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2년째다. 읽기만 하다가 쓰기가 더해지더니 독서모임에서 말하고 듣기까지 하고 있으니 드디어 초딩 국어 4종 세트를 완벽하게 갖춘 인간으로 거듭났다. 이런 시간들이 고통이던 때도 있었다. 빠르게 휘리릭 읽어재끼고 싶어도 느려터지기만 한 독서 속도에 얼마나 갑갑했던가. 갈 길은 까마득했다.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드문드문 찾아오던 그런 순간들이 마라토너에게 찾아온다는 데드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다. 책 읽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은 편안하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길이 나왔다. 이제 세컨드 윈드로 들어선 걸까.

 

여전히 마음 한 구석 해결되지 않은 답이 있기는 했다. 내가 왜 책을 읽지? 책을 읽으며 시시때때로 질문을 던졌다. 작사가나 시인이 되고 싶어서? 뭔가 1% 부족하다. 반드시 그런 목적만은 아닌데. 그럼, ? ……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디어 이 책에서 답을 찾았다.

 

서문의 첫 문장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책을 펼쳐 들면 순식간에 나만 남습니다.(p5)’ 그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홀로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알 것 같기에. 이 한 문장에 홀딱 반해서 주문했다.

평소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주로 세 가지이다. 서문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 차례를 훑어보며 내 성향과 맞을까 짐작한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신문까지 추천해주면 대부분 낙점이다. 이동진 작가가 말한 세 가지 방법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일치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한 방법은 책에서 3분의 2지점을 펼쳐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 대부분의 저자는 책의 3분의 2지점쯤 되면 힘이 빠지는데,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나머지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에세이나 시는 편집 방법에 따라 순서를 뒤섞을 수 있으니 이 방법을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소설을 선택하기에는 타당한 방법으로 판단된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란 이름은 많이 들어봤고, 내 책장에는 김중혁과 함께 쓴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질문하는 책들이 꽂혀있다. 문제는 두 권 다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며, 나는 팟 캐스트가 도대체 뭐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른다는 거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 거의 바닥상태라는 게 내가 가진 결정적인 단점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을 통해서 이동진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저자가 만들어낸 지적인 세계,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세계와 통째로 만나는 것입니다.(p79)’ 사는 무대가 다르기에 그와 내가 평생 만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썩 괜찮은 세상을 알게 된 느낌이다.

 

17천 권의 책을 소유한 사람의 독서법이 담겨있다. 17천이란 숫자에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그가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17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각의 책들을 선택하기 위해 17천 번의 생각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각이라는 도구를 통해 다듬어진다. 존재는 끝도 없이 깊어지거나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 것처럼 다듬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각도에서 몇 번을 커팅 하느냐에 따라 빛의 반사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생각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사람은 세상이 뿜어내는 빛도 섬세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공감하며 반짝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마치 재미있는 책을 또 한 권 읽는 느낌을 줍니다.(p6)’ 대화뿐 아니라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저자와의 공통점을 찾으며 위안을 받았다. 나와는 다른 점도 많았다.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된 듯 신선했다.

 

<1>생각이라는 주제로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를 소개한다.

책을 읽는 이유를 정보를 얻기 위해, 있어 보이기 위해, 재미있으니까.’등 세 가지로 제시한다. 그가 말한 세 번째 이유가 바로 내가 찾은 답이다. 재미있다는 데,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도 이유가 없듯이 책도 마찬가지인거다. 그냥 좋으니까, 재미있으니까 읽는 거다. 읽어지는 거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고 쿨한 답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다.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장르였다.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야기니까. 소설 속에 설정된 극단적인 상황과 인위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싫었다.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만 같았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p29)’,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p30)’ 궁금해졌다. 인간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의 색깔이. 소설 몇 권을 거부감 없이 구입했다. 두근거렸다.

저자는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인간은 한 번 밖에 못 살기 때문,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읽은 책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말을 조심하게 되었으니까. ‘다르고 다름을 좀 더 민감하게 말하고, 비언어적 행동도 자세히 관찰한다. 사람의 감정은 의외로 작은 것에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섬세해진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과 호흡의 차이점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위 고전에 대한 찜찜함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 독서의 주된 대상은 교과서였기에, 개나 소나 다 아는 필수 고전 중 안 읽어본 책이 꽤 많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습니다.(p36)’라는 저자의 말에서 상당한 위안을 받았다.

독서에서 정말 신비로운 순간은, 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사이 어디인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p80)’ 책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책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만나는 그 적절한 지점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무엇을 공감대라 해석한다.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공감대의 균형이 잘 맞는 책을 만나는 순간, 가장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2>는 이다혜 작가와의 대화가 담겨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행복에 관하여 나눈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고 빈도라고.(p141)’, ‘우리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이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p142)’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집 근처 커피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한 느낌을 쓰는 일이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엄청나게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하루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커피 값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음에 감사한다.

 

<3>에는 이동진의 추천도서 500권의 목록이 있다. 이 중 내가 읽은 책은 7권이고, 읽지는 않았지만 책장에 있는 책이 16권이니, 아직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 있을 책은 477권이다. 관점의 전환이 일어났나. 예전 같으면 나의 무지함에 괜히 주눅이 들어 마음이 쪼그라들었을 터이다. 이제는 그의 추천도서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겹쳐지는 책이 23권이고, 평소 관심을 갖지 않던 책이 477권이라는 것뿐이다. 그의 독서법에 의한 목록이니 다만 내게 맞는 책을 선택하는 데에 참고로 하면 될 것이다. 그 중 내가 선택한 책을 읽어간다면 477권이 빚어내던 생각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I have read, I'm reading, I haven't read’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북플 북엔드에 적힌 글귀이다. 읽은 책이 있고, 읽고 있는 책이 있고, 읽을 책이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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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30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3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서 모은 책들이 몇 권인지 궁금해서 2년 전에 책을 세어 보는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 세어보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어요. ^^;;

나비종 2017-07-01 0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래서 전 알라딘에서만 구입하니까 구매목록으로 대략만 압니다. 알라딘 중고에 판 것도 꽤 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