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봄이 더디 온다. 진눈깨비와 비와 안개가 여름 직전까지 찐득하게 우울하게 붙어 있다가 5월이 다와가서야 마지못해 우리 곁을 떠난다. 눈이 녹고 얼고를 반복해 공원 길은 질척거리고 피부 깊숙히 파고드는 냉기의 서늘함이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런가 싶을 때 왜 이다지도 봄은 더디 오는 거야, 3월인데 왜 아직 겨울인거야, 겨울 보다 왜 더 추운 것 같은 거야 라며 절규하고  싶을 때 공원 잔디를 뚫고 피어나는 꽃이 있다. 손톱 만한 크기의 데이지들. 물론 그 보다 더 일찍 구근을 심어 가꾼 개인 정원에는 크로크스와 스노우 드롭들이 꽃을 피우지만 한 낮에 아주 잠깐 해가 날 때 잠깐 꽃잎을 열었다 닫고 만다.

 

여행을 갔을 때 나름 기념품으로 사 오는 것이 식물화집이다. 가능하면 좀 세밀하게 그린 식물화집을 사오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일반 서점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분명 제대로 된 화집이 있을 것 같은데, 의사소통 불가로 찾지 못하고 그냥 간단한 도감 수준의 식물화집을 샀다. 2월 말이면 피는 스노 드롭은 체코어로 스니젱카인데 스니젱카 라고 발음할 때 그 시즌의 공기가 풍경이 같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로 나무 한 가지 꽃이름 한 가지라도 그 지역 언어로 알고 싶은 것, 거의 같지만 조금씩 다르기도 한 식물들을 알고 싶은 것이 그 지역에 대한 나의 애정 같은 것이다.

 

오늘 선생님께서 수마트라 섬의 어느 호수가에 혼자 수행을 가신 일을 말씀하셨다. 솔깃하여 그 호수 이름이 뭐예요..하고 점심을 먹을 때 여쭈어 보았다. 적지 않아 금방 잊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 좋은 곳에서도 하루 이틀이면 여긴 어디? 나는 왜?의 심정이 된다고 하셨다. 혼자이고 싶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갈 때 습관처럼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기지만 한 번도 (아니 어쩌다 한 번은 그렸지만) 제대로 색연필을 잡아 본 적이 없다. 그리는 것 보다 읽어야 할 일이 늘 산더미여서 연필 잡을 여유가 없었다. 벌써 뉴스 지면에는 눈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 사진이 실린다. 지금부터 올라오는 작은 꽃들 중에 바람꽃을 빼 놓을 수 없겠는데, 바람꽃은 주로 계곡 가에 피기에 절벽에서 보기 어렵다.(절벽의 바람꽃이란 시적 상상력이자 상징으로 읽었다) 추위를 뚫고 바람 속에 피는 꽃들이 그 어느 꽃들보다 여리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발견! 시전문 잡지가 있었다니 반가운 마음으로 읽고 있다. 시도 읽고 시 평론도 읽고 이런 일이 살아가는 일 같다. 어딘가에선 시가 계속 쓰여지고, 누군가는 잡지를 펴내며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행복해하는 일, 새 해 벽두가 보람차다.

 

 단체 여행에서 스케치북을 잡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와중에도 스마트 폰 메모장으로 간단하게 그림을 그리는 분을 보았다. 젊은 시절 경도 된 작가라며 그의 유적지에서 흠뻑 즐기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도 시간을 만들어 나뭇 가지라도 하나 그리고 왔어야 하나 그랬어야 하는데 하는 약간의 후회가 남는다. 사람을 보느라 자연을 전혀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그런 날이 올까?) 선생님이 수마트라 섬에 수행을 가신다면, 그 때는 나도 같이 가서 꽃과 나비를 그리고 싶다. 사람 말고 자연과 벗하고 싶다.

 

 

 

일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14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5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5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5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