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생필품이 없는 게 참 많다. 빗자루, 쓰레받기, 전기밥솥 이런 것들인데, 주변인들은 어찌 그런 것도 안갖추고 사는지 늘 답답해한다. 공산품은 본질적으로 쓰레기가 된다는 베이스에 더해, 그런 소소한 일상용품들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물건이 없어서다. 특히 요즘 전기밥솥은 왜 그리 요란하고 대단한지, 질색이다. 전자렌지, 김치냉장고도 없는 우리 살림을 못마땅해하시는 시어머님의 정신건강을 위해 전기밥솥은 하나 장만했는데, 불과 5년이 안되었다.

 

책도 장정이 예쁘면 손이 가고, 내용이 좋아도 폰트 종이 재질등 전체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최근에 <사진과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본 순간 '이렇게 예쁜 책이 있었다니!' 감탄했다. 손에 만져지는 느낌도 참 좋았다. 책 날개에 작가소개가 없는 것, 속지의 질감과 색감... 휘르륵 펼쳐 본 바 내용도 디자인도 어느 하나 거슬리는 점이 없었다. 늘 가지고 다니고픈데, 가지고 다니면 닳는 류의 그런 책이었다. '한 사진가와 살아온 14권의 사진책들'이라는 부제도, 14편으로 나뉘어진 1편의 소제목 '당신이 남기고 간 시간들 속에서'를 눈으로 훑어 가는데 뭔가 쿵 하고 마음이 내려 앉는 소리가 들렸다.

 

뉴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두주자 리 플리들랜더가 한때 재즈 뮤지션들의 재킷 앨범용 사진을 찍어서 밥벌이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스토리빌이란 도시에서 그는 벨로크를 발견했다. 스토리빌은 1917년까지 매춘이 합법화된 미국에서 몇 안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며 재즈의 본고장이었다. 스토리빌의 창녀들 사진을 찍은 벨로크의 필름을 소장하고 있던 래리 보렌스테인에게 원판 필름 89장을 구입한 리 프리들랜더는 자신의 손으로 인화를 했고, 1970년에 뉴욕 현대 미술관의 후원으로 사진집의 출판과 함께 전시회가 열렸다.

 

벨로크의 작업은 사진가와 모델이 성공적으로 결합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기술이 뛰어난 사진가는 무엇이든 잘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잘 찍으려면 그가 찍는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진가는 지형을 사랑하고, 어떤 사진가는 산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사랑하며, 어떤 사진가는 도시의 거리를 사랑한다. 벨로크는 명백히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 여자들이 무슨 일을 하건 차별을 두지 않았다. 18 존 자코우스키

 

도대체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1912년이면 내가 태어나기 전하고도 까마득한 옛날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빛나는 이마와 사랑스런 곱슬머리, 벌거벗은 육체와 천진한 웃음소리, 한 낮의 나른한 고양이처럼 쭈욱 뻗은 다리, 이 세상의 끈을 놓은듯한 무념의 표정까지도....살아있는 나는 죽어버린 그들과 같은 시간 속에 있다.19

 

 

인용하고 사진을 보여주고 자기의 코멘트를 다는 형식의 책이었는데, 2편까지 읽고 보니 참..이 사람 이렇게 진솔하게 편안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었구나.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에 휙 읽어 버리고 싶지 않아 그만 멈추었다. 하루에 한 편이든 두 편이든 꼼꼼하게 찬찬히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나도 사진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에 사진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왠지 가정과 사진을 병행 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부러 사진을 멀리 했기에 정말 두근두근 설레임을 안고 볼 수 밖에 없는, <서칭 포 슈가맨>과 애니멀즈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저절로 소환되는 그런 느낌의 책이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더 많이 더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눈 앞에 무엇 부터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랑의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도 머리 맡에 있은지 꽤 되었는데, 예쁜 책이구나 싶었지 뭘 어쩌자는 거야, 하면서 쉽게 손에 들어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서야  머릿말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예쁜데 재밌기까지 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뭔가 위안을 주었다. 5~6년 전의 겨울 나는 김경주 시인의 글쓰기 강의와 작곡 강의를 듣고 싶어 무지 망설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의 핑계는 아이들이 중요한 시기?라서. 또 나는 들으면 엄청 끝간 데 없이 빠질거야, 나이 든 내가 그런 강좌 가면 다른 수강생들에게 민폐일거야. 악기를 하나도 다룰 줄 모르는데 작곡 수업이라니...이런 생각을 하면서 수강을 포기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덜 절실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의 나는 갈림길에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 했고, 작곡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만의 노래를 만들고 그것을 노래하거나 연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고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음치였다는 게 비극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타나 피아노 같은 악기 없어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떤 날은 박수만 두 시간 동안 쳤다. 옆 사람과 의식적으로 다르게 박수 쳐보라고 하니까 각자 자기만의 박자를 만들어냈다. 어떤 날은 한 명씩 소리를 내기 시작해 스무 명의 목소리를 합쳐봤더니 신기한 화음이 났다. 아이들 스스로도 신기했고 화음을 다 같이 멈추게 했더니 '오오'하며 소름 돋는다고 했다. 25

 

나는 사람을 사귀는 것을 참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넘치는 사람이라 친구도 연인도 많이 사귀었다. 하지만 사귐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꼭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내 이론상 모든 사람은 매일 조금씩 변하고 나는 그것을 예측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점이 사람을 사귀는 재미난 이유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질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평생 나를 보고 겪고 또 보고 겪어도 항상 신기한데, 어떻게 모르는 게 더 많은 남에게 질릴 수 있을까? 내일이 다르고 몇 년 후가 다를 우리는 왜 재미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을까? 53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에서 이런 대목을 읽는 순간, 아! 저 자리에 내가 앉아 있어야 했는데...하는 생각과 함께 위로를 받았다. 툭 툭 내뱉듯이 나 이렇게 살아 하는 분위기의 이랑의 산문은 쿨하고 깔끔하게 쓰여 졌음에도 지저분하고 단정하지 못한 나의 일상이나 사고를 껴안아 주는 듯한 넉넉함이 가득했다. 생활을, 마음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면, 이 정도 깔끔하고 진솔한 글을 만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임을 산문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1월에 만난 예쁜 책 두 권이다.

 

 송인서적 부도로 타격을 입은 작은 출판사들이 많다고 한다. 송파구에서는 어려움에 빠진 출판사를 위해 책을 선물하자는 취지로 행사를 벌인다 한다. 책을 골라서 선물할 곳을 적어주면 구청에서 발송해주는 형식의 행사다.  어떤 의미에서든 책을 읽는 사람들은 주변에 책을 권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고 보면, 명절을 앞두고 더 적극적으로 책선물을 하는 것을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몇 군데 선물 주문을 해 보는 밤이다. 아이들에겐, 최신간이자 30프로 세일을 하는 레고 아이디어북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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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1-26 15:02   좋아요 0 | URL
쑥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꿈꾸는섬 2017-02-01 00:20   좋아요 0 | URL
쑥님~ 설연휴 잘 보내셨어요?
쑥님과 사진~ 잘 어울려요.^^
게다가 작곡도 도전해보시면 어떨까요? 멋질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