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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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그림에 불과했다. 두 팔, 두 다리 활짝 벌리고 맨몸으로 서있는 남성이라니!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시선은 중심으로 모아졌다. 그런데 가장자리로 눈길이 옮겨지면서 살짝 갸우뚱한다. 원과 정사각형은 왜 그린 걸까.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인체 비례도>를 처음 보던 순간의 기억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각종 뼈, 근육, 장기들의 스케치도 있었는데 그것이 매우 정교해서 놀랐다. 메디컬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으로 제시되는 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린 이가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도대체 화가야, 과학자야?

 

SF를 중심으로 글을 써온 작가라는 소개를 읽기는 했지만,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글들이 펼쳐졌다. 무릇 내게 SF라 함은 우주선에서 뿅뿅 광선 줄기차게 나와 주거나, 매우 커다란 괴 생명체가 드럽고 걸쭉한 침 같은 거 질질 흘리면서 인간이건 동물이건 홀딱 먹어버리거나, 미래나 과거로 이리 저리 옮겨 다니거나, 붕대 풀어 질질 끌고 다니며 바닥 청소하는 미라가 등장하거나, 땅 속 깊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건더기 하나 서로 먼저 찾으려고 용을 쓰는 부류 정도였다. 곽재식의 소설은 이러한 고정관점을 단숨에 없애주었다. 생소하고 신선했다. 의식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겉표지 안쪽에 적힌 저자의 소개만으로 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했다. 도대체 과학자야, 소설가야? 소설 안에 담긴 과학적인 내용들이 심오했기에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궁금했다. 저자에 대하여 조금 더 찾아보고 나서야 그의 소설이 왜 이토록 전문적인지 이해가 되었다. KAIST와 동대학원을 거쳐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과학자였다.

 

2006년에서 2016년까지 썼던 단편들 중 9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토끼의 아리아>,<흡혈귀의 여러 측면>은 대기업의 언론 플레이, 국가 예산을 연구비로 따내기 위한 연구소 설립 관련 비리, 연구원의 연구비 횡령, 언론에 의해 내몰려지는 약자, 군중심리로 무심코 저지르기 쉬운 폭력 등 과학 분야에서의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다룬다. <숲 속의 컴퓨터>,<4차원 얼굴>,<로봇복지법 위반>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지구 멸망을 86년 앞둔 인간들의 심리를 다뤘고, <박승휴 망해라>,<빤히 보이는 생각>은 인간의 뇌와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읽은 <박흥보 특급>흥보가SF의 기발한 콜라보이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부터였나, 요즘은 소설집을 읽을 때 발표 순서대로 읽는다. 각 단편의 끝부분과 저자의 말에서 소설의 발표 시기가 소개되었기에, 시간의 순서대로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었다. ‘, 이 때부터는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졌구나.’ 상상하며 읽어가는 묘미가 있었다.

 

작년 11, 요리하는 로봇에 대한 과학 뉴스를 수업 시간에 소개해주었다. 아이들은 동영상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싱크대에 설치된 두 개의 로봇 팔이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끝내는 홍보 영상은 상상과 현실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 후로 로봇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더니 올해 3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한 로봇 바리스타, 실리콘밸리에 등장한 로봇 피자 체인점, 로봇 바텐더에 대한 기사가 등장했다.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내용과 함께 로봇에게도 사람처럼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 뉴스의 요지였다. ! 굉장하다! 의 차원을 이미 넘어섰다. 애완견 대신 강아지 로봇이 등장하는 세상이다. 로봇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급속도로 넓어질 것이다.

올해 초, 웹 소설의 드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다. 요일별로 매일 1030분에 업로드가 되는데, 이게 은근 순정만화 같기도 하고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는 소설은 <모두 너였다>인데 여기에 로봇이 등장한다. 인공지능을 가진 클론과 클론테스터와의 이야기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도무지 다음 편이 상상이 안 되는 작품이다. 곽재식의 소설들이 그랬다.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한 작품을 읽으면 결론이 궁금해서 중간에 호흡을 끊을 수가 없었다.

9편의 작품 중에서는 <로봇복지법 위반>이 가장 인상 깊었고 공감이 갔다. 근래 로봇 관련 과학뉴스를 많이 접하고 그런 내용의 웹 소설에 빠져있기 때문일까.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로봇이 일상화되는 세상, 로봇의 권리,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접점이 존재한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는 로봇, 그런 로봇들이 폐기되는 과정, 로봇의 할렘 가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작가가 그린 세상이 전혀 황당무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거다. 이제 로봇은 더 이상 상상 속 대상이 아니므로. SF가 현실화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만일 이 거장이 소설을 썼더라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상상했다. 이토록 과학적이면서 예술적인 인물은 어떤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릴까 궁금했다. 11을 더해서 2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경우를 메디치 효과라고 한다. 화가이면서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그림이 과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듯이, 과학자가 쓴 소설은 과학적으로 좀 더 깊이 있고 훨씬 더 넓은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반전에 유머가 살짝 얹힌 소설. 읽고 상상하고 읽고 상상하다보니 내 상상력도 한결 풍부해진 느낌이다. 상상의 나이테가 넓어졌다. 따뜻해서 세포분열 속도가 빠른 봄과 여름에 나무가 확 자라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p40, 1째줄, 더는 더 철저히 저는 ~

p284, 3번째 단락 5째줄, 어떻게 갖고 어떻게 다를지를 ~ 같고 ~

p328, 밑에서 2째줄, 감각을 방해하기는 일을 ~ 방해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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