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지역의 문학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누구는 줄기차게 영국의 이언 매큐언을 지지하며, 누구는 계속해서 일본의 렌조 미키히코을 품에 껴안을것이며, 누구는 끊임없이 프랑스의 조르즈 페렉 혹은 보들레르를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결국에는 처음이자 마지막문학은 바로 이소설이다, 


여러가지의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나의 최종선택은 허민 벨빌의 <모비딕>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성적인 힘의 강렬함. 이 소설의 화자 이슈메일이 미치광이 선장 에이헤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편집광적스러운 성격에 한번에 매혹당했다. 그 불가능한 도전에 대한 미학과 기술. 그리고 집념. 지금 현대사회에서는 남성다움의 개념 그 자체로 야멸차게 사그러지고 있다. 물론 맨핼즈에 나오는 짐승남이나 아이돌을 빗대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매력적인 육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부할수 없는 스프리트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가 평소의 신념대로 처절하게 내뱉던 말을 믿는다는 가정하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남성우월주의의 위대함을 대중들에게 꺼림김없이 설파하던 애티튜드. <우국>에서 어는 한 젊은 장교가 쿠테다에 실해하자 아내를 죽이고 자기자신도 자해할복을 하는 소름끼치는 닭살스러운 문장은 그야말로 죽음의 미학을 어떠한 미사여구의 보탬없이 보여준다. 그 남성성. 그야말로 모비딕이 보여주는 그 자연세계에 대한 동경심은 그대로 나에게 일종의 계시록이 되었다. 나는 모비딕이야말로 남성들이 가장 실현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그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과정을 볼때마다 나도 그자리에 있었으면 한다. 미문학은 이러한 프런티어정신으로 시작하였다. 미지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개입. 그리고 야욕과 탐욕. 그리고 욕망의 충실한 재현. 나에게 있어서 허민 멜빌은 축복같은 존재이다. 나는 없어져버리고만 남성성에 대한 복원에서 말이다.


이 폴란드태생에 소설가 조셉콘라드는 평소 선원을 할 인물은 못되었던 것 같다.  그는 빠른 시간에 영어를 배워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도저히 그 난해한 문장구조를 조직화나갈깨 모든 영문학도를 좌절케 한다. 이 안티제국주의가 보여준 소설의 세계는 실로 광대하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를 흉내내기위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쳤다. 예를 들면 리들리 스코트의 <에일리언>의 우주선이름은 그의 유명한 소설<노스트로모>에서 빌려왔는데 이번 신작 <프로메테우스>의 기본플롯도 조셉 콘라드의 세상과 편행우주를 달린다.  몇대를 걸쳐<암흑의 핵심>은 리메이크가 수도 없이되었는데 그 생명력은 대단히 끈질기다.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사회에서도 그의 모더니즘 사고가 계속 유행처럼 퍼지는 상황을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른다. 


월리엄 포크너야 말로 마크 트웨인과 더불어 미 남부를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그는 대단히 소설을 엄격하고도 청교도적인 시각으로 묘사를 종종 펼치곤 하는데 그의 생활습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물며 그의 노벨상수상소식을 들은 주위이웃들은 그가 그토록 유명한 소설가인줄을 전혀 몰랐다는 풍문이 들려오곤 하면서 그의 작가적 태도를 엿볼수 있다. 월리엄 포크너가 가장 유명하게 나에게 다가온 첫기억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상의 소설중에서 마침표없이 끊어지지않고 가장 긴 문장이 올라왔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 소설은<압살롬 압살롬>인데, 사실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로 읽으면 그 맛이 제대로 살아있지는 않다. 역시 그의 소설도 여전히 남부인의 생각이 여과없이 투영되는데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며 냠녀차별주의자이다. 그러니깐 그도 허민 멜빌처럼 여성을 믿지 않고 오로지 남성의 파워만으로 세계를 구축해난간다.


여러명의 대기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레이먼드 첸들러, 대쉴 해밋등등이 있다. 



 
 
 

임상수의 <하녀>(2010)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임신한 서우가 커다란 럭셔리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워 우아하고도 교양있고 엣지있게 읽던 책이 장 폴 사르트르의 아내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이었던 화면이 눈앞에서 선하게 펼쳐질때였다. 서우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던 여성이었다. 태어났을때부터의 고급화, 명품의 다른 판본. 다른말로 이야기하자면 재벌의 자녀.


이 내츄럴 본 부르조아 서우는 결국에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고 뼈속까지 프롤레타리아 전도현은 자살로서 그 생을 마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파국적인 종말을 그 스스로 선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2의 성 여성은 자본의 소유량만큼 그 계급이 더 세분화되는 현상을 가져온다. 그런데 결국에는 이들이 성을 매물화한것은 사실이다. 그녀들이 '섹스'때문에 결국에는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성들이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고 그 자본을 가지고 여성들을 유회할 때 그들의 심성은 즐거움으로 가득차있다.


여기 몇편이 여성들의 잔혹사를 생생하게 라이브화한 한국 소설들이 있다.


일찍이 월리엄 포크너는 가장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면 매음굴을 경영하라고 문학지망가들에게 총고한다. 이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속에서 인간들의 가장 충실한 욕망을 엿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영화속에서 다시한번 반복하는데 장정일의 소설을 각색하면서 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에서도 여균동이 문성근과 같이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난데없이 등장하는 대사이다. 여기 강영숙의 <리나>(2009)도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세상에서는 알수 없는 기호로 명명되어진 국가와 그 내면을 알 수없는 리나와의 대면으로 이루워진 브리꼴라주 같은 작품들이다. 가라타니 고진처럼 네이션-자본-노동 이 3개의 요소가 스스럼없이 영토를 장벽없아 드나들며 그들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본을 모으는데 전념하는 '성'이 있다. 아무도 우울한 여성사를 다루면서 성을 단독직입적으로 다룬 소설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더불어


이 소설은 그냥 강영숙의 세계를 이어받거나 혹은 계승하여 여러가지로 글로벌화된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는 좀더 국가를 정확하게 명시하며 그러니깐 태국의 창녀촌, 좀 더 날것으로 그곳의 추악한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다. 다소 특이한게도 한국소설들의  창녀들의 이름들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외모와 더불어, 난 이것이 굉장히 판타지한 세상을 은유적으로 는 메타포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그렇치 않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일종의 창녀이야기를 다루는것은 남성들의 환상극이다. 거기의 여자들은 침묵을 지켜면서 남성들이 쏟아내는 갖은 굴육과 모욕을 버텨가면서 세상의 질서를 버텨내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부르조아 남성들이 그 주체들이며 프롤레타리아 더 정확히 노동자들은 배제된것이 현실이다.


그냥 종말을 향해서 가는 묵시록적 소설이다. 김사과가 나한테 매력적인 것은 여성이라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마음껏 한다는 점이다. 잦은 욕설과 그 세상에 대한 불평, 그리고 명품에 대한 숨김없는 애정표시, 그리고 된장녀들을 향한 옹호, 도대체 왜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게 당신하고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그녀가 나의 여자가 되면 그 문제는 달라지지만, 그 대중들에게 거침없는 대사들을 마구 발설하면서 페미니즘의 영토를 수립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녀 스스로가 아직 멈추지않고 폐허가 된 세상에 대해서 전투중이다, 그 미래에 대해서도 감히 희망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않는다. 도대체 왜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숨기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몹시도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을 자유자재로 만드는 그녀를 볼때마다 나는 지지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년 어떠한 작품보다도 나에게 커다란 성찰을 일깨운 작품인데, 솔직히 남자가 (돈벌)능력 되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하는것은 서로에게 피곤하면서 짜증나는 부조리극을 연출하게 된다. 남성이 노동시장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때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교과서적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의 인물처럼 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실수의 반복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특히 평생을 데리고 살 배우자를 고를때는 말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의 <날개>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상의 남성인물들이 무기력하게 생활하고 그 여인들이 육체와 웃음을 팔아가며 그 생계를 유지할때 그 가련함이란. 여기서도 그냥 젋은 여성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것을 힘들게 묘사하고 있는데 솔직히 이러한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세상의 사건들이 더 소설같은이.


올해의 소설중에서 정말로 끝까지 눈을 떼지않고 밤을 세워가면서 읽은 책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상당히 잘 엮여있으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볼수 있는 글로서(그 반대편에는 항상 한유주가 도사리고 있다) 여성이 지금-현재 어떠한 수난을 맞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 유구한 역사적 사실로서 보여주는 일종의 개인연대기체험담인데 마지막에는 그냥 모든것이 깨끗하게 소멸한다. 그러니깐 이 절망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것을 내내  말하는 작가의 육성이라는 것이 또렷하게 생생하게 들린다. 그냥 살아간다는것이 어떻게 보면 참혹 그 자체인데 그것을 이겨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 하나의 교훈이다. 이 소설의 인물을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의 장에서 전투적으로 매일같이 살았지만 결국에는 그 의미화는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한민국의 여성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역사이다.




 
 
아이리시스 2012-04-13 22:37   댓글달기 | URL
우왓, 네오님. 오랜만에 폭풍 페이퍼 반가워요. 알찬 문학 독서기군요. <끝나지 않는 노래> 담아놓고 밤새워 읽고플 때를 대비해 사야겠네요.^^

네오 2012-04-13 23:15   URL
아이리시스님이다!! 감솨!! 저 플픽속의 사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제인바킨인가 ㅋ

최진영의 <끝나지 않은 노래>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든단장편을 가리지않고 읽었는데 좋아요!!!! 강추강추!!
그런데 남성을 무슨 양아치취급하는건 그랬음 ㅋㅋ
 
미안해, 고마워 SE 
박흥식 외 감독, 김영민 외 출연 / 디에스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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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영화는 두마리의 말로부터 시작했다.


하나는 벨리 타르의 <토리노의 말>(2011)과 다른 하나는스티브슨 스필버그의 <워호스>(2011)이다. 나에게는  어떠한 동물이 등장하더라도 결국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기억의 원경험을 지닌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이다. 나는 이 영화를 겨우 (클레식이라고 불리는)영화 오백편을 보고 난 다음 이 영화를 보고 감탄의 찬사를 보냈는데 내가 영화 삼천편을 보고 난 후에도 봤을때에도 역시 무릎꿇게 만들던 작품이다. 내가 브레송을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내내 정서를 지배하는 그 절망감때문이다. 브레송의 영화를 끝까지보고 난 다음 극장문을 나서게 되면 저절로 내가 왜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는 실존적의문을 자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내 개인적으로 모든 영화들을 보고난 다음에 공통된 감각이었다. 브레송은 영화에서 이 주인공들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이입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것이 참 아이러니한게 이 영화와 같은 주제 <무세트>는 가능한데 나에게 있어서 <당나귀 발타자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네번>이 나의 감각을 뒤흔들더니 <토리노의 말>은 정점을 찍게 만든다.  아무튼


<미안해, 고마워>를 작년에 직접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것은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실수였다. 모든 단편들이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지만 최종적으로 나의 심금을 울리게 만든것은 박흥식의 <나의 동생>이라는 편이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봤을때 느낀 최초의 감정은 고레야즈 히로카즈의 영화같다는 것이었다. 어린 소녀가 나오고 그 어린 소녀가 홀로 집안에서 뛰어놀면서 만화영화<플란더스의 개>를 보면서 울음을 지을때,  어디서 많이 보는듯한 데자뷔를 경험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가서 충격을 먹은 장면은 그 소녀의 엄마가 들어오고나서 욕조에서 소녀와 동생이라고 생각한 소녀가 함께 목욕했을때, 엄마가 당장 욕조에서 그 소녀를 꺼내면서 그 동생이랑 같이 목욕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를 줄때, 그 소녀가 울먹이면서 다시 엄마에게 자기한테 그 소녀가 형이라고 부른다고 일러바칠때까지는 혹시 그 동생이라는 소녀가 병에 걸린 남자아이이고 그 소녀가 형이라는 소녀도 결국에는 남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그때 화면이 다시 욕조에 그 동생이라는 소녀를 비출대 그 소녀는 정체는 결국에는 '강아지'였던것이다. 그 형이라는 소리도 강아지의 울부짓음이었던 것이었다. 난 이부분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강아지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스크린에서 재현했기 대문이다. 물론 어린이라면 이러한 생각은 당연한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 몇년전가지만 해도 강아지를 양육할때 이러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감동은 대단히 스펙타클이었다. 이 영화한편으로 나는 박흥식 감독을 다시봤다.


그 이유는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의 영화가 냉철한 이성의 영화라면 이창동, 김기덕, 정성일,박흥식의 영화는 뜨거운 가슴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난 한번도 전자의 영화를 보고 슬픔의 정조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영화화적으로는 분석하고 싶은 마음이 한결 나의 감각을 뒤흔들기전에 냉정한 이성으로 복원된다. 그런데 후자들의 영화들은 놀랑울정도로 나의 육체를 슬그머니 젓게 만든다. 나에게 있어 이창동의 모든 영화들은 그냥 폭풍눈물의 결정체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나약한 인간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질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펼쳐질때 그 소름돋음이란 그 자체로 공포이다. 예전에 <오수정>과 <오아시스>를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연달아 보았는데 그때 크게 감명받은 작품은 이창동의 주제였다. 김기덕은 말할것도 없다.  정성일은 그냥 모든 쇼트들이 그냥 액체였다. 그런데


이 영화정말 나에게 있어서는 그냥 추억의 아픔을 건드리는 영화이다. 그래서 좋다.



 
 
맥거핀 2012-04-13 02:32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아트시네마에서 <당나귀 발타자르> 하던데 보고 오셨나요?

네오 2012-04-13 10:43   URL
아니요^^

치니 2012-04-13 12:00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티비에서 중반부터 봤는데, 웬만해서 중반부터 영화를 보는 행위를 하지 않는 저인데도 채널 못 돌리고 끝까지 보게 한 힘이 있었어요. 말씀대로 추억의 아픔을 건드리는, 그런 면이 있어서 그랬나 봐요.
이창동의 신작이 기다려집니다. 요즘 이곳에는 볼 영화가 하나도 없어요. 흐엉. (헝거 게임 보고 대실망. ㅠ)

네오 2012-04-13 12:31   URL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보석같은 작품이지요~

이창동은 모든영화들을 한자리에서 보게되면 이상한 경험을 체험하게 될것입니다. <초록물고기>부터<시>까지 어떤 아련한 향수를 그리워하게 되더군요~ 재계발로 인해서 사라지는 농촌의 풍경, 그리고 순진했던 시절에 첫사랑, 옛날옛적 오손도손 살았던 가족들, 그리고 종교없이 남편과 아들과 정답게 살았던 신혼시절, 그리고 지금 시를 쓰지않는 시대의 상실감 그 모든것이 아마도 채무감때문에 영화를 만드는것 갔다는 생각이 드네요ㅋ

그곳은 그냥 주변의 광경이 영화아니겠습니까ㅋ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올해 제니퍼 이건의 놀랍고도 새로운 소설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녀의 소설을 차례차례 순서적으로 읽을 생각으로 그녀의 이력을 구글에서 마구잡이로 검색하고 있었는데, 나의 눈에 이 소설의 홍보문구중 2011년 퓰리처상 소설 수상작이라는 글귀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열심히 맹렬하게 퓰리쳐상 역대소설수상작들을 뒤지고 있었는데, 예전에 내가 그렇게나 열심히 모으며 나의 책장을 장식하고 있었던 논픽션과 역사부분이 다시금 새로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까지만 해도  아마존을 통하여 2000년대의 역사부분을 거침없이 사모으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표현을 바치고 있었던 열혈청춘의 그 시절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한국어로 번역한 미국사가 제대로 소개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몹시도 가슴아퍼하는 사람이다. 사실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도 못한 신생국가가 지금은 강력한 파워군단을 지니며 여러 분야에서 극렬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면,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는데,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외교사는 


한마디로 옴베르트 에코의 표현을 빌려 궁극의 리스트이다. 햇수로 2005년 시점에서 교보문고에서 바로 구입한 책인데 아직도 어김없이 나의 베스트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도서이고 보면 상단한 메리트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나는 헨리 키신저가 열심히 그가 존경하는 인물의 정책에서 배웠고 흉내내던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대해서 띠끌하나없이 그를 흠모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후배에게 헨리 키신저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는데 그는 상당한 미국무부내에서도 비주류라고 단언한다. 물론 그가 미국무부에 들어설때는 확실히 관료라는 이미지보다는 학자의 품격을 지닌 서생이라는 오해를 받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현상파악이다. 그만큼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외교를 다스리던 사람은 정말로 손에 꼽을만 한데, 지금 얼핏 생각하기에는 부시때 활약하던 콜린 파웰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불현듯 생각난다. 하지만 그들의 정책는 도널드 럼스펠트의 펜타곤에 위해서 수시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아마도 미외교사에 대해서 추후의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무튼 지금 역대 퓰리쳐상 역사부분을 보면서, 물론 번역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느낀점이 상당히 부드럽게 소설처럼 역사서를 잘쓴다는 점이다.  미국책들이 유려한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책을 원본이든 번역서이든 당연하게도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치 못하고 지나칠때가 너무 많다데에 나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매번 나는 이럴때마다 그냥 스킵하면 지나쳐가는 아쉬움이 진하게 베인다. 그래서 미국사들을 살펴보자면, 


뒤에 두권은 굉장히 유명한 옥스퍼드 역사서시리즈인데 모든 미국사를 연대기적으로 이렇게 세세하게도 잘 설명한 책이 없다고 자평하고 싶다는 정도이다. 이 책들은 미국의 남북전쟁전후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풀어쓴 분석서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역사부분을 과도할 정도로 유럽사에 편중한 부분이 많은데 미국사를 들쳐보고 있으면 어느정도의 우리역사와 매치컷업기법으로 씽크로율의 흐름이 비슷하게 꾸며나가는 것이 눈에 띠기도 하다. 특히 1810년부터 1848년까지의 미국부흥의 시대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마치 우리나라의 해방이후의 정국을 본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역사는 어떠한 시각을 지니고 있는냐에 따라 어러가지의 해석방법이 달라지는데 그래도 어떤 공통분모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면 우리들은 정확하게 그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그리고 2010년도 퓰리쳐상 역사부분 수상작과 2009년 파이낸셜타임즈와 골드만 삭스의 올해의 책이 공동수상한 책이 있는데 바로


금융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가 저술한 금융사인데 대공황이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앙은행에 대한 정책에 성공과 좌절을 다루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부분에 대한 최고의 책은 이미 1970년대에 밀턴 프리드만과 안나 슈워츠가 공동저술한 <대공황, 1929~1933년>이 있다.  이책을 관심갖게 된것은 내가 폴 사뮤엘슨에 대해서 사무러칠정도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던 시절에 유일하게 그의 반대진영에서 줄기차게 화폐정책의 우수성과 재정정책에 대한 무력성을 멋지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분은 상당히 매력적인 분인데 거의 모든 시카고대 출신들에 노벨상수상자들은 이분에 얽힌 일화들은 책으로 쓰고도 남을 정도이다. 예를 들면 포트폴리오이론으로 유명한 해리 마코위츠의 논문심사를 할때 다른 교수들이 그에게 혹독한 비평을 가할때 다른 교수들과 달리 그에게 다른 면모를 봤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교수였다. 물론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유명한 로버트 루카스2세(아마도 현존하는 경제학자중에서 내가 닮고 싶어하는 유일한 이분, 결국에는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것이라는 불길한 저주같은 숙명)의 지도교수로도 유명하다.


파이내셜타임즈와 골드만 삭스의 올해의책 역대 수상작을 들쳐보면


지금 대기중에 있는 도서들인데 정말로 기대가 저절로 되는 작품들이다. 특히 이 경제분야에서도 관심을 갖지 못하면 저절로 도태가 되는데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읽어야 한다고 나만의 착각에 빠져있다. 여기서 중요한 책은 2011년 mit 경제학과 교수 아비히지트 베너리지와 에스더 듀플러가 공동 저술한 (2011)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숱하게 배웠던 경제학이론이 왜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명확하게 밣히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굉장히 쇼킹한 책이다. 특히 에스더 듀플러는 내가 알기로는 어떠한 경제학자들보다도 천재중에 천재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녀가 누구도 감히 누구나 수상하고 싶지만 함부로 수여하지 않은 신성불가침적상 40대 이하 경제학자에게만 수여하는 존 클라크 베이츠상을 이미 수여했기 때문이고, 초대수상자가 1947년에 수상한 폴 샤무엘슨이다. 이분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자면 솔직히 이분이 경제학에 이룩한 업적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중들은 경제학하면 케인즈만을 기억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에 못지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정도이다. 특히 그는 25살때 박사논문으로 <경제분석의 기초>(1947)를 작성하였는데, 처음 이 책을 보고 그 놀라움을 이루 묘사할수가 절대적으로 없었다. 어떻게 25살에 이런 대단한 책을 만들었을까부터 시작해서 기존의 모든 경제학적 사고를 뒤집으면서 새롭게 수리적으로 증명할때는 그 전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트 듀플러는 학문의 집필실에만 머무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제3세계에 가난한 동네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모든 현상을 분석하는 열혈행동가이다. 사실 그녀가 이 상을 봤을때 처음기사를 보고  의아했다.  내가 알기로는 계발경제학의 대가는 같은 대학의 대론 에이스모굴라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에이스 모굴라의 경제성장학 책 일장을 보면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서 '미라클'이라면서 자세하게 소개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로버트 루카스 2세이다. 눈여겨볼 지점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또 한권의 책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으로 2003년에 매경이코노미스트를 통한 기사로  처음접하고 무려 10년 동안 내가 그녀의 사랑을 아무조건없이 바라보며 아낌없이 지치지않고 나의 사랑이 완성하기를 바랬던 심정으로 기다려왔던 


대니얼 카네만, 이분의 처음 생각을 접하고 내가 그동안 배웠던 경제학을 떼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화끈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웠던 그분이다.  그러니깐 인간의 사고가 합리적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인지오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는 것인데 예전에 경제학에 대해서 신나게 토론했던 후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래도 경제학의 기본개념은 인간은 나름대로의 합리적 사고를 하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점이다. 그러니깐 나도 합리적 기대학파와 행동경제학 그 영역을 서로 왕복하며 기웃거리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명쾌한 결론은 아직도 요연한 편이다. 나의 경제학 출발점은 항상 인간은 언제나 우수하다라는 합리적 기대이론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금융시장의 귀결도 결국에는 효율적시장에서의 합리적 판단이 아니게느냐가가 나의 지금 생각이다. 


아마도 이달은 이책들을 읽으면서 희희낙락하고 읽을 나를 발견하니 매우 기쁘다.^^



 
 
 
힌트는 도련님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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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프랑스의 68혁명 혹은 5월혁명과 대한민국의 2011년 10.26서울시장선거는 청년세대들이 아버지세대를 부정한다점에서 닮았다. 청년들이 기존질서 혹은 윤리에대해서 반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미래를 기약할수 없는 경제적 불안한 상황가운데에서도 불굴의 인정투쟁으로 희망적이 미래찾기를 소망한다는점은 낡은사회가 폭력과 섹스와 비윤리적이 태도가 점칠되어가고 있는 그 때, 지금-여기에서 누구에게든 우발적으로나 또는 우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사회적변화는 우리에게 정치참여라는 '장치'를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재'로 자동적으로 그 이미지에 홀리게 하는 등록가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