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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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루과이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의 연설을 접했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연설이었다. 개발이 행복을 막아서는 안 되며,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고. 빈곤한 사람은 조금만 가진 사람이 아니고 욕망이 끝이 없으며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는 우루과이 군사 독재 시절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혔고, 심지어 책조차 허용되지 않는 독방에 7년을 있었다고 한다.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고 책도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견뎠을까. 제정신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B박사 역시 독방에 갇혀 있다 나온 사람이다. 그는 나치에 잡혀 아무도 없는,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혔다. 그가 그 곳을 나올 때는 나치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서일 뿐이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지 못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하고,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정신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긴 침묵은... B박사가 가진 B박사다움을 잃어버리게 했다.

 

호세 무히카 대통령과 B박사의 경우는 확실히 다르다. 무히카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하고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지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 7년을 견뎠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우루과이 국민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할 지를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B박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단지 나치가 찾고자 하는 재산을 숨겨 준 법률가일 뿐이다. 뭔가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치에 결연히 대항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나치를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나치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도 않았다.

 

독방에 갇힌 채 온전히 혼자 있어야 한다면...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을, 두려움을, 고독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깨우침을 위해 스스로 해도 힘든 마당에, 강제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정말 무서울 뿐이다.

 

첸토비치는 그런 면에서 나치와 닮았다. B박사의 두려움을 간파하자 나치와 같은 책략을 쓰기 시작한다.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 체스판을 두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B박사는 마치 갇혔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정신을 분열시킨다. 이제 B박사는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겠지. 나치와 첸토비치는 한 사람의 가능성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체스 이야기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고독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그리고 있다면, 낯선 여인의 편지는 한 남자의 무책임함과 한 여자의 순정을 써 내려간다.

 

어느 날 갑자기 소설가 R에게 수십 장에 달하는 편지가 한 통 온다. 무언가 아련한 느낌과 비통함이 자리한 편지에는 한 여인의 사연이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항상 사랑했지만 사랑 받지 못했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저를 결코 모르는 당신께'라는 수신인에 호기심이 동한 그는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한 여인의 삶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를 만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의 시간들이 말이다. 소녀일 적 그의 따스한 눈빛과 상냥한 음성에 사랑에 빠진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 그 어떤 남자를 만나도 그녀가 사랑한 건 오로지 R 단 한 사람 뿐이었다.

 

보통 여자에게 바라는 절개라는 것이 육체에 치중되어 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녀는 끝까지 순수하게 R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그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풍족하게 키우기 위해 그녀는 고급 창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길, 그 스스로가 기억해내길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책임한 R은...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는 순간까지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피천득 님의 수필 '인연'이 떠오른다. 일생을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도 못 만나기도 한다는.. 아사코와는 세 번 만났고, 그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그녀는 소설가 R을 만나 행복했다지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당신은 결코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단코 그럴 겁니다. 그것이 제 운명입니다. 그것이 제가 죽어서도 껴안아야 할 운명이겠지요. 전 당신을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제 이름과 저의 모습을 모르는 그대로 그냥 떠나겠습니다....(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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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5-02-0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갑자기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ㅠㅠ
감기조심하시고요, 편안한 저녁 되세요.^^

꼬마요정 2015-02-10 14:40   좋아요 0 | URL
봄이 온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미련 많은 겨울이 샘이 났나봐요.. 그래도 오는 봄은 막을 수 없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려구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