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적 정치 - 좌·우파를 넘어 서민파를 위한 발칙한 통찰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릴 때 매일 빠짐없이 신문을 보긴 했다. ‘TV편성표띠별 오늘의 운세. 두 가지 코너가 신문을 통해 접하던 세상의 전부였다. 사실 세상이랄 것도 없었다. 오늘 텔레비전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 지, 12분의 1의 확률로 똑같은 행운을 갖게 되는 닭띠들의 운명을 확인하는 일로 세상을 알 수는 없었으니까. 그 때의 내게 정치라든지 경제라든지 사회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딴 세상의 일이었다. 인쇄되어 지면에 담긴 실제 세상은 박제된 글씨에 불과했다. ‘정보는 넘쳐 난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 된다.(p44)’ 보고 싶은 것만 보던 나의 세상은 매우 밋밋했고, 그 밖을 메우던 나머지 세상은 미지의 검은 대륙처럼 거대하고 멀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p65)’ 젊었을 때는 뭔가를 스스로 판단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는 수동적인 인간은 판단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흔히 오르던 단골 주제는 정치였는데 나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관심 분야에 대한 호불호가 워낙 극명하게 갈리는 성격이다. 좋아하는 분야는 끝까지 파고들었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한 상식은  최소한이라는 하한선이 전혀 없는 제로 상태였던 거다. 우리,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맞니? 어떻게 이 사람을 모를 수가 있지? 친구의 핀잔에 속으로 항변했다. 모든 분야를 다 알 필요는 없잖아. 난 단지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이야. 플라톤이 했다는 말은 과거의 나를 향해 죽비를 내리친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p65)’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던 것을.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p158)’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말했다고 한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한다.’던 홍세화 선생님의 말씀이 디졸브 된다. 몇 년 전에 들었는데도 아직까지 또렷하다. 강연장에서 그 말을 듣던 순간 조용하던 내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했던 느낌도 생각난다. 2080의 사회에서 1090으로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큰아이가 대학교 3학년이 되니 서서히 취업 걱정이 된다. 뱃속에 있을 때는 배 밖으로만 나오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더니. 이유식을 먹다가 내가 지은 밥에 어떤 변형을 가하지 않고도 식사가 가능해졌을 때, 이제는 되었다 싶더니.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다 될 줄 알았다. 무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번이야말로 더 이상 할 걱정이 없다 했다. 어미에게 자식은 네버 엔딩 스토리인가. 오십이 다 되어가는 딸을 아직도 걱정하시는 우리 엄마를 보면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 같다.

청년 문제에 대한 내용이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는 아나운서 면접에 지원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변변치 않은 대학을 나오고 스펙도 없는 그녀의 합격 여부는 말도 꺼내보기 전에 이미 스캔되어 결정된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이런 것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p194)’ 책에서 언급된 상황이 내 아이의 일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저자의 글은 억지스럽지 않아서 좋다. 아직도 정치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부담가지 않게 사회를 알려준다. 묘하게 도발적인 면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 당신은 어쩔래?’ 라는 멘트를 간간이 은밀하게 날린다. 기생충을 향한 접근 방식에 신선한 매력을 느끼고, 글쓰기에 대한 경험담에 경계심이 풀렸던 걸까. 그래서 용기를 얻었나보다. 몇 년 전까지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정치에 관해 쓰인 책을 스스로 구입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고요하던 내 삶으로서는 분명 파격적인 사건이다.

 

설마 진짜 안 보게 될까 전날까지도 긴가민가했던, 어제 시행되었을 지도 모를 학업성취도평가도 폐지되었다.  ‘대선이 끝나면 정치 책을 읽는 일에는 시들해(p9)’ 질 거라는 그의 말이 내게는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변화가 피부로 확 와 닿는 요즘, 정치에 더욱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할 수 있도록 힘을 행사하는 것, 이게 바로 정치의 힘(p177)’ 정치의 영향력에 관한 그의 정의가 명쾌하다.  ‘지구의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했다던 간디의 말이 생각난다. 판단하고 싶어졌다. 내 밖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나를 담고 있는 이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p155, 밑에서 3째 줄: ~이회창 후보 김대중 후보의~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