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던 길이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을 하는데 눈이 내렸다. 그냥 눈이 아니고 세상에 태어 나서 처음 보는 펑펑 쏟아지는 눈이었다. 그리고 순간 순간 느낌들이 달라졌다. 펑펑 내리다가 가늘게 흩어지며 내리다가 풀풀 날리다가 함박눈이었다가 진눈깨비였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열정적으로 덩어리의 눈들이 휘날리는 곳이 있는가하면 어떤 곳에서는 싸락눈보다 작은 입자들이 밤새 내려서 포스라운 눈밭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 한결같은 부드러움으로 긴긴 겨울 밤공기를 채우고 기어코 땅으로 내려 앉아 버린 다는 것을, 하염 없는 풍경을 만든다는 것을.

 

일행과 함께 한 여행길이었다. 욕심과 용기를 동시에 내어 눈길을 걸었다. 발 밑에 느껴지는 뽀득뽀득한 느낌들과 천상의 하얀 풍경, 자작나무가 도열한 길이었다. 여름에 다녀 간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추워서 좋았고 눈이 있어서 기뻤고 함께여서 설레었다. 목적지를 찍고 돌아 나오는데, 좋은 것을 혼자 차지하기 미안하던 차에 다른 길로 갈 기회가 생겼다. 50미터를 걸었을까 말까.

 

이런 길은 조용히 혼자 가는 것이 운치가 있지..

 

같이 가던 일행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 마음 나도 알기에 잠깐 뒤로 처졌다. 나도 그러고 싶었거든요..거리를 두고 따라 갈 작정이었다. 걸음을 잠깐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한 쪽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킨 듯한 넓디 넓은 눈밭이요 한 쪽은 자를 댄 듯 곧게 자란 전나무 숲이다. 

 

뭐지...이 익숙한 느낌은.

 

내가 죽음의 장소로 막연하게 꿈꾸던 바로 그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쩌지...저 눈밭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나...잠깐 생각하다가 아냐 지금은 혼자 온 게 아니잖아, 반대편의 전나무 숲으로 잠깐  몇 발자욱 들어갔다. 하늘을 보는데  바람에 섞인 눈의 입자가 만들어 가는 고요함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왔다.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아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젖지 않는 보슬보슬한 눈밭이었다. 전나무가 만들어 놓은 하늘 길과 그 길 사이로 포말처럼 날리는 눈의 입자들이 뽀얗게 눈앞을 가리며 내려왔다. 앞 사람과 뒷사람의 거리가 벌어질 만큼 딱 그 정도만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시간 개념이 없어졌다.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은 가방에 두고 왔다. 장갑도 어딨는지 찾다가 그냥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길을 나선 참이었다.

 

일어나서 보니 원래 길이 아닌, 숲으로 사람들이 내어 놓은 길이 보였다. 지름길이다 싶어 무작정 그 길을 허위허위 헤쳐 나갔다. 어떤 확신이었는지는 모르겠고, 전날 마신 술이 판단력을 흐리게 했는지 다운 된 생체리듬 탓이었는지 눈귀신에 홀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숲길을 그렇게 치고 나오자 저만치 사람들이 보였다. 더 열심히 달려 사람들을 쫓아 갔는데 일행들이 아니었다.

 

길도 마을 사람들만 다니는 소로였던지 눈에 발이 푹푹 묻혀서 몇 걸음 못가 자꾸 넘어진다.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달리다시피 걷고 있는데 저만치 앞서 지나 갔던 사람 둘이 돌아와서 묻는다.

 

저 반대편 길에서 네 친구들을 봤어. 넌 출구를 찾는 거지?

응(끄덕끄덕끄덕)

우리를 따라와, 하더니 베낭에서 뜨거운 차를 꺼내 한 잔 주고, 자기 장갑을 벗어 준다.

고단한 일정 끝에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플 일행을 생각하니 마음이 쫄아들었다.

눈밭을 뛰다시피 걸었다.숨이 턱 밑까지 차고 금방 쓰러질 듯 비척거리니

두 친구가 양쪽에서 팔을 내어준다. 자기들을 잡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장 서서 썰매를 끌다시피 나를 끌었다.

 

셋이서 급히 걷느라 다 같이 헉헉대는 와중에 키가 작고 수염 난 친구가 묻는다

네 이름은 뭐니?

지니, 넌?

알렉, 알렉세이.

그제서야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 온다. 한 마흔 이짝 저짝일 듯한 이 친구 둘은 한 명은 키가 자그마하고 다정하게 눈빛을 가졌다. 또 한 명은 키가 크고 이지적으로 생겼다. 둘 다 술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누면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도시에서 왔니?

(어, 이 친구 뭘 좀 아네, 어느 나라냐고 안 묻고 어느 도시라고 하다니...

그 와중에 또 마음에 든다)

서울

넌? 하고 물어 보려는데, 저만치 일행이 보인다.

 

이 추위에 눈 길 위에 서서 황당한 심정으로 어쩌지도 못하고 탕아를 기다렸을 검은 실루엣이 이 쪽으로 걸어 온다. 반갑다. 나를 들다시피 끌고 와준 그 친구들하고 사진을 찎고 싶었는데, 어두워져 가는 데다 그럴 상황이 아니다. 초딩보다 못하다고 지청구를 들은 참이다. 더 혼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일행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어찌 참 이렇게 나란 인간은 예측가능한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치 예정되었던 것 처럼 그렇게 당연한 사고를 기어이 치고 말았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시간을 빚졌다. 어둡기 전에 눈풍경을 보며 갈 수 있었을 그런 시간이다. 상황이 종료되고 버스에 몸을 싣고 창 밖을 보며 가는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휴대폰만 있었어도, 아마 연락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먼저들 가세요. 전 이 곳에 남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