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과 서쪽으로
베릴 마크햄 지음, 한유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은 형체가 없다. 낮게 걸린 별들이 빛나고 달이 은빛 안개를 휘감았을 때, 이 세상은 물이 모두 사라지고 다섯 번째 날의 밤이 여전히 제 존재가 신기하기만 해 당혹스러운 피조물들 위로 내렸을 때의 모습이 분명한 창공처럼 된다. 364쪽


베릴 마크햄. 이 책의 저자이자 여성 최초로 대서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비행한 여성 파일럿이기도 하다. 허나 위의 발췌문을 서두에 옮겨두고 시작한 것은 이 책의 다양한 면모중에 내 마음이 머물렀던 것은 그녀가 대자연안에 있을 때 겸손된 인간의 자세를 넘어선 '무'와 가까운 평온의 시선이었다. 위의 글에 이어지는 내용은 저러한 대자연 앞에서, 마치 형체조차 없는 것처럼 신비로운 상황속에서는 나도 타인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은듯한 기분이 든다는 내용이다. 헌데 그런 상황일수록 오히려 더 자세히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 열린 마음과 겸손된 자세로 자연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멧돼지, 심지어 물리기 까지한 사자들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은 인간이 가지는 오만함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동물들도 각자의 역할에 충만했을 뿐,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닌 사살되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다. 비행을 할 때 조차 길을 잃고 낙오한 얼룩말이 없는지를 찾아보고, 누군가 들려주는 우화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까지하는 순수한 그녀의 모습은 책 전체에 가득차 있다.


세상의 모든 적막들은 저마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아침나절 숲 속에서 다가오는 적막은 잠든 도시의 적막과는 다르다. 비 바람이 몰아치고 난 뒤 느껴지는 적막과 비바람이 몰아치기 전의 적막은 다르다. 84쪽


천천히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찾아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 며칠 전 태풍이 몰아치던 밤이 그랬다. 그때 당시 내가 느꼈던 적막감을 이 책에서 얼핏 보았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광활한 초원이나 대자연앞에 나를 맡긴적도, 누군가를 잃거나 고립될 수 있는 상공에 올랐던 적도 없지만 어쩐지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마치 베밀 마크햄의 인도로 나는 그 곳들을 전부 내가 가보고 느끼고 누군가 내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 것만 같다. 책의 후반부에 이 책의 표제가 되는 ' 이 밤과 서쪽으로'편을 보면 내가 환상에 빠진 것 같다고 느꼈던 삶을 살았던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비행을 하는 것이 대단한것이 아니라 자신은 비행법을 배웠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고 말이다. 거만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행동이 특별해지고, 그 삶 자체가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여길게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에 빠져들고, 또 그것이 '일'이라는 범주에 속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위엄을 갖게된다는 의미였다. 결국 어쩌면 나의 삶도 충분히 그녀처럼 특별한 삶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너무나 달콤한 환상속에서 나는 이 밤과 서쪽으로 비행했음을 느꼈다. 물론 아직은 그녀의 조종으로 이뤄진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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