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스님의 산막일지
지율 지음 / 사계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손 한 번 내밀어보세요. ? 넷째 손가락이 검지보다 길면 남성 호르몬이 더 많은 거래요. 그래?

옆에 있던 20대의 동료도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과 나의 손을 번갈아 보자니 길이보다 질감에 눈길이 간다. 매끈하고 뽀샤시한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주름지고 푸석한 손. 왠지 모를 부끄럼에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는다.

책 속의 사진에는 할매와 할배들의 손이 자주 등장한다. 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쭈글쭈글 주름지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고,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3D 화면을 보듯 굴곡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책은 열 가구밖에 살지 않는 오지 마을에서 3년 동안 머문 지율 스님이 할배, 할매들과 더불어 살아온 일상을 기록한 농사일지이다. 열두 달 동안 이어지는 소농들의 투박하고 소박한 삶이 흑백 사진처럼 담백하다. 천천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계절의 변화도 느껴지고 농사짓는 풍경이 24절기와 절묘하게 연결되어 멈추지 않는 시계바늘처럼 그려진다. 살아 숨 쉬는 땅과 꿈틀거리는 생명의 존재가 보인다. 그 속에서 자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은 말을 거는 책이다.

흑백과 컬러가 번갈아 있지만, 컬러라고 해도 주로 두 가지 색상이다. 가늘게 굽이치는 초록, 부드럽게 뭉글거리는 황토, 자주 등장하는 동물의 몸조차 땅 색깔을 닮아있다. 가을 단풍처럼 찬란한 빨강, 노랑이거나 화창한 하늘처럼 푸른색도 있건만 렌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스님을 따라 덩달아 시선의 끝을 아래로 향해 본다.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모델은 할배와 할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들의 손과 발과 웃음이다. 흙을 밟고 있는 맨 발, 바람을 어루만지는 맨 손, 모를 심는 투박한 손, 갈라터진 발뒤꿈치. 그 모습을 보면서 때때로 울컥한다. 단순히 안쓰럽다는 느낌과는 미묘하게 다른 뭉클함이다. 왜 이럴까 가슴을 쓸어내리다 중간 즈음에서 발견한 문장에서 답을 찾는다.

당신들의 일생은 심고 가꾸고 낳고 기르고 거두고 나누는 일이었으리라.’(p164~165)

왜소하고 굽은 등으로 땅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생명을 두 손으로, 두 발로 정성스레 지키고 계시는 분들. 수줍은 소녀처럼 소박한 호영이 어머님의 웃음이나 호탕한 대장부처럼 껄껄 웃음꽃이 활짝 핀 동네 어르신들의 얼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땅과 같이 낮아져 등 굽은 그분들을 그렇게 내몰고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p111)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 삶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나 역시 방관자로 머무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세상은 한없이 높아지고 넓어지고 빨라지지만, 할매들은 그렇게 육십 년을 살아오셨고 남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가실 뿐이다.’(p211)

늙어가는 시골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다음에는 누가 이 땅을 지켜낼까. 땅을 지켜낼 손들이 얼마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조금만 더 우리 이웃의 삶과 우리 주위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들에 관심을 가진다면 법과 제도가 지키려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소중한 것을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p163)

손의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손으로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지키고 있느냐 에서 오는 것이었다. 땅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손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이다.

오늘 하루 내 손이 만진 것을 떠올려본다. 앞으로 만지게 될 무언가를 생각한다. 무엇을 만지고 지켜야할까. 적어도 한갓 종이나 쇳덩어리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내 발길이 닿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을 무언가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다. 못생기게만 보였던 내 손에서도 나이 들어갈수록 깊어질 주름 사이로 아름다움이 배어나올 수 있도록.

 

 

p167, 4째 줄, 문장 끝 따옴표 누락됨

p200, 40미터는 족히 되는 초록색 꽃뱀~ : 보통의 꽃뱀은 50~120cm정도라는데, 40미터는 다소 많이 길어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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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자마자 양손을 펴서 살펴봤어요. 왼손은 검지가 길고, 오른손은 약지와 검지 길이가 비슷해요.. ^^;;

나비종 2017-02-22 09:01   좋아요 0 | URL
오홋! 저와 반대이시군요. 저는 양손 다 약지가 깁니다만. .ㅎㅎ
이거 통계치라 완전히 믿을 건 못 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펴서 오밀조밀 살펴보게 되더라구요^^;

yureka01 2017-02-2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진 때문에라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나비종 2017-02-22 09:27   좋아요 0 | URL
MSG 첨가하지 않은 잔잔한 다큐같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