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Macbeth (맥베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Alpha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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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짧고 굵다 할 [맥베스]는 TV용까지 포함, 수십 차례 영화화된 소재다(IMDB 링크 참조). 그중 필견작을 꼽자면 세 버전을 들 수 있다. 나로선 가장 먼저 접한 맥베스 영화로, 원작에 충실하면서 표현주의 양식에 입각하여 욕망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맥베스의 불안 및 공포를 강렬하고도 묵직하게 눌러 담은 오손 웰즈 감독의 흑백 1948년작. 중세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으로 배경을 옮겨 대담하게 잔가지들을 쳐내고 굵고 큰 붓으로 일필휘지 그려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 1957년작 [거미숲의 성]. 가장 어둡고 잔혹한 셰익스피어극으로 악명 높은, 인간 비판을 넘어선 혐오를 드러내며 폭력의 전시로 고어물에 진배 없었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색채 1971년작. 아직 못 본 작품이지만 한 편 더 보태자면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라 할 헝가리 출신 벨라 타르 감독의 색채 1982년작까지. 그리고 개인적인 결론부터 적자면 이번 저스틴 커젤 감독의 색채 2015년작 [맥베스]의 경우 전술한 걸작들과 나란히 놓기가 망설여짐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눈여겨 볼 각색이란 생각이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에서 내게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요소라면 공들인 화면 구성과 색채 감각이다. 셰익스피어극을 영화화할 때 아무리 서사 골격과 내용에 충실하고 그 현란한 수사로 점철된 대사와 방백을 모두 옮긴다 하더라도 원전 이상으로 다층적인 뉘앙스를 품은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영화 작가라면 마땅히 극 해석을 가장 잘 드러내 전달할 표현 양식을 찾아야 하고, 전술한 세 거장 - 오손 웰즈, 구로사와 아키라, 로만 폴란스키 - 버전 모두 그에 성공한 경우다. 이에 저스틴 커젤 감독이 찾은 묘안은 스코틀랜드의 자연을 십분 활용하면서 핏빛과 잿빛을 번갈아 주조로 내세우는 모노톤 화면인 것으로 보인다. 광활하고도 다채로운 풍광과 대비되면서 왜소한 인간과 그 내면의 불안, 혼돈, 공허가 더욱 도드라진다. 화려함보다 강렬함에 방점을 찍은 단색 기조 색감은 광기와 죄책감을 오가며 갈등하는 맥베스의 심경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면서 극 중에 마치 한 편의 광시곡과도 같은 시정을 불어 넣는다. 다만, 절제된 정갈함이나 묵직함과는 동덜어져 보이는 시정의 과잉, 도취가 아쉽다. 온통 붉게 채색되는 유혈낭자 학살 현장과 황폐한 광야의 묘사가 기계적으로 나열되면서 때로 본연의 목표인 잔인한 욕망의 비주얼을 벗어나 이미지 때문에 서사 흐름 및 정서가 훼손되는가 하면, 의당 강조됐어야 할 대목들이 감지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흐트러지는 사단을 빚기도 한다.

 

 

관건은 이렇게 강렬한 영상으로 얼마나 탁월하고 차별화된 비전의 '맥베스'를 보여줬느냐일 것이다. 맹목적인 충심으로 반란을 제압한 스코틀랜드 글래미스의 영주 맥베스(마이클 패스벤더)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과 아내의 부추김으로 자기 암시라도 받은 양 왕권을 향한 망집에 홀려 덩컨 왕(데이빗 듈리스)을 시해한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뒤 폭주하는 야심과 제동을 거는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으면서 옥좌를 지키기 위한 살육을 이어간다. 즉, 2015년 [맥베스] 역시 초라한 개인의 덧없는 욕망과 중독에 관한 드라마, 야욕이 파행을 부르고 그에서 비롯된 가책과 불안, 긴장과 우울이 인간을 잠식하며 자멸로 이끄는 이야기다. 다만 원작 및 고전 각색작들과 비교할 때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맥베스 부부의 자기파괴적 야망, 왕위 찬탈 동기를 권력욕보다는 자식 잃은(후사가 없는) 아비와 어미의 고통, 트라우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원작과 기존 맥베스 영화들은 전투 장면으로 서두를 열었던데 반해 본작은 맥베스 부부가 전쟁 내지 병고나 자연재해로 잃었을 아이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그 작의(作意)를 드러낸다.

 

 

이후 앨론 전투에 임박, 맥베스는 마치 죽은 아이의 투사체라도 되는 양 어린 소년병의 팔에 아대를 감고 얼굴에 전사의 표식을 그려주며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허나 그 소년을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이때부터 맥베스의 무의식이 빚어낸 소년병의 혼령 내지 허상이 그 자신을 시종 따라 붙게 된다. 덩컨 왕 암살을 망설일 때 홀연히 나타난 소년의 환영이 단검을 들고 맥베스를 인도하는가 하면 마지막 맥더프(숀 해리스)와 결전을 벌일 때도 맥베스의 최후를 묵묵히 지켜본다. 즉, 본작은 맥베스가 전쟁통에 아이를 잃은, 상처받은 아버지라는 설정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 맥베스 부부의 야망이 권력에 대한 굶주림보다 상실감에서 비롯됐으며 삶의 의미가 퇴색된 허전함, 막막함을 채우려는 대리 충족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는 감독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허나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지만 대대손손 왕을 낳으리라'는 마녀들 예언이 바쳐진 뱅코우(패디 콘시딘)와 플리언스(로클란 해리스) 부자를 대하는 맥베스의 태도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젖을 먹여봐서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알지만 거사 앞이라면 젖꼭지를 빼고 머리통을 박살낼 것'이라든지 '내게서 여성을 거둬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수심으로 채워달라, 내 안에 들어와 여자의 젖을 담즙과 바꿔달라'는 맥베스 부인(마리옹 꼬띠아르)의 절규에 가까운 독백들이 예전과 다른 고통의 색을 띠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만들기도 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본작의 카메라가 맥베스의 내면 이상으로 그 외연에도 초점을 맞춤으로써 구조적인 권력 동학에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맥베스는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자객의 손을 벗어나 도주했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고 발작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며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범행을 토해낸다. 이후 실성하다시피한 맥베스에 의해 표출되는 온갖 징후는 한 인간을 통째로 집어 삼켜버린 권력의 위세와 자장, 그것이 훑고 지난 자리에 남겨지는 폐허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후 결말부에 이르면 '버넘 숲이 던시네인 성을 향해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 한 패하지 않으며 여자의 몸에서 난 자는 멕베스를 해하지 못한다'는 마녀들의 두 번째 예언이 숲을 타고 오는 화염과 '나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제왕절개로) 나왔다'는 맥더프의 칼날에 의해 실현되고 부질없는 욕망을 끝까지 불태우던 맥베스는 재만 남긴 채 회한에 싸여 스스로 목숨을 내려 놓는다. 암살당한 덩컨의 아들 멜컴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동안에 붉은 안개를 헤치고 등장, 맥베스의 진검을 집어들고 다시 핏빛 광야로 향하는 어린 플리언스의 결기 서린 모습이 아직 예언은 열려있으며 전쟁의 폭력과 고통, 권력 찬탈의 아귀다툼은 끊이지 않고 영겁으로 반복되리란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저스틴 커젤 감독은 새로운 [맥베스]의 비전으로 성찰적인 현대 반전(反戰)영화의 장르성을 내세운 셈이다. 어린 소녀를 더불어 갓난아기까지 안고서 붉은 안개 틈새로 출몰하는 마녀들은 마치 전쟁 사상자들의 혼백처럼 묘사되면서 한편으로 자손이 없는 맥베스 부부의 결핍을 강조하는 극적 장치로도 보여진다. 원전과 달리 공개 화형 당하는 맥더프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해 잔혹한 전쟁의 희생양은 정작 군인들(남성들)이기보다 무고한 여성과 아동들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맥베스의 욕망을 부추겨온 맥베스 부인조차 맥더프 가족을 화형식에 처하는 맥베스에게서 광기에 갇힌 괴물을 목도하고 허물어진다. 매 전투 씬마다 뚜렷한 액션 동선을 지워낸 혼전 양상으로 장르에 도사린 스펙터클의 함정을 지양(止揚)한다. 도입부에서 맥베스가 반역자 맥도널드를 처단하는 앨론 전투는 새벽녘 담청색 주조의 잿빛 안개가 서린 가운데 치러지는 반면 그가 전사하는 최후의 던시네인 결전은 핏빛 석양 속에 펼쳐지면서 색감 변화로 점점 더 진한 피를 흩뿌리는 전쟁의 참상, 그 생리를 형상화한다. 저스틴 커절 감독은 원전의 폭을 줄여가며 가장 명료하면서 동시대적인, 어찌 보면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맥베스'를 내놓았다. 여러 시도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선 그만큼 고전 본유의 매력이 반감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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