이가 애기를 갖더니 얼마 전에 또 이렇게 귀여운 꼬꼬마들을 낳았다. 보들보들 강아지를 매일 가서 보는 건 너무 좋지만 일년도 안 돼 또 아이를 낳는 사랑인 어쩌란 말인가. 시골에선 돈 되라고 강아지를 받는다는데 사랑이 아저씨도 그런게 아닌가. 평소에 아저씨랑 한담을 즐겼는데 수더분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동물학대를 한단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하자 언니는 그 사람을 내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래도 꼬꼬마 강아지는 귀엽고 사랑인 불쌍하고 아저씨에 대한 내 감정은 지랄 맞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저씨랑 얘기하다 사랑이가 동네 건달 개랑 연애하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 다행이다. 사랑이가 알아서 연애했으니까, 하고선 강아지들만 예뻐하면 좋겠지만 사랑이의 삶의 조건, 같은 개이면서 다른 개인 시골 개들을 생각하니 다시 또 착잡해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며칠 전 귤껍질을 버리러 센터 근처 풀밭에 갔다가 정구지 밭을 일구는 아저씨를 봤다. 지난해 부추를 여러번 끊어먹었는데 겨울 되면서 잊혀졌던 곳이다. 아저씨 왜 그러고 계세요. 아저씨는 당신 밭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당신도 몇번 부추를 먹었고 풀이 많으니까 밭을 일굴 뿐이라고 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고 안 해도 아무 문제 없는 일을 점심시간을 쪼개서 한다.

 

 처음 이곳에 내려와 남다른 포부와 열정을 갖고 이것저것 의욕적으로 일을 벌이다 어느날인가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나 지금 왜 이러는거지. 왜 이렇게 의욕적으로 덤비는거지. 선거로 바꿀 수 있는건 없으니까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자, 내가 잘하면 사람들도 같이 잘 할거야. 내 안에 과잉 의욕들을 걷어내고 보니까 다름 아닌 인정욕구가 또아리 트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나만의 의욕으로 되는 일은 자기만족 밖에 없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묵묵히 제자리에서 그냥 사는 사람들, 당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한테 배운다. 일상을 견디거나 즐기지 않고 자신의 당연함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보여준다는 의식이 없어서 더 아름답다. 사랑이네 아저씨가 폐지를 주우면서 바지런하게 사랑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권산이 아버지의 집을 당연히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티 다 내고 소문내면서 하는 일들을 묵묵히 제자리에서 해내는 사람들. 나도 그렇게 당연하게 살고 싶다.

 

 

 

 

 

 

 

 

 

 

 

 

 

  '글쓰기 공작소'의 이만교 말처럼 나는 그저 언젠가 리뷰를 멋지게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서재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만 갖고 사는게 만족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리뷰를 쓰겠다고 포스트잇을 뗐다 붙였다 했지만 아직 리뷰를 쓰지 못했다. 그저 이런 책을 내준 권산과 당연한 삶을 살아준 어르신에게 감사한 마음만 간직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