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고 이민아 목사님의 책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민아 목사님은 이어령 선생의 따님으로 유명한 분이고,

선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이지요.

 

그 책에서 레위기에 대하여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데,

목사님은 레위기를 읽을 때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사실 성경 66권 중에 가장 재미없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지켜야 할 규례의 나열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익숙치 않은 문장에 맨 '그래야 한다'는 법만 얘기하고 있으니,

지루할 만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좀 바뀌고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요.

그냥 맘대로 하시면 될 텐데 굳이 그렇게 규례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지요.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자칫 하나님의 협박이나 공포의 조장으로 읽혀질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도는 하나이지요.

죄를 짓지 말라는 당부. 설사 짓더라도 씻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주십니다.

그것이 레위기에서 말하는 각종 규약들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읽는다면 레위기는 그 어떠한 성경들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이민아 목사님의 레위기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좀 힘든 시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말씀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는, 사랑을 확인하고

그리하여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도 전하는

사랑의 2016년이 되길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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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세상사에서도 이름은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름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자신의 성을 상으로 내리듯이
이름은 귀한 것입니다.

'육룡이 나르샤'란 드라마에 이지란이란 장수가 나옵니다.
이성계의 의형제이지요. 이지란 여진족 사람이긴 하지만
이성계와의 관계가 돈독하여 '이씨' 성을 지니는 영광을
누립니다. '이방지'라는 삼한제일검의 칭호를 사용하는 이가
있습니다. 얼마전 정도전을 구하는 공을 세우자, 이성계가
직접 성과 이름을 하사합니다. 감격이지요, 그에게는.

반면 어느덧 세월은 흘러 지금은 이름이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부모님의 이름조차도 그렇습니다. 책에도 언급되는 목사님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요즘은 특히나요.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살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일침이지요. 자원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야말로 사랑을 나누는 삶 말이지요. 
한숨에 섞어서, 
원망의 말에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말하는 것 말고요.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인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삶이나
이름이 높여지는 삶이나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모두 '사랑하는 삶'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사랑의 징검다리가 많이 생기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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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동서고금은 모두 일상에 관하여

'감사'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감사할 일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바쁜가'......

'젠장!!!'
사실 성경에서처럼

'감사'를 일부러 찾아서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자꾸 바울을 얘기하게 되는데요.

떠오르는 사례가...
바울은 언제부터인가

지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세 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치료해달라고 말이지요.
드디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응답을요.

바울은 좀 방황을 했었는지, 즉각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바울은 건강 외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룬 위대한 인물입니다.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론과 실천, 그 삶을 통해 그의 성과는 열 두 제자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을 보면 우리나라의 '선비'가 떠오릅니다.
완고하고 강직한,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그런 사람들은 자칫하면
교만하고 독선에 빠질 가능성이 많지요.

바울 자신도 그걸 알았나 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승승장구하는 바울에게 약점은 건강이었으니까요.
건강이 바울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만약 건강도 훌륭한 상태였다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감사합니다.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사했던 겁니다.

범사에, 일상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부러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할 것을 찾아서 감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흥분한 상태에서, 분노한 상태에서 감사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감사'라는 단어가
튀어나올려면 마음의 상태가 차분해져 있어야 합니다. 차가워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감사는 그 마음의 상태가 따뜻해져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그 흔한 말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차가운 온기(?)

감사한다는 것은 나를 낮추고 겸손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이지요.
특히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더욱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총이니까요.
하나님께 감사.
범사에 감사.

감사할 줄 알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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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십계명의 제2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나무나 돌이나 금속이나 어떠한 것으로도, 짐승이나 물고기나

신령하게 생긴 바위나 나무나 어떤 것도, 심지어 하나님

당신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십니다. 요즘에는 무엇보다도 '돈'이

최고의 가치를 자랑합니다. 하긴 옛날에도 돈은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권력을 누렸긴 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돈의 매력은 커집니다. 돈의 노예가 될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저도 조심해야겠네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살아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시공간을 창조하셨으니 당연합니다. 집, 회사, 차 안, 길거리,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카페에도, 과거에도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그런 분을 어떤 형상으로 빗어서,

깎아서, 주조해서 만들어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되버립니다.

그냥 흙이나 나무나 금속 덩어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가두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제대로 섬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질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

히브리어에서 질투라는 단어에는 '정열' '열정'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열과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가둘 수 없는 분입니다. 만들어지지 않는 분입니다.

가두고 만드는 순간, 그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적도 없고, 만지지도 못하고, 마음이 없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음성.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섬깁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아닐까요.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듣고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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