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1.

'나'는 이름이 독특하고 예쁜 어린 여자이다. 맥심도 좋아하는 그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책 제목은 <레베카>이지만, 레베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입을 빌어 그 누군가가 평가하는 레베카가 그려질 뿐이다.

 

처음엔 스산한 느낌이다. 우울한 잿빛 하늘 같은. 모든 일이 끝나고 맥심과 '나'가 어느 시골의 여관에서 머무르면서 '맨덜리 저택'의 기억을 불러온다.

 

처음은 '마이 페어 레이디'나 '귀여운 여인', '제인 에어'처럼 평민 출신인 어린 여자가 귀족의 마나님이 되는 행운을 거머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2.

읽는 내내 맥심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나'를 봤을까. 호텔에서 반 호퍼 부인이 아는 체를 하기 전부터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사실은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잊고 싶어 떠나 온 몬테카를로에서 레베카와는 완전히 다른 순수하고 어린 여자를 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길이 가는거다. 거만한 귀족 노부인 옆에서 그 여자는 더 빛나고 순수해 보인다. 어떤 관계일까. 딸일까..? 딸이라면, 왠지 호감이 사라질 것만 같다. 저 노부인 밑에서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로 자랐겠지. 하지만 딸은 아닌 것 같다. 너무 순수하고 어리숙해 보인다. 말끝을 흐리고, 무언가 주저한다. 귀엽다. 보호해주고 싶다. 식당에 있구나. 우연인 듯 식탁을 차지하고 신문을 펼쳐든다. 반 호퍼 부인. 유명한 여자다. 작위나 재산이 있다 싶으면 무조건 아는 체를 하고 보는. 나에게 온다. 그녀를 소개시켜 줄까..

 

무표정하고 깔끔한 신사인 맥심의 속마음은 저렇지 않았을까. 귀족들 속에서 자란 그가 겉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듯 해도 어린 여자 앞에서 초조해지는거다. 좋아하니까. 자신에게도 레베카에게도 없는 순수함을 가진 저 빛나는 여자애를.

 

사랑한다. 그녀와 함께 맨덜리에서 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그 곳을 그녀도 좋아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어리다. 나보다 젊은 남자를 원하지는 않을까. 난 나이도 많고 재미도 없을텐데... 바빠서 그녀와 함께 있어주지도 못한다. 나는... 죄를 지었다.

 

잭 파벨이 다녀갔다 한다. 탐욕에 가득 찬 건달 같은 그 놈이 그녀를 유혹하면 어쩌지? 그 개 같은 놈이 이 저택에 발을 들이다니...

 

3.

아이러니하게도, 맥심은 '나'의 어리고 순수한 모습에 반했으나 힘든 일을 함께 겪으며 어른이 된 '나'에게 의지한다.

 

이런 맥심의 마음도 알지 못한 채, '나'는 레베카를 질투하며 맥심을 의심한다. 아직도 레베카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며.

 

나를 사랑하나요..?

 

물어볼 수 없었다. 레베카를 잊지 못한다고 할까봐. 그저 혼자가 싫어서 결혼한거라고 할까봐. 하지만 물었어야 했다. 사랑하니까. 사랑받고 싶으니까. 행복하고 싶으니까.

 

두려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그저 떨던 '나'는 나중에서야 그의 진심을 듣게 된다. 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텐데. 그랬더라면 맨덜리 저택은 청순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삶을 다채롭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런 일들이 맥심과 '나'를 하나로 묶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신분과 나이를 넘어서 말이다.

 

4.

레베카.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아름답고 당찬 그녀. 누구보다 드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 무슨 일이든 자연스럽게 처리하고, 어떤 남자에게도 굽히지 않는 그녀.

 

맥심에게 맨덜리 저택과 평판이 제일 중요했다면, 레베카에게는 자유가 제일 소중했다. 여자라서 하지 못하는 것들, 갖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던 그녀는 그것이 못내 억울했을 터였다. 만약 결혼하지 않아도 재산이며,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면 그녀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자 혼자 사는 삶을 -그것도 귀족이, 수녀가 아닌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린다면 상관 없었겠지만, 손에 쥔 것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남자는 다 가지는데 여자는 왜 안되나) 그래서 그녀는 맥심과 결혼했다. 레베카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 그와.

 

5.

많은 이들에게 존재감을 뿜어내며 사랑받는 그녀는 멋진 여자였을 것이다. 맥심과 '나'의 잣대로는 그녀를 평가할 수 없다. 맥심에게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 더 야심있는 존재, 다루기 어려운 존재였을테고. '나'에게 그녀는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맥심의 과거를 아는 존재이니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드는 생각은 '위선'이었다. 로맨스로 출발해서 스릴러로 가다가 마지막은 귀족 사회의 위선이 드러나는 거다. 맥심이 무슨 말로 레베카를 욕하든, 둘은 같으니까. 맥심에게 맨덜리가 아닌 다른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대도, 맥심은 레베카를 욕했을 것이다. 물론 레베카가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결국 맥심은 가장 큰 죄를 지었고, 레베카가 이겼다.

 

6.

'나'가 댄버스 부인에게 먹혀 저 어두컴컴한 바다에 잠기려고 하기 직전에 들려 온 커다란 소리는 이 책의 완벽한 전환점이다. 이 일로 인해 맥심의 가면은 부서지고, 댄버스 부인은 길을 잃으며 '나'는 어른이 된다. 잔혹한 진실은 곧 어른이 되려면 통과해야 할 관문이 되어버렸다.

 

7.

그러나저러나, 나는 로맨스를 사랑한다. 초반부, 둘의 달달함이 너무 좋다. 정말 기억을, 행복한 기억을 병에 담아둘 수 있으면 좋겠다 느낄 정도로.

"기억을 병 속에 담아두는 발명품이 나온다면 좋겠어요. 향기를 담아두는 향수병처럼 말이에요." 내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기억은 색이 바라지도, 희미해지지도 않겠지요. 언제든 원하면 병마개를 열고 기억을 생생한 현실로 만드는 거예요."나는 그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주시했다.
"삶의 어떤 순간을 병에 담아두고 싶은 거죠?" 그가 물었다. 놀리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다가 무심코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을 담아두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요."
"그 말은 오늘 하루에 대한, 아니면 우리 드라이브에 대한 찬사인가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그가 마치 짓궂은 오라버니 같았다. (pp.56-57)

"~나는 맨덜리로 가야지.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테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소."
"그런 식의 농담은 마세요. 이제 전 기차표를 알아보러 가야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니, 나랑 결혼해달라고 하는 거요, 멍청한 아가씨."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전 청혼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돼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우선 저는 당신과 같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요." 내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있는 세상이 무엇이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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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4-1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뮤지컬 장면이 눈앞에 고스란히 그려지고 넘버들이 들리는 듯..

꼬마요정 2017-04-17 10:43   좋아요 0 | URL
슬프게도.. 제가 아직 뮤지컬은 못 봤답니다. ㅠㅠ 올해 하는 건 꼭 보려구요.

다락방 2017-04-1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꼬마요정 2017-04-17 10:43   좋아요 0 | URL
넹넹 꼭 읽어보세요~ 저 레베카 읽고 대프니 듀 모리에에게 반해서 그녀의 책을 세 권 더 샀습니다. ㅎㅎㅎ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