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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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철봉의 녹처럼 잊고 있던 기억의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칼자국>에 나오는 어머니의 칼이었을까, <도도한 생활>에서 흐느끼던 피아노의 울림 때문이었을까. 소설 속 공간이, 길처럼 갈라져 나온 문장이, 불쑥 튀어나온 단어가 물처럼 스며든다. 한동안 굳어있던 기억의 알약들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소설은 빛을 품는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 작가의 치열한 시간과 마음이 함께 버무려진 빛이다. 그 빛을 반사시키거나 통과시키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빛은 독자를 거쳐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지닌 또 다른 빛으로 탈바꿈한다. 별 감흥 없이 통과시킬 때 독자는 거울이 된다. 굴절시켜 마음에 담는 독자는 여러 형태의 렌즈이거나 프리즘이 되기도 한다. 한 편의 작품이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의식을 일깨우고 탄성을 자아내는 상상력이 담긴 작품도 매력적이지만, 나를 움직이는 건 일상적인 이야기, 그 안에 담긴 사소함이다. 소설 속 인물을 접한 나는 소설 밖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세상에 하나뿐인 또 한 편의 소설이 내 옆에 놓인다. 다큐에 가까운 나만의 이야기이다.

 

8편의 작품에 담긴 각기 다른 방들을 보며 어린 나를 담았던 방을 생각한다. 벽에서 피어나던 곰팡이와, 구멍 뚫린 천장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던 세숫대야와, 걸레 꽁꽁 얼던 방문 앞에 커튼처럼 드리워지던 쑥색 담요와, 반 지하의 공간에서 방향제인 듯 맴돌던 연탄가스 냄새를 떠올린다.

 

<침이 고인다>에서는 후배를 지겨워하는 심리가 집요하리만큼 치밀하게 묘사되어 내게 심어져있던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다. <성탄 특선>에서는 서툴기만 했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났던 일이 생각난다. 이유 없는 행동은 없고, 의외로 다른 이들에겐 사소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진지해서 서글픈 이유가 많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기도>,<네모난 자리들>TV에서 보았던 다큐를 생각나게 한다. 내겐 다소 생소한 내용이라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평소 바라보지 못한 삶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뭉클하고 감동적인 한 편의 영화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식당서빙과 설거지, 인형 눈 붙이기, 파출부, 밤 깎기, 절의 공양주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으셨던 당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 앞에서 꾸벅꾸벅 조시던 어머니 곁에는 늘 글리세린이 놓여있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부드럽게 스며들던 액체. <칼자국> 속 어머니의 칼은 글리세린 병을 떠올리게 한다. 매끄럽지만 살짝 칼에 베인 듯 쓰라리다. 모든 감당은 당연하지 않고 세상에 당연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p169)

 

<도도한 생활>의 피아노는 내게로 와서 하모니카로 변신한다. 어릴 때 유일하게 욕심이 났던 악기. 간절히 바라던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숨을 불어넣던 순간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생생한 느낌이다. 언제 사라졌나 기억조차 나지 않던 물건이 왜 그리도 갖고 싶던지. 가끔 생각한다. 하모니카가 담고 있었을 부모님의 마음과 궁핍에 부딪혔을 망설임의 시간들을.

 

<플라이데이터리코더>라는 제목은 푸르게 빛나는 플레이아데스성단을 연상케 한다. 일시적으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던 블랙박스에 등장한 우주의 윤리는 짠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칼자국>의 주인공이 사과를 돌려 깎는 모습을 지구의 자전으로 비유하는 우주적인 묘사 역시 신선하다.

 

김애란의 소설은 밝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어둡지만도 않다. 웃기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세밀화처럼 그려진 현실에 우주적인 상상력이 조미료처럼 뿌려진 서술이 그저 담담하다. 통통 튀는 팝송처럼 화려하지도, 헤비메탈처럼 자극적이지도 않다. 조금씩 출렁이는 담담한 랩을 듣는 느낌이랄까.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 굳이 찾아 읽지 않는 색깔이다. 하지만 순전히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읽다 도중에 덮어버릴 수 없게 하는 끌림이 있으니. 코끝 찡한 느낌이 마음을 덮는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깊은 곳에서 서서히 흘러드는 심해 해류인 듯 뭉클함이 묵직하다.

 

살아가면서 마음속에는 자그마한 블랙박스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 깊이 간직한다. 그러다 어떤 계기를 만나면 봉인이 풀린다. <포켓몬스터>의 포켓볼처럼 하나씩 뚜껑을 열고 나오는 과거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있다.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기쁨도 있지만, 깊은 곳에 있던 감정은 짙푸른 바다를 닮은 슬픔이기 마련이다. 가끔은 필요한 시간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시간을 보냈다. 울컥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위태위태하고 가슴 아팠던 시간을 지나왔다는 안도감과, 현재의 시간과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시간과 공간과 사람의 소중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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