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알라딘은 나에게 한 해의 기록을 보여준다.

 

아아,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보고 싶기도 하다.

 

제일 먼저 이만큼의 책을 '만났다'고.. 어쩐지 책장을 더 샀는데 꽂을 데가 없더라니...

 

내가 사랑한 작가가 '윌리엄 세익스피어'라고. 아직 못 읽은 세익스피어 작품이 많은데, 반성하게 된다. 하긴 반성할 게 한 두개도 아닌데 뭐.

 

이렇게 반성을 시작해본다.

 

매일 뭔가를 쓰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 해, 읽은 책들 리뷰 적는 것도 못 해, 매일 읽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 해... 아, 못하는 것 투성이 투성이 투성이.

 

읽고 싶은 책을 찾다보면 번역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덕분에 원서를 사긴 했는데, 한 장 읽는데만 어마무시한 시간이 걸리는거다. 다시 한숨만 내뱉으며 나의 무지를 탓하며 책을 덮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순간이랄까. 그래도 그녀는 사전을 갖다 놓고 끊임없이 읽고 쓰고 했지만, 난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상태라 영어 사전을 갖다 놓고 끊임없이 읽고 쓰고가 안 된다. 쓰는 건 당연히 생각도 안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예전에 한창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읽을 때가 생각난다. 그 때, 그의 말을 독일어로 이해하고 싶었는데... 좋아하는 작가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같은 언어로 쓴 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다른 언어로 쓴 글은 얼마나 어려울까. 낯선 언어로 쓰여진 책이 번역도 안 되어 있다면... 거기다 그 언어가 적당히 낯설다면, 그 낯선 언어가 주는 낯선 느낌은 '절망'에 가까운 비참함이 되어 돌아온다. 영어 공부를 참 많이 했는데 아직도 난 영어가 낯설다. 츠바이크는 독일어로 글을 썼는데 난 왜 영어를 이야기하는가. 역시 내 나라 말로 글을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

 

내가 받은 굿즈도 나온다. 아, 그러고보니 '낯선 땅 이방인' 유리컵을 얼마 전에 깨먹었지. 다시 눈물이 고인다. 굿즈 때문에 산 책도 제법 되는데, 마음에 드는 굿즈는 그냥 팔아주면 좋겠다. 다시금 '낯선 땅 이방인' 유리컵에 애도를 표한다. 

 

리뷰를 쫙 쓰고 싶었는데,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면서 미뤘더랬다. 그래서 정리해보니.. 그냥 포기할까... 아니, 무슨 이렇게 좌절과 후회가 많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열심히 읽은 책들과 열심히 쓴 리뷰가 있는데.. 게으른 자여.. 이렇게 항변하는 나를 밀어버렸다. 밤에 혼자 잘 논다...

 

 푸시킨과 플로베르라니. 단편과 장편의 차이만큼이나 다를 것 같았는데, 마음 속 깊이 숨겨두었던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탐욕, 허영... 내가 가진 수많은 단점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꼭 리뷰를 써야겠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자꾸 떠올랐다. 축축하고 어두운 느낌이 들진 않았지만, 트리니다드의 쨍한 날씨 같은 환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지프 콘래드가 그린 콩고 같다고나 할까. 식민지가 가진 무기력감이 깔려 있고, 그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 말 많은 사람들... 거기서도 여자들은 참 억척스럽게 살았는데, 로라는 자신의 딸이 죽자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도 무기력해지는 느낌이다.

 

 

 

 

 

파우스트는 읽을 때마다 인간이 가진 호기심과 갈망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괴테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도.

 

결국 파우스트는 구원 받았으나, 누가 구원한 것일까. 공동체적 삶과 세계 시민을 위한 삶은 어떤 것일까. 온갖 부와 명예를 다 누려보았으나 결국 선택한 것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도 성진도 팔선녀도. 사회가 정해놓은 질서에서 최고 우두머리는 아니더라도 그런 이들을 가볍게 여길 수 있던, 오히려 그런 지위가 필요하지 않던 삶이었는데 다 던졌다. 이 생의 안락함보다 영혼의 안락함을 선택한 이들. 다른 세상을 경험한 이들은 결코 이 세상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동화나 삶이나... 동화가 삶이고 삶이 동화인 것일까. 삶이란 이야기가 주는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아무리 꾸며대도 삶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려지지 않는다. 하긴, 그림자를 가리려면 더 큰 그림자가 혹은 어둠이 필요할테니. 그림자가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건 '희망'이란 이름일지도 모르겠고.

유령 이야기가 빠지면 어쩐지 찰스 디킨스가 아닌 것 같다. <닥터 후>의 닥터도 찰스 디킨스 만나고 왔는데. 테닥이었나 맷닥이었나.. 그 에피소드 다시 찾아봐야겠다. 여튼 내가 좋아하는 디킨스. 도덕적인 삶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모두가 도덕적일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의 도덕적 행위가 가진 파급력은 크니까. 누구나 칼턴이나 핍처럼 실수하고, 막 살고, 헛된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칼턴처럼 희생할 수도 없고, 핍처럼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감사해하며 남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환멸을 느낄 때, 이 세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을 때 그들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그리고 행한 대로 받게 될 거라는 믿음을 준다. 계속해서 탐욕을 부리면 잘 살 것만 같아도 불레만 씨처럼 될 거라고. 아무도 없는 빈 방, 거대한 탐욕이 또 다른 실체가 되어 자신을 짓눌러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난 이 책이 너무 좋다.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 좋다. 책이 나에게 구애하는 것 같다. '난 너에게 환희를 줄 수 있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 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아주 열심히, 아주 행복하게, 가끔은 쓸쓸하게.

 

 

 

 

 사람들은 쓸 데 없는 일을 하고, 쓸 데 없이 참견하고, 쓸 데 없이 걱정하고, 쓸 데 없이 돈을 벌고, 쓸 떼 없이 돈을 쓰고... 참 쓸 데 없이 살면서 행복하길 바란다. 도대체, 어떻게 2천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인간은 참 한결같을 수 있는가.

 

세네카를 읽은 나도 참 한결같이 쓸 데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가. 그래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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