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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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교과 내용을 가르치는 일이 주가 되고 생활 지도와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교직 생활 27년 째. 갈수록 이 일이 어렵고 조심스럽다. 가르치는 일은 노하우가 쌓여가고 투자한 시간에 대비해서 효율도 높아지는데, 발령 초반에는 부수적이라 생각해왔던 영역들이 점점 높은 비중을 차지해간다. 이 직업이 다루는 대상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깨달음의 영향이 크다. 내가 마주보는 대상이 살....는 것이다. 이 사실은 종종 커다란 부담감으로 온다. 분열법으로 번식하는 아메바 같은 하등 생물을 제외하고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삶은 어느 하나 동일하지 않다. 학생들을 마주 본다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영혼들이 나로 인해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삶의 방향이나 빛깔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심스럽다.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발화점이 될 수도, 내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생명 에너지가 또 다른 누구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 그들이 어느 부분을 바라볼지 전혀 예상을 못한다는 점이 나는 때로 두렵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처음으로 접했다. 빈 종이를 옆에 두고 거미줄처럼 깔린 관계망을 그려가면서 결말이나 사건의 원인을 예측했다. 학교에서의 체험 캠프를 시작으로 소설 속 사건은 전개된다. 배경이 학교이고, 교사와 학생과 가족 관계에서 발생한 일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보니 여타 추리 소설보다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7년 전에 진행을 했던 영재캠프를 떠올린다. 여학교이고 여름방학이라서 시도 가능했던 캠프였다. 간단한 침구를 가지고 와서 팁별로 깃발도 만들고, 천문 특강도 듣고, 천체망원경으로 달도 관측하고, 탐구활동도 하고, 저녁에는 학교 건물 한 옆에서 삼겹살도 구워먹고, 가사실에서 밥을 지어 나누어먹었다. 밤에는 골든벨, 몸으로 말해요, 이구동성 등 팀별 게임도 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학교 뒷산으로 천천히 산책도 했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한편으로 내가 그 때 참 무모했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생각한다면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젊음은 무언가에 도전하는 횟수와 비례하는 걸까.

 

카카오 톡에서 나의 상태메시지는 처음처럼이다. 처음 수업을 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처음 사람을 대할 때의 조심스러움으로 대하고자하는 작은 다짐이 담긴 문구이다. 그게 생각만큼 잘 지켜지지는 않지만. 학생들의 일상적인 어긋남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기분이 다운된 날의 수업은 다른 날보다 확실히 신경이 곤두선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교실을 나서는 순간, 조금만 참을 걸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좀 더 넓어져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은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선생도 인간이니, 학생이라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다보면 교육자의 얼굴 아래 본래 있던 인격이 드러나기도 하겠죠. 그것이 학생들의 공감을 불러오거나 반발을 초래할 테고요. 그래서 생활인으로서 그의 모습은 어떤지 알고 싶은 겁니다.(p59)’

 

드라마 <스위치>에서는 원칙주의자인 검사와 도플 갱어인 독특한 사기꾼이 남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 검사가 사기꾼과 손을 잡고 마약과 연관된 거대한 암흑 세력을 소탕하려는 시도를 하자 원칙주의자 검사는 그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목적이 옳아도 수단이 잘못되면 모조리 틀린 것이 되어버리는데. (중략) 왜 나쁜 놈이 저지른 진짜 나쁜 짓을 하나하나 모아서 입증하고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어?(p126)’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드라마 내용과 오버랩 시키며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진짜 나쁜 짓을 입증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내 생각은 회의적이다.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울 때조차 흔히 말하는 FM 대로 걸어가야 하는 걸까. 잘못된 수단을 모조리 틀린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예전의 나였다면 남주인공 검사의 입장에 가까웠으리라. 요즘 생각은 달라지고 있다. 누가 보든 안보든 멀리 떨어진 횡단보도까지 굳이 돌아서 차도를 건너던 나는 이제 없다. 필요에 따라 휘휘 둘러보며 무단횡단을 할 때도 있다. 더 나쁜 놈들이 버젓이 휘젓고 다니는 세상의 풍경을 뉴스에서 자주 접하면서부터 점점 드라마 속 사기꾼의 논리에 마음이 기운다.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p116~117)’ 지난주에는 시어머님께서 나물과 국을 끓여주신다고 가지러오라고 하셨다. 당신께서는 종종 말씀하신다. 억지로 가져가라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며느리 입장에서는 마냥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은 아니다. 직장일이 많아 몸이 너무 피곤할 때면 굳이 그것을 받으러 시댁까지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안 해주셔도 된다며 사양하면 혹여 서운해 하실까 염려스러워 매우 기쁜 척 리액션을 취하고 살짝 강요된 느낌으로 다녀올 때가 있다. 그런 마음으로 시댁을 향하면 학생들의 입장이 이해된다. 교사인 나는 편하게 대해준다고,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아이들 입장은 다를 것이라고. 관계 자체가음의 방정식이므로 마음속으로는 마이너스의 답을 안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제목 음의 방정식의 의미를 풀이한 문장을 한참동안 음미하며 그래프의 변인들을 떠올린다. 2차원 평면에 그래프를 그리려면 독립 변인과 종속 변인이 필요하다. 기체에 작용하는 압력을 증가시켰을 때 기체의 부피가 변화하는 그래프라면, 일정하게 변화하는 값이 독립 변인으로 가로축에, 독립 변인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값이 종속 변인으로 세로축에 온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값은 통제 변인이다. 둘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경우에서든 일정하게 해주어야 하는 값, 예컨대 일정한 온도 같은 것이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반비례하는데, 소위 보일 법칙이라 불리는 이 관계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었을 때 성립한다. 독립 변인이 선생, 가르치는 쪽, 이끄는 쪽, 억압하는 쪽이라면, 종속 변인은 학생, 배우는 쪽, 따르는 쪽, 억압받는 쪽일 것이다. 통제 변인은 둘 사이의 관계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에 의한 변수들일 것이다.

내가 주로 맺고 있는 관계들을 대입해본다. 학생들이나 내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독립 변인이고, 시댁이나 관리자와의 관계에서는 종속 변인일 것이다. 1기압, 2기압, 3기압 등 독립 변인이 일정하게 변화되어야 그에 따른 그래프를 깔끔하고 편하게 그릴 수 있다. 이처럼 독립 변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종속 변인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해야할 것이다. 변인을 통제하면서 일정한 걸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생들과의 관계가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겠다. 삶의 경험이 많아지면서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들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대상은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많은 것들을 고려하면서 일정한 걸음으로 걸어가려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인간관계는 결국 독립 변인, 종속 변인, 통제 변인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무게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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