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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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은 팡쓰치와 이팅 그리고 이원이의 이야기의 사랑이야기다. 사랑이야기라고 적었지만 사실 과연 이것이 사랑인가에 대한 논의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중학생일 때 쓰치는 같은 빌라에 거주하는 학원선생 리궈화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가정도 사회도 여성이 당하는 성적 폭력은 가해자인 남성보다 피해자인 여성에게 더 큰 상처와 책임을 묻는 분위기라 어린 쓰치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피해자가 아닌 '연인'이라는 자리였다. 어린 연인이었던 쓰치는 자신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리궈화의 말을 믿고, 또 자신도 진짜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이 당한것은 '폭력'이 아닌 '연인들의 애정행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쌍둥이처럼 같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같은 책을 읽고 수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이팅조차도 눈치챌 수 없도록 쓰치의 사랑은 숨겨야만 했고, 이런 그녀의 상황을 리궈화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김없이 이용했다. 그렇게 리궈화의 욕망에, 사회의 눈가림에 이용당한 소녀들은 쓰치 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리궈화와 같은 존재의 수도 하나가 아니었다. 이원의 상황은 쓰치와는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남자와 결혼했고,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 동안은 분명 그녀는 세상에서 몇 안되는 행복한 새댁이었다. 만취상태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이원은 버텼다. 폭력으로 인해 그와 헤어지기에는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원은 쓰치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힘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나이였고, 적어도 절친이었던 이팅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던 쓰치와는 달리 쉬쉬했을 뿐 이원의 상황을 주변인들은 알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것과 묵인하는 것의 차이는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묵인하는 것도 조금의 위로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르고 던지는 비수만큼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쓰치의 상황을 전혀 모르던 이팅은 그녀를 질투하고, 그 질투심에 해서는 안되는 잔인한 말을 내뱉는다. 나중에서야 쓰치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았을 때 어째서 이팅은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해하고 괴로워하고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애써야 했을까. 이원과 쓰치의 또 다른 차이점, 어쩌면 작가인 린이한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쓴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일기를 쓰고 있어요. 글을 쓰면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언니의 말이 맞았어요. 글을 쓰고 있으면 내 생활을 일기장처럼 쉽게 내려놓을 수가 있어요. 글을 쓰고 있으면 내 생활을 일기장처럼 쉽게 내려놓을 수가 있어요. 245쪽


책을 읽던 중에 봤던 영화가 생각났다. 쓰면서 나의 일을 객관적으로 혹은 완벽하게 제3자가 되어볼 수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고, 그 사진속의 나를, 혹은 상대를 혹은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 그래서인지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다음의 대사가 생각났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 중에서.


사실 소설을 읽고나서 꽤 시간이 흘렀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딱 2가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미친듯이 뭐라도 적어야 할 것 같은, 리뷰를 적음으로써 린이한 작가에게 위로를 던지고 싶고, 그녀가 던져주고 간 것에 대해 답해야 할 것 같은 의무를 느낀 사람. 그리고 나처럼 아픈 마음으로 잠시라도 이 작품을 뇌리에서 지우고 싶었던, 비겁하지만 타인의 아픔에 대해 모르고 싶었던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사실 이 소설의 중심주제를 벗어나서 문학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다음의 상황에 대해서만 리뷰를 쓰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를 볼 때는 마카롱을 먹어야 하고, 영국 영화를 볼 때는 스콘을 먹어야 하고, 러시아 영화를 볼 때는 러시안 소프트캔디를 먹어야 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캔디를 먹다가 딱딱한 호두조각이 씹히면 꿈을 꾸다가 중간에 놀라서 깬 기분이었다. 278쪽


저렇게 맘에 쏙드는 문장이 나올 때는 웃음짓다가 이내 쓰치의 아픈 상처가 드러나는 페이지를 마주할 때면 그야말로 온몸이 가시박힌듯 아팠다. 쓰치를 바라보는 이팅의 마음으로 책을 읽었고, 또 그런 마음으로 린이한 작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예 모르는 일이라고, 그런일이 정말 있을 수 있느냐며, 소설을 통해 알았다고 해도 난 모르고 살겠다고 바둥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기어이 나는 이런 내 마음을 다 담아 리뷰를 적는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마음으로 조용히 세상 어딘가에서 폭력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사회가 외면했던 그녀들이 제발 힘내라고, 진짜 죽기전까진 결코 죽지 않는다고, 그렇게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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