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의 인문학 -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시드페이퍼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두 라인을 더 지나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왼편에 도로로 향하는 통로가 나온다. 100M 남짓 될까 도로를 따라 걷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춘다. 횡단보도를 건너 한 블록을 걸어가는 길에는 훠궈, 소고기, 돼지고기, 양 꼬치, 닭고기, 참치 등 식당이 열 지어 있다. 1층 통생갈비 오른편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계단을 오른다. 2, 나의 목적지인 커피숍이다.

집을 나와 7분쯤 걸리는 시간, 코스는 매번 별반 다르지 않다. 도로 따라 쭉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니 별다른 변수가 없다. 굳이 어제와 다른 경로를 찾는다면 신호가 빨리 켜지는 횡단보도를 이용했다는 점이랄까.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짧은 코스이지만 직장 일을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는 길이라서, 나만의 시간이 고일 공간으로 향하는 이 길이 참 좋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동네를 산책하면서 관찰하고 느낀 점을 기록한 책이다. 작가는 19개월 된 아들, 지질학자, 타이포그라퍼, 일러스트레이터, 곤충박사, 야생동물 연구가, 도시사회학자, 의사와 물리치료사, 시각장애인, 음향 엔지니어, 반려견과 함께 걷는다. 그 과정에서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다. 전문가들은 그들이 관심을 가진 대상에 주목하고 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함께 산책하고 비슷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가는 동반자들과의 모든 산책이 끝난 후 같은 길을 다시 걸어본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세상을 경험한다.

 

집으로 가기 위해 커피숍을 나섰다. 늘 걷던 길이 맞나. 조금씩 스며드는 생경한 감각에 당황스러웠다. 같은 경로를 오간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전과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느낌이 달랐다. 세상으로부터 내게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감각세포를 간질이는 자극들은 강아지풀이 손등을 두드리듯 까슬까슬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소리가 잠시 볼륨을 줄였다. 도로면과 자동차의 타이어가 만나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주기적인 BGM처럼 도플러효과를 반복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식당의 두꺼운 유리문 열리는 소리, 환풍기 소리, 구겨진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뒹구는 소리, 저마다 다른 신발을 신은 사람들의 발소리, 금속성의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홍보용 현수막이 펄럭이는 소리, 숯불 피우는 소리, 만두집 커다란 솥에서 증기 빠지는 소리들이 시시각각으로 고막을 두드렸다.

소리만이 아니었다. 고소한 고기 냄새, 진한 향수 냄새, 담배 냄새, 찐만두 냄새, 축축함을 머금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콧속을 들락거렸다. 따뜻한 장소에 있다 나와서일까. 겨울바람이 부드럽고 살짝 시원한 감촉으로 얼굴을 어루만졌다. 혀끝을 잠시 내밀어보았다. 혓바닥이 시렸다.(, 이건 아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자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졌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아까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썩였다. 나로부터 나오는 소리였다. 가만가만 내쉬는 숨소리와 운동화의 발소리가 테두리처럼 나를 감쌌다.

잠자고 있던 세상이 조금씩 눈을 뜨면서 잠자고 있던 나의 감각을 두드렸다. 눈으로만 바라보던 세상이 소리로, 냄새로, 촉감으로 다가왔다. “‘본다는 단어의 말뜻은 하나가 아니라고요.(p268)”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니 문장의 의미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압도적인 풍광을 보유한 장소 정도는 가주어야 새로운 감각이 일깨워질 거라 생각해왔다. 문화나 자연 환경이 전혀 다른 세계로의 여행은 물론 신선한 자극이 되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물리적인 거리가 생각만큼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당신이 얼마나 먼 곳을 여행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통 멀리 여행할수록 결과는 나쁠 뿐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차리는 지가 중요하다.(p151.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는 내가 어디에 주목하려 하느냐에 달렸다.(p32, 윌리엄 제임스)’ 가벼운 동네 산책으로도 감각은 충분히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동반자도 없이 혼자 갔다 혼자 돌아오는 길이 왜 이리 다르게 느껴졌을까. 원인은 책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 두 번의 다른 산책을 경험한 작가와 상상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나는 무언가 하나쯤은 바뀌었기를 소망했다. 그 무언가는 아마도 나 자신일 터였다.(p332)’ 작가 스스로 한 말이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문장의 길을 따라 삶의 시간을 산책한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바라보는 세상은 점점 다채로워지고 깊어진다. 책을 펼치면서 화성에도 가보고, 존재하지 않는 달의 도시도 바라보고, 꿈속을 달리고, 뇌 속을 들여다보고, 혼자라면 가보지 못할 장면을 상상한다. 3D 입체 영상처럼 냄새가 훅 끼얹어지기도 한다. 세상을 향하는 귀와, 코와, 눈과, 피부와, 혀가 한결 민감해진다. 마음도 점점 민감해져 세상의 작은 아픔들이 가시가 되어 촘촘해진 감각모를 건드린다.

이 책의 작가는 실제 산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겪었지만, 나 역시 달라진 나를 경험했다. 직접 경험보다는 약하겠지만, 늘 걷던 길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하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나는 커피숍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며 몇 시간 전과는 다른 7분의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의 뽀송뽀송한 느낌처럼 기분 좋은 경험일 것이다. 심장이 살짝 두근거린다.

 

p279, 밑에서 6째줄 : 외이의 구불구불한 동굴을 지나 가느다란 뼈에 가 닿고, 고막을 진동시키고, 작은 유모세포들을 춤추게 했다. → ②, 로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귓구멍으로 들어온 소리는 고막을 진동시키고, 이 진동이 귓속뼈에서 증폭되어 달팽이관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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