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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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 안재성 장편소설


안재성 작가의 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의 중심줄거리는 북쪽에서 교사로서 활동하던 정찬우가 전쟁발발 후 당의 명령으로 인민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군과 함께 남하하면서 겪게되는 고초를 다룬다. 만주로 유학을 갈 만큼 총명했던 학문 뿐 아니라 민족에 대한 열정과 인성 자체가 바른 인물이었다. 가족과 일부러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저 친일파가 권세를 누리는 남쪽에 대해 큰 호감이 없었기에 당에서 명령한 일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행하였다.


얼마 후 정찬우 일행은 둘씩 짝지어 진주 읍내 중학교와 농업전문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느라 바빠졌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남조선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조선식 사회주의이며 남조선의 과거 역사교육은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사상이라는 내용이었다. 59쪽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라는 표현이 틀리진 않지만 당의 명령으로 거주지나 직업에 제한을 받는 북조선식 사회주의가 반박할 만한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픈건 왕을 중심으로 한 노예가 현재는 재벌, 돈을 중심으로 한 노예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전쟁 초반에는 북쪽이 우세였기에 군과 함께 다니며 계절음식을 먹는 등 마치 전시상황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서울을 지나면서부터 날아드는 총과 유엔과 미군이 하늘에서 뿌려대는 총알에 정신없이 쫓기게 되면서부터 독자인 내게도 전쟁의 참혹한 상황이 전해졌다. 그런 상황속에서 판단이 흐려진 군간부들은 조금이라도 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즉결처분을 명하는데 그때마다 파리보다 못하게 사라지게 될 생명을 살려낸 것이 정찬우였다. 그가 권력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권력을 제대로 이용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루아침에 민심이 바뀌다니. 우리가 서울에서 보았던 민중들의 표정은 전부 거짓이었을까? 서울역 광장에 모여 있던 의용군은 모두 강제로 끌려나온 이들이었을까? 인민군이 다시 오면 이번에는 또 인민군 만세를 부를 것인가? 103쪽


국군과 인민군의 우열상황에 따라 민심이 변하는 것이 정찬우의 눈에는 배신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 민중들 중 하나였을 나의 입장에서는 그저 안타깝고 안타깝기만 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영화나 소설, 실제 전쟁에서 벌어졌던 대량학살 사건을 알면 알 수록 더욱 그랬다. 도대체 이들의 자유는 누가 보장하는가. 그게 권력이든, 사유재산이든 가진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오히려 자유를 빼앗긴 것은 민중이었으니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감방이었다. 자살을 할 수 없도록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감시하는 곳이 감방이었다. 목숨을 끊기 위한 노력은 살아남으려는 노력보다 훨씬 힘들었다. 221쪽


사방에서 터지는 폭탄을 피해 얼어붙은 시체옆에 눕고 관에까지 들어가야 했던 정찬우에게 '살고자 하는 희망'도 '삶의 포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봐도 그의 사람됨이 느껴지지만 전쟁과 남을 짓밟고서라도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이기적이란 말조차 아까울 정도의 비이성적인 존재들은 포로가 된 그를 가만두지 않는 포로생활 동안 그에게 잠시나마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판을 통해 10년형이 선고받은 그는 다시금 전쟁한 가운데에 서있는듯한 탄식만 남겨졌다.



사실 소설을 읽는 내내 전쟁중에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상황을 읽을 때보다 박창섭과 같은 비인간적인 것(?)들의 장면이 훨씬 읽기 괴로웠다. 더 답답했던 것은 뻔히 보이는 그런 간교함과 모략을 어째서 북이나 이남이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단 전쟁처럼 목숨이 달린 상황이 아니고서도 충분히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화가나서 도대체 내가 이 소설을 왜 읽으며 화를 내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 소설의 제목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가 정찬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이미 지난 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왜 분노하면서 화를 내고 있을까. 민중들의 변심에 배신감이 아닌 동정심이 생겨난 까닭도 어쩌면 내 삶만 중요하다는 생각, 적어도 박창섭처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진 않았다는 교만이었다. 괴로워도 기억해야했다. 이 소설을 두고 조해진 소설가는 다음의 평을 남겼다.


'이 소설은 잊혀진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도한, 한 사람의 끝나지 않을 오열이다.'


이 울음을 받아낸 소설가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그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를 위해 희생되었을 많은 이들을 위해 기억해야 한다고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책을 읽기 전, 전쟁소설이 주는 괴로움과 어두움이 두려워 피하려는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고통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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