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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사람

 

1회

 

 

  

두 사람이 사랑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의미를 찾는 생물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면 쉽게 절망에 빠져버린다…….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태어났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축의 시대는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아. 우피나샤드의 신비주의자들, 맹자, 에우리피데스의 시대였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어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축의 시대』 중에서

 

이제 곧 당신은 여든두 살이 되겠구려. 당신의 키는 6센티미터쯤 줄어들었고 몸무게도 겨우 45킬로그램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며 탐스럽구려. 우리가 함께 산 지는 어언 58년이 되어가고 나는 당신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하오. 오로지 내게 안긴 당신 몸의 열기로만 가득 채워질 탐욕스러운 공허를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새로이 간직하오.

―「D에게 보낸 편지」, 『어떤 사랑 이야기』 중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님과 함께」 중에서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께. 오늘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사랑의 감정으로 여러분을 불러봅니다. 저는 언제고 사랑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평생 가는 사랑 이야기를 한번 써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평생 가는 사랑을 믿습니다. 영원한 사랑을 믿습니다. 한 사람이 죽은 뒤에도 결코 식지 않는 사랑도 믿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한 사랑이란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끝없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제 계산으로 한다면 사랑은 둘이 셋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 것 아닐까? 이런 마음을 품고 어디선가 그런 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길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났습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으로 써보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저는 몇 해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어떤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귀농 부부의 이야기였습니다. 산골에 둘만 가서 사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내 쪽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언제가 이 부부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올 초 저는 신문 북 섹션에서 신간 한 권을 봤습니다. 저는 그 책을 쓴 이가 그 때 그 인터뷰 속 남편이란 걸 금세 알아봤습니다. 남편의 이름이 특이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이름은 남곡입니다. 남쪽 골짜기란 뜻입니다. 남편이 낸 책은 『논어』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제가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논어』를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는 것이 새로웠지만 그 부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남편은 귀농 초기에 아내와 함께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논어』를 읽자고 제안한 것은 아내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와 둘이서 읽기 시작했지만 차츰 차츰 더 많은 사람들과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 년간 『논어』를 읽었다고 했습니다. 저마다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논어』 책을 가지고 와 읽고 토론을 하면서 시골에 정착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60살이 다 되어서 『논어』를 읽은 것이 자기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사이에 아내는 죽고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논어』 책은 남편이 아내의 영정에 바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편 이남곡 선생님을 만나러 장수에 내려갔습니다. 오동나무에 보라색 꽃이 필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남편 이남곡 선생님을 만나고도 차마 아내 고 서혜란 선생님의 이야기를 묻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이남곡 선생이 쓴 『논어』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남곡 선생이 쓴 『논어』 책은 평생에 걸쳐 부부가 나눈 사랑의 밀어들이란 것을요. 조심스런 대화. 흥분해서 나눈 대화. 희열에 가득차서 나눈 대화. 손을 맞잡고 나눈 대화. 꽃과 달을 보면서 나눈 대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나눈 대화. 노래를 부르며 나눈 대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면서 나눈 대화. 밤길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눈 대화. 병원 다녀오는 길에 나눈 대화.

저는 이 글을 쓰기 직전에 이남곡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이남곡 선생은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심어놓은 꽃 옆에서 자라던 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내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창포, 수선화, 수국, 느티나무 참 많은 꽃과 나무를 심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 한 덩어리 사연이 없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남편 이남곡 선생님은 아내가 죽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보내줬습니다.

 

봄에는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더니, 정작 작물이 자랄 5월부터 지금까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땅속 작물이라 잘 자라주었답니다. 굵기도 작고 양도 적습니다만 물 한 방울 공급 받지 못한 사정을 생각하면 그저 대견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적은 양이지만 식구들과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라면 비로, 더위라면 더위로, 건강하고, 재미있는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인연에 감사드리며.

 

2010년 여름

장수 좋은 마을 이남곡, 서혜란 드림.

 

아내 서혜란 씨가 주위 사람들에게 감자를 나눠주며 쓴 글입니다. 이글을 쓸 때 아내는 자기의 곧 다가올 죽음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았던 듯도 하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내 서혜란 씨를 상상하면서 이글을 씁니다. 이남곡 선생님은 전라도 함평 사람입니다.

“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함평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시골 학교에서 공부를 꽤 잘했는데 어머니는 시골에선 제대로 아이들 교육을 시키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혼자 먼저 서울에 올라가셨습니다. 여러 가지 잡일, 막일, 가정부 같은 것을 하면서 자리를 잡고 자식들을 서울로 불렀습니다. 제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이었습니다. 올라오긴 했는데 서울에 어떤 학교가 있는지도 모르고해서 기왕이면 제일 좋은 학교에 시험 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서울에서 제일 좋은 학교 원서 한 부만 사와보라고 해서 그 학교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했습니다.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480명 뽑는데 420명은 경기중학교 출신 중에 뽑았고 60명만 타교생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뽑힌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제 목표는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1학년 때까지만 유지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과 2학년 사이에 제 심경에 뭔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1학년과 2학년 사이의 선택으로 지금껏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정학을 당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칭찬한 아들이 정학당하니까 어머니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또한 다른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다른 욕망들보다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농촌기반 사회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국민의 8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니까 NL이니 PD니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대학 때도 농촌법학회에 가입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독자니까 군대는 가질 않고 스물대여섯에 교사 자격증을 따 경기도 화성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서른넷까지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내는 협동조합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1978년에 남민전을 만났습니다. 남민전은 지하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저는 그 조직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깊숙이 개입했단 것은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단 뜻입니다. 그중에는 제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민전 활동은 세 달 정도 했는데 활동하면서 그때까지 품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대의에 대한 이상과 결합되어 있는 개인의 권력의지란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본 것입니다. 저는 남민전과 결별했습니다. 결별하기 위해서 학교도 그만두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었는데도 집을 나왔습니다. 당시에 조직과 결별한다는 것은 제겐 그만큼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6개월 동안 서울에서 하숙 같은 걸 하면서 모든 연락을 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애도 태어나고 생활도 해야 했기 때문에 대우에 취업했습니다. 대우 개발에 6개월 정도 다닐 무렵 남민전 사건이 터졌습니다. 사무실로 누가 찾아왔는데 예감이 좋질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론 조직과 결별했지만 한 때 간부였기 때문에 15년을 구형받고 4년형을 살았습니다. 그때 아내도 6개월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갓난쟁이와 가난한 어머니는 도움을 줄 사람도 없이 허허벌판에 던져진 꼴이 돼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내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도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습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말들이 많았겠습니까? 특히 친정에서요. 그렇지만 아내는 나를 흔들림 없이 믿어주었습니다. 남민전 나올 때 이미 과거와는 결별했지만 저는 징역살이를 하면서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더 크게 바뀌었습니다. 제도 변혁만으론 새로운 사회건설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운용할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은 무오류라는 생각. 무엇이 진리인지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진리에서도 과학에서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뇌란 걸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나를 『논어』와 연결시켜 준 듯도 합니다.

아내는 저보다 먼저 징역살이를 마치고 양장점을 열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저는 출소 후 대성학원 강사가 되었습니다. 낮엔 학원 강사를 하고 밤엔 불사연(불교 사회 연구소)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우린 제도를 바꾸면 의식이 바뀐다고 생각하지만 의식이 존재에 끼치는 영향도 많습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된 것은 자본주의가 인류의 지금 의식의 수준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보편화한 것은 개인의식의 해방, 개성의 해방입니다. 그렇지만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가 이기주의, 물질주의 같은 현대적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해법을 요구합니다. 이제 우리가 마주한 현대적 과제는 새로운 진보에 대한 전망입니다. 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 보니 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싶어졌습니다. 아내 역시 새로운 대안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내는 한살림 생협의 초기 멤버였고 여성 민우회 생협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 민우회 활동할 때 이미 불치병을 선고 받았습니다. 1994년의 일이었는데 아내 나이 마흔하나나 마흔둘, 사십 대 초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루프스 병인 줄 알았는데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긴 전신 경화증이란 병으로 진단을 받았습니다. 장기의 안과 밖이 모두 굳어가는 병입니다. 민우회 동료들은 아내가 민우회 생협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체구인데도 쌀가마니를 번쩍번쩍 들어 날랐다고요. 그때 이미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게 아닌가 하고요. 병원에선 치료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선 도시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때 우리는 생협 운동 너머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 무소유의 야마기시 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에 야마기시 특강이라고 해서 7박 8일짜리 연찬회에 참여했습니다. 연찬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반찬 비슷한 걸로 아는데 연찬은 그게 아니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끝까지 함께 따져보는 것입니다.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나누는 것이 연찬입니다. 우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삶의 모델을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아내는 시골에 가서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치료를 받으러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특히 벌침이 효과가 좋았습니다.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안산에 벌침을 받으러 다녔고 벌침 선생님이 거처를 옮기면 그때마다 거길 다 찾아다녔습니다.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8년을 지내다가 이번엔 작은 공동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자립 가능하면서도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서도 사이좋은 마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부부가 해보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이 새로운 인간인지에 대해 서로 공감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은 자기중심성, 아집을 넘어서는 인간이었습니다. 삶 자체를 아예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는 꿈이 그저 개인의 수행 차원에 멈추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이가 좋은 사회의 바탕이 되는 그런 삶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해남부터 전국을 다 돌아다녀서 지금 사는 장수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옆에 개울이 흘렀고 한 열 가족 정도가 살기에 좋아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깊은 듯해도 마을과 멀지 않았고 아늑한 곳이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장수에 정착했습니다. 우린 거기에 살면서 생협에 된장 고추장을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이름도 지었습니다. ‘좋은 마을’이라고요. 남원에 나갔는데 친절한 세탁소란 이름이 있기에 우리도 쑥스러워하지 말고 좋은 마을이라고 이름 짓자 했죠. 마을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둘만 있을 때 캐치프레이즈를 정했습니다. ‘절대 양보’였습니다. 양보도 두세 번 하다가 안 되면 싫어지는데 우리는 계속 양보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에고로부터 벗어나는 실험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논어』 공부를 했습니다. 『논어』 공부를 하면서 아내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식사 준비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논어』 강독을 계속 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음악을 아주 좋아해서 좋은 마을 사람들 카페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도 광주에서 온 손님들과 산골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달이 휘영청 밝았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아내가 조금 취했습니다. 그게 아마 아내가 인생에 마지막으로 취한 것일 겁니다. 그러곤 음력 6월 보름달 밤에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아내는 7월에 죽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마을 논실학교 모임이 있었습니다. 일어났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도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둘이서 함께 가지부침을 했습니다. 손이 많이 가지만 아내가 평소 아주 잘하고 좋아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열다섯 명분의 조찬을 준비했는데 그것이 이승에서 아내의 마지막 조찬 대접이 된 셈입니다. 아마 그때 이미 아내의 심장이 멎어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요일에 아팠는데 화요일에 병원에서 숨을 거뒀으니까요. 유언할 새도 없는 급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다만 죽기 얼마 전 아내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저를 가리키면서 우리 남편은 자기를 향한 눈빛이 한 번도 바뀌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저는 짜증도 내고 화낸 적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저 사람은 그런 순간들의 나를 다 용서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둘이 있을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당신이 판단했던 일이 다 옳았다고. 혹시 그때 속으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죽기 전날 서울대 병원에서도 마을 논실학교에서 인문학 교실을 열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지금 논실학교에서 여는 인문학 교실을 여는 것도 아내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우리 좋은 마을은 여섯 가구가 살고 있고 두 가구가 터를 닦고 있습니다. 내년엔 여덟 가구가 되겠지요. 저는 마을에 돌아올 때 불빛이 보이면 좋습니다.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동안 여러 가지 삶의 실험을 해왔는데 아내의 신뢰가 없었다면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해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저의 동지이자 도반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난 뒤 뜻을 같이해서 심지어는 징역도 같이 살고 수많은 시도도 같이 했는데 그 근본 바탕은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서로가 없었다면 두 사람 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건 다 해보고 갔습니다. 아내는 여성 민우회 20년을 맞아 이런 글을 썼습니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우리 사회의 인간화’라고 봅니다. 사회의 인간화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이용하려고 하는 인간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되는 것, 그런 인간이 만드는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고 그것이 더욱 진보 발전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타에 대한 배려, 사랑의 에너지라고 봅니다.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는 모든 관계의 질이 자본에 의해 맺어집니다. 이제는 그 관계의 질을 애정으로 치환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인간미 넘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화’라는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데 생협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이 물음을 검토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아내는 서로서로 얼굴이 보이는 인간관계를 맺길 원했고 그런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내의 꿈이 다시 한 번 느껴집니다. 저 또한 아직도 아내와 함께 꾼 꿈속에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내가 운전을 못 하니까 어딜 가든 같이 다녔습니다. 그럼 차 안에서 같이 노래도 부르고 그리고 제가 어디 갔다 오면 아내가 벌써 여보,하고 부르며 서 있곤 했습니다. 아내 죽고 일 년은 공황상태였습니다. 아내 있을 때 함께 아내와 이야기하고 꿈꿨던 그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내가 죽고 아쉬운 것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아내는 흔히 말하는 5분 후 스타일이고 저는 5분 전 스타일입니다. 아내가 늦장을 피우는데 처음에는 제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집사람이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늦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게 느껴집니다. 그때 늦더라도 마음 편하게 늦게 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시골에 살면서 일을 할 때도 나는 당장 급한 공장 일부터 하자고 합니다. 아내는 뭘 하나 보면 꽃밭에 가서 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풀을 메고 있는 거죠. 그럼 저는 얼른 공장에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꽃밭의 풀을 메고 싶어 하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제가 화이부동이란 말을 『논어』에서 읽었습니다. 다름을 억지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내와 살면서 화이동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예 상대방과 같아지고 싶었던 거죠. 이제 겨우 화이동에 다가가고 있었는데 아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쉽습니다.

아내는 달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결혼한 첫해 추석날 제가 친구들과 같이 있느라 달밤을 아내와 함께 보내지 못했는데 나하고 같이 달을 보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요샌 달만 보면 그 생각이 납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불안을 물리치는 두 가지 방법

 

2회

 

 

3.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나 맨 밑바닥 최하위층 생활은 똑같이 불안했습니다. 과거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로맨스는 자수성가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는 일 중 어떤 직업이 가장 리스크가 큰 줄 압니까? 바로 농업과 어업입니다. 농업과 어업의 리스크가 가장 컸던 것은 이 일들은 사람의 힘과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리스크와 불안은 존재와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불안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안감은 모든 사람을 다 지배합니다. 인간은 불안을 버텨내는 법을 배워야 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불안이 낳은 가장 좋지 않은 결과는 저마다 개인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확대 재생산되면 서로를 공격합니다. 남을 해치면 강해진다는 착각을 합니다. 이 세상을 청소년 소설이나 영화처럼 보는 겁니다. 나는 혼자야.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해라고 합니다. 요새 유행하는 노래 가사 중에 “내가 제일 잘 나가”란 게 있습니다. 그 노래 밑에 깔려 있는 정서도 불안입니다. 걸그룹의 노래들을 들어보십시오. 자기 계발서의 유행 역시 불안의 산물입니다. 자기 계발서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에게 솜사탕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을 불안에 몰아넣으면 미친 듯이 자기 착취를 합니다.

 

불안을 극복하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 도를 닦는 것, 참선과 같은 것이고, 둘째는 옆 사람과 자꾸자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섞여 있습니다. 도 닦는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걸 익히는 겁니다. 돈 없이 품위 있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오는 불편함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정 돈이 없어서 난 시골 가서 폐가 하나 얻어서 살래,라고 결심해도 실제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다면 엄청나게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것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것 그것 하나가 있다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아주 소중한 거 하나만 남기고 다 비울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고 사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버리는 쪽으로 자기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불안에 직면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짐승이 되거나 인간을 뛰어넘는 인간이 되거나.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한번은 스무 살 여대생이랑 이야기하는데 노후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노후가 너무 불안해서 어찌어찌 삼천만 원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대학교 2학년이 그렇게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얼굴을 보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불안과 고통에 절어 있었습니다. 저한테 묻습니다. 선생님 이 돈을 노후 준비를 위해 어디다 보관해야 할까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내가 너에게 시를 읊어주겠다. 이 시를 아침저녁으로 열 번씩 읽어라. 그 시는 이렇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마흔 넘은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스펙을 위해 자격증 하나 따는 것과 찐하게 연애 한 번 하는 것. 뭐를 고를래? 마흔 넘은 사람들은 당연히 찐하게 연애하는 것을 고를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계산을 하죠. 뭐가 손해이고 이익일까? 헤아려보죠. 그런데 자기 삶을 앞에 두고 계산이란 걸 할 때 돈 계산 말고 다른 계산을 하는 능력이 자꾸만 사라지는 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정산은 삼사십 년 뒤에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저는 그 학생에게 당신의 노후 준비는 이십 대를 이십 대답게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엄청난 구조적 모순 속에 있습니다. 다만 구조적 모순만 따지면 끝없는 자기 연민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20대는 재테크를 할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맞서야 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기 연민 이런 거 그만합시다.

지금 상황에서 일자리 대책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좌 쪽이건 우 쪽이건 다 거짓말입니다. 현재 구조상 일자리 창출은 자본가의 투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말은 자본주의자가 투자할 마음이 나게 한다는 소리나 똑같습니다. 고용정책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때입니다. 자본자가 투자하는 한도 내에서 일자리가 나온다는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연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치적 변혁을 하는 데 같이 연대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옆 사람과 자꾸만 이야기해 보란 말입니다. 그러는 한편 가난해지더라도 살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힘을 바로 이십 대에 길러야 합니다. 한번은 또 다른 스무 살짜리 여대생을 만났는데 그 학생이 저에게 연금보험을 들었다고 자랑합니다. 저에게 “선생님 복리의 마법을 아세요?”라고 묻습니다. 연금이나 보험은 일찍 들수록 유리하다, 뭐 이렇게들 광고하니까 요새 학생들이 연금이나 보험에 많이 듭니다. 저는 “학생. 그 돈 가지고 뭐하고 싶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여행 가고 싶고, 뭐도 먹고 싶고, 뭐도 배우고 싶고, 뭐도 하고 싶고, 뭐도 하고. 가만 듣다 보니 자기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달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사십시오. 그래도 그 일을 수십 년 뒤로 미룰 거예요?”라고 물었죠. 제가 캐나다 살 때 AIG 보험회사의 브로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노인이 반팔 티셔츠 입고 슬리퍼 신고 해변에서 손녀딸 같은 비키니 미인을 양팔에 끼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RETIRE TO RICH”라고 쓰여 있었죠. 사실 이 광고 사진은 삼십 대 중반 남자의 판타지를 노년에 투영한 것입니다. 이삼십 대의 판타지를 노후에 투사한 것입니다. 실제 노후가 아니라 가상의 노후입니다. 육십 대 노인이 되면 손녀딸 같은 비키니 미인도 귀찮습니다. 광고사들은 불안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런 판타지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부님을 한 분 만났는데 그 신부님 말이 요새 신도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보험사가 너무 많아서라는 거죠. 불안은 보험사에서 다 관리해 주니까요.

제가 비그포르스란 낯선 스웨덴 사람을 소개한 이유는 지금 한국 사람들 앞에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모델 말고 다른 모델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다른 세계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희망을 준비하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모델을 대체할 다른 정치 경제 모델을 시도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현재 지구상에서 실제로 현실화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스웨덴 모델이었기 때문에 비그포르스를 소개한 것입니다. 비그프로스 사민주의의 이상과 가치는 secutiry입니다. 그는 일생에 걸쳐서 인간은 어째서 노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곱씹고 또 곱씹었습니다. 그가 살던 스웨덴 사회도 노동은 인간의 재능 계발이나 창조와는 거리가 먼 활동이었습니다. 노동은 지루하고 인간은 파편화되고 원자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업 극복, 할 수 있다」라는 연구 보고서에서 생산적인 것은 오로지 시장이며 국가는 항상 비생산적이므로 실업 대책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거꾸로 뒤집습니다. 실업의 원인은 자본가들이 산업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산업의 조직을 자본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공공이 일자리를 조직합니다. 자본은 일자리를 조직할 때만 지원을 받습니다. 국가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펼칩니다. 만약 한진중공업이나 쌍용 사태 같은 일이 스웨덴에서 벌어졌으면 정부는 이 사람들을 어디다 배치해야 할지 나섰을 겁니다. 만약 5천 명이 해고되고 한창때 스웨덴이라면, 이사할 집 이사 비용까지 다 챙겨줬을 겁니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해고되면 나라에서 다 파악해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 어디로 재배치해야 하는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개인의 서비스나 열정까지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있지만 보편적 복지의 개념에는 어떤 것은 돈으로 따지면 안 된다는 합의가 들어 있는 겁니다. 무상 보육 이야기도 이 때문에 나옵니다. 애를 낳는 것은 돈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중에 “경제의 목표는 좋은 삶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경제의 목표는 재산의 축적이 아니라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번역본마다 해석이 다 다르긴 하지만―생계 수단에 대한 불안감이 생겨나면, 아주 기초적인 생계마저 불안해지면 생존 욕구가 무한히 늘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탐욕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불안 때문이란 겁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봐도 나는 좋은 삶을 살기 싫고 돈이나 왕창 벌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좋은 삶을 살고 싶은데 너무 불안한 겁니다. 당장 의식주가 불안한데 별 도리가 없지요. 이럴 때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필요합니다. 돈이 없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이런 불안을 개인적으로 강해지는 걸로 풀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자신을 자신의 삶을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불안 속에서 자기 착취를 합니다.

비그포르스는 1930년대 사람이고 구체적인 상황도 다르지만, 다만 그 시대와 지금은 모두 지구적 구조의 전환이 필요하단 공통점이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서로서로 만들어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열망으로 가상의 미래를 생각하는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실제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4. 여기까지가 홍기빈 소장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르고 잘생긴 한 남자가 생각납니다. 그는 네팔 출신 이주민 노동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의 부모님 고향은 티베트입니다. 저는 일에 지친 그가 벽에 고개를 기대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자기 고향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고향 노래를 부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옛 노래를 부르면 현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잊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는 동안 두고 온 과거와 미래와 현재 자기 삶이 연결된다고요. 그러면 현재 삶도 견딜 만하다고요. 자기가 왜 여기에 이 모습으로 이렇게 앉아 있는지 알 것 같다고요. 그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주민 노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나 붙잡고 당신의 현재는 당신의 미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당신의 현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 애쓴 것을 미래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든 이 현재와 과거, 미래를 연결시키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시간들과 소중하게 재회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과 소중하게 재회할 수 있는 방법은 실은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형체처럼 영혼 속에서 쉬고 있는, 나를 동경하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 그런 것 말입니다.

 

어쩌면 그 이주민 노동자의 삶도 홍기빈 소장이 말한 자본주의의 로맨스―자수성가를 꿈꾸는 삶―에 해당될 겁니다. 그러나 그 로맨스는 사랑하는 자기 가족을 위한다는 소중한 가치도 품고 있습니다. 그 가치마저 없다면 그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는 곧잘 자기 가족, 이제는 늙어버린 아버지. 가난한 조국 난민촌에 사는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 서서히 기쁨과 희망 같은 것이 자라났습니다. 여기서 돈을 모아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이나 노인들에게 필요한 버터를 살 때 특히 큰 기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 뒤로 그에게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아직은 아닌’ 시간,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직은 재회하지 않은 가족들과의 행복한 삶’일 뿐입니다. 그에게 현재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닙니다. 그가 운영하던 가게는 철거 위험에 처해 있었고 그동안 그는 몹시 불안했지만 그에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혼자였다면, 사적인 유토피아를 꿈꿨다면 그는 좀 더 약했을 것입니다. 홍기빈 소장은 잠정적 유토피아란 말을 썼지만 바우만이란 학자는 민영화된 유토피아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 유토피아란 말도 많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소비자 유토피아, 민영화 유토피아, 사적 유토피아.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인간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큰 것을 갈망하고 동경한다는 것. ‘아직은 아닌’ 행복을 꿈꾼다는 것.

지금은 몹시도 불안감이 높아진 시대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홍기빈 소장이 제시한 두 가지 불안 대처법을 듣자니, 그리고 이주민 노동자의 꿈을 떠올리자니 사회학자 바우만의 이 말이 떠오릅니다.

“(집단적인) 자발적 소박함이 집단적 궁핍화에 대한 유일한 긍정적 대안이 되고 있다.”

 

 




 
 
 

 

 

 

불안을 물리치는 두 가지 방법

 

1회

 

 

내가 계속 말하고 있는 이런 절망의 형태에는 오늘날의 정치학 용어 중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다.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라는 근본주의적 물음을 무력화시켜 버리는 어떤 동참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순간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시간이란 ‘되어 있음’ 이전에 존재하는 ‘되어감’의 시간이다. 그런 ‘되어감’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패배를 모르는 절망에 거듭 맞서야만 하는 위험을 무릅쓰게 한다.

―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중에서

 

우리 시대의 경우 허무주의란 이익의 추구보다 더 높은 어떤 종류의 가치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익의 추구를 사회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한다. 따라서 허무주의는 정확히 말해 세상의 모든 것이 가격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허무주의는 가격이 전부하는 주장 앞에서의 체념과 굴종이다. 그것은 인간의 비겁함을 가장 현재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허무주의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살과 뼈를 탄식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그의 어머니가 궁핍한 육신으로부터 그를 위해 그러모아 만든 것이었다. 사랑과 열정 때문도 아니었다. 쾌락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매일의 가장 절절한 필요 때문에 그러모은 살과 뼈였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 매여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마치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소유물처럼 아무 목적도 없이 이내 소모되고 말 그런 소유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그는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크고 가장 격심한 분노를 느꼈다.”

―존 버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중에서

 

실업이란 표현은 잉여라는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중에서

 

비그포르스는 자신이 말하는 유토피아를 길잡이에 비유하면서 청사진에 해당하는 종래의 유토피아 개념과 대조시킨다. 즉 이 단어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된 규칙들을 만들어 내는 일관된 체계를 이루도록 짜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 나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원래 목적했던 바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기억하고 유념해야 할 사항들을 모아놓은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미래를 향해 삶을 펼쳐나갈 때 필요한 것은 정해진 미래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가상의 미래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을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라,라는 정해진 매뉴얼과 같은 규칙 혹은 청사진이 아니다. 살아가며 이런저런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원래 만들고자 했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고 내가 소중히 하려 했던 것, 내가 반드시 피하려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일깨워주고 또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느슨한 행동 지침이다. 사회를 설계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제 많은 사회가 아니라면 그 문제들이 해소되고 개선된 사회라면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대략 그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회를 바꿔나가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있다. 그렇게 그려낸 사회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토피아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아무 데도 없는 곳은 아니다.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중에서

 

유토피아란 단어를 사용했을 때 유토피아는 오직 목표로서 혹은 실제적 행동을 위한 일종의 길잡이로서 생각되는 모든 미래를 일컫는다.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것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중에서

 

 

1.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은 글로벌 정치 경제 연구소 홍기빈 소장입니다. 그는 한때 제가 제작했던 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했기 때문에 저는 담당 피디로서 파업부터 해고, 장바구니 물가까지 그에게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유독 강렬하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희망’이란 말이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제가 앞에서 인용한 스웨덴 정치인 비그포르스를 소개하면서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말을 썼습니다. 잠정적 유토피아란 말이 바로 희망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존 버거는 개인적인 죄책감에 해당하는 부끄러움 말고 집단적 부끄러움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집단적 부끄러움이 바로 희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집단적 부끄러움은 희망의 능력을 갉아먹고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감정입니다. 존 버거는 계속 묻습니다. 미래에 대한 타당성 있는 예측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그는 대답합니다. 경제학 정치학 생태학 교육 국방 이 모든 것은 서로 결합되어 있고 ‘실제의 삶은 동시적으로 또 분리 불가능하게’ 그 모든 오류들로 고통받고 있다고. 그래서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분리시켜 놓은 여러 영역들을 한데 묶어서 볼 수 있는 영역 제휴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고. 각자가 자기 방에 누워서 똑같은 악몽을 꾸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93년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때 갑자기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급작스러운 유학의 동기는 “자본주의가 대체 뭐야?”라는 질문과의 씨름에 끝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굉장히 불안한 짓이었는데 까짓것 조금 굶으면 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유학 간다고 그러면 교수가 되고 싶은 거라고 생각들 했는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한 푼도 없이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 일단 말이 통하질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1986년 11월 20일 오후 3시 이후로는 영어에 대해서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학력고사가 끝난 시간이죠. 유학 갔을 때 내 나이 서른이었는데 나이는 있는 대로 먹었지 아는 사람은 하나 없지 말은 통하질 않지. 비행기 타고 공항에 탁 내리니까 거짓말 안 보태고 피부가 시렸습니다. 유학이랍시고 갔는데 누가 나한테 말 걸까 봐 무서워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도착 후 며칠 뒤에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드는데 current account로 할래, deposit account로 할래, 묻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말이죠. 게다가 밥 먹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였습니다. 햄버거 가게마다 뭘 그렇게 물어보는지, 양파는 뺄까요? 뭐는 어떻게 할까요? 그때마다 everything, everything,이라고 합니다. 나중엔 everything이 입에 배버렸습니다. 모든 게 낯선데 박사 공부하러 간 거니까 서른 살 연령에 걸맞은 구실을 해야 하는데 나는 쎄서미 스트리트 수준의 언어 구사와 사고밖에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이제 어떻게 살까? 나는 망했구나, 나는 망했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즈음에 꿈을 꾸는데 꿈속의 이미지는 내가 병아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도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인데 피부가 여물지 않아서 따끔따끔거립니다. 이것이 내 불안의 이미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장학금을 타고 조교로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4년차 때 정말 돈이 똑 떨어져 버렸습니다. 수돗물과 식빵만 먹으면서 한 달 넘게 산 적도 있습니다. 전화와 인터넷은 끊어졌고, 손 벌릴 데는 한 곳도 없고, 열아홉 살 넘어서는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청해 본 적도 없고. 통장에는 4만 원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저는 마흔 살 될 때까지 통장에 500만 원 이상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신 빚도 없었습니다. 아프면 돈 걱정부터 합니다. 한 번은 안경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안경이 우리나라 돈으로 15만 원 합니다. 안경을 찾아 온 도시를 헤맵니다. 안경다리 부러지면 청테이프로 붙이고 삽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돈 없을 때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고통은 다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와 불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보면 조지 오웰이 극빈자가 되어서 도시를 돌아다니는데 그때 자신이 가난한 경험은 ‘지루함’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래 봤자 배고픔을 참는 것, 어디 먹을 것이 떨어져 있지 않나 찾는 것뿐이니 지루합니다. 그런데 그전에 저는 자유와 안정성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자유를 잃으면 대신 안정은 되고 안정성을 잃으면 대신 자유를 얻고. 그러니까 자유는 불안정성과 세트, 안정성은 지루함과 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자유는 불안하면서도 지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불안 역시 자유와 세트가 아니라 지루함과 세트입니다. 실업자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따분함입니다. 저는 그래서 언젠가 유행했던 ‘노마드’란 말이 우습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나 노마드지 돈 없는 사람에겐 자유란 끔찍한 것입니다. ‘프리랜서’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자유롭지만 돈이 없다면 그 자유는 끔찍합니다. 1930~1940년대 포드주의적 공장은 군대 같았습니다. 노동자들은 대규모 작업장에서 군인처럼 훈련받고 살았습니다. 철저한 상명하복 문화였고, 대신 시키는 대로 하면 굶어 죽지는 않았습니다. 대공황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길은 사회 전체를 공장으로 조직하자는 연구도 나왔습니다. 자유와 안정의 이분법은 이 시절, 즉 포디즘 시대의 산물입니다. 1960~1970년대 히피문화는 바로 이것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영국의 록 스타들은 유독 미술학교 출신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1960년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가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난 그런 삶을 거부할래, 하는 별난 애들은 미술학교에 가고 방랑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다양한 물건을 많이 생산하는데 변화무쌍한 수요에 맞춰 생산 조직 자체가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이건 고용 해고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탄력성, 유연성 같은 말이 나옵니다. 기간 인원은 정규직을 쓰고 나머지는 유연하게 쓰는 겁니다. 신자유주의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불안함과 지루함을 다 같이 불러올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온몸의 힘을 모아 모아서 ‘안정’을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오매불망, 사람들의 꿈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정성을 얻든지 먹이사슬 위에 올라가는 것(권한이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 이게 사람들의 꿈이 돼버렸습니다.

 

 

2. 불안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그런데 그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없습니다. 인간만이 미래와 현재 과거를 그렇게 겪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계획할 능력이나 자원이 내 손 안에 없다면 꼼짝없이 다가오는 미래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같은 상황이면 비정규직은 인생을 계획할 수가 없습니다. 5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 결혼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뷔리당의 당나귀’라고 불리는 우화가 있습니다. 당나귀에 양옆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 똑같은 맛과 똑같은 냄새를 가진 풀 더미를 쌓아놓습니다. 당나귀는 어떻게 할까요? 당나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 앓다가 끝까지 아무 선택도 못 하고 결국 심한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죽습니다. 이 우화는 인간의 행동을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윤리 철학에 의문을 던집니다. 흔히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여러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 대가와 소득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고 여겨지지만 인간이 당나귀와 같은 처지가 된다면 어느 하나를 쉽게 선택하진 못할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가 가르쳐준 안정된 행동들만 따르다가 죽는 삶이라면 모를까 거기서 한 걸음만 옆으로 비껴나면 수많은 미지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럴 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 있을 건가요? 안전하게 합리적인 계산이나 하면서 익히 알려져 있는 행동들만 하다가 죽을 거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애초에 우리가 뭐하러 태어난 것일까요? 인간에게 인생관, 종교 등과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은 미스터리 같은 인생의 심연 앞에서 삶을 펼쳐나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나귀도 인간도 본질은 합리적 계산기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펼쳐내는 존재란 것입니다.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우리는 완벽하게 뭔가를 알고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이 원하는 가상의 미래라는 것을 얼기설기 엮어놓고 그것을 계획 삼아 삶을 펼쳐왔습니다. 살고 나서야 그 계획이란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깨닫게 되지만 삶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서 다시 미래를 그립니다. 그 경험을 미래랑 연결시키면서 길잡이로 삼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U2의 「주 스테이션」이란 노래에는 시간은 미래를 과거로 만드는 기차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현재는 미래가 있기에 존재합니다. 미래는 현재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안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가 돼버립니다.

 

불안과 공포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차이. 바로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무서운 괴물은 우릴 공포스럽게 합니다. 공포는 대상이 있습니다. 불안은 대상이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고 뭐가 다가올지 알 수도 없습니다.

통장에 4만 원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렵습니다. 제가 토론토 가서 사흘째 되는 날 젤러스라는 제일 싼 곳에 가서 쇼핑을 했습니다. 백인 부부가 쇼핑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가는데 내가 무심코 그 쇼핑카트를 치고 갔습니다. 백인 아빠가 열이 받아서 제 멱살을 잡으려고 합니다, 저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는데도 너무 불안하니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뭔가가 불안하면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불안은 무기력, 무감각을 불러오고 할 수 없는 것이 없으니까 지루합니다. 졸업시험이 걱정되면 준비하면 됩니다. 통장에 4만 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멍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손발이 묶인 채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가난이 아니라 무기력이 사람을 무능력하게 합니다.

그래도 자본주의를 알아야겠다는 미션만큼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걸 포기하면 난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파산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포기하면 난 인간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토토의 천국」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늙은이가 자기 인생을 회고하는 건데 그 늙은이는 자기가 대여섯 살쯤 다른 집 아이랑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잣집 아이랑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바뀐 걸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완전히 어긋났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50~60년 그 긴긴 세월을 통째로 무의미했다고 하는 겁니다. 노인은 자신이 원래 아버지를 찾지 못해서 불행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 노인이 정말로 바꿔치기 당한 건지 아니면 노인의 평생에 걸친 망상에 불과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저는 내가 이것까지 포기하면 왜 태어났는지 무의미한 거 아니냐 그런 질문, 그런 순간에 대한 영화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만 특별히 하는 게 아니라 다들 할 텐데 저는 그걸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학 가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공부하면서 호강했습니다. 내 친구들은 노동 현장에 갔는데 나는 공부마저 포기하면 나는 나를 뭘로 정당화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이 바뀌는데 몇 백 년 걸릴지 모르지만 모래알 한 톨의 힘일지라도 기여란 걸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일 수도 있고 자식 새끼 먹이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신념일 수도 있고 거기에 무슨 우열이 있겠습니까? 자기 삶의 미션이란 것, 그걸 포기하면 내 인생은 끝이다. 그런 게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미션을 피해 도망갑니다.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는데 물고기 배 속이란 공간은 숨만 쉬고 있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런 상태인 곳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나와서 다시 미션을 수행합니다.

저는 2005년에 귀국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제가 알고 싶었던 만큼은, 내 기준에서 만족할 만큼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 이런 거구나 알았다 해도 당장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까지 알게 되는 건 아니니까,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을 봐야 하는 거니까 3, 4년간 뭘 해야 할지 계속 궁리했습니다. 2008년 2009년 정도까지는 뭘 해야 할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사회과학과 정책 수립을 동일한 과제로 삼은 연구소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와 사회과학과 정책 수립을 매개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연구소를 열었습니다.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데, 불안을 극복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껍데기는 가라

 

2회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저는 지혜로워지고 싶었습니다.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남들을 괴롭히는구나. 그때부터 남의 말을 듣는 게 중요해졌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그건 가장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벌이었습니다. 책 읽고, 영화 보고, 미드 보고, 음악 듣고, 죽어라 뭔가를 보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 목록엔 미야베 미유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떤 날은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를 혼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에 관한 글을 써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상을 주기도 하고. 스스로 지혜로워졌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침잠하기로. 그런데 그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까? 오늘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아볼까? 그 시간은 정말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부턴 빨리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잘하는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정말 고마운 일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 지독한 자기 연민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든 누구에게든 위로를 받아야 해,라는 생각이 무너진 겁니다. 한 친구가 저를 배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제 앞에서 자신이 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알고 보면 얼마나 불쌍한지 쭉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 저건 나다! 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저는 가장 비참하고 초라한 제 모습을 봐버렸습니다. 자기 연민이 골수까지 박힌 인간이 타인한테 할 수 있는 일을 본 겁니다. 저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가장 불쌍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불쌍한 것이다. 서로의 불쌍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한테 위로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로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로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영주야! 하고 부릅니다. 영주야! 너는 어떤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니? 영주야! 너는 영화가 왜 좋니? 영주야! 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니?

사람들을 만날 때도 좀 바뀌었습니다. 이젠 주장하지 않고 듣고 싶어졌습니다. 누가 “난 쭉쭉빵빵이 좋아.” 그러면 예전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묻습니다. “왜 좋아? 언제부터 그랬어? 촉감 때문이야? 아니면 야동을 많이 봐서 그러니?”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나요?”란 질문이 가능함을.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을.

저는 제가 과거에 한 일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발레 교습소」를 만들고 나서야 「발레 교습소」를 왜 만들고 싶어 했는지를 알게 된 셈입니다. 저는 그때 IMF 트라우마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애들이 왜 이렇게 떨고 있나? 그 애들은 어린 시절에 IMF를 겪었던 겁니다. 저는 가난해도 괜찮아,를 맑고 밝게 그려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 시절에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좋은 사람들 중에 정혜윤(그러니까 지금 글을 쓰는 저. 변 감독은 저에게 이런 걸 배웠답니다. 저렇게 한심해 보이는 애가 생각이란 걸 하다니.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지 말자. 쳇!) 그리고 송경동이 있었습니다. 2008년에 송경동(이 사람에 대해선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란 책에 꽤 자세히 썼습니다.)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맑게 “제 옆에 서 계시네요. 처음 뵙겠어요. 누나.” 그 표정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당신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달아오를 수 있는지, 일종의 혁명의 리비도라고 할 수가 있겠죠.

저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지혜로워졌다기보다는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산산이 태우며 작품을 만들겠다고. 장점도 100% 보여 드리겠습니다. 단점도 100% 보여 드리겠습니다. 무엇하나 숨기려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장점에서 매혹된 것이 단점에서 실망한 것보다 크기만 바랍니다. 이것이 제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출사표를 던질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 시간이 2년 반에서 3년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낮은 목소리」, 「밀애」, 「발레 교습소」까지는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2년마다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훌륭한 감독이 되고 싶은 꿈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 속에 어떤 사람이 내 영화를 보고 행복할까, 어떤 사람이 내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까에 대한 고민은 없었습니다. 나는 이런 장면을 찍고 싶어. “나는 이런 장면을 내 영화에 꼭 넣고 싶어.”는 있었지만 “관객들에게 이런 ‘정서’를 제공하고 싶다.” 같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쉽게 영화를 찍었습니다. 감독이란 걸 졸라 즐겼습니다. 현장에서도 누가 내 권위를 해치는가 살펴보는 데 집중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촬영이 끝나면 늘 놀 여력이 있었습니다. 반성은 어느 정도 과장이 있기 마련이니 이 말에도 아마 과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완전히 지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번 「화차」 때는 찍고 나면 뻗어서 잠자기 바빴습니다.

 

어떤 영화를 찍을까 찾다가 어느 순간 결심했습니다. ‘장르’라는 방식이라면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그거라면 속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중요한 말을 할 수 있겠구나.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게, 귀 좀 대줘.” 하고는 실은 악몽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재미있어 보이지만 무겁고 무서운, 무겁고 무섭지만 힘 있고 뜨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를 불태울 수 있는 건 행복한 얼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 같이 행진하는데 한쪽 골목에서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다 하고 웅크리고 있던 애가 한걸음 내딛는데 그땐 이미 그 아이는 패배할 것이 분명합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울먹울먹 걸어가는 아이들 얼굴을 그리고 싶습니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섹스를 나누는 아이들을 그렸을 겁니다. 이젠 탐닉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인간을 그리고 싶어진 겁니다.

 

그 무렵 「화차」의 판권의 풀렸습니다. 처음엔 망설였는데 「화차」가 속삭였습니다. ‘영주야, 화차에 타. 너 아니면 누가 풀어낼 수 있어. 너는 알잖아. 자기 연민의 폭력성을, 자기가 불쌍해 죽겠는 여자가 저지르는 일을, 자기가 불쌍해 죽겠는 여자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잡아먹는지, 너는 알잖아. 교코(「화차」 원작 여주인공)가 2012년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돌아다닐지 너는 알잖아.’

그래서 “「화차」,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지난한 각색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불균질하고 엉성하고 거친 부분이 있어도 이 영화가 나의 출사표가 되겠구나.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 영화 이후에 더욱 뜨거워지고 더욱 정교해져 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화차」는 2011년 7월 8일에 크랭크인했고 70일간 찍었습니다. 정말 좋은 스태프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촬영도, 조명도, 미술도, 동시녹음 팀도, 제작부도, 연출부도.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만나 행복했었습니다. 촬영 전엔 별의별 생각을 다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이제 됐다,라고 생각한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부족한 건 알지만 후회되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창 촬영할 때 ‘희망버스’가 출발합니다. 가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경동이는 매번 전화합니다.

“누나, 이건 해야 하는 일 같은데요.”

“경동아, 미안. 나 촬영 중이야.”

“괜찮아요. 누나.”

 

그런 통화를 한 날은 침대서 못 자겠습니다. 바닥에 누워 울다가 잡니다. 울다가 깨달았습니다. 나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고 찍는 동안 행복하고 코피가 나도록 나를 불태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보다 인간다워지는 것도 그렇게 사랑하는 영화만큼 내겐 중요하다. 영화로 표현하는 한편 세상을 향해서 시민 변영주로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끝나고 제일 하고 싶은 것은 ‘희망버스’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만큼이라도 용감해진 건 다 송경동 때문입니다.

 

「화차」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신용카드 사회의 문제를 너무 개인의 문제로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핵심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느냐를 보여 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태도는 알면 다 된다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한 연후에 그것이 아무리 끔찍한 거라도 자기 말이 맞는다는 사실에 안심하거나, 어떤 누구에게도 욕을 먹고 싶어 하지 않거나, 모두로부터 존중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세상에 지대하게 아는 게 많으나 그럼에도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빠져 나의 취향이나 향유하며 살겠다고 하거나……. 이 모든 것을 다 합해서 1970년대를 살았던 어떤 시인은 말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이걸 좀 더 귀엽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왜 직접 가서 손을 잡지 않나요? 당신은 풍경을 보면서 나뭇결이나 이파리에 코를 갖다 대지 않던가요? 당신은 그렇게 우아하신가요? 그래서 저에게 2010년대 최고의 영화는 이창동의 「시」입니다. 「시」야말로 가서 시체 냄새를 맡는, 마음이 아파, 하고 말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서 봉분의 흙을 덮는 여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화차」가 전달하고 싶었던 ‘정서’입니다. 마음속이 어쩐지 뭉클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자기 연민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내 자신이 예뻐 죽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영화감독 변영주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화차」를 어떻게 바라보았던가요? 내가 만약 「화차」의 교코(차경선)가 되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나는 누구를 택했을까? 저는 교코(차경선)의 눈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저라면 일단은 내가 사는 도시의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골랐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백화점, 기차역,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치 그 자체로 흔한 풍경 같은 여자요. 도처에 있는 여자들이요. 풍경이 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눈에 띄는 점이 없는 여자를요.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자아를 강조하지만 자아가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얼굴은 비슷해졌습니다. 옷차림도 닮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그 욕망, 환상, 고독, 불안, 공포에서 닮았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중 가장 외로운 여자, 행복해질 수 없다면 가짜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자고 생각했던 여자, 외로워서 아무 손이나 덥석 잡던 여자 하나가 풍경 속에서 사라진 겁니다. 그녀는 사라지면서 이 도시의 정체를 폭로했습니다. 이 도시의 정체란 무엇일까요?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일만큼 슬픈 게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살인이 아니어도 이 도시에선 그런 일이 너무나 흔합니다. 제대로 살아보자고 결심해도 한번 나락에 떨어진 이상 제대로 살아가긴 또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이 도시에선 그런 일이 너무나 흔한 겁니다. 이 도시에선 한번 나락에 떨어지면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오해받고, 굶고, 불안하고, 맞고……. 저마다의 ‘화차(지옥으로 가는 불수레)’에 올라타고 마는 겁니다. 이 도시에선 한번 올라탄 화차에서 내리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입니다.

「화차」에는 난데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 한 컷 들어갑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몰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하늘 위로 화차가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슬프고 섬뜩했습니다. 저는 변영주 감독에게 그 장면은 왜 넣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그저 하늘이 아름다웠던 것으로만 기억에 남는 평범한 날에 벌어지니까.

 

그런데 이 영화엔 신용카드 대란 같은 뉴스는 나오지 않습니다. 채권 추심에 대한 뉴스도 나오지 않습니다. 신용카드를 받은 개인을 구제하는 법제도 토론회 같은 것은 더더욱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사회적 사건임을 드러내는 어떤 단서도 없습니다. 그저 한 여자는 죽이고 다른 여자는 죽을 뿐입니다. 변영주 감독은 그저 사회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그런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 주고 싶다고 말할 때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가능하겠죠. 저 여자는 잔인해. 저 여자는 불쌍해. 누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 저 여자는 재수가 없었어. 나도 등록금 대출금 때문에 힘들어. 등등등.)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재난, 고통,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한 개인의 몸입니다. 재난과 고통이 최후에 남겨 놓는 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아무런 보호막도 없는 한 개인의 완전히 까발려진 벌거벗은 몸일 뿐입니다. 먹고 싶고, 가리고 싶고, 숨고 싶고……. 저는 그 벌거벗은 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그 몸을 끌어안을 수 있는가? 벌거벗은 몸도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변영주 감독은 ‘껍데기는 가라’라고 했습니다. 혹시 그렇다면 벌거벗겨지기 전에, 그러니까 미리 스스로 껍데기를 벗고 벌거벗은 몸을 직시해 본다면, 그래서 벌거벗겨진 타인의 상처와 고통이 내 안에도 잠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렇다면 혹시 우리에게도 화차를 피할 공통의 희망이 생길 수도 있을까요?

 

참,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를 빼놓을 뻔했습니다. 데릴라가 삼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그 두 번째 그림에서 이제 세 번째 그림으로 넘어왔습니다. 데릴라는 잠든 삼손을 내려다봅니다. 삼손의 머리채는 데릴라의 무릎 위에 놓여 있습니다. 둘은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끝)




 
 
lovely 2012-04-19 00:06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껍데기는 가라

 

1회

 

 

이번엔 제가 오랫동안 알아왔고 한번 알게 된 이후 한 번도 그 곁을 떠나려 한 적이 없는 고 마음 아주 깊은 곳으로부터 항상 잘되길 바랐던 사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이나 1996년경일 겁니다.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가 개봉되던 해입니다. 저는 이 사람을 인터뷰하러 갔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를 막 개봉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러 간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인터뷰의 첫 번째 조건이 뭡니까?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일단 둘 다 자리 잡고 앉는 것 아닙니까? 둘이서 얼굴은 봐야 인터뷰를 하든 말든 할 텐데 이 사람은 제 앞에 앉지를 않는 겁니다. 계속 서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 전날 밤에 본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 이야기를 합니다. 정류장에 깃털이 날린다고 했던가요. 깃털 하나가 하늘을 날다가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의 이야기라고 했던가요. 지금도 그녀가 썼던 단어들이 기억납니다. 애플. 달리기. 핑퐁. 대통령. 컴퓨터. 히피. 반성하는 히피. 쓸쓸한 히피. 아침에도 그리 밝지 않은 퀴퀴한 냄새나는 방 안에 그 단어들이 뿌려졌습니다. 그녀는 내 곁에 결코 앉으려 하지 않고 끝없이 서성대고 나는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기만 했던, 그것이 우리의 기묘한 첫 인터뷰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녀를 조금은 더 잘 관찰해 볼 수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녀는 크고 강했습니다. 전쟁을 치르기 전 전사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킬과 하이드 이야기를 조금은 압니다. 한몸 안에 선량한 지킬과 악마 같은 하이드가 다 들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도 조금은 압니다. 구약의 무시무시한 밤에 데릴라는 삼손의 머리털을 깎아서 삼손의 힘을 빼앗아버립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가 한몸 안에 지킬과 하이드를 가지고 있듯 한몸 안에 삼손과 데릴라를 데리고 있구나. 저 사람의 몸 안에는 굳건한 성전 같은 전사 삼손이 우뚝 서 있고 그리고 그 옆에는 결국 삼손을 무너뜨리고 말 무자비한 데릴라도 있구나. 삼손과 데릴라, 그 둘은 너무나 가깝게 있구나. 그렇습니다. 삼손은 머지않아 데릴라에게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데릴라는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곧 그녀는 자기만의 치열한 전쟁을 치를 것이었습니다. 만약 인생도 우리가 치러야 할 하나의 시험이라면 출제 위원은 그녀에게 난이도가 높은 심화 학습 문제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받아든 사람. 즉 그녀는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만합니다. 그녀의 자존심은 문제를 피하는 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생명력, 긴장감, 도전, 방어, 공격 에너지. 이 모든 것들이 그녀가 「포레스트 검프」를 설명할 때 한 말, 이 모든 일이 버스 정류장에 깃털 하나가 떨어지던 시간에 벌어지던 일이야,란 말 속에 섞여서 공중을 떠돌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 실격」을 세 장의 사진으로 시작한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삼손과 데릴라 세 개의 연작 그림으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한 첫 만남은 삼손과 데릴라가 함께 바짝 붙어 있는 그림인 셈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그녀를 알게 된 후부터 몇 년간 가장 지배적인 이미지는 그녀의 바짝 들린 턱입니다. 턱을 들고 다닌다는 표현이 이상하단 건 압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다닌다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에겐 있었습니다. 흔하디흔한 미남 미녀들도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는 듯, 그걸 확인하려는 목적 하나로도 자랑스레 고개를 들고 다니니 저는 그 표현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런 자기만족적인 저돌성이나 자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의미로 격렬하게 턱을 들고 다녔습니다. 때릴 테면 때려라. 피하지 않겠다. 단 네가 때리는 것은 내 맨 얼굴이어야만 한다. 들린 턱에는 이런 식으로 가슴을 울리는 묘한 호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의 들린 턱에는 어떤 거부도 담겨 있었습니다. 우린 하나의 가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면은 항상 그 가면을 쓴 사람의 얼굴보다 좀 짧습니다. 그렇다면 가면을 쓰고 있어도 턱만은 맨살 그대로 노출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 피부와 아예 달라붙어 버릴 정도로 우리가 가면에 익숙해져 있다면 우린 타인의 맨살이 닿아도 그게 맨살인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항상 우리의 가면이 조금 짧을 필요가 있습니다. 맨살은 진심이나 다름없습니다. 언뜻언뜻만 보이는. 아주 짧은 시간에 잠깐만 내비치는. 그런데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면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가면에도 선악이 있습니다. 아마 인간은 인류가 문화란 걸 알게 된 이후로 가면을 썼을 것입니다. 진심을 가리기 위해서도 쓰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씁니다.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도 쓰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씁니다. 그런데 가끔씩 맨살을 통째로 무방비 상태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저 사람이 제대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염려도 하고 감탄도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순진함 때문에 맨턱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순하게 믿어온 것에 대한 어떤 장밋빛 착각과 타성에 대한 반발로 턱을 내밉니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뭐 그렇게 자신만만해? 뭐 그렇게 행복해지려고들 해? 뭐 그렇게 고통받지 않으려고 해? 뭐 그렇게 적응하려고 해?

그녀는 오만한 표정으로 “자, 여기 너는 뭔가를 보고 있다. 한 인간의 맨살이다. 그런데 너는 이것을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에 대한 거부입니다. 뭐든지 편리한 대로 보는 것. 이미 은폐되는 것이라면 그냥 두는 것.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그 즈음 그녀는 어느 자리를 가나 좌중을 휘어잡았습니다. 누구도 말싸움에서 그녀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전쟁터를 잃은 전사들처럼 아무 데서고 기꺼이 싸울 준비, 자신을 바칠 준비, 그녀 자신을 탕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턱에 삼손과 데릴라가 하나의 웅장한 신전을 배경으로 함께 서 있습니다. 그 시절에 그녀가 그랬던 이유, 저는 지금은 그녀가 가벼워지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가면의 무게라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피부에 달라 붙어있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뜯어내야만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그림을 소개해 보고 싶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술을 나눠마셨습니다. 「발레 교습소」가 개봉되고 대략 일 년쯤 지난 때의 일일 겁니다. 그러곤 그녀가 집에 가려는 저를 위해서 택시를 잡아줬습니다. 막 출발하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택시 문을 확 잡았습니다. 그녀에겐 급히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혜윤아. 「발레 교습소」 보지 마라. 나 더 잘할게. 앞으로 더 잘할게.” 그렇습니다. 마침내 데릴라가 삼손의 머리털을 움켜쥔 것입니다. 삼손은 쿵 쓰러질 것이고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저는 이교도의 한 사람. 데릴라를 보낸 이교도의 한 사람이지만 데릴라가 실패하길 바라는 이교도처럼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혹은 데릴라가 성공해도 그 성공에 비통함을 느낄 이교도처럼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제 세 번째 그림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그녀의 입을 통해 들려드리겠습니다. 영화감독 변영주입니다.

 

 

2. 강덕경 할머니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그 할머니는 영화 「낮은 목소리」 주인공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일본 도야마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습니다. 정신대 문제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건 지금은 돌아가신 김학순 할머니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일본의 한 외무성 관료가 정신대 문제 그런 건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그걸 보자 기가 막혔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혼자 살아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라도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진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증언을 한 후 여기저기서 나도! 나도! 하고 커밍아웃한 할머니들이 나왔습니다. 그 숫자가 400명이 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할머니들 중 단 한 명도 같은 곳에 있던 사람이 없단 겁니다. 다들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는 강덕경 할머니를 서교동 나눔의 집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1992년 겨울의 일입니다. 다른 할머니들은 드러내놓고 저희를 경계했는데 강덕경 할머니는 최대한 저희를 도와주려 했습니다. 저는 강덕경 할머니 얼굴을 보자 이 할머니 얼굴만 제대로 찍어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할머니 얼굴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너무 어렵게 커밍아웃했어요. 맘껏 찍으세요. 도와드리겠어요. 그런데 대신에 말입니다. 대신에 날 이용해만 먹고 제대로 일 못하면 평생 가만두지 않겠어. 할머니는 말도 조곤조곤 잘해서 정신대 할머니들의 대표 역할을 했습니다. 너무 나서지 않으면서 할 말 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소학교 다닐 무렵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이 있고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화가가 자원봉사를 해서 그녀는 나눔의 집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녀의 초기 그림은 전부 추상화였습니다.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선들을 종이위에 쭉쭉 어지럽게 늘어놓습니다. 초록색인가 파랑색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이 뭘 것 같습니까? 몸살입니다. 「낮은 목소리」 찍으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점점 더 잘 기억하게 되면서부터는 실제 상황을 그렸지만 저는 할머니 초기 추상화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당시 강덕경 할머니는 내 담당 할머니였습니다. 담당 할머니가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시 영화를 찍었던 모든 스텝들이 마니또 할머니를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싸우면 문 잠그고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저흰 촬영을 못합니다. 잘 화해를 못하는 거죠. 그럼 우리 스텝들은 자기 마니또 할머니들 이야길 듣고 우리끼리 싸웁니다. 그럼 우리는 이해 당사자가 아니니까 누구 잘잘못인지 빨리 결론이 납니다. 대부분 강덕경 할머니가 승리합니다. 왜냐, 감독의 마니또니까. 「낮은 목소리」 일편 마지막 장면은 송년회입니다. 강덕경 할머니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릅니다. 「해운대 엘레지」란 노래인데 그 뒤에 그날을 생각하면 할머니가 미래를 예견한 노래같이 느껴집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나보고 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영화는 1993년에서 1994년까지 2년간 찍었고, 1995년에 개봉했습니다. 영화는 나름대로 인기를 끌어서 사회적으로 나눔의 집 모금 운동도 벌어졌고 한 독지가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땅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전세 생활을 청산하고 나눔의 집에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덕경 할머니는 나눔의 집으로 이사 갈 때 이미 폐암 말기였습니다. 할머니가 어느 날 제게 말했습니다. “영주야, 나 3개월 진단 받았다. 3개월만 찍으면 되니까 빨리 시작해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찍기 시작했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전혀 일을 하지 못했고 대개 앉거나 누워 지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할머니들은 인생 최초로 자기 밭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깔깔거리고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2편은 아예 나눔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찍었는데 방에 있다 보면 할머니들이 문을 두드립니다. “할머니 왜요?” 그러면 어서 빨리 자기가 기른 호박을 찍으란 거죠. 자기가 호박을 수확하는 걸 찍으란 거죠. 그러곤 제 앞에서 밭길을 따라 호박을 짊어지고 걸어갑니다. 저는 할머니 뒤를 따라가면서 찍습니다. 하루는 할머니들에게 물었습니다. “호박을 왜 찍고 싶으세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 것 보여주고 싶다고. 자신을 평생 열심히 일한 사람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강덕경 할머니는 앉아 있거나 누워만 있는데 노동을 하는 할머니들은 기쁩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 2편은 위안과 비애. 포복절도하는 장면과 슬피 우는 장면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 년이 지나자 돈이 딱 떨어졌던 겁니다. 문제는 강덕경 할머니가 일 년 반을 살았다는 겁니다. 마지막 6개월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다행이다 반, 인간이 이래도 되나 반.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돈이 없었던 겁니다. 한 번은 제 조연출이 간호사에게 “이번엔 정말 돌아가시는 거지요?”라고 묻고는 자기가 한 말에 자기도 놀라서, 자기가 한 말에 자기도 혐오감이 들어서 어디론가 사라져 한참 울고 돌아온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할머니 앞에선 웃고 떠들지만 그 순간에도 돈 생각을 합니다. 내 모든 이야기를 한 유일한 할머니였는데도 말입니다. 저에겐 당장 내일 촬영할 돈이 없었습니다. 스텝들 밥값 차비를 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말기 암 환자 가족과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밤늦게까지 할머니 병실을 지키고 있다가 최대한 웃고는 꼭 술집에 갑니다. 술 먹고 갖은 패악질을 다 합니다. 제 자신이 혐오스러웠습니다. 저는 그 정도로 돈 앞에서 기꺼이 이중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옥 같은 한철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듯 시나리오를 한 편 썼습니다. 그 시나리오를 로테르담 영화제 프리 마켓에서 발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시놉시스를 재밌어하는 제작자들이 있으면 미팅을 갖는 씨네마트가 있는데 저는 도망치듯 그곳에 갔고 정확히 삼 일 뒤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 나 안 지키고 딴 데 가서 딴 일 하는구나. 나 확 죽어버린다. 꼭 이러고 돌아가신 듯했습니다. 「해운대 엘레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함께 있자고,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강덕경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했던 2년을 치유하지 못한 것이 저에겐 아주 컸습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우리 스텝 중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아산병원에 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병원엔 스텝들이 각자 우는 자리도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할머니 시신 찍은 것 보니 죄의식이 더 커졌습니다. 카메라가 시신에서 뒷걸음치는 걸로 보였습니다. 차마 카메라도 시신 옆에 가질 못하는 겁니다. 3편 ‘순결’은 강덕경 할머니 묘소에서 성묘하는 걸로 시작됩니다. 순결은 나눔의 집을 떠나서 지방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들을 찍었습니다. 사실 저는 할머니들이 잘 사는 걸 보면서 치유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대만에 있었는데 언니는 어디로 끌려갔어?” 저는 ‘순결’을 찍고 강덕경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나 치유받았다. 강덕경 할머니. 나 이제 손 털게요. 안녕. 안녕. 나 간다. 응 알았죠?

 

그러나 털긴 뭘 텁니까? 저는 그때 삼 년 어디 가서 조용히 지내야 했던 겁니다. 충분히 나 스스로 나를 위로해 줬어야 하는 겁니다. 내겐 내가 제일 불쌍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제일 크게 고통을 겪었단 생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나는 이렇게 행동해도 돼. 그 고통을 겪은 나는 막 나가도 돼. 좀 망가져도 돼. 사실은 어떤 곳에 가도 내가 위로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있었단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낮은 목소리」 찍었다고 하니까 무지하게 올바른 사람인 줄 압니다. 술집에서 술 마시거나 노래 부르고 있으면 변 감독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같은 쪽지가 옵니다. 때마침 백내장 수술을 받기도 해서 더 우울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위로받고 싶어 하는 거 그게 아주 독입니다. 그건 끔찍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저는 그때 3년 어디 가서 조용히 지내야 했던 겁니다.

 

저는 그녀들의 기억을 7년 동안 덮어쓰고 살았습니다. 그러곤 ‘숨결’이 끝나자 곧 김윤진 씨가 나온 「밀애」를 찍었습니다. 그때 저는 진짜 찍고 싶은 것을 찍었다기보다는 이건 어떨까? 이거 괜찮을까?란 생각으로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 「밀애」에는 찍고 싶었던 장면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이 밤에 돌아오면 여자가 힘들다고 우는 장면. 그리고 김윤진이 여관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걸어가는 장면. 저는 일탈을 통한 탐미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일탈을 통한 탐미적인 세계 그 자체 혹은 그걸 찍고 있단 것 자체가 제겐 위안으로만 느껴졌던 겁니다.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누가 찍는다면 가장 말리고 싶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는 찍을 때 일탈을 통한 탐미적 세계가 내게 위안이 아닌 것을 벌써 알고 있었고 평단이든 관객이든 어떤 평가와 관계없이 (김윤진 씨가 그렇게 열심히 촬영해 준 것이 고맙지만) 나 개인적인 동기의 불순 때문에 미안한 영화입니다. 그때도 한 3년 쉬었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밤 10시에 고삐리들이 편의점에 서서 후루룩 후루룩 컵라면을 먹고 있는 걸 봤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쟤네들이 향유할 세상을 우리가 다 망쳐놓고 우리는 위로를 찾는답시고 세상을 떠도는구나. 병―신―.

 

빵셔틀하는 애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아예 체제 바깥에 있는 애들이 영화의 소재가 되곤 했었습니다. 일진이라든가. 마약을 하거나 가출을 한다거나. 그런데 그 애들에게 빵 배달하는 애들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아이들, 반항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닌 아이들. 삶을 계속 지연만 시키는 아이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 아무것도 아닌 아이들이 어느 날 저 아줌마랑 저 아저씨처럼은 정말 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자기 동네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삶의 교훈 같은 것을 얻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재미있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냥 헛헛하게 담담하게. 거칠게. 그런데 그런 세계엔 유머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재밌게 그리는 것은 정직하지도 않고 있을 법하지도 않다고 생각한 게 제 잘못이었어요. 나중에 비슷한 또래 아이들 다룬 일본 소설 「레볼루션 No.3」를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 작가는 단 한 번도 식자층의 시선을 취하지 않아요. 지식인이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완벽한 이해와 연대의식으로 쓰고 있었어요. 지식인이 짐짓 사려 깊은 척 다 이해하는 척 굴지 않을 때 유머가 나오더군요. 저는 짐짓 이런 결심을 했었죠. 대상화시키지 말아야지. 눈높이를 맞춰야지. 아……!

 

현장에서는 윤계상이나 이준기, 김동욱 다 신인이었습니다. 감독으로서 나는 이 아이들에게 연기를 잘하게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떤 영화적인 야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그래도 그 영화를 생각하면 제가 좀 귀엽습니다. 「발레 교습소」는 감독이 자, 힘나지 힘나지, 으쌰으쌰하면서 뒤뚱뒤뚱 치어리딩을 하는 영화입니다. 「발레 교습소」에도 찍고 싶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계상이랑 민정이가 얼토당토않은 비디오를 보다가 하룻밤 잡니다. 그러곤 다음 날 둘이 만났는데 여자는 계면쩍고 불안하고 얼굴도 똑바로 못 보겠습니다. 남자는 그걸 보다가 한마디 합니다. “안 좋았어?” 저는 순박함, 단순함, 복잡하지 않음, 이런 걸 담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설날 가족들끼리 밥 먹다가 할머니에게 뭐라 뭐라 하면서 나가버리는 장면. 그건 내가 그 또래 때 가족들한테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2005년 3월, 두툼한 군사우편을 한 통 받았습니다. 입대한 윤계상이 보낸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온통 다 나와 함께 영화를 찍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러니까 그 애의 행복했던 하루하루 행복했던 빛나는 그날들을 모아 모아서 영화를 말아먹은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고작 그것뿐이었습니다. 행복한 날들을 모아서 영화 한 편을 말아먹은 것입니다. 그것이 말도 못하게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다 망―쳤―구―나. 내가 망친 거야. 그전엔 대체 누가 못한 거야? 촬영감독이야? 배우야? 이렇게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언제부터 벌어진 걸까? 아. 로테르담 간 거부터 시작되었구나. 그때부터 망친 거구나.

 

자, 여기까지입니다.

데릴라가 삼손의 머리칼을 움켜쥐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기억너머 2012-04-03 14:31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것들을 생각케해주시네요..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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