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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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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키스>를 보던 순간, 정적이 흐르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직도 그 충격이 생생하다. 어떤 사진이나 영상보다 에로틱하게 다가왔던 강렬함은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금빛이 뿜어내던 색채감이었는지, 서로를 감싸 안은 두 연인의 포즈였는지, 제목이 연상시키는 설렘이었는지, 이 모든 것이 뒤엉킨 복합적인 분위기였는지 정확히 모른다. 무엇이 나를 끌어당긴 건지, 그것이 부분이었는지 전체였는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분명한 건 그 그림에 매혹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강렬한 매력이 육박해올 때 평소의 취향은 발언권을 내세우지 못한다.(p114~115)’ 연보라, 하늘? 초록도 좋고. 간혹 좋아하는 색이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노란색은 어떤 식으로든 언급된 적이 없다. <키스> 후로 노란색이 추가된다. 어쩌면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노란색을 좋아하는 성향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그림을 계기로 봉인 해제된 건지도.

그때부터였다. 카드형 USB나 휴대용 손거울이나 머그컵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소지품을 선택하게 된 기준이 뛰어난 성능에서 변경된 것은. 명화 하나면 족했다. 시골 느낌 나는 도시 근교에 직접 지었다는 멋들어진 집으로 집들이를 갔어도, 그저 부러웠던 건 전면이 통유리인 거실 너머로 펼쳐지던 초록의 흔들거림도, 큰 숨 한 번으로도 깨끗함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던 공기도 아니었다. 주방 한 벽에 자리 잡은 거대한 황금빛 타일 하나면 충분했다.

책장을 펼쳐보기도 전에 이미 절반 이상은 맘에 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책 제목이 보이지 않던 거리에서는 말라비틀어진 동태 덩어리처럼 보이던 표지그림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책에 대한 호감지수는 급속도로 치솟는다. ‘벌써 재밌다, 보검아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p9)’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사랑의 생애에 대한 정밀묘사다. 책에서 언급되는 현미경 아래 사랑이라는 프레파라트를 올려놓고 구석구석 관찰이라도 하듯, 그 속성을 연구한 학자가 쓴 논문처럼 사랑을 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심리묘사가 치밀하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인물의 의식이나 그 이면에 잠재된 심리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는 점에서 심리학의 냄새가 짙다.

형배, 선희, 영석, 준호, 민영, 형배의 부모님이 하는 사랑은 어느 것도 같지 않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색상도 다르고 채도도 다르기에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없다. 이들의 사랑 중 몇 가지 요소를 엮어 순서쌍으로 결합시킨 후, 자신만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유키를 입력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기억 속의 사랑이 된다.

주로 등장하는 세 인물 이외에 주변인들의 사랑에도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스칠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새 한 마리에 해당하는 살점의 무게가 한 사람 전체와 동일하다며 존재의 중요성을 어필한 우화처럼, 그 어떤 사랑도 가볍지 않다. 누구나 겪었음직한 감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마다 그 대상마다 다른 미묘한 차이는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없음을 말해준다. ‘모든 사랑이 다 다르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규정되지 않으니까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걸 따로 정할 수도 없다.(p145~146)’라는 말처럼.

내 사랑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유형의 사람에게 끌리고,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도 비슷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끌어당기는 공통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막상 헤어지고 나서는 비슷했다는 느낌이 들던 걸 보면. 다시는 사랑 따위 하지 않을 거야 하면서 어느 순간 또 다른 상대에게서 매혹의 지점을 발견해내던 자신이 이해되지 않던 적도 있다. ‘사랑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관념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관념의 속성 때문이다.(p289~290)’이 문장이 그에 대한 답이 되는 걸까.

관계를 이어가면서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지적이 냉철하고 객관적이다. ‘현미경으로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굳이 현미경으로 볼 필요가 없고, 또 현미경으로 보지도 말아야 한다.(p231)’,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p221)’, ‘눈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도록 유도된 것을 본다.(p253)’,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낸다.(p228)’ 사람의 말이나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리에 대한 서술이 당황스러울 만큼 적나라하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상대에게 했던 행동과 당시 느꼈던 선명한 감정을, 말하자면 부드러운 말 뒤에 숨겨두었던 마음을 떠올려본다. 묘하게 설득되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점이 더욱 당황스럽다.

책을 읽다가 새로 옮긴 직장에서 심적으로 힘들어하던 직장 동료에게 마음에 꽂혔던 문장을 카카오 톡으로 보냈다.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p54)’ 제 이야기 같다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읽다보면 사랑이 사람으로, 사람이 삶으로도 읽힌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 사랑이란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므로 일반적인 관계에 적용해도 도움이 많이 될 만한 내용이다.

표지를 다시 본다. 하얀 바탕에 쓰인 제목 ....’. 동그라미 4개가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의 자만 동그라미가 길쭉하다. 사랑을 뜻하는 와 중의적으로 겹쳐진다. . 별 걸 다 갖다 붙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추리소설에 버금갈만한 심리소설을 읽다보니 감각이 예민해졌다. ‘다르고 다름을 알았다고나 할까. 무심코 나오는 말에 조사 하나에도 많은 심리가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굳이 귀로 들리는 것이나, 하필 이 순간에 코끝으로 흘러들어오는 향기도, 새삼 부드럽게 느껴지는 감촉도, 이렇게 맛있었나 싶은 음식 하나도 그냥 나를 지나치는 무의미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이 새삼 소중해진다.

 

사랑이 목표였던 적이 있다. 멋진 사람을 보면 설레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던 것은 오로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사정권 안에 들어있는 따뜻한 이성이었다. 설렘으로 가슴 뛰던 마지막 순간이 언제더라. 기억이 희미해져갈 무렵, 내게 다시는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한동안 울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간지 남은 많았다. 드라마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들의 띠는 심폐소생술처럼 나의 심장을 부활시켰다. 만지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뭐 그런대로 삶은 다시 즐거워졌고 상상의 힘은 가끔 꿈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살아가다보니,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이성 말고도 많았다.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되었음을 확인하던 순간, 이상형을 앞에 둔 듯 콩닥콩닥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의 대상이 굳이 사람으로 한계 지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니.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p285)’라 말한 저자의 메시지는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고 망설이며 관찰자 입장에서 상상하며 판단해버리는 이들에게 의미심장하다. 이생에서의 사랑이 일단락된 형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준호의 또 다른 사랑이 피어오를 것이 암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박에 대한 준호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 ~ 나는 아무래도 결혼에 적합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형배의 사랑에서 희망을 찾는다. 카카오 톡에 저장된 이름 사랑’, 가끔은 사랑이라 쓴 두 글자가 웬수로 읽히는 남자. 거실에서 발가락을 만지면서 그 손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저 인간에게, 또 누가 아는가. 형배가 선희를 다시 만난 그 순간에 느끼던 사랑처럼, 다시 두근거리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말의 영향은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나지 않을까.(p130~131)’라 말한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니까. 하여 내 폰의 주소록에 저장된 닉네임은 앞으로도 줄기차게 내 사랑 ㅇㄱ일 것이다. 사랑은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네버 엔딩 스토리이니까. 나의 삶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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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왕 아모세 - 제20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작 창비아동문고 285
유현산 지음, 조승연 그림 / 창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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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마지막으로 무언가 상상을 해본 것은. ‘만약에 내가 무엇이라면?’이라든지,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든지. 초등학교 때에는 종종 상상하기를 좋아했건만. 동화 소공녀는 어린 나의 가슴을 늘 뛰게 했다.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느껴지던 그 짜릿함이란!

도둑왕 아모세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언젠가부터 닫혀버린 상상력의 방문을 슬그머니 두드렸다.

 

책이나 영화를 접할 때 거부감을 느끼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역사, 추리, 피 질질등이 대표적이다. 이 모든 것들의 종합선물세트 같던 책. 솔직히 은빛 사과 스티커 하나 보고 이 책을 선택했다. ‘창비 좋은 어린이책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호기심이 발동하였기에.

 

역사를 안 좋아했던 탓에 관련 지식도 얄팍하다. 외울 것도 많은데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연도별로 나열하다보면 머릿속에선 쓰나미가 지나간다. 낯선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생소한 용어와 생활 방식에 대한 묘사가 슬금슬금 고개를 들던 앞부분은 1차 갈등을 일으킨다. 계속 읽어, 말어?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책장을 펼쳐야하는 대하소설보다는 낫겠다싶었다.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그나마 들어는 보았던 파피루스, 스핑크스등의 용어들이 등장한 것이 다행이랄까. 중국어가 간판 속 무늬처럼 보이던 중국 난징에서 친숙한 햄버거 로고를 발견했던 순간, 무척이나 반가웠던 기억과 겹쳐졌다.

 

읽어 보았던 몇 안 되는 추리 소설들은 하나같이 음산했다. 이야기가 추리 쪽으로 흘러간다 싶을 때 2차 갈등이 일었다. 주춤거리며 이야기를 따라갔다. 으흠? 은근히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거다. 도무지 결말이 상상되지 않았기에 조용히 숨을 죽이며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추리 소설이 주는 반전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피 질질까지는 아니었지만, 투탕카멘의 무덤과 미라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3차 갈등이 생겼다. 자고로미라라 하면, 군데군데 풀린 누리끼리한 붕대에 강시처럼 두 팔 내밀고 눈까지 덮인 헝겊 사이로 시뻘건 레이저 눈빛 쏘아대며 요리조리 사람들을 잘도 쫓아다니는 공포어린 존재 아닌가. 무덤이 연상케 하는 퀴퀴하고도 음산한 기운에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덤 안에는 아직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까도 까도 계속 까야하는 양파왕, 투탕카멘. 여러 겹으로 된 관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장면에서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보듯 은근히 긴장감이 생겼다.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매력은 서사와 수학의 결합이었다. 눈알 그림 하나에 담긴 수학적인 의미는 매우 치밀하여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오롯이 이야기의 힘으로 독자들을 끌어가는 힘이 상당하다. 기자로 일했던 경험이 사실적인 문체로 이어져 깔끔한 느낌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 느낌을 주는 그림도 독특하고 마음에 든다.

 

어른이 되어서 읽는 동화는 종종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어릴 때는 보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메시지가 보석처럼 발견되기 때문이다. 용기 있게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헤쳐 나가며 도전하는 주인공을 보고 나를 돌아본다.

이색적인 이미지를 가진 이집트라는 공간적 배경,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이라는 생경한 시간적 배경에 덧입혀진 신비로운 이야기. 갑자기 상상하고 싶어졌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 위를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꿀 것만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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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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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이가 작성한 문장 완성 검사지를 우연히 보게 된 날이었다. 몇 개의 미완성된 문장에 대한 답변이 이토록 선명하게 심리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나온 엄마의 회색빛 시간들에 푹 적셔진 아이. 짧고 무심한 문장이 바늘인 듯 마음을 찔렀다.

직장일과 육아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가사에 날마다 피곤했지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핸드폰 주소록을 아무리 뒤져도 선뜻 버튼을 누를 수 없던 외로움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던 엄마를 아이는 어떤 눈망울로 바라보고 있던 걸까.프롤로그에서 문장 완성 검사에 얽힌 일화를 보며 그 때를 떠올렸다. 지나왔다기보다는 견뎌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들. 책 제목과 자연스레 겹쳐지던 시기였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라니! 매일 매일이 아득한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한 제목인가. 정열적인 붉은 표지가 책을 만든 이의 심장인 듯 그 안에 담겨있을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제목만으로 위안이 되는 책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을 읽기 전에는 긴장감이 앞선다. 간혹 제목만 번드르르하고 저자 혼자 떠들고 끝나버리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읽었다 마음에 더욱 커다란 구멍이 뚫린 적도 있었기에. 기대만큼의 내용이 담겨있는 책은 비교적 드물었다. 내용이 제목을 탄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별 기대감 없이 첫 장을 펼쳤다.

 

짧은 문장 하나가 많은 내용을 포함할 때가 있다. ‘나는 가진 게 많다.’(p5)라는 첫 문장은 작은 충격이었다. ‘첫 문장의 중요성을 다룬 내가 사랑한 첫 문장(윤성근, 2015.7.)이 생각났다. 이토록 자신감 있게 가진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매력적인 첫 문장에 앞으로 나올 내용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99칸의 방을 가졌어도 100칸을 채우고 싶어 1칸을 욕심 부리는 마음이 일반적이건만, 그가 가졌다는 무언가가 단순히 물질의 많고 적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시간들을 지나와야 이런 마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책에는 82편의 시가 16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담겨있다. 주제별로는 5편 내외의 시가 소개된다. 저자는 시가 뿜어내는 치유적 공기에 매료됐다.’(p8)라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저자를 보며, 시를 해석하며 저자가 뿜어내는 치유력 또한 상당하다고 느낀다. 시를 음미하며, 저자의 생각을 음미하며,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시간 사이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소박하고 따스한 문장에 때론 울컥해하면서.

 

무엇보다 매력적이던 내용은 등장하는 많은 문장들이 하나같이 내 자신을 긍정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당신은 원래 스스로의 다리로 걸었던 사람이다.’(p72~73), ‘자기 몸과 마음이 기운 쪽으로만 움직이면 절대 안전해요.’(p75, <영웅>, 이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지금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나를 보호하고 다독여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야.’(p77)

종종 등장하는 옳다라는 문장은 사소한 망설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누군가의 꼭 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은 언제나 옳다.’(p53~54), ‘내가 그렇게 선택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필요해서다. 그러므로 모든 나의 끌림은 늘 옳다.’(p54)

 

힘들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소리 지르지 못하는 깊은 물이/ 어쩌면 더 처절한 비명인지도 몰라.’(p216, <아름다운 비명>, 박선희) 이불을 꿰맨 후 뒤집어서 구석에 접혀있던 귀퉁이를 빼듯이 마음 한 구석에 고여 있던 아픔이 후련하게 빠져나갔다.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p30, <겨울 풍경>, 박남준)란 문장도, 시 <살다가 보면>(p38, 이근배)도 위로가 되었다. 시인의 주는 공감의 힘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산속에서>를 읽고는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p84)이란 문장에서 시가 지닌 치유의 힘을 생각했다. ‘치유란 동굴 속에 숨은 사람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서 어둠을 함께 감내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가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p311) 시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관통한 느낌을 문장으로 옮겨 담으며 나도 그래, 나도 그런 적 있어라 말하고 있었다.

 

<업어준다는 것>(p56~57, 박서영)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토닥일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에필로그제목 역시 인상적이었다. ‘함께, 충분히 기다려줄 것!’(p310)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일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거울처럼 되뇌어도 충분한 문장이다. 딸아이가 생각났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와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엄마를 충분히 기다려준 것은 아니었을까. 배려심이 깊고 어느 순간 단단한 심지를 지니게 된 아이. 아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훌쩍 자라버린 22세의 딸. 내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문장은 그토록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걸어와 준 나의 아이였다.

 

책표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강렬하게 보였던 색채가 주던 첫인상이 살짝 달라져있다. 따스하고 은은하다. 언젠가 시골에 가서 샀던 스카프가 연상된다. 천연 염료로 염색한 부드러운 거즈 같은 헝겊. 반짝이지 않아도 소박하고도 결 고운 느낌에 목에 두르면 은은한 따스함이 전해져오는 느낌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처럼 그런 따스함이 뭉클한 책이다, 이 책은.

 

 

오타

p123, 웃다가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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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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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 뚜 둥 뚱 띵 띠 딩 띵~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 밖에 없는 줄 알던 내게 가야금으로 울려 퍼지던 <Canon>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곰곰 생각하면 얼마나 고지식했던가. 느낌이야 비루하겠지만 첫눈처럼 그 놈에게 가겠다며 나도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을. 어떤 악기로든 그 음악을 연주하면 그만인 거다. 집요하게 인터넷을 뒤졌다. 단순한 주제에 입혀진 변화 자체로도 매력적인 곡이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색소폰에 이르기까지 여러 악기로 울리면서 미술에서의 20색상환을 보는 듯 달라졌다. 이토록 많은 악기로 연주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웠던 건 각각의 연주가 갖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캐논변주곡을 떠올렸다. 조금씩 변주되는 일상은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통통 튀는 음악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1장은 책 수집과 서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책꽂이는 매혹적인 굿즈에 부록으로 딸려오는 책으로 주로 채워진다. 알라딘 중고 매장의 경이로운 가격을 직접 확인한 후로는 중고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희귀본을 향한 열정의 깊이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창시절 희귀한 껌 종이 수집을 위해 엄청나게 껌을 씹어댔던 마음과 비슷할까. 절판본 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 속에서 생소한 책들과 그에 얽힌 일화를 많이 알게 되었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 걸맞게 삼면이 책꽂이인 서재라니! 안방의 한 면만 겨우 점령한 나는 거실 TV 주변으로의 영역 확장을 도모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버린 과거가 있다. 집안 곳곳에는 나의 책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명당이 이토록 많건만. 붙박이 신발장도 그렇고, TV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자리 주변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얼마나 아늑할 건가 말이다. 이중으로 주차된 안방의 책꽂이를 올려다보며 그림의 떡을 보듯 저자의 서재 이야기에 입맛을 다신다.

 

2장에는 주로 아내와의 일상이, 3장에는 친구들, 딸아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담겨있다.

아내와 연결된 애정 어린 일화가 인상적이다. 자칫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경쾌하다. 침침한 장면은 저자를 통과하면서 가벼운 탁구공으로 변신하여 또르르 책을 향해 달려간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런 책 이야기를 끌어낼까 싶을 정도로 엉뚱한 방향이다. 아내와 고기의 결합에서는 어머니, 야구, 부탄, 세계사 이야기가 담긴 책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아내와 밥이 결합되니 위대한 패배자, 마사지법, 지위다툼에 관한 책이 등장한다. 날마다 먹는 밥이지만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밥과 얽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책과 연결 짓는 저자의 사유가 유쾌하다.

 

일상과 책 소개가 적절하게 버무려진 글이다.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출간되지만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어차피 기술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지듯이, 누가 소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으로 소개되기 마련이다. 엄청난 책이라며 각종 언론의 찬사가 쏟아진 책이라도 정작 읽으면 배신감을 느낀 적도, 별로 라는 평에 기대 없이 읽었다가 보물섬을 찾은 경우도 있다. 책 소개에 관한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성석제, 천명관,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뇌내혁명,최성애 박사의 행복수업,자식이 뭐라고,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행복한 책읽기,나의 레종 테트르등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메모한 책이 10여 권이나 되니까.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이다. 읽고 나서 괜히 샀다 싶으면 중고 매장으로 냉큼 달려가기 위한 심산이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펜과 연습장을 옆에 둔다. 좋은 문장이나 연상되는 생각을 메모하여 독후감을 쓸 때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다 읽고 보니 책 제목과 작가 이름만 잔뜩 적혀 있다.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좋은 문장이 있으면 종종 적곤 하는데, 이번에는 단 한 문장도 적지 않았다. 기발한 생각이 무더기로 많았는데, 문장이 괜찮았는데 왜 적지 않았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유를 알고는 피식 웃는다. 너무 많았던 거다. 적어도 이 책을 팔지는 않겠구나. 유려한 문장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어휘로 결합된 그의 문장은 본인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빛을 발한다. 흔히 일어나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적은 글은 그 상황에서 누구나 생각할 법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표현한다. 점진적인 감정의 변화를 세밀하고 유머러스하게 드러낸 글이 모여 지문과도 같은 저자만의 문체가 된다. 단편 소설을 써도 어울릴 듯싶다.

 

얼핏 지질하게 보일 수 있는 축축한 생각들을 따스한 양지로 끌어올려 봄날 햇살을 받은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것. 저자의 글이 가진 힘이다. 독서만담이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수필의 향기가 나는 이야기였다. 미소를 지으며 그 향기를 따라가다 내용이 어떨까 궁금해지는 책을 여러 권 만났다. 이야기 자체로도 유쾌한데 좋아하는 책까지 잔뜩 담겨있는 책이라니! 즐거운 음악을 편안하게 감상하고 난 느낌에 행복해졌다.

 

 

p40, 밑에서 두 번째 줄, ” 빠짐

p144, 세 번째 단락, 티켓 사자의 서』→『 티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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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7-03-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앞뒤 맥락을 이해하지 않았거나, 문해력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쓴 것이 느껴지는 호평과 악평은 모두 ‘저런 분도 있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나비종님의 글은 따뜻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제 책을 칭찬해 주시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제 책을 철저하게 읽었고 사려가 깊은 분이라면 그 어떤 지적이라도 달콤할 것 같아서요.

오타를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판을 찍게 되면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특히 책 제목 오타를 냈군요. 고맙습니다.

리뷰를 읽다보면 대체 이 분들은 왜 책을 안 쓰는거야?라는 감탄이 나올 때가 있어요. 나비종님의 글이 딱 그렇네요. 제목에 변주곡이라는 말이 나와서 내 책이랑 변주곡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했는데요.

아귀가 딱 맞는 비유이시네요. 다만 과찬이라서 제가 좀 민망합니다. 언급하신 책 모두 좋아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뇌내혁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어요. 오래된 베스트셀러라서 ‘이게 뭐야‘라고 지적하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놀랍게도 실제로 있습니다) 좋은 책은 시기의 장단기, 판매여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봐요

천년전의 책이건 오늘 나온 책이건 , 1천만권이 팔린 책이건, 수십권이 팔린 책이건 독자에 따라서 명저가 될 수 도 있죠. 읽은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저에게 <긍정 마인드>의 중요성을 알려준 인생의 책 중의 하나에요. 리뷰 감동적으로 잘 읽었고 과찬은 질책으로 여기겠습니다. 저보다 글을 잘 쓰시는 것이 확실하니 기회를 봐서 출간하시길....

나비종 2017-03-05 12:09   좋아요 0 | URL
댓글이 거의 없는 황량한 이 공간에 이토록 성의있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요. 댓글을 쓰신 분이 무려 헉! 작가님이라 한 번 놀라고, 리뷰에 대한 리뷰를 쓰신 듯 막대한 분량에 두 번 놀란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ㅎㅎ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을 일상 뿐아니라 글에도 적용하는 편이라 댓글에 대한 댓글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달아왔습니다. 가령 ‘잘 읽었습니다.‘란 글이 달리면, ‘감사합니다.‘라 적었다가 음, 한 글자가 모자라는군! 하며 ‘감사합니다, 훗!‘이런 식으로요. 어제 저녁, 책에 대한 리뷰를 쓰다 필이 꽂혀서 새벽녁까지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써대는 바람이 이제 겨우 멀쩡한 두 눈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좋은 느낌으로 리뷰를 읽어주셔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책읽는 속도가 느려터져서 읽다보면 다소 세밀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직업의 특성상 앞에 주어진 테이터를 분석하고, 특징을 파악하고,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분류하고, 오타를 발견하는 일에 익숙해져있다보니 저도 모르게 치밀해지곤 합니다.^^; 책 제목에 대한 오타 앞에서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사후 세상으로 가는 내용을 소개하신 책이라 티켓으로 입장하는 것처럼 일부러 중간에는 제목을 바꿔쓰신 게 아닌가 하구요. 궁금한 마음에 적어놓았더니 답변을 주시네요.

캐논을 떠올린 이유는 전체적인 느낌 때문입니다. 정황상 분명 같은 사건이었을 것 같은데 조금씩 변화되는 내용과 문장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거든요.

요즘에는 고전에 관심이 가서 책을 구입할 때 학창시절에 읽지 못했거나 허술하게 읽었던 도서도 함께 구입하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데미안>,<노인과 바다>등 다시 읽고 새로운 느낌을 받고 싶어서요. 좋은 책에 대한 생각이 저와 일치하시네요. <뇌내혁명>도 구입해서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려가 깊다거나 작가님보다 글을 잘 쓴다하신 표현은 과찬이십니다. 이 공간에서 독서의 고수, 생각의 고수님들의 글을 접하다보니 제 생각이 습자지처럼 얇아서 깊이를 논하기 어려운 지경이고, 제 글 역시 비루하고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거든요. 더욱 많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라는 질책으로 담아두겠습니다.ㅎㅎ(민망해하면서도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나비종은 따라쟁이~~)

박균호 2017-03-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나비종 2017-03-05 13: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박균호님두요.^^*
 
지율스님의 산막일지
지율 지음 / 사계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손 한 번 내밀어보세요. ? 넷째 손가락이 검지보다 길면 남성 호르몬이 더 많은 거래요. 그래?

옆에 있던 20대의 동료도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과 나의 손을 번갈아 보자니 길이보다 질감에 눈길이 간다. 매끈하고 뽀샤시한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주름지고 푸석한 손. 왠지 모를 부끄럼에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는다.

책 속의 사진에는 할매와 할배들의 손이 자주 등장한다. 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쭈글쭈글 주름지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고,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3D 화면을 보듯 굴곡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책은 열 가구밖에 살지 않는 오지 마을에서 3년 동안 머문 지율 스님이 할배, 할매들과 더불어 살아온 일상을 기록한 농사일지이다. 열두 달 동안 이어지는 소농들의 투박하고 소박한 삶이 흑백 사진처럼 담백하다. 천천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계절의 변화도 느껴지고 농사짓는 풍경이 24절기와 절묘하게 연결되어 멈추지 않는 시계바늘처럼 그려진다. 살아 숨 쉬는 땅과 꿈틀거리는 생명의 존재가 보인다. 그 속에서 자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은 말을 거는 책이다.

흑백과 컬러가 번갈아 있지만, 컬러라고 해도 주로 두 가지 색상이다. 가늘게 굽이치는 초록, 부드럽게 뭉글거리는 황토, 자주 등장하는 동물의 몸조차 땅 색깔을 닮아있다. 가을 단풍처럼 찬란한 빨강, 노랑이거나 화창한 하늘처럼 푸른색도 있건만 렌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스님을 따라 덩달아 시선의 끝을 아래로 향해 본다.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모델은 할배와 할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들의 손과 발과 웃음이다. 흙을 밟고 있는 맨 발, 바람을 어루만지는 맨 손, 모를 심는 투박한 손, 갈라터진 발뒤꿈치. 그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울컥한다. 단순히 안쓰럽다는 느낌과는 미묘하게 다른 뭉클함이다. 왜 이럴까 가슴을 쓸어내리다 중간 즈음에서 발견한 문장에서 답을 찾는다.

당신들의 일생은 심고 가꾸고 낳고 기르고 거두고 나누는 일이었으리라.’(p164~165)

왜소하고 굽은 등으로 땅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생명을 두 손으로, 두 발로 정성스레 지키고 계시는 분들. 수줍은 소녀처럼 소박한 호영이 어머님의 웃음이나 호탕한 대장부처럼 껄껄 웃음꽃이 활짝 핀 동네 어르신들의 얼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땅과 같이 낮아져 등 굽은 그분들을 그렇게 내몰고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p111)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 삶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나 역시 방관자로 머무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세상은 한없이 높아지고 넓어지고 빨라지지만, 할매들은 그렇게 육십 년을 살아오셨고 남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가실 뿐이다.’(p211)

늙어가는 시골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다음에는 누가 이 땅을 지켜낼까. 땅을 지켜낼 손들이 얼마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조금만 더 우리 이웃의 삶과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에 관심을 가진다면 법과 제도가 지키려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중한 것을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p163)

손의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지키고 있느냐 에서 오는 것이었다. 땅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손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이다.

오늘 하루 내 손이 만진 것을 떠올려본다. 앞으로 만지게 될 무언가를 생각한다. 무엇을 만지고 지켜야할까. 적어도 한갓 종이나 쇳덩어리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내 발길이 닿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을 무언가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다. 못생기게만 보였던 내 손에서도 나이 들어갈수록 깊어질 주름 사이로 아름다움이 배어나올 수 있도록.

 

 

p167, 4째 줄, 문장 끝 따옴표 누락됨

p200, 40미터는 족히 되는 초록색 꽃뱀~ : 보통의 꽃뱀은 50~120cm정도라는데, 40미터는 다소 많이 길어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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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자마자 양손을 펴서 살펴봤어요. 왼손은 검지가 길고, 오른손은 약지와 검지 길이가 비슷해요.. ^^;;

나비종 2017-02-22 09:01   좋아요 0 | URL
오홋! 저와 반대이시군요. 저는 양손 다 약지가 깁니다만. .ㅎㅎ
이거 통계치라 완전히 믿을 건 못 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펴서 오밀조밀 살펴보게 되더라구요^^;

yureka01 2017-02-2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진 때문에라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나비종 2017-02-22 09:27   좋아요 0 | URL
MSG 첨가하지 않은 잔잔한 다큐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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