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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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쓰기가 겁나는 소설인데, 완독 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기도 어려운 소설이다. 단숨에 몰아쳐 읽는 소설이 아니어서 완독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으나,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감흥이나 느낌을 몇 문장으로나마 적어둬야 할 것 같다. 이런 소설은 도저히 안 읽은 체하며 넘어갈 그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 이런 책 읽었어, 하며 꼭 홍보를 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은 책, 다른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는 책. 자꾸 칭찬이 과해진다.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이 책의 묘미는 갈피마다 박혀있는 보석같은 짧고 간결한 문장을 읽는 맛이다. 순간 순간 심호흡을 가다듬게 되는, 읽고 또 읽게 되는, 정곡을 파고드는 정확한 표현들을 대하는 맛이다. 학교 교사의 능력을 교실(수업)장악 여부로 따진다면 소설가의 능력은 소설장악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독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바쁜 일상에서 한가롭게 읽기는 더욱 어려운 소설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나니 무언가 세상이 달라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읽기 전과 읽은 후, 내 주변의 공기의 흐름이 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51쪽)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67)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속으로 들어오듯. (238~239)

 

그는 그런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로 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더 아름다워 보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붕과 벽의 모든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고, 비 오기 전 나뭇잎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까지 보이는 그런 나이. 세상은 자신을 허락하듯이 몸을 여는 거였다. 이제 남은 인생이 길지 않으니 한번 길고 절실하게 세상을 보라고, 그래서 그동안 잡고 있던 것들을 세상이 놓아주는 것이었다. (291)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둘 중 한 명이 그 중심부를 가져가죠."(351~352)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 (353)

 

"나는 언제나 중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했어." 네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라고." (374)

 

 

신형철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역시 신형철의 평은 '정확하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문장을 잘근잘근 씹는 맛을 느낄 수 있었으니 번역하신 분에게도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다. 덕분에 잘 읽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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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신간소식에 설터의 산문집이 보여서 간만에 다시 설터의 소설들을 읽어보자 했는데 이런 리뷰 만나니 반가워요. ^^
설터의 소설은 줄거리보다는 분위기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정말로~

nama 2018-11-09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분위기와 곱씹는 문장이지요. 신간 소식, 저도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