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축축하고 어둑했다. 정확한 여름의 경계는 어느 지점일까. 계절의 경계는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물기가 돌고 바람이 불고, 그것들은 경계를 구분 짓는 동시에 뭉개버린다. 계절은 세상에 습기처럼 퍼져있지만 저 나름의 시간으로 고유하고 만들기 나름의 공간으로 개인에게 존재한다.

 

나리가 여름을 여는구나. 생각을 했다. 도심 화단의 나리가 한 주 남짓 피고 졌을 때 아, 생각보다 빨리 지는 꽃이었구나. 나리는.했다. 도심에서 보았던 그 나리는 순전한 노랑이었는데, 여기 숲의 나리는 청초한 주황에 야성의 점이 여러 개 찍혀 있다. 검은 점인데, 주황이 배경이라 짙은 밤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고 지어 또 피는 것이 무궁화만은 아니라는 듯이, 숲 곳곳에 무리지어 피고 졌는데, 여전히 또 피고 있음을 선명함으로 증명한다. 분명히 또렷하게 아름답다.  타이거 릴리. 참나리의 영어명이다. 같은 숲에 같은 시기에 피는 주황의 토트무늬 야생화가 또 있었는데, 이름하여 범부채. 잎이 난 모양새가 납작하게 부채모양이고, 꽃잎엔 온통 붉은 점이 덮여 있다.

 

까만 점박이와 빨간 점박이가 축축한 숲 속에 청량감을 주며 피어 있다. 여기 저기 군데 군데, 이미 피고 진 것은 씨앗을 달고, 지금 한창인 것도, 이제 피려고 하는 것도 있다. 그 안에 내가 있다. 공간을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앉아서 공간을 짓는 일은 얼마나 풍성한 일인가. 이 숲, 축축하고 생생한 이 쪽. 선명하고 정확한 사랑의 꽃이 범, 스럽게 피고 지고 또 피고 있다. 계절의 틈새에서 꽃은 풀은 나무는 자기만의 공간을 짓고 향기를 날린다.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 엿보기만 하는 일 모두 차곡차곡 설레임을 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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