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이렇다.

고.맙.다.



작품해설 중 신형철(문학평론가)...





나의 소감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고맙다'.



오른쪽 새끼발가락 쪽에서 가늘고 가늘게 늘어난 그림자가 덤불을 넘어 어디론가 뻗어 있었다.

그림자로구나.

그때 알았다.


*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10쪽




그림자가 일어선다라는 것은 어떤 의밀까. 자살충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 마주하게 되는 '자아'이려나.

사실 이소설은 내게 있어 오래된 전자상가 음향기기 수리점에서 일하는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야기를 이야기하기에도 벅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을 현실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뇌리와 가슴에 콕콕 박히게 적었다는 평론가의 한줄 소감과 일치하기에 더더욱 고마운 소설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이 용산전자상가를 무대로 했던 안했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SNS속의 화려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가 '슬럼'이란 단어로 일축시켜버리고 외면하는 다른 쪽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리뷰를 너무 오랜만에 적으려다보니 말이 길어진다. (곧 나아지겠지.)

그런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배우고, 많이 읽은 분들께 넘기고 나는 그저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야기만 적고 싶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39쪽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책을 오래도록 부여잡고,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잠자리에서도 읽었던 것은 이들의 연애가, 무심한듯 툭툭 던지는 무재의 고백이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랑이 참 고팠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해서 만날 때 마다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비싼 레스토랑을 가지못하고 검은 봉지속 샌드위치를 나눠먹어도 마냥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연애가 고팠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경요의 [노을]이 떠올랐다. 사랑, 그거하나면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과거에 포기했던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사 마치 연기하듯 하려는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 참 좋고 부러웠다.



출근하는 길에 보고 샀다는 그것을 받아 들고, 또 보자며 돌아서서 가는 무재 씨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화분을 얹은 채로 수리실로 돌아갔다. 어느 틈에 그 자리로 돌아갔는지 유곤 씨가 입구에 앉아서 감나히 나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픕니까.

아니요.

얼굴이 빨갛습니다.  55쪽


누군가의 얼굴을 붉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요즘처럼 날씨마저 우리의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하는 세상에는 더더욱 잦은 일이다. 하지만 오롯이 '호감'과 '설레임'과 '떨림'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던 적이 언제였을까 싶었다. 소리가 나면 고개를 끄덕이는 플라스틱 떡잎 장난감을 받아들고 들어오는 은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유곤처럼 나도 그녀에게 얼굴이 빨갛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내 속마음은 순수한 유곤과는 다를 것이다. 아마도 속으로는, '당신,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나 하는거에요?'라고 질투를 느꼈을테니말이다.


전화번호를 물어보고서는 며칠이 지나도 걸려오지 않는다면 이미 그로부터 잊힌 사람이 된거라고, 그저 예의상 물었을거라고 쉬이 관계를 끊어내는 이들에게 무재와 은교의 연애방식은 꽤나 지루하고 답답할 것이다. 언제 무얼 하자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이미 틀린 약속이라고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은교와 무재의 연애는 시종일관 무계획이다. 어찌보면 어느 날은 은교가, 또 다른 날엔 무재가 느닷없이 상대방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버린다. 미안한 기색도 없고, 불편한 기색도 없다. 이 사람이 지금 나와 연애중인 것이 맞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인 나도 어느샌가 그들의 방식이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저렇게 살면서 무슨 연애냐는 우려와 걱정도 그즘에서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연애. 그래. 그것은 돈이랑 무관하다. 삼포, 사포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이는 그 감정, '사랑'은 역시나 '돈' 혹은 '현실'이란 것들로 결코 방해받을 순 없을 것 같다.


신호를 대기하느라고 무재 씨가 브레이크를 밟고 있을 때에는 차가 부들부들 떨었다.

떠네요!

떠는데요!

하며 둘이서 깔깔 웃었다. 153쪽


평론가는 말한다. 저 두 사람의 끝이 처음과 비교했을 때 다분히 희망적이라고. 과연 그럴까? 역시나 현실에 두 발을 꾸욱 내딛고 선 내게는 그 두 사람의 미래는 결코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둘 중 누구하나 꼿꼿하게 서버린 그림자에 눌려 세상과 이별할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그냥 저 두 사람의 사랑이 예쁘게 보였다. 대물림 되어버린 빚이 결국 본인 세대에서도 끝나지 못할 줄 알면서도 마음이 가는 사랑, 이 사람이 얼마나 배웠고, 얼마가 가졌는지 한 순간도 궁금하지 않는 사랑, 3만원 짜리 중고차를 타고 언제 퍼질지도 모르는 굉음을 내며 달리는 차안에서도 그 누구보다 행복한 여행을 즐기는 사랑, 그래, 그 사랑이 부럽고 예쁘다. 백의 그림자속의 그림자가 일어서든 말든 알게뭐람, 난 이런 사랑을 한다면 그놈의 그림자 따위 수백 번 나를 찾아와 나를 짓누르고 내 앞을 가로막아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마다 따라가지 말라고 붙드는 무재가, 공허한 속과 마음을 따뜻한 국물로 채워주는 은교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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