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카페 라테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커피는 나와 맞지 않지만, 우유의 부드러움과 캐러멜의 달콤함은 다른 영역이니까. 커피는 다만 거들 뿐 소소한 첨가물에 불과하달까. 생크림을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고봉으로 쌓아 올려도 맛있으면 0칼로리라는 불변의 계산법도 있으니, 체중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는다.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런 탕약을 왜들 마시는지 생각했던 내가.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노곤하던 혈액은 혈색을 되찾는다. 입안에 맴도는 깔끔함과 개운함은 날마다 나를 유혹한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퇴근 후 엄마로서의 일정까지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터디 카페에서이다. 적당히 말똥말똥한 밤이어도 괜찮다. 나의 낮은 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니까. 여기에 오려고 잠시 직장에 9시간 정도 다녀오는 거니까.

고정불변일 것 같던 취향이 변하는 중이다. 초콜릿, 어리굴젓 같은 단짠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다고?!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여기던 입맛이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라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 없게 된다. 현재의 세상만이 절대 월드라 여겼던 시절의 오만함이다.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도 변하고 있다. 도미노 현상인 듯 인간관계의 농도도 서서히 달라지는 중이다. 내가 이런 사람과 그토록 친밀했다고?! 절대 그럴 리 없는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히 스케치하여 세상이 변화해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날개에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라는 저자 소개가 있다. 저자 송길영은 사람들의 검색기록을 토대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한다.

그는 지능화와 고령화를 사회 변화의 주요 축으로 언급한다. AI 최적화 시스템에 따라 일자리가 변화하고, 효도의 종말이 나타난다고 전망한다.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본다. 기존에 없던 존재, 핵 개인의 출현이다.

물질의 세계에도 핵이 있다. 핵이 처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다. 원자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이던 시기가 먼저이다. 달리기의 출발선처럼 원자는 늘 시작점이었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발견되기 전까지. 쪼갤 수 있는 입자가 되면서 원자는 근본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보다 더 작은 쿼크가 등장하는 순간, 원자는 또다시 뒤로 밀린다. 핵의 세계가 세상을 향해 열린다.

핵 개인이 처음부터 존재한 건 아니다. 조부모로부터 부모와 자식들이 생활근거지를 공유하던 대가족이 먼저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거대한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핵가족이 된다. ‘이 붙어 있지만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사회로 나아가는 개인의 출발점은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는 원자가 쪼개지듯, 그래서 흩어지듯, 결국 홀로 서는 핵 개인의 새로운 시대를 건넌다.

 

새로움은 기존 사람들에게 종종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외할머니께서 잔액이 남은 버스카드를 주셨어. 이제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쓰래.” “티머니페이로 등록해서 사용해, 엄마. 온다택시 어쩌구 티머니GO 저쩌구 마일리지 쭝얼쭝얼...”

큰딸이 택시 호출 앱을 핸드폰에 깔아준다. 카카오 택시를 접하면서 느꼈던 생소함이 다시 구현된다.

좀 어렵다.” “엄마! 하나도 안 어려워. 공항버스 어쩌구 고속버스 저쩌구 지원금 쭝얼쭝얼...”

설명을 들어도 주춤거려지는 신문물이다.

기시감이 든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택시를 잡으려 할 때의 일이다. 도롯가에서 두리번거리시며 팔을 들어 올리시는 80대 부모님. 예약 문구를 매단 택시 한 대가 휭 지나간다.

요새는 택시 잡기 참 힘들어.” “엄마, 양반콜 부르면 금방 오는데, 전화할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예약 택시 몇 대를 구경하는 동안, 살짝 답답해진다. 결국 콜택시를 부른다.

당신들이 접하는 생소함과 내가 느낀 답답함이 큰딸과 나 사이에도 고스란히 복제되었으리라.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보이는 분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태운 기차는 점점 빨라진다. 미래를 향해 달리는 동안 변화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변화는 당장 학교에서 직접적인 체감 온도로 다가온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예전 아이들은 안 그랬는데.”

복도를 걸어가며 라떼를 찾는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게 세대 차이지. 요즘 발령받은 20대나 30대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길걸?”

동료가 말한다.

체감하는 온도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세대가 변했건 시대가 변했건 분명한 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시작 지점을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변화 또한 노을의 그러데이션처럼 자연스레 물들어 가니까.

아이들은 점점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간다. 게임만 해도 이제 유저들은 동네와 국가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된다. SNS에 실려 보이지 않는 연결이 지구를 휘감는다. 그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예전에는 안 그랬던 아이들을 복기하는 횟수가 잦아진다. 괴리감을 느끼는 내 모습을 돌아본다. 사고가 점점 경직되어 가는 걸까. 이상적인 모습을 가둬놓고 고정된 틀을 고집하고 있나.

 

완고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론을 내리는 순서에 있다. 답정너랄까. 처음부터 스스로 정한 정답이 있다. 그다음에는 정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찾아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형이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도 코팅한 종이에 물 뿌리는 듯 말방울이 흩어진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살아온 배경과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결론을 내리는 거니까. 나의 말이 틀리지 않듯, 그의 말 역시 그렇다. 다만 완고함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3장에서는 직장 상사의 라떼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이니 빠른 환경 변화에는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경고한다.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완료형 회고록의 삶을 살지 말고 지나간 권위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함을 강조한다.

삶은 OX 선택형이 아니다. 틀린 답이 없다. 제각기 다른 답을 작성할 수 있는 서술형이다. 100M 일직선 달리기가 아니라 원형의 룰렛에 가깝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의 삶의 문제에 허락을 논할 수 없다. 골프 경기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갤러리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삶은 스스로 걸어야 하는 각자의 몫이니까.

 

우리 나이 또래에는 현직에 있을 때 자혼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드물 거예요.”

맞아요. 예전에 비해 경조사에 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어요.”

연로하신 부모님도 챙겨야지, 요즘 취업도 어려운데 자식도 신경 써야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40대 직장 동료의 결혼을 앞두고 사무실에서 오가던 말이다. 20대 후반의 미혼 자녀들과 80대의 노부모가 있는 분들이다. 올해의 사무실 구성원은 유난히 비슷한 또래가 많아서인지 고민의 지점들이 많이 일치한다.

자녀들의 결혼보다 발등의 불은 취업이다. 갈수록 취업의 문이 좁아지니까.

요즘은 취직만 해도 효자예요. 효도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제 앞가림만 잘하면 좋겠어요.”

맞장구치는 말들이 오간다. AI 시장의 확대로 인한 직장 문화의 변화가 2~3장에 걸쳐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회적 기여가 동반되는 일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자신을 현행화해야 함을 권유한다. 하나의 장르가 되도록 고유함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자식으로부터의 부양은 아예 기대하지 않으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의무로 떠안은 나이대이다. 위아래로 부양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다른 손은 차가운 물에 담그고 있는 사람인 양 체감하는 세상의 온도 차가 가장 큰 나이, 지금의 50대인 듯하다.

 

효도의 종말이라는 4장의 제목을 보며 속마음을 들킨 듯 움찔한다.

이제 효도를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어. 내가 마지막 효도 세대가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타당함이 막연하게 흐릿한 생각에 선명한 선을 덧씌운다.

효도의 끝이 개망나니 자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족도 남처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존중하는 매너를 장착하라는 거다. 오히려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관계가 아름답다는 것. 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니까.

저자에 의하면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완고함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한글자에 나오는 문장이 떠오른다.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한 글자, ‘이다.

‘ “불이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불이 나를 삼키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섭지 않은 말은 무엇일까.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는 사람은 하품만 나오는 말은 무엇일까. “불이었다.” 이미 재가 되어 들꽃 하나, 풀잎 하나도 삼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늘 과거를 사는 바보들은 나도 한때 불이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한글자, 정철, p284~285)

 

무의식적으로 불이었던 기억을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이듦의 미래를 그리는 4장에 공감의 시선이 머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필요하니, 내 존재의 의미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격려가 따뜻하다. 왜 옛날만 후회하고 지금은 함부로 사느냐는 문장이 제법 서늘하다.

몇 번이고 읽으며 마음에 새긴 내용이 두 군데 있다.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멋진 사람이 나이가 든 것’,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라는 문장들이다. 멋진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진정성으로 고유한 서사를 만들 것. 변화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방법이다.

핵개인은 자신의 삶과 사회 모두에 책임을 다하는 존재이다. 옛날 사람이라 핵개인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다. 당신도 나도 이미 원자 단계를 지나 핵개인으로 쪼개져 있으니까. 이를 인지하고 홀로 서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을 뿐이다.

나의 의지로 내린 선택은 새로운 세상으로 삶을 이끈다. 라떼에만 머물렀더라면 아아의 깔끔한 세계를 평생 몰랐을 터이다. 무난하게 잘 걸어왔다며 평지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낭떠러지 앞에서 주춤거릴 건가. 일단 한 발을 과감하게 내밀면 어떨까. 당신 어깨에 달린 날개가 펼쳐지는 희열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로움은 발을 떼지 못하면 결코 깨닫지 못할 무게로 살며시 접혀있으니.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12-14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한 때 카라멜 마키아토의 맛에 반해 이를 맛나게 내놓는 가게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어요. 당시엔 온통 머리속에 카라멜 마키아토 뿐이었죠. 당시 제일 맛있는 곳은 엔젤리너스였는데, 이 가게 없어졌지요.ㅠㅠ 지금은 입맛이 변했는지, 생각이 변했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만 찾지요. 결국 개인의 취향 변화는 호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해요. 호기심이 없다면 그 한 곳에만 머물기 쉽답니다.

나비종 2023-12-20 20:03   좋아요 0 | URL
저도 커피숍에만 가면 카라멜 마키아토만 마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당충전이 필요할 때 마시기는 하지만 이제는 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죠.^^
엔제리너스가 없어졌군요. 저희 동네에는 매장이 없어서 없어진 줄도 몰랐네요.
호기심... 공감합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듯 크든 작든 방향의 전환을 위해서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용기가 필요한 듯합니다.^^

호시우행 2023-12-21 0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행복하세요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생명은 세포분열을 한다. 몸집을 크게 하거나 생식하거나 저마다 목적을 품고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 세포분열이 거듭될수록 유전정보를 담은 염색체의 말단은 짧아진다. ‘텔로미어라 부르는 부위이다. 텔로미어가 소멸하는 순간 세포의 생명은 끝난다. 죽음으로 향하는 노화가 시작된다.

식품의 유통기한처럼 나의 세포 역시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으리라. 환경에 따라 다소 연장되거나 단축된다 해도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나의 몸은 달려갈 터이다. 잡을 수 없는 시간처럼 말이다.

현재로서는 텔로미어의 단축 속도를 늦추는 방법뿐이다.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식생활, 운동, 수면 등 건강한 몸을 위한 일반적인 권장 패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집 주변에 녹지가 많으면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속도가 느려져 생물학적 연령이 2년 이상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식물은 역시 버릴 게 없는 완벽한 식품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인가. 녹지까지는 아니지만 출퇴근길에 나무 곁을 지나간다.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가끔 나무가 말을 거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젯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내 잎이 이만큼이나 바닥에 떨어졌단다.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인 양 나무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아깝지 않니?

가을을 품은 나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한다.

-때가 되어 떠난 건데, . 할 일을 다했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나무도 나처럼 숨을 쉬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삭막한 도시를 유영하는 침묵에 둘러싸여 쫓기듯 달려가느라 초록빛 숨결이 물결치는 장면을 휘리릭 넘겨버려 왔나. 눈앞에 놓인 책 표지의 초록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호흡이 느려진다.

 

겉표지의 무성한 초록 아래로 나무를 응시하는 단 한 사람과 그의 그림자가 시선을 끈다. 옆으로 누운 느낌표 같다. 단 한 사람. 마음을 집중하게 만드는 문구이다.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일까. 내용이나 맥락을 떠나 단 한 사람은 어떤 이를 연상케 하는가.

단 한 사람을 주재료로 상상의 요리를 펼친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 남는다면 어떤 이가 남을까. 당신 곁에 단 한 사람만 남을 수 있다면 지금 누가 떠오르는가. 나를 가장 아껴주는 단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은 누구인가.

러브스토리를 짐작한 건 나만의 상상이었던가. 책을 읽을수록 나의 가정은 허물어진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핀 조명이 내리쬐는 영역에 있지 않을 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보다 광범위하다. 가족, 소외된 사람들,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랑을 폭넓게 다룬다.

 

소설단 한 사람은 나무를 매개로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몽환적인 설화 느낌도 나고 판타지 소설의 외피를 입은 듯하지만, 지극히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통찰하는 시간을 건넨다.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 주인공 목화에 이르기까지 모계로 이어지는 똑같은 과업은 수천 년을 생존하는 나무의 능력과 연결되면서 시작된다. 세 사람이 미션을 바라보는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외할머니에게는 기적, 어머니에게는 지옥이다. 주인공 목화는 이 일을 중개라고 표현한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얼핏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언제더라. 역시 희미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쑥스럽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말을 삼켰던가.

 

죽음 이후에 남을 나의 흔적은 무얼까. 물건을 정리하면서 시곗바늘을 상상한다. 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시각을 가늠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은 물건의 유통기한은 언제일까. 내 몸을 이루는 세포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허탈한 건 쓰임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으로 툭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가장 먼 듯하면서 가깝다. 삶과 죽음을 1부터 100까지의 숫자로 표현하라면 삶은 1, 죽음은 100이라고 여긴다. 이들 사이의 거리가 나에게만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자만한다. 흔한 착각이다.

삶의 범위는 1부터 99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퍼져있다. 언제 도약적으로 뛰어 99가 될지도 모른다. 무작위로 던져지는 주사위처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99도의 물이 100도의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불현듯 온다. 작가의 표현처럼 느닷없는 죽음, 말도 안 되는 일, 눈 깜빡할 사이에 생사가 갈린다.

 

박스 접는 AI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뉴스 속의 노동자가 떠오른다. 01로만 작동되는 로봇에게 눈앞의 대상은 흑백 화면 속 음영으로만 존재한다. 로봇은 생명과 생명이 아닌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안대를 두른 채 거침없이 팔을 휘두르는 거인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순간적으로 섬찟하다.

뉴스는 하루에도 몇 건씩 말도 안 되는 죽음을 쏟아낸다. 소설 속 문장이라면 차라리 좋을 죽음을 토해낸다. 이토록 허탈하고, 찰나적인 끝맺음이라니. 더욱 안타까운 건 세상을 향해 드러나는 죽음보다 드러나지 않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늘진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사그라드는 죽음을 조명한다. 노후 설비를 교체하다가, 자재를 옮기다가, 조형물을 설치하다가, 이물질을 제거하다가, 청소하다가 죽는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일깨운다.

 

사고는 흔하고 무작위로 일어나는 죽음은 보통 명사인듯하다. 죽음은 언제나 막연한 끝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겨왔다. 블러 처리된 그림처럼, 그저 삶에서 멀리 떨어진 배경처럼, 아득한 지평선처럼 외면하고 살아왔던 듯하다.

대부분의 죽음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 터이다. 그 순간이 온다면 간절하게 타임머신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에게 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삶의 분명한 종착점은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특별한 고유 명사로 변화하니까.

이 책에서는 죽음이라는 낱말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죽음의 속성을 샅샅이 묘사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경고한다. 이와 더불어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도 언급한다. 예컨대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다 맞는 죽음 같은 경우이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이라.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이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후회 없는 지금으로 채운 삶, 영원한 오늘을 누려온 삶을 살아왔다면 미소 지으며 그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삶이라면, 오늘 지금의 삶을 걸어간다면 가능할 수 있겠다.

사실 인간의 언어로 죽음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죽음은 언제나 말보다 위에 있으니까. 갈팡질팡하는 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이러니한 건 죽음에 접근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는 거다. 빛을 건너 어둠을 향해 다가가듯.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다. 타인의 죽음에 개입하게 된 주인공 목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깨닫는다. 중요한 건 따로 있음을, 운명에는 자신만의 몫이 있어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그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삶이 고유한 만큼 타인의 삶 역시 그렇다. 각기 특별한 삶은 관계로 얽힌다. 소설 속 가족, 연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가는 감정의 농도를 생각한다. 관계의 키는 옆으로 자라 상대의 심장을 향한다. 두 개의 심장에서 나오는 파동이 공명한다. 음악 같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면 감정은 짙어진다.

주인공 목화는 자신이 목숨을 구한 이들의 삶을 거울인 듯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자기가 자기를 구해야 함을, 누군가 대신 삶을 살아주는 게 아님을,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니 상대의 삶이 어떤지 알 수 없으므로 쉽게 판단하지 말 것을 깨닫는다.

죽음에서 출발한 그녀의 결론은 삶이다. 저자의 결론이다. 삶은 죽음과 탄생 모두를 담는 그릇이라고. 둘이었다 하나가 된 나무처럼 나눌 수 없는 거라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소설의 끄트머리가 삶을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원하는 삶과 원하는 죽음은 동일한 의미를 품으니까.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 장면을 떠올린다. 부드러운 속살과 따끔거리는 가시가 공존하는 음식 말이다. 맛있는 생선 살을 남김없이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잘한 통증을 감내해야 한다. 세상에는 정반대의 요소가 공존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삶이 고통이자 환희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포가 모여 보이는 생명체를 이룬다. 구름방울 백만 개는 빗방울 하나를 이루고, 빗방울들이 모이면 폭우가 쏟아진다. 인류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단 한 사람은 분명히 존재 한다. 작가는 그 한 명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텔로미어는 염색체가 풀리는 현상을 막아준다. 유전정보를 지켜주는 울타리이면서 세포의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물질이다. 마지막이 있기에 과정은 의미롭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1째줄: 기억하기 위해 사랑~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5째줄: 언젠가 언제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아한 언어
박선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창작물에는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울림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는 이는 필요한 메시지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 감상자의 마음에서 예술은 다시 창조된다.

이미지를 매개로 하는 예술은 울림의 차이가 특히 큰 분야이다. 보는 순간 빠른 속도로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작품과 감상하는 이의 심장이 공명하는 순간이다. 경험치가 각기 다르니 심장은 다른 진폭으로 뛴다. 찬찬히 살펴보면 처음과는 느낌이 달라지더라도 첫인상의 강렬함은 내내 여운으로 남는다.

2차원으로 압축된 이미지에 촘촘히 담긴 이야기를 상상한다. 입체 조각보다 평면으로 된 사진이 더욱 인상적인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농축된 서사 때문이리라. 거기에 나의 서사가 더해지면 또 다른 파동이 만들어진다.

우아한 언어는 사진을 매개로 한 아트디렉터 박선아의 에세이이다. 저자에게 우아한 언어는 사진이다. 카메라를 처음 잡던 순간부터 렌즈 안에 세상을 담는 과정에서 사진이 그녀에게 들려주던 말을 조근조근 옮겨적은 글이다.

 

말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닌데도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란한 세상이라는 프롤로그의 문장에 공감한다. 문유석이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데이 셔퍼트의 세 황금문을 떠올린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말하기 전에 스스로 묻는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닌데도 말을 하고자 함을 깨닫는다.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꿀꺽 삼킨다.

글을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닿는 순간 스르르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 봉처럼 Del 키를 누른다. 불필요한 부사어와 문장들을 모니터가 삼킨다.

언어 이전에도 소통은 있었을 터이다. 몸짓과 눈빛으로 마음을 표현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침묵의 언어들을 세심한 눈길로 살피고 해석했을까.

작가가 사진을 찍었던 순간은 분명 크고 작은 소리로 북적이는 풍경이었으리라. 사람들이 담긴 거리, 집중하여 일하는 사람들, 하다못해 커다란 나무로 다가가는 바람이라도 살며시 고요를 깨뜨렸으리라.

사진에서는 냄새나 촉감, 맛도 제거된다. 빛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사진을 보며 MR을 제거한 음원을 떠올린다.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할 때 마음의 초점은 선명해진다. 진공을 거니는 물체를 보는 듯 고요로 둘러싸인 여백에서 피사체는 도드라진다. 시각적인 요소로만 표현된 시공간의 파편이 된다.

 

까마득한 우주의 탄생 이래로 시간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사진에는 본질적으로 찰나의 간절함이 담긴다. 잠시나마 빛과 함께 시간을 붙잡았다는 증거이다. 그 순간 마음을 투영하기로 판단한 작가는 신속하게 셔터를 눌러 공간을 자른다. 섬세한 감정은 오롯이 찍는 이의 것이다. 숨은그림처럼 마음이 담긴다.

사진에는 찍는 이의 마음이 반영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면 나를 찍어준 사진을 보면 된다던가. 환하게 웃는 나의 표정을 잘 찍어주던 사람이 떠오른다. 나의 웃음을 마음에 담고 싶었던 걸까.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이 보는 순간 감탄하게 되는 작품은 아니다. 카페에 혼자 앉은 노신사의 뒷모습, 선상 유리에 비친 표정, 건물 벽에 매달려 작업하는 뒷모습, 전동차에 오르는 사람들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중년의 부인, 거리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노년의 사람들. 주로 뒷모습과 일상의 물건이 담긴 16장의 사진이다. 저자는 피사체의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전체적으로 아쉬운 점은 두 가지이다. 사진 관련 신변잡기를 기록한 글과 사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점, 내용에 비해 가성비가 그리 높지 않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저자를 따라 사진의 본질을 고찰하며 느린 시간을 보낸 점은 의미 있었다.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 잠시 멈추어 느슨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면 사진을 찾는다. 빽빽한 삶이 사진을 볼 여유조차 허하지 않을지라도 그루터기의 위안이나 햇살의 따스함이 간절할 때 행복했던 순간을 박제한 사진을 잠시 소환한다. 내가 담겼거나 내가 담았거나 손끝으로 그리운 대상을 가만히 보듬는다. 부드러운 걸음으로 다가온 사진이 마주한 심장에 닿는다.

잠시 과거로 타임슬립하면 2차원 평면으로 누워있던 사진이 3차원 입체로 되살아난다. 숨결에 섞여 들어오던 향기, 귓가를 보듬던 소리, 부드러운 촉감, 달콤한 맛. 모든 감각이 어우러질 때 감정은 따뜻한 물 위에 떠 있는 꽃차인 듯 피어난다.

감각은 심장에 기억을 새기는 조각칼인가. 몇 년이 흘러도 감각 세포를 자극하면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니 말이다. 엄마와 함께 먹던 빵의 맛이 여전히 뭉클한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 듣던 음악에 커다란 숨을 쉬게 되는 것처럼.

예술적인 사진도 많지만, 깊은 의미를 주는 건 스스로 찍은 사진인 듯하다. 과거에 느꼈던 감각이 감정을 품고 고스란히 되살아나 현재의 나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괜찮다, 괜찮다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고 차가워진 손끝에 온기를 건네준다.

 

인간의 시각 세포는 두 종류이다. 명암을 감지하는 간상 세포와 색깔을 구별하는 원추 세포이다. 어둠의 공간에서는 간상 세포만 조용히 활성화된다. 채색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독립적인 흑백사진에 나는 강한 매력을 느낀다. 오롯이 명암으로만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MSG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재료 자체의 맛이 우러나는 담백한 요리를 맛보는 기분이다.

사진가 필립 퍼키스가 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흑백사진에는 톤이 있습니다. 흑과 백 사이 무수히 드러나는 회색의 톤이 있죠. 어둠에서 밝음으로 펼쳐집니다.” 수묵화를 보는 듯 정적인 고요함과 그러데이션으로 펼쳐지는 무채색의 변화에서 잠재적인 역동성을 느낀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저자는 사진을 찍는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대사를 인용한다. 삶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문장이다. 사진을 보듯 삶의 장면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싶어진다.

손바닥에 책을 얹는다. 128g의 가뿐한 무게이다. 삶이 부력을 받아 덩달아 가벼워지는 듯하다. 흑백의 표지에 마음이 정갈해진다. 책날개 안에 적힌 문장을 다시 펼쳐본다. ‘언젠가는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 살기를 꿈꾼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환해져 천천히 글자를 더듬는다.


p164, 7째줄: 프랑스고배우들은 프랑스고 배우들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개인주의자야. 나만 생각해서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무한정 퍼주는 것도 아니니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중간 지점에 있는 개인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자아가 형성될 즈음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걸맞게 행동하지 못하니 뚜렷한 정체성을 드러낸 건 아니다. 양극단의 뾰족함을 피해 두루뭉술한 그림자 뒤로 숨었던 셈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접하기 전까지 한동안 나의 성향에 대하여 생각하는 걸 잊는다. 제목을 보는 순간, 기억이 소환된다. 선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기억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치기였으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겉도는 김치찌개 맛처럼 어설픈 옷을 입었던 듯하다.

이 책은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를 꿈꾸는 판사 문유석의 에세이이다. 그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며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개인주의 성향임을 당당히 밝히고 주변의 풍경을 그리며 해석한다.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 , 우리의 카테고리에 포함된 듯 점진적으로 범주를 확대한다. 자신에서 타인으로, 세상으로 점차 사고의 영역을 넓히며 합리적 개인주의의 특질을 고찰한다.

 

1부에서는 집단주의의 비합리성 비판을 통해 합리적 개인주의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저자는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이 주체로 서야 함을 강조한다. 합리성이란 나와 타인을 모두 동등한 존재로 인지하는 것이니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함을 말한다.

1부는 제목부터 벌써 좋다.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라니! 지지받는 느낌에 든든해진다. 거절하지 못했던 예전이 떠오른다. 딱히 상대방의 상처를 걱정한 것도 아닌데 내키지 않으면서도 일을 해준다.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라는 저자의 말이 냉철하다.

2부는 법정 사례를 통해 타인의 속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결국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마음을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말하기 전에 거쳐야 한다는 세 황금문이 인상적이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이 질문들이 떠올라 삼킨 말들이 제법 있다.

3부에서는 세상을 해석한다. 현실을 포함해서 다큐멘터리와 영화, 책 속에 담긴 세상의 모습이 등장한다.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것, 진짜 용감한 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것.’ 저자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주체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배스킨라빈스 입구에서 나를 가로막던 네모난 덩치의 압도적인 존재감. 되돌아갈 타이밍을 놓쳐 주춤주춤 헛손질하던 느린 손가락. 등을 향해 쏘아지던 침묵의 눈총. 가차 없이 친절하여 더욱 민망하던 카드를 다시 대주세요.’의 단호함. 오른손엔 스마트폰을, 왼손엔 스페어타이어인 양 교통카드를 들고 의 허락음을 기다리던 손바닥의 땀. 테이블 한쪽 옆에 얌전히 대기타고 있는 식당 메뉴 모니터에 흠칫 흔들리던 동공. 구 문물의 경계에 서 있는 원시인이 바로 나다. 눈 딱 감고 한 발을 내딛는 데 얼마나 조마조마한 용기가 필요했던가.

얼마 전, 지마켓에서 물건을 주문하셨다는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은행 거래도 영업시간 전에 가셔서 통장으로 처리하시는 당신이 그 어려운 걸 해내셨다. 80대 노인이 느끼는 세상은 나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낯선 모습이리라. 혼란 속에서 끌어내셨을 당신의 용기를 가늠하며 덩달아 더듬더듬 세상을 따라갈 용기를 낸다.

온라인을 통한 표현의 비중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SNS에서 이루어지는 인정투쟁의 현실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나는 이면서도 완벽하게 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이니까. 글쓰기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의도한 문장만을 보여주니까. 많은 행위가 참과 거짓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세상에 완벽한 진실이 있을까. 진실이라고 믿는 주체의 믿음만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의 인터뷰 장면을 보았다. 지난 9월에 출간한 저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담이다. 핵개인은 핵가족과 비슷한 맥락으로 정의한 신조어이다. 대가족이 붕괴되어 핵가족이 되었다지만, 이마저 더욱 작게 쪼개져 개인으로 서는 시대가 왔음을 예측한다. 빅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도출한 결과이다.

사회자와 작가의 대화를 경청하니 살짝 소름이 돋는다. 8년 전 문유석 판사가 이 책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묘사한 합리적 개인주의의 개념과 상당 부분 맥락이 통하기 때문이다. 송길영과 문유석 모두 세대가 아니라 시대가 변했음을 강조한다. 공감한다. 나만 해도 이 인터뷰를 접한 미디어가 그렇게나 생소하게 느껴지던 유튜브였으니까.

유튜브로 김필 노래 모음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요즘 가장 많이 찾는 미디어 콘텐츠는 유튜브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창작 플랫폼 서비스 투비컨티뉴드이다. TV 앞에 앉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라면 환장을 하는 드라매니아지만 본방 사수도 드물어졌다. 넷플릭스로 몰아보거나 연휴를 이용해서 전편을 정주행한다. 유튜브에서 음악 모음을 찾아 듣는다. 예능 프로그램은 클립 영상을 보거나 쇼츠로 볼 때가 많다. 2~3분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중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야. 내가 보기에 지저분한 게 불편해서 치운 것뿐이야.”

대학교 1학년 때, 칭찬하는 나에게 친구 C가 웃음 지으며 한 말이다. 수업에 미리 와 있던 C는 강의실 바닥에 널려있던 휴지들을 치운다. 나의 관점에서 C의 행동은 이타적이었지만, 그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주변을 청결하게 만드는 개인주의적 행동이었던 거다.

주변이 지저분할 때면 그 말을 떠올리며 정리했다. 쓰레기를 줍고 나의 책무가 아니어도 일 처리를 했다. 그저 보고 있기가 답답해서 나를 위해 움직였다. 행동하면서 스스로 약속한다.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인데라는 떨떠름한 생각은 갖지 말자고. 자발적인 동기로 움직이니 불만은 없다. 약간의 원망이라도 끼어들면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예일님의 시 디딤돌 2’(feat. 투비컨티뉴드)가 생각난다. ‘디딤돌은 비 오는 날, 놀이터 옆에 생긴 물웅덩이에 발이 젖지 않도록 누군가 놓아둔 돌 두어 개에 관한 시이다. 낯 모르는 따스한 배려에 말랑해진 마음이 담긴다. 압권은 2탄이다. 시인은 맑은 날, 같은 장소에 놓여 있던 디딤돌이 치워진 장면을 목격한다.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 발을 위한 배려다. ‘같은 장소 다른 생각 / 결국은 닮은 맘’. 반대의 행동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우리는 모두 함께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상을 산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시 디딤돌’,‘디딤돌 2’의 주인공도 자신을 위해서 돌을 가져다 놓았을지 모른다. 그 옛날 나의 친구가 그러했듯이 스스로 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 문화가 붕괴해가는 현상은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은 자존감으로 세울 수 있으리라.

봄부터 신호를 보내오던 무릎이 여전히 말을 건다. 의식적으로 평지 걷기 시간을 늘려서인지 점점 통증이 약해지는 중이다. 골관절염약을 복용하면서 근육을 키우는 치료법이 현재로서는 유일하다. 다양한 운동 방법을 검색하면서 깨닫는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나만의 운동이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는 어느 만큼일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타주의 모두를 개인주의의 범주에 넣어본다. 사유하는 영역의 크기가 다른 동심원을 상상한다. 발바닥만큼이냐, 두 팔 벌린 크기냐, 전 지구를 품고 자신과 동일시하느냐의 차이로 구분하면 어떨까. 누군가의 원이 작다면 한계가 거기까지라 여기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주의의 합리성은 개개인이 그리는 동심원에서 교집합이 만들어질 때 구현되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과학스러워~ 첫 발령 후 몇 년간 과학 교과서 외적으로 읽은 책은 거의 과학 관련 도서이다. 재미있는 물리 여행,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과학잡지Newton, 과학 어쩌구 백과사전 등. 온통 과학으로 쳐발쳐발한 머릿속 세상이 수업의 폭을 넓혀주리라 기대한다.

지나고 보니 나는 넓이와 깊이를 혼동한 듯하다. 당시의 책들은 수업의 깊이에만 기여한다. 수업내용이 풍성해진 건 인문학 도서를 접하면서부터다. 예전에는 나뭇가지만을 보여주었다면 잎도 돋아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매달린다. 퍼펙트한 수업은 아니지만 스스로 변화의 정도를 인지할 정도로 비유와 예시가 다양해진다.

작가 유시민은 인문학과 함께 과학을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과학에서 출발한 나에게는 반대로 인문학을 일찍 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시작부터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확신한다. 수업의 색깔이 훨씬 찬란했으리라고. 아이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더 가까이 가져다 놓았으리라고. 나아가 그들 스스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땅따먹기 놀이에서 영역을 넓히려는 자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인 공부도 마찬가지다. 과학에서 인문학으로, 인문학에서 과학으로 넘어가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바라보는 세상이 넓어진다. 존재의 좌표를 더욱 선명하게 찍을 수 있다.

 

물리학자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 떠오른다. 양자역학, 화학, 생물학을 거쳐 인간과 사회를 말하는 책이다.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다른 영역들을 넘는 시도가 신선하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학 이야기이다. 과학의 여러 영역에 대한 개론을 인문학과 연결 지어 비유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연스럽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도 덩달아 깊어진다.

작가가 후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세상에 접근하는 방향은 전혀 반대이다. 과학 교양서가 양자역학화학생물학뇌과학인문학 순이라면, 이 책의 순서는 역순이다. 인문학뇌과학생물학화학양자역학 순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영역을 확장하여 우주론수학까지 이어진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거꾸로 재생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당연하다 여기던 현상과 지식이 당연하지 않은 이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과학자의 교양서는 계단을 보는 느낌이다. 이전 단계를 이해해야 다음 단계를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이 책을 보며 연결된 기차를 떠올린다. 소설의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어느 분야를 먼저 읽어도 독립적이다. 차례에 배열된 순서를 따라가면 생각이 유연하게 흐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학문의 목적지는 같다. ‘세상이다.

 

저자는 나와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려면 인문학과 과학 모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장에서는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점을 주목한다. 인문학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

부제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와 관련된 내용은 2장부터 5장까지 걸쳐있다. 2장의 뇌과학에서는 나는 무엇인가를, 3장의 생물학에서는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를, 4장의 화학에서는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5장의 물리학에서는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유시민 작가의 문장이 주는 매력이 있다. 간결하고 솔직하다. 평소 만연체에 거부감을 느끼기에 명쾌한 그의 문체로 속이 후련해진다. 기본적인 과학 용어를 친절하게 풀이해준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 배려가 마음에 든다.

본인이 잘 아는 분야에서 상응하는 내용을 찾아 설명한다. 저자가 전공한 경제학의 내용이 많이 등장하여 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시간을 보낸다. 경제 법칙과 신경 세포, 칸트 철학과 양자역학, 사물 자체와 현상, 측은지심과 거울신경세포처럼 말이다. 몸과 마음이 합체되어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예시를 접한 기분이다.

 

뉴런과 관련된 문장을 보니 배가 자주 아파 조퇴가 잦던 아이가 생각난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는 데도 반복되는 고통을 호소하던 아이다. 이 책을 보니 꾀병이 아니었겠구나 싶다. 뉴런이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니 말이다. 마음의 아픔이 육체적 고통에 영향을 주었던 거다.

인간과 박쥐는 주관적인 감성 형식이 다르다고 한다. 동일한 사물 자체를 다른 현상으로 인식한다는 내용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생물마다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니까. 눈의 구조만 봐도 동물에 따라 명암만을 인식하거나 일부 색깔만을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도 같은 시공을 공유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일치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건 아닐 터이다. 당신과 내가 사는 세상은 분명 다르다.

본질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도 보인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좋지 않은 물질을 만들어 잘못 사용한 책임은 화학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다.’,‘세상은 원자로 꽉 차 있고, 원자는 모두 텅 비어 있다. 존재와 무를 어찌 구분할 것인가.’,‘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와 같은 문장에서이다.

작가는 인문학에 가장 많은 변화를 준 인물로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을 꼽는다. 내가 사는 곳과 나의 생물학적 기원을 우리 집과 우리 엄마의 진실을 밝혔다라고 일컫는다. 탁월한 비유다. 문장에 깃든 통찰에 감탄한다.

 

이미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지만 인문학적으로 짚어주니 그 의미가 새삼 경이롭게 다가온다. 모든 생물의 DNA는 똑같이 네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도 유전으로는 물려줄 수 없어 새로운 개체는 매번 무()에서 시작한다는 내용이 특히 그렇다.

엔트로피 법칙과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래 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고.

너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한 명이야.’ 인문학적 고백은 정신적인 영역을 설명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육체적인 영역을 말할 수 있다.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가진 원자의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어.’ 과학 버전이다. 순간, 온 우주의 원자들이 모여 제각기 다른 조합으로 유일무이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스친다. 건조한데 묘하게 뭉클하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인문학의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와 과학의 질문인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자신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건조한 T가 인문학자의 시선을 거쳐 F를 품게 된 느낌이다. 2차원으로 누워있던 과학지식을 3D 입체 영상으로 바라보고 나온 기분이다. 조금 더 넓고 다양한 색채를 지닌 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걸까.

 

P262, 8째 줄: 신계(新界) ~(神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