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 1.4킬로그램 뇌에 새겨진 당신의 이야기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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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에 너 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터프하게 여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제 가슴에 손을 얹는 남자. 드라마 <파리의 연인> 속 이동건이다. 내 맘속에 너 있어 부르짖는 심쿵 멘트에 모니터가 뚫어져라 감정 이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랑하면 두근거리는 심장, ‘Heart’. 하트 모양()이 심장의 형태를 본뜬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마음은 심장에 있음을 당연히 여겨왔다. 곰곰 생각하면 중추신경계는 뇌와 척수뿐이니, 정신 작용은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굳이 마음이 어디에 있냐 한다면 뇌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을. 그렇긴 해도 이동건이 김정은의 손을 자기 머리에 얹고 뇌 안에 너 있다!’ 외치는 장면은 어쩐지 뻘쭘하다. 이어질 장면을 더 상상해본다. 집에 온 여주인공, 손바닥으로 느껴지던 심장 박동을 생생하게 되새기며 뒤척여야 자연스럽건만, 머리에 얹었던 손을 코끝에 대었을 때 정수리 냄새라도 난다면?

 

347페이지의 두께감에 눌리고, ‘라는 기관이 연상시키는 복잡한 이미지에 주춤했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살짝 헐벗고 허연 옷 늘어뜨린 근육질의 남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컴퍼스를 들고 도형을 그리는 책표지. ‘이 책 겁나 어려워.’ 라며 학문적 냄새를 뿜어내는 포스에 멈칫하던 책,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이다. 한동안 책장의 먼지만 읽어내던 책인데 어쩌다 손이 갔을까. 명색이 과학 샘인데 이 정도 책은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은 없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1.4킬로그램의 뇌에 대한 이야기는 긴장했던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빠른 스피드로 펼쳐졌다. 괜히 걱정했다 싶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뇌 관련 강연을 집중해서 듣고 난 기분이었다. 뇌의 구조적인 과학 상식부터 뇌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에 관한 일화, 영화 속 장면, 실험 이야기, 미술 작품, 정밀한 스케치, 문학 작품, 철학적 사유가 담겨있었다. 그 안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뇌 모양의 퀼트 작품을 라는 실로 한 땀 한 땀 꿰어서 만드는 것 같았다. 뇌를 통해 나를 들여다본 경험은 신선했고 새로운 관점 하나가 늘어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에 뿌듯했다. 첫 장을 펼칠 때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끊임없이 를 생각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는 존재하는가. 1<뇌와 인간>을 읽으면서 육체와 정신에 대하여 생각한다. ‘육체가 시간의 흐름을 살듯이 정신도 시간의 흐름을 삽니다.(p40)’라는 문장 앞에서 점점 예전 같지 않아지는 몸을 바라본다. 육체가 늙어가는 속도로 정신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이면서도 무서운 일인가. 육체는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 누구나 나이 들어가면서 쇠약해진다. 이와는 달리 정신의 흐름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가 되었다가 탈피하고 날아가는 나비가 되는가 하면 폭우에 무기력하게 휩쓸려가는 나뭇가지가 되기도 한다.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허한 대상이 내 안 어딘가에 있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뇌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점이 새삼 신기하다.

우리 몸의 세포는 주기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뇌세포만이 유일하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네이버캐스트의 <숫자로 보는 일생>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뇌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 말한다. 어릴 때부터 내게 다가왔던 모든 경험들은 내 뇌의 어딘가에는 새겨져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란 존재를 만들어왔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뭉클하다.

 

는 합리적인 존재인가. 2<뇌와 정신>에 나온 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맞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p117)’. 어떤 일이든 그 일이 내게 일어날 수밖에 없던 배경을 어찌나 잘 끼워맞추어 왔던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적인 본능인걸까.

모든 선택에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행동을 좌우하는 수백 수천 가지 요소들이 존재(p122)’한다는 문장에서 잠시 쉬어 간다.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을 되돌아보면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지금은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정반대의 선택이라 해서 자신을 모순되는 존재라 여길 필요는 없겠다. 선택으로 가는 배경적인 공간이 변화했을 것이니. 빛은 직진하지만 중력장을 지날 때에는 휘어져서 진행한다. 개기월식 때 지구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할 달이 붉게 보인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양과 달 사이에 지구가 가로막고 있어도 지구의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기 때문에 달 표면까지 파장이 긴 붉은 빛이 도달하여 반사되기 때문이라 한다. 대학 다닐 때 설명해주신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빛의 입장에서는 최단 거리를 가는 것이라고. 단지 공간이 휘어져서 먼 길을 도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고. 다른 사람의 선택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 모든 선택이 선택 시점의 배경 안에서는 최선이었듯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기에.

뇌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면이 있다. ‘행동은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한다면, 눈 딱 감고 2주 동안만 그 사람에게 잘해주면 됩니다.(p124)’ 웃으면서 공감한다. 행동을 정당화하는 뇌의 습성을 적절히 활용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환상통, 거울 요법, 환각, 코타르 증후군(좀비 병) 등 뇌와 관련된 질병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바보스러워 보이는 뇌의 작용이 귀엽다는 생각을 한다.

 

는 의미 있는 존재인가. 3<뇌와 의미>를 되새기다보니 아침에 본 재방송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어쩌다 어른>에 나온 김미경 강사의 강연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므로 나에 대해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도 나라고 한 부분이다. 20대에는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두려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조언을 들은 후에 찜찜해한 적도 많았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데 하며. 나에 대해서 나만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엉뚱한 데에서 답을 찾으려했으니 나의 사소한 면까지는 모르는 이의 조언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의 해상도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삶의 해상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p243)’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입이 딱 벌어지는 풍경을 보았는데 막상 사진으로 찍으면 눈으로 보았던 만큼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그만큼 우리 눈의 해상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밀하다고 한다. 삶의 해상도도 마찬가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삶은 상대적으로 해상도가 떨어지는 카메라의 사진일 수밖에 없다. 내 삶의 장면을 의미 있는 해상도로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는 영원한 존재인가. 4<뇌와 영생>에서는 SF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존재를 떠올린다. 컴퓨터에 뇌만 이식하여 불로장생하는 우주적인 악당이.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과학뉴스에서 미래의 인간 모습이 그림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뇌와 생식기나 손가락이 과하게 크고 나머지 몸은 상대적으로 왜소하다. 영화 <E.T.> 속 주인공이 연상되는 기형적인 모습이다. 묘한 일은 어쩌면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이 과학 분야 뉴스에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언젠가는 가능해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다. ‘우주 더하기 나우주 빼기 나의 차이가 없는(p267) 세상일지라도 유한한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싶다.

 

5<뇌과학자가 철학의 물음에 답하다>에서는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나를 생각한다. ‘무엇인가 특별한 경험을 하거나 유리벽을 깨고 멀리 갔을 때 자아가 성장한다(p326)’ 이 책을 읽은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고, 그것은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독립적인 자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예측 가능한 세상에 잡음을 집어넣음으로써, 예측 코드로는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방법입니다.(p330)’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나를 더욱 성장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뛴다.

 

신기한 일이다. 어떤 장르의 책을 읽어도 결론은 나 자신으로 모아지는 것이. 뇌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당겨서 바탕 화면을 변화시키며 나를 읽어보라 시험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삶을 경험하며 살아간다면 더욱 재미있어질 것 같다. 뇌에 앉은 먼지가 기분 좋은 바람에 살짝 날아간 것처럼 상쾌하다. 뇌 안에 있는 내가 조금 더 자란 기분이랄까. 정신이 거의 무한정적으로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멋진 일이다. 뇌에 있는 주름 켜켜이 새로운 무언가가 담기는 상상을 한다. 발이 절로 들썩인다. 일단 걸어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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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우주에 거주하는 미래형 인간의 모습도 상상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주의 무중력 현상 때문에 뇌의 모양이 짓눌리는 형태로 변한다고 해요.

나비종 2017-11-20 23:21   좋아요 0 | URL
공간이란 시간만큼이나 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어떤 힘이 개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으로 탈바꿈하니 말이죠. 우주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힘들이 물감처럼 공간을 채색하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무중력 상태의 공간에서 뇌가 변한다면, 그 안에 담긴 정신도 육체만큼이나 달라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