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 어느 외계인의 기록 매트 헤이그 걸작선
매트 헤이그 지음, 정현선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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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영역에만 머무르기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큰 개념들이 있다. 관성도 그 중 하나. 어원은 게으름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개념이다. 관성을 맨 처음 언급한 과학자 케플러도 이토록 광범위한 의미로 적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야에 사용된다면 보다 적절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겠다. 이를테면 삶과 인간의 성향 같은 인문학적 영역 말이다.

정지의 반대 개념은 움직임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100% 옳은 문장은 아니다. 관성의 영역에 들어서면 움직이는 상황이 정지해있는 것과 동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개념이 하나로 묶인다. 모순처럼 여겨지지만 몇 번을 음미하면 깨닫게 된다. ‘움직임이 제로에서 무한대까지 폭넓은 범주를 지닌다는 사실을. 움직임은 조금 더 디테일하게 묘사되어야 한다. 또 다른 부사어가 추가되어야 제대로 설명된다. ‘어떻게움직이느냐가 그 정체성을 결정한다.

관성에 포함되는 움직임은 제로 상태의 개념이다. 속력이든 방향이든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움직일 뿐이다. 영원히 직진만을 지속하는 상황이다. 생물이라면,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운 존재랄까. 정반대의 개념이 결합된 식물인간에 비견된다. 동물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식물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 식물을 규정짓는 광합성도 하지 못하니 이도저도 아닌 서글픈 대상 말이다.

 

소설휴먼은 지적으로 뛰어난 외계인이 리만 가설을 증명한 수학자로 변신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라는 지령을 수행하려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인간으로 눌러앉는다는 이야기이다. 키워드는 인간의 관계사랑이다. 저자 매트 헤이그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기법을 도입한다. 문학의 본성이야 근본적으로 낯섦을 전제하지만 그는 모든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자 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 하나하나에 낯섦을 불어넣으려 한다면 인간의 여집합은 필수적이다. 외계인 능력자 등장하신다.

많은 이들이 당연함의 의자에 편하게 앉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당연하게 말한다. 저자는 최소한의 의자조차 걷어차고 벌떡 일어난다. 천을 떠다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씨실과 날실을 엮어 천을 직조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저자를 따라가는 독자는 당연하게 여기던 개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당연함의 함정에 가장 먼저 빠져들기 쉬운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자가 바라본 관계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그는 이 가족의 구성원을 해체한다. 아내와 자식과 남편을 민낯으로 바라보게 한다. 독자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덩달아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편견 없이 바라보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새삼 낯설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하기 어렵다지만 약간의 거리 두기만으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이 되는 순간, 마음에는 낯선 바람이 분다. 예술에도 적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제안했다는 개념이다. ‘형식이라 하면 얼핏 실속 없는 껍질, 물건을 잠시 둘러쌌다 버리는 포장재가 연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알차야함은 물론이다.

문학에서는 형식도 어느 부분 중요하다. 내용과 형식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형식은 독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끌어당기는 최전선에 있다. 묵직한 산문보다 몇 줄의 시가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시는 블랙홀처럼 많은 것들을 압축해서 넣어야 한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장르이다.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많은 작가들이 관계사랑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외계인을 도입하여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시 정의한 매트 헤이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성의 옷을 입은 대상 중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시선이 가장 많이 간 부분은 아내와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였다. 분명 사랑에서 출발했을 관계성은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점점 퇴색된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채 관계만이 남은 삶. 그들의 연결은 문서 위의 화석인 듯 굳어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과거형이다. 외계인은 관성을 깨뜨리는 외부의 자극과 같다. 저자는 이를 통해 관계사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라 속삭인다.

 

관성은 사람을 무감하게 만드는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을 돌아본다. 마음의 집에 당연하게 놓여있던 가구들이 들썩인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바람은 가구와 만난 최초의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놓는다. 나만의 정의로 이름 붙여져 내 주변에 놓인 대상,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존재감이 흐려지던 무엇을.

태양이 하나인 것은 당연한가. 달이 지구 주위를 맴도는 건 또 어떠한가. 구름, , , 바람, 안개에 이르기까지.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텐데. 순간 이동, 물질 변환, 생체 설정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재설정하듯 버튼 몇 개로 가능한 세상. 여행기 캡슐, 문자 캡슐, 알약 먹듯 책을 삼키며 소화하는 존재를 상상하며 즐거웠다. 일주일을 보내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 새삼스러웠다. 일주일을 힘들게 허덕이고 주말과 휴일 이틀만을 즐기려할 게 아니라 닷새를 신나게 보내는 방식으로 관점을 바꿔보라는 것.

주인공이 지니고 다니는 기프트에도 감탄한다. 저자의 네이밍 중 베스트라 꼽는다. ‘gift’선물또는 재능을 의미한다. 의미를 곱씹으면 정반대의 개념을 내포한다. 대개의 경우, 선물은 밖으로부터 온다. 반면 재능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니 안으로부터 발휘되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기프트를 보며 나의 기프트를 생각한다. 레벨 차이가 엄청 나겠지만 나에게도 분명 기프트가 있으리라. 그게 어떤 재능이든 선물로 여기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용면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아들을 사랑하기까지의 동기가 살짝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사랑을 느끼는 과정은 첫눈처럼 너에게 갔다 쳐도 그 짧은 교류로 부성애가 느껴질까 싶은 거다. 외계인 주인공님! 보나도리아에도 금사빠가 있을 테죠?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도 느꼈지만 매트 헤이그의 강점은 후반부의 휘몰아침에 있다고 본다. 소설의 전개에서 음악이 느껴진 달까. 크레센도인 듯 점점 세지면서 아첼레란도처럼 점점 빨라진다. 이런 이유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개운하다. 뒷맛이 깔끔한 소설이다.

휴먼 2가 등장한다면 다른 버전의 외계인은 어떨까. 외계인이라고 전부 우리 지구인보다 뛰어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보다 덜 뛰어난, 보살펴주어야 하는 외계인도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억 년에 한 번씩 부는 차원 이동 폭풍에 휘말려 어쩌다 지구로 떨어지는 거다. 지구인으로 귀화되는 결말은 똑같다. 과정은 거울처럼 이루어진다. 소설의 핵심은 이 외계인에게 휴먼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다. 매트 헤이그의휴먼뛰어난 외계인이 인간의 본성을 외부에서 깨닫고 습득하는 이야기라면, 휴먼 2는 지구인의 내부에서 스스로 나온다는 점이 다르다. 어떤 점을 발췌하여 어떻게 가르쳐줄 것인가가 핵심이다. 가르치려면 근본적으로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 당신이라면 하얀 도화지에 인간의 무엇을 어떻게 언급하겠는가.

 

같은 작가의 글을 두 번씩이나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의 선택은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순전히 자발적인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서 무심코 기대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보고나니까 알겠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좋았던 거다.

매트 헤이그의 글에는 따스함과 희망이 담겨있다. ‘비극은 아직 익지 않은 코미디이며 실패는 빛의 속임수이다. 깊은 삶을 중요하다 하면서도 태양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깊은 굴만을 파도록 권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다독인다. 차가운 건 우주만으로도 족하다며 따스함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주의 평균 온도를 떠올리면 세상은 이토록 추울 수 없다. 그의 글은 영하 270도의 우주 안에도 뜨겁게 타오르는 별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마음은 데워진다. 희망은 심장으로부터 피어나는 불씨이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방향의 변화로 달라지는 결과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관성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낯선 글을 만난다는 건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삶이 느닷없는 힘을 받는 것과 같다. 3부의 제목처럼 상처 입은 사슴은 가장 높이 뛴다. 힘은 나를 변화로 이끈다. 삶의 관성을 깨뜨리고 얼마나 방향을 바꿀 것인지는 우주 안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스스로의 몫이다. 그 힘이 나를 아프게 하든 보듬어 주든 어느 쪽으로든 의미가 깊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휴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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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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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놈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해. 구렁이처럼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를 해바라기 모드로 바꿀 때마다 꿍시렁거렸다. 당연히 뱃속으로 넘어가야 할 포도 씨를 발라먹는 모습조차 쪼잔하게 보이는 순간, 500포인트의 HY견고딕체가 자리를 잡았다. 이번 생은 망했어. 그때 그 인간이 사는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었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백스페이스 키를 눌러 선택의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윷놀이 백도처럼 어느 순간 시공간이 홀라당 뒤집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아. 그때 소개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그 얘기를 나눈 버스를 타지 말았어야 해. 화장실 한 번만 갔다가 퇴근했어도 되었겠지. 그럼 내 인생은 오줌 한 번 안 눠서 망한 거야? 버스를 타고 다닐 그 학교에 발령받지 않았어야지. 시험을 좀 더 잘 보았으면 다른 학교로 갔을 거잖아. 그럼 안 만났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간의 역행은 점점 가속이 붙었다. 대학교를 지나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결국 다시 태어났어야 이 상황을 모면할 지경에 이르렀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죽기로 결심한 주인공 노라가 오밤중에 요상한 도서관을 만나 평행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 삶들을 체험하다 살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이다. 살아보지 않은 삶들은 가지 않은 길 저편에 존재한다. 저 길로 갔더라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후회의 순간들이 매달린 미지의 삶은 매력적인 유혹이다.

소설 초반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심리가 담긴다. 작가는 디테일한 묘사들로 상황을 스케치한다. 20대 초반에 자살을 결심하고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힘들어했다는 그의 경험담이 그대로 투영된 듯하다.

여성인 노라의 삶이지만 작가가 살아가면서 깨달은 마음을 적절하게 배치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각각의 삶들은 어느 하나 100%의 완벽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성공해서 좋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없다. 세상을 위하는 일을 하게 되지만 다른 점이 부족하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꿈꾸는 생활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이내믹한 구성과 과학적인 요소가 흥미롭게 배열되어 끝까지 호흡을 놓지 않고 빠져들었다.

 

매트 헤이그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모든 삶에는 수백만 개의 결정이 수반된다는 것,

사소한 결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

그런 선택들이 모여 많은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

매번 선택한 건 당신이라는 것,

대상보다 바라보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

당신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지나온 삶과 현재의 나를 많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버게스 셰일을 뒤집어 까는 화석발굴학자가 되어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작가의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가와서 움찔움찔 놀랐다. 가볍게 읽을라치면 재미있게도 읽힐 책이었을 텐데. 작가의 삶과 노라의 삶과 나의 삶이 겹쳐져 묵직하게 밀려오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했다.

 

살면서 쉬웠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망했다고 투덜대던 나의 생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제껏 주변의 탓으로 책임을 전가한 채 불평만 했던 거다. 내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그를 선택한 건 나였다. 수많은 선택을 모아 주변을 이렇게 만든 이도 바로 나였다.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관점을 바꿔야했다.

부사어를 바꾸어 사건을 재구성해본다. 이 사람 덕분에 인내심을 배웠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좌절로 넘어지기도 했다. 슬픔이 깊어졌다. 외로움으로 황량한 사막에 선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정도가 되었다. 다른 길을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책을 잡았다. 배설하듯 글에 마음을 쏟아냈다. 글이 너무 장황해져 시에 도전했다. 어쩌다 시조 대회에 나갔다.

사소함의 중요성은 결과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시조 대회에 응모한 예선 작품의 시작도 사소했다. 자전거, 카톡, 우연한 대화들이 사소한 연결고리로 이어졌다. 수많은 선택 중 한 가지만 빠졌어도 지금의 순간이 없었으리라. 결과가 좋아 시조시인 등단이 코앞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느린 걸음으로 주인공과 나의 삶을 병행하며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500포인트의 HY견고딕체가 다시 새겨졌다. 당신이어야만 했어. 나는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한데 거기에는 그의 지분이 상당하니까. 나무를 튼튼하게 만든 건 햇살만이 아니다. 비바람과 폭풍, 불타는 더위, 이파리를 갉아먹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시련 끝에 오히려 단단해지는 것이니.

개피곤해도, 눈이 시뻘개질 정도로 업무에 시달려도, 퇴근 후에 기다리는 나만의 시간이 있어 스르르 넘긴다. 나의 글이 다른 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울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묘한 희열을 느낀다.

내 글이 화창한 봄날 같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봄을 심어두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길가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노란 민들레를 보는 정도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며. 나는 슬픔과 어둠의 힘을 믿는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느꼈던 다른 이의 아픔이 때론 나의 아픔을 밀어낼 수 있으니까.

 

꽤 오랜 시간, 삭아버린 밥은 추웠던 시간들로 타들어가는 발화점이었다. 40대 후반까지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이었다. 심장이 제 속도를 찾게 된 계기는 백일장에서 시를 짓고 나서부터였다. ‘이팝꽃처럼 솔솔이란 글은 물먹는 하마처럼 나의 아픔을 빨아들여 시 안에 박제시켰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 담긴 노라의 삶은 나의 삶을 돌아보며 계속 걸어 나가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 사소한 선택의 결과를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 책임감이 생겼다.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진짜 삶인 거다.

글을 쓰면서 나의 삶은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다. 사소한 선택이 모여 만들어지는 길이다. 쉽지는 않지만 걸어가고 싶은 길이기에 괴롭지는 않다.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팠던 순간들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후회로만 채운 채 억울해할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 내가 한 수많은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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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12-09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나비종 2021-12-09 17:48   좋아요 0 | URL
어머!소식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thkang1001 2021-12-09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비종 2021-12-09 17: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때 그 놈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ㅎㅎ

잭와일드 2021-12-0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나비종 2021-12-09 23: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번 생은 망하지 않은 게 맞나 봅니다^^

마르셀 2021-12-15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자께서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의 시작은 대단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仁)하고자 한다면 그 순간 자신에게 인(仁)함이 오는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비종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나비종 2021-12-16 03: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심란한 생각이 있었는데 공자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니 조금 위안이 되는데다 저의 삶을 응원하신다는 말씀에 다시 업그레이드 되네요.^^; 이제 몇 시간 뒤 출근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야겠습니다..
 
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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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서 처음으로 금붙이가 찰랑거렸던 날, 거리엔 온통 귀걸이를 장착한 인간들로 그득했다. 털모자를 새로 사고 바라보는 거리에는 어디에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냐! 모자 인간들이 창고 대 방출 하듯 쏟아져 나왔다. 욕망했던 물건들은 타이밍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눈앞에서 찬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욕망이 사그라지면 증발해버리는 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복되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보이는 것, 마음을 흔드는 문장, 고막을 울리는 선율, 나를 향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나의 욕망과 다름 아니라고.

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바닷물을 들이켰을 때 경험한다는 타들어가는 갈증처럼 경계를 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부드러운 필기감을 안겨주는 볼펜을 소유하고 싶다는 바람부터 불로장생을 꿈꾸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나를 중심으로 가족, 직장, 사회, 국가, 세계, 우주까지 영역을 넓히면 욕망하는 대상은 무한대로 확장되리라.

 

추적! 욕망 편!나귀 가죽은 욕망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소설이다. 스토리라인은 단순하다. 자살을 작정한 청년 라파엘이 우연히 목숨을 대가로 욕망을 이루어주는 나귀 가죽을 득템한 후 인생역전하려다 망한 이야기이다.

알라딘 요술램프는 문지르는 수고만 하면 된다. 나쁜 놈에게도 절대복종하는 요정 지니는 자체판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뇌의 존재이다. 그래도 얘가 낫다. 이노무 가죽때기는 어마무시해서 소원의 경중에 따라 불에 굽는 쥐포인 양 사이즈가 줄어드니. 붉은 경계선을 긋고 시뻘건 눈으로 나귀 가죽의 사이즈에 집착하는 주인공. 욕망이 실현될 때마다 줄어드는 테두리를 보며 멘붕에 빠져든다. 두문불출하며 무소유의 해탈인간으로 변신을 도모하지만 실현불가능한 시도의 끝은 파국이다.

얼핏 독일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파우스트가 연상된다. 영혼의 자리에 목숨이 들어간다. 아류작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파우스트는 그나마 세속적인 쾌락을 누렸지만 라파엘은 가죽 습득 초반을 제외하고는 욕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발자크가 욕망 속으로 한 걸음 더 접근했다는 느낌이랄까.

 

작가는 욕망과 행함이 지닌 모순을 까발린다. 인간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본능적인 요소로 바람행함을 꼽는다. ‘바람의 대가와 목숨을 등치시키며 주인공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오래 살기 위해 감정을 죽일 것이냐, 열정의 수난을 받아들여 젊어서 죽을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욕망하자니 목숨이 줄어들고 욕망하지 않자니 사는 것 같지 않다. 살기 위해 삶을 포기하게 되는 아이러니다. 발자크가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결국 하나다. 욕망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 보이지만 선택이 불가능한 모순이라는 거다.

요즘 연모하는 드라마에서도 세손저하가 부르짖는다. ‘어쩌면 영영, 내 삶은 목숨만 연명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략) 겨우 이 자리 하나 지키자고 눈 감고 귀 막고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feat. 드라마 <연모>) 이런 생각으로 액션을 취했다는 세손저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책을 읽을 때면 내 옆에는 A4절반만 한 이면지와 연필이 놓인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적기 위함이다. 글에도 방향성이 있다. 메모들을 훑어보며 리뷰의 방향을 정한다. 다큐냐, 산책 모드의 수필이냐, 약간의 허풍을 MSG로 뿌려댈 거냐. 한 번 더 입 안에서 문장을 굴리며 맛을 본다.

읽을 때는 감탄했던 문장이건만 다시 읽으면 왜 샀나 싶은 옷이 된다. 독서속도가 느리면 문장을 꼼꼼히 음미할 수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생각이 방향성을 잃기 쉽다는 것. 수시로 변하는 욕망들을 수용하다보니 열 장 가까운 메모에는 당최 일관성이 없어진다. 울다 웃다 다시 울어 엉덩이에 뿔이 나는 송아지 글이 된다.

데미안을 재독하고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처음에 쓴 리뷰를 읽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두 번째 리뷰를 작성했다. 두 편의 글을 비교해보았다. 같은 인간, 다른 리뷰였다.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드는 건 한 권의 책만이 지닌 특별함이 아닐지 모른다.

 

나귀 가죽은 어디까지 보고자하느냐, 얼마만큼 보고 싶은가에 따라 시야의 편차가 큰 책이다. 츤데레 까도남에 양파 모드까지 장착한 소설이다. 까도 까도 생각거리가 쏟아진다.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전복된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상황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이보다 더 정치적일 수 없다. 소설이 출간된 1831년을 살아갔던 이들에게는 정치 다큐에 가까울 정도의 현실감으로 다가갔으리라. 무위도식하는 자연 인간상을 추구하는 나의 욕망을 중심으로 놓으면 정치라고는 가문 논바닥에 말라비틀어지는 풀때기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19세기와 21세기의 시간이 벌려놓은 틈,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국가 간 문화의 이질성, 30대의 발자크와의 나이 차에서 오는 사유의 각도, 남자인 작가와의 성별의 차이. 타고난 정체성을 차치하고라도 대략 가늠해도 해석이 달라지는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코끼리 전체를 보지 못하느니 오른쪽 새끼발가락 주변에 난 털 하나의 움직임을 묘사한들 뭔 상관이랴. 내 시선이 거기에 집중되는걸. 이 리뷰로 나귀 가죽의 전체 모습을 가늠한다는 건 우연히 발굴한 갈비뼈다귀 하나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전신상을 유추하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저만 믿지 마소서.

 

빽빽했던 문장 덩어리들에 비하면 가독성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생각보다가 생각보다 만만치는 않지만. 종교적 방언 터지듯 주인공이 꾸역꾸역 말하는 부분 역시 토 나올 정도로 갑갑하지는 않다.

초반이 지루해 질랑 말랑 할 때 메피스토펠레스의 스멜을 풍기는 노인 한 분이 납신다. 동굴을 벗어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온 느낌으로 봇물이 터지듯 문장이 흐른다. 노인을 묘사한 문장에 흡인력이 있다. 드디어 나귀 가죽이 등장한다. 흥미진진한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의 무대가 바뀔 때마다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여 주장을 펼친다.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의 성향을 분석하며 나의 생각은 어떤 이의 견해에 가까울까 가늠해보는 과정도 흥미롭다. 과학적인 내용이 나올 때는 과학적 요소와 인간의 본질이 의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놀라기도 했다.

신의 한수라고 생각하는 편집 체계는 옮긴이의 각주가 해당 페이지의 하단에 있다는 점이다. 뒷부분에 부록처럼 한꺼번에 빼놓아서 왔다갔다 짜증나는 책도 있는데 현명한 선택이다. 옮긴이가 구사하는 어휘력이 상당하여 낱말 뜻에 대한 검색도구는 필수이다.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라면 여주인공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리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달라진 나의 욕망을 본다.

첫째,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관념이란 유기적인 존재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기거하면서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인간의 정신은 요정 같아서 지푸라기라도 다이아몬드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사유 작용도 운동이라는 것. 정체 모를 물체에 영향력을 가하려면 그 물체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속성에 따라 충격을 받고 부서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리라는 것. 작가는 물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사람으로 대상을 도치해도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예술을 방탕과 연결 짓는 관점이 신선하다. 예술은 방탕이 주는 가장 희귀한 감동을 일상적인 감동으로 수립하고 요약하여 삶 안에 또 다른 극적인 삶을 창조한다는 것. 또한 힘을 최대한도로 신속하게 소진시킴으로써 그 감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체계라는 것. 예술가 역시 격렬한 일탈의 욕망을 대립시켜 평범한 삶을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강렬하므로 방탕의 길로 들어선 거라는 것. 문학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셋째, 힘에 대한 서술이다. 인간이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의 길을 터줄 뿐이라는 것.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진다는 것.

 

욕망은 변화무쌍한 물처럼 흐른다. 이에 따라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이 달라질 터이다. 리뷰를 분석해보니 사유와 글쓰기를 욕망하는 내가 보인다. 책을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느낌의 글이 쓰인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껏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시간들은 바로 나의 욕망을 바라보는 과정이었던 거다.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것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는 거다. 이것도 괜찮지 않고 저것도 괜찮지 않다는 거다. 욕망을 하던 욕망하지 않던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상황은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발자크가 분석했던 것처럼 삶에서의 욕망이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요소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뜨거운 감자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니. 자신의 욕망을 감당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책에서 어떤 욕망을 발견할까. 나의 욕망이 당신에게 정답이 아니듯 그게 어떤 것이든 보편적인 정답은 아닐 터이다. 분명한건 그 순간의 당신에게는 최선의 정답이리라는 것. 이런 이유로 나는 모순을 품에 안고 내 욕망이 보여주는 길을 가려는 것이다.

 

 

p55, 밑에서 3째줄: 편암 더미 속에서 한 겹씩 한 겹씩, 한 층씩 한 층씩 (중략) 화석을 발견했을 때

편암은 변성암이므로 열과 압력의 정도가 몹시 약하면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맥상 페이스트리 분위기의 저 문장에는 퇴적암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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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11-22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아... 나비종님. 저는 이번 독서는 대 실패입니다. 읽기도 어려웠는데다 내용도 전혀 파악이 안되어서 정말 대강대강 읽었어요. 이실직고 합니다 ㅠㅠ 나비종님의 리뷰를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렵니다ㅎㅎㅎ 아 진짜 웬만하면 악으로 버텨볼라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에라이 그냥 비평을 써야겠다 해서 전신의 에너지를 긁어다가 화려하게 비평했어요 ㅋㅋㅋㅋ 에휴

욕망에 대한 작품인 건 알겠는데 그렇게 욕망들이 열렬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안들었어요. 가죽으로 다양한 욕망을 이뤄내었지만 주인공은 뭔가 잡을수 없는 바람을 잡고싶어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리고 주인공이나 주변인들이 하는 말들이 너무 어려워요ㅎㅎㅎ뭔가 대단히 심각한 주제를 두고 논쟁하는 것도 같은데 도통 이해가 가질 않네요^^;

저는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좋은 뉘앙스에 주로 쓰이는 듯 해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길때 좀 더 인간다워지고 그러는게 아닐까요? ㅎㅎ 이렇게 글도 쓰고 다양한 책을 읽고 싶은 소소한 욕망조차 없으면 삶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져요 ㅎㅎㅎ

아이고, 올해 마지막 모임이었는데 뭔가 마무리가 영 시원치 않군요! 그래도 같이 했다는 데에 뜻을 두기로 합니다 ^^ 이렇게 또 한해의 모임을 완수했어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점점 날씨와 공기가 나빠지고 있는데 몸조심하시고요, 2022년에 또 새로운 모임을 이어가기로 할게요. 다시한번 고생많으셨습니다 ㅎㅎㅎ

나비종 2021-11-24 19:53   좋아요 1 | URL
지난 달부터 읽어서 겨우 겨우 리뷰를 마친 것을 이실직고합니다.ㅋㅋ 천천히 읽었으니 그나마 내용 파악이 조금이라도 되었구요. 나물이 넘었던 수많은 고비를 생각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답니다. 물감님의 화려한 비평은 잠시후에 감상하겠습니다. 전신의 에너지를 속시원하게 긁어내셨을까요?ㅎㅎ

주인공이 지닌 욕망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봅니다. 돈벼락 한 방 맞고 죽기 싫어 전전긍긍하는 꼬라지였달까요.
개인적으로 만연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촌철살인에 매력을 느끼는 자로서 뭐 좀 모르는 인간들의 말이 장황해진다고 보는지라...시대상에 대한 은유가 많아서 물감님이나 저나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나봐요. 뭔가 대단히 심각한 주제 안에는 혁명이 중심에 담겨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겪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욕망은 보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내느냐 은밀하게 숨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해탈한 몇몇 성인군자들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가진 것 아닐까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인간다워진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글도 쓰고 잘 쓰기 위해 드럽게 재미없는 책도 읽고자 하는 욕망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ㅋㅋ 하아~ 한데 욕망을 실현하기에 장애물이 너무 많네요. 겁나 바빠서 개피곤에 쩔어있습니다, 요즘ㅠㅠ

마무리는 오히려 좋은 거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어떤 난관까지 넘을 수 있을까 나름 도전의지가 생기거든요. 나만 이런 게 아니니까 라며 서로 의지하면서 넘고 있는 걸 보면 엄청 뿌듯합니다.ㅋㅋ 이렇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니 2인 3각을 하는 기분입니다. 우리, 내년에도 열심히 달려볼까요?^^
 
아처
파울로 코엘료 지음, 김동성 그림,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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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국을 사발 째 들이켰다. 10월초는 한마디로 내가 제일 잘 나가!’모드였다. 상금 사냥을 위해 지난 9월 말에 참가한 시조대회에서 생각지 않 쾌거를 이룬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나. 이 여세를 몰아 또 다른 시조대회의 문을 두드린다. 오예~ 1등 상금이 무려 100만원이다! 이번에는 단시조로 도전해보아야겠어. 시조 3편을 후다닥 짓는다. 제출했던 시조들은 읽고 또 읽어도 너무도 뛰어난 수작이므로 우편접수 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풍부한 상상력으로 상금을 어디에 쓸 건지 궁리한다. 결과는? 이 문단의 첫째 줄이 의미하는 그게 맞다. 쩜쩜쩜 흐윽.

주최 측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당선자들의 명단을 두어 번 훑었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마음을 이해하는가. 가장 마지막 줄에서조차 나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의 과녁을 명중한다. 보고 또 보아도 그토록 뛰어난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오만방자해진 나는 나만의 과녁을 만들어놓고 화살이 명중했다며 좋아라했던 거다. 주최한 사람들이 설정한 과녁이 저만치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내 삶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은 이런 방식으로 겸손이라는 삶의 자세를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지금은 커피숍. 퇴근 후의 나는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글을 쓰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 아처궁사를 의미한다. 전개되는 서사는 단순하다. 활과 화살과 표적을 중심으로 궁사가 갖춰야 할 자세를 짧은 소설 형식으로 담았다. 삶에 적용할 지침으로 확대하여 마음에 담을만한 작품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얼핏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싶다. 나에게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도움을 주었던 책이다.

궁도처럼 행위에 정신적인 영향력이 깃든 영역은 활을 쏘는 데 뿐 아니라 삶의 전반에 관련 태도가 적용될 수 있다. 파울로 코엘료가 의도한 바도 아마도 그러하리라. 활은 화살을 날리기 위한 도구이니 능력을 발휘하는 몸, 화살은 세상을 향해 날아가니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동, 표적은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니 수시로 세우는 목표에 비유된다.

작가의 문장을 읽으면서 소설 밖에서 나의 서사를 펼쳐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그 일에 대한 열정과 실천, 주변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 삶을 살아가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문장 하나하나를 지나면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께에 비해 읽는 데 걸린 시간의 가성비는 놀라울 정도로 말이 되지 않았다. 한 페이지 앞에서 30분 이상 머물던 때도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싶다. 은은한 색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림에서 작가의 마음이 보였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답게 여백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여백은 여백대로 깊이감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중심인물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한 색깔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색채의 농담을 표현하는 기법이 출중했다. 그림을 그린 김동성 작가가 절반의 기여를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이 좋아서 그의 이력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그림책 작가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기록한 내용을 찾았다.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을 반복 설명하기보다는 은유적으로 해석해서 텍스트가 말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는 작가의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 두 작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인터뷰어의 멘트에 좋은 글을 운 좋게 만나 작업을 한 경우라고 답한다. 얼마 전의 자만한 인간의 최후’를 떠올리니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기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그것을 구현할 테크닉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안다는 것, 작가로서의 역량은 폭이 넓어야 생기며 그래야 깊이 팔 수 있다는 것, 테크닉만으로는 감동을 만들 수 없다는 말들이 마음에 남았다.

인터뷰를 읽은 후 책을 다시 펼쳐 그림 부분만 발췌하여 감상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각각의 본문에 정확히 한 장면의 그림만 삽입되어있음을 발견했다. 텍스트를 몇 번이고 음미하며 표현할 이미지를 고민했을 작가를 떠올리니 순간 뭉클했다. 그는 그림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용 중에서는 동료를 언급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동료는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 한다. 자신의 삶을 감당하기에도 바쁜데 다른 이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글짓기대회에서 상을 타거나 어딘가에 글이 실릴 때면 메시지를 보내 주변 이들에게 알리곤 했다. 최근에도 카톡으로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어미와 존칭어에만 변주를 주어서 보냈다. 그들의 답문을 다시 살펴보았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이도 있었고 형식적인 멘트를 보낸 이도 눈에 띄었다.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도, 전화까지 해서 기쁨을 함께 나눈 이도 있었다. 어렴풋이 동료가 될 수 있는 이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하루 동안 만났던 이들부터 친구나 지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 필름이 흘러가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작가의 문장들이 의미 있는 발걸음인 듯, 하나의 문장을 지날 때마다 멈추어 서서 그들을 떠올렸다. 명확한 기준을 찾은 듯 문장에 부합되거나 부합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관성에 의해 유지되어온 그저 그런 관계들도 있었다. 막연히 껄끄러운 느낌으로 자리하던 그들의 존재가 타인의 문장 앞에서 정체성을 드러냈다.

동료를 찾는 조건은 내가 어떤 동료가 되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기도 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사람,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 약점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물과 같은 속성을 지녀 언젠가는 바다에 닿아야 함을 절대 잊지 않는 사람, 눈에 기쁨이 깃든 사람, 맡은 일을 열정적으로 해내는 사람.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동료를 찾기를, 그런 동료가 되어줄 수 있기를.

 

이 책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뒤표지의 안쪽에 담긴 뜬금없는 내용이다. 연금술사가 엄청 유명했던 점은 인정한다. 한데 그걸 굳이 뒤표지의 안쪽에 두 페이지나 걸쳐 집어넣어야 했을까. 아처에 대한 것이 아닌 추천사를 말이다. 전 세계 85백만 독자를 사로잡은 연금술사한국어판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 출간에 대한 홍보가 목적이라면 뒷날개의 좁은 한 편에 배치했어도 충분했다. 처음에는 이 책과 무슨 연관성이라도 있는 멘트들일까 해서 읽어보았다. 전혀 관련성이 없었다. 연금술사만을 위한 유명 인사들의 말임을 깨닫는 순간 실망스러움이 밀려왔다.

뒷날개에 배치한 파울로 코엘료의 인터뷰를 왼편에, 이 책에 또 다른 지분이 있는 김동성 작가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면서 느꼈던 점을 인터뷰해서 오른편에 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전작의 명성에 기대어 부록처럼 출판된 책인가 라는 느낌조차 들었다. 연금술사가 대놓고 언급되니 자연스레 이 책과 비교하게 되었다. 결이 완전히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서사가 약한 이 책이 밋밋하고 진부하게 인식되어 자칫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독립된 책으로 당당했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본 나의 의견이다.

 

50대를 넘어서면서 실감하는 점은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면 돈은 생각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 돈으로 살 수 없는 건강, 돈으로 살 수 없는 친구,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 행복, 열정들 하나하나가 진정 소중한 것들이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았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친구와 열정의 중요성을 확인하였다.

표적을 보는 법에서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그날 아침의 활쏘기에 너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 앞으로 수많은 날이 남아 있고, 각각의 화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라는 내용이다. 시조대회의 결과에 위축된 마음이 있었다. 그래, 나는 단지 하나의 과녁을 맞히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쏘아야 할 화살은 다시 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등 뒤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계속 도전해볼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뒤표지에도 언급된, ‘발시의 순간에 나온 말에 공감한다. 무언가를 멀리 쏘아 보내는 동작은 자아를 마주하게 한다는 것. 시든 리뷰든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내 자신을 만나왔다. 때론 감추고 싶었고 따끔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화살을 쏘아왔던 이유는 글이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까닭이다.

 

아처화살은 나에게 이었다. 110V의 전압을 220V로 변환해주는 트랜스인양 책속의 문장들이 글쓰기에 도전하는 나에게 해주는 말로 다가왔다. 숱한 훈련 끝에 마침내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 자신의 활과 화살, 표적이 된다고 했다. 나의 삶과 나의 글과 나의 행동이 하나가 되는 순간으로 해석했다.

화살을 쏘고 나면 궤적을 눈으로 좇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긴장을 남겨둘 필요가 없으며 마음을 놓고 미소를 짓는다고도 했다. 최선을 다해 나의 화살을 쏘고 나서 미소 짓는 순간을 맞이하려면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이 필요하리라. 우연히 좋은 결과가 나오든 바라던 결과가 나오지 않든 자만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세상에는 많이 들어본 말들이 먼지처럼 떠다닌다. 교과서 속에 나올 법하다면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말들이 적절한 시기에 확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운명이란 말을 떠올린다. 좋았던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사소한 순간을 만났을 때, 절묘한 그 순간을 운명이라 부르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필 이럴 때 하필 이런 순간에 마음의 과녁에 명중이 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마음과 공명이 된다. 울림이 커진다. 나에게는 아처가 이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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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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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게는 아직 넘기지 못한 5분의 1이 남았는뎁쇼? 이게 진정 끝? 투비컨티뉴드로 믿었던 글들이 미완성 장들의 모임이었다니! 열나게 달리다 갑툭튀한 낭떠러지를 만난 나는 진정한 부조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도대체 맥락 없는 내용으로 어떤 리뷰를 뽑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소송은 부조리의 결정판이다. 세상의 모순을 몽땅 까발려줄 테닷! 작정하고 펜을 든 저자 앞에서 논리를 논하지 말지어다. 미완성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완성작으로 발표되었대도 딱히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읽기 전에 후루룩 넘겨보았을 때에는 빽빽한 게 팔만대장경 조판을 보는 듯하더니. 막상 읽어보면 책장 넘김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 담긴 내용이 갑갑해서 그렇지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소송을 당한 주인공 요제프 K가 법원을 둘러싼 인물들과 만나며 소송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다 끝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 놀라운 건 죽는 순간까지도 소송당한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다. ‘?’에 집중하며 소설을 읽으면 낭패를 본다는 것. 언제쯤 나올까. 절반 가까이 넘어가면서도 그노무 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나. 설마 마지막에는 나오겠지. 5분의 4를 지나니 주인공 K가 개를 부르짖으며 죽는 게 아닌가. 대체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하나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읽는 데 걸린 시간의 몇 배가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K를 둘러싼 모순된 상황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범위를 넓히면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보다 커다란 틀에서 찾아야 했다. 소설 안에 갇힌 소송의 이유 따위가 중요한 소설이 아니었던 거다.

꿉꿉하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을 오가는 K는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소송으로 표현되며 소설 전체를 끌고 가는 상황은 개인의 삶을 옭아매는 다른 무엇일수도 있다. 그를 향해 파도처럼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K에게 미션을 던진다. 가상의 게임공간으로 투입된 K가 통과해야할 관문이랄까. 그리고 모든 상황의 뒤에는 이를 지켜보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 법원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조직은 한 국가일 수도, 사회일 수도 있다.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K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결국 K를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법률 세계의 오래된 격언으로 등장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가만히 있는 자는 언제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울 접시에 올라가 자신의 모든 죄와 함께 저울질당할 수 있다는 것. 카프카는 구성원들의 삶을 커다란 틀에 가두고 통제하려는 체제의 모순을 까발리고 싶었던 걸까. 피의자를 대변해야 할 변호사는 되레 소송에 처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직무태만을 합리화한다. 번듯해야 할 것 같은 법원은 허름한 가정집 다락방에 위치한다. 최고의 우두머리로 상징되는 인물은 막연한 존재로만 묘사된다. 누구도 실체를 본 적이 없다.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두 군데가 있다.

첫째, ‘변호사라는 제목에서 등장한 장면이다. 거대 조직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문장들이 있다. 작가는 법원 조직과 그 안에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유일하게 올바른 길은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말한다. 터무니없는 일이 있더라도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거대한 법원 조직은 영원한 부유 상태에 있어 누군가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라고. 조직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K를 둘러싼 인물 대부분이 어떻게든 법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조직의 연결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성처럼 이어져오는 편견이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는가. 거대 조직은 조직의 룰을 합리적이라는 틀로 세운다. 잔혹동화에 등장하는 맞춤형 침대처럼 인간의 키를 틀에 맞추려 한다. 답정너다. 주인공 K는 끝내 그 침대에 눕게 된다.

둘째,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서술된 결말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연상케 한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약하고 여위어 보이는 어떤 이의 등장과 그의 행동과 이를 본 K의 생각과 리액션이다. 여기에는 짙은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K가 겪은 혼란과 부조리가 종합 서술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문제의 그 어떤 이는 K를 향해 양팔을 뻗는다. 그 액션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K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떤 이가 너무 멀고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두 손을 쳐들고 도와달라는 듯 손가락을 펼치는 K의 리액션은 거대 조직의 늪으로 소멸되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같은 안간힘이다.

K가 내뱉은 물음표의 폭풍 랩에서 이 소설의 정체성이 보인다. ‘누굴까? 친구일까? 좋은 사람일까? 관련된 사람일까? 도와주려는 사람일까? 한 사람일까? 아니면 전체일까? 아직 도움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내지 못한 반대 변론이라도 있는 걸까? (중략)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찬물을 파란색으로, 더운물을 빨간색으로 표시하는 방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덕분에 우리는 푸른 별이 붉은 별보다 뜨겁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 않은가. 뜨겁게 불타는 별을 품고 있는 영하 270도의 우주, 빛이 강할수록 더욱 진해지는 그림자. 세상의 많은 것들이 모순적인 형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뜨거우면서 차가울 수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던 때도 있었다. 아이스크림 튀김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원리를 생각하다보니 오늘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모순처럼 보이는 현상을 과감하게 시도해볼 생각을 한 누군가는 세상의 본질을 알았으리라고.

합리적이라는 말은 이상향에 가까운 개념인걸까.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이상을 열망하는 인간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꿈같은 존재처럼 말이다. 행동경제학에서 연구하는 인간들은 버젓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고전경제학을 뛰어넘어 행동경제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현실의 모습에 가깝게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거라고 들었다. 우리의 입안을 즐겁게 하는 수많은 겉바속촉이 존재하듯 세상은 온통 부조리투성이이다. 카프카는 이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작가가 아니었을까.

 

p342, 밑에서 2째줄: 후기구조조의 ~주의

p354, 밑에서 3째줄: 펠리치 펠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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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10-19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래요, 완성작으로 나왔어도 별 차이를 못느꼈을듯요 ㅋㅋ
그나저나 참 난해하고 난감한 책입니다. 어쨌거나 저자의 메시지나 뜻을 알고는 싶은데 뭘 생각하더라도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하게 되거든요. 어차피 미완작이니까 독자의 생각도 미완이면 어떠랴 싶네요 ㅋㅋㅋ

<구성원들의 삶을 커다란 틀에 가두고 통제하려는 체제의 모순>이 메인 주제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어쨌든 국가나 사회라는 집단 속에서는 강제적인 통제가 늘 잇따를테고, 보기에 따라 그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돼었다 하기도 뭐하니까요. 그래도 이건 아닌데,하는 개개인의 판단과 어떻게든 질서를 잡으려는 조직의 관계에서 오는 모순... 누군가는 억울해야만 굴러가는 세상인가 봅니다ㅠㅠ

저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변호사가 제일 밥맛이었어요. 의뢰인을 봐가면서 태도가 극명하게 나뉘는 것도 재수없고, 주인공의 소송 건도 마냥 미루기만 하는데다 납득할만한 진행상황을 전달해주지도 않는데 이런 게 무슨 대단한 변호사 타이틀을 갖고 있는지 말이죠. 현실을 받아들여라, 너만 추락하게 될 뿐이다 등등 조언은 고맙지만, 고객보다는 법원의 편에 서있다는 느낌이 강하더군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법원과 함께 고객을 단념하게 만들고있으니 답답합니다. 카프카는 법공부하면서 이런 사례를 무수히도 봐왔겠죠. 법원의 부조리함과 직원들의 권력 행사. 그것들을 일반인이 어떻게 해볼 수가 있을까요.

여튼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해주는 작품이었어요. 왜 카프카의 책을 시대의 문제작이라 불렀는지 알 것도 같네요^^ 가독성도 좋아서 좋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고소인은 부행장이 아닐까 추축해봅니다. 부장과 사이 안좋은 인물로 가장 유력하고, 같은 직장에서 부장의 약점을 잡기 딱 좋은 위치거든요~ 또한 부장도 생각보다 억울함을 강하게 표출하지 않는 걸 봐선 켕기는 게 있을것도 같고요. 이건 if story 입니다. ㅋㅋ

나비종 2021-10-20 19:23   좋아요 1 | URL
미완성의 장들에 서사가 추가되고 완성작으로 나왔으면 더 멘붕이 왔을 지도요. 골다공증 걸린 뼈다귀마냥 구멍 숭숭 뚫린 곳을 독자의 생각으로 완성을 해야하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ㅋㅋ

체제의 거대한 그림판 위에서 우르르 휩쓸린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어요. 중력장의 영향으로 공간이 휘면 빛은 나름 직진 모드인데도 휘어지는 경로로 진행하게 되거든요. 나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뭐 이런 거요.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어느 정도 선일까 생각해요. 자동차와 사람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려면 신호 체계와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 싶거든요. 그러다가 뉴스에서 도를 넘는 국가나 사회의 개입 사례를 보면 대체 없느니만 못하는 이 지경은 뭔가 싶기도 하구요.
‘누군가는 억울해야만 굴러가는 세상‘ㅠㅠ 그 누군가가 힘이 없는 존재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무너지는 세상에서 제일 큰 상처를 입는 건 또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 마음 아픈거죠.ㅡㅡ

저도 변호사, too! 전형적인 약강강약 스타일이잖아요. 정글의 왕 앞에서 깐족대는 여우?새끼가 생각났어요. 그런 면에서는 변호사 등장 장면에서 후련한 통쾌함이 느껴지더군요. 대놓고 풍자하고 까는 작가를 보면서 아주 작정을 했구나 싶었어요.ㅋㅋ

재미는 드럽게 없었지만 가독성은 또 좋고 아리까리했지만 뭔가 느낌을 알 것 같기도 해서 별점 3점에서 레벨업했습니다~ㅎ
흠~ 고소인이라.. 미스터리물로 여긴다면 의외로 행장일지도 모르죠. 부행장은 대놓고 적대자라 용의자 1번이라면 다소 시시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카프카의 난해한 성정을 생각한다면 행장일 수도 있습니다!ㅋㅋ 행장은 지가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면서도 왜 버벅거리는 K를 시키냐구요. 고객을 매수해서 대성당으로 유인한 거죠. 쫌 수상합니다. 요제프를 견제하려고 그랬을 수도 있죠. 그러면 1타 쌍피일 수도 있어요. 유력한 용의자인 부행장도 제거할 수 있으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