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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촛불집회 등에서 보여주다시피 현실이 훨씬 흥미롭고 풍부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저자의 개념어, 그리고 현상을 응축시켜 정리하는 소제목들이 지닌 명민함이라고 할까.

감탄하면서 봤다.

 

 

 

 

 

 

 

끌리고쏠리고들끓다 (클레이서키/갤리온/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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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첸바크의 [애널리스트]는 꽤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53세의 정신분석의 프레더릭 스탁스가 과거 젊은 시절 어느 때 자신에게 상담을 받던 어떤 여인을 방기한 것 때문에 그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괴편지를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속절없이 자신의 삶이 파괴되는 과정이 전개된다. 결국 그는 협박자가 요구한대로 자살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1부는 그럭저럭 볼만한 정도였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프레더릭(리키)이라는 인물의 매력이 약했다. 그의 대화문은 거의 최악이었다. 다른 문장들은 좋은데 대화체에서는 힘이 쑥쑥빠질 뿐더러 실소가 나오는 대목도 있다.

그런데 존 카첸바크로 검색해보니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이 이 존 카첸바크를 언급한 대목이 있었다. 바로 대화문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실례로 존 카첸바크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이 작가의 대화문은 유명한 모양이다.

소설을 손에 들고 그럭저럭 넘기고 있던 나를 바짝 조이게 한 것은 2부부터였다.

2부는 자살을 가장한 채 스탁스로서의 존재를 마감하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리키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카우치의자 뒤에서 듣고, 이해하려 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조용히 나이들어가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리키는 자신의 잘못한 일에 대한 책임추궁치곤 너무나 값비싼 댓가를 요구했다고 결론을 내린뒤 스탁스의 삶을 파괴시킨 그 미지의 협박자를 향해 반격을 기획하고 행동한다.

2부의 주된 흥미는 리키가 새로운 신분을 얻어 새로운 삶을 운영하며 복수를 준비해가는 한편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스릴러 장르의 인물답게 리키는 복수를 위해 철저히 변화하는 인물상을 보여주지만, 그 변해가는 인물의 소소한 묘사와 설명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P.S. 53세라는 나이 설정이 다소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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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아니라 오늘이어서 다행이었다. 날씨가.

어제처럼 햇빛 쨍하고 더운 날이었다면 이다지 감상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른 시각에는 밝았던 날이 오전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둑해지더니 이내 비가 내리고 있다.

오전 내내 꼬박, 다른 일 다 미뤄두고 두꺼운 이 소설을 마저 읽었다.

아마도 94년 또는 95년도 쯤에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동생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었다.

그 때 이 책이 오늘처럼 나를 눈물짓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면 그 뒤로도 하루키라는 작가의 책들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봤을 테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니까.

동생이나 나나 [상실의 시대]를 읽은 후 10년도 넘은 지금, 동생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최근에 이 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은 것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동생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갔고 결혼했고 자식 둘을 둔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사에 매어 있고, 그건 그의 와이프도 마찬가지. 그들의 그런 생활의 댓가로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대학시절 동생은 나보다 훨씬 급진적이었고 활동도 그랬다.

왜 다른 책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오늘 다시 읽으며 '시대'를 제목으로 삼은 것 때문에 아마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나이테의 일종으로 되새겨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분석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 할지라도 이제 그런 식의 과거 어느 시대의 지표로 쓰여지질 않길 바란다. 뭐, 모르지 바란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닐테니.

어쩔 수 없었다, 대학시절과 이 책을 처음 읽던 13, 4년전과 지금이 엎치락 뒤치락 떠오르면서 감정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을.  제자리 걸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변했어야, 지금 어디쯤 왔어야 그래, 내가 많이 나아왔구나, 대견하다 내지는 잘 살아왔다, 그런 뿌듯함을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 나를 돌아보면 나는 멀리 떠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시간이 너무나 한참 지났는데도 ... . 

소설 마지막에 미도리는 묻는다, 지금 어디냐고?  

이런 책 하나 갖는 것 나쁘지 않다. 비록 마음이 다시 한 번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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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자들이 베토벤을 듣고 즐기게 하자는 것이다.

 - P. 312 -

 
   

 

 

 

 

 

 

 

[베토벤평전 - 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 (박홍규, 가산출판사.2003)

베토벤을 듣는 노동자.

새삼 내가 베토벤 평전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를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호시노라는 청년이 우연히 들르게 된 클래식이 흐른 찻집에서 듣게 된 음악이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피아노삼중주, op.97)이다. 호시노는 장거리 트럭운전사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 좀 놀았지만 그래도 졸업은 했고,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전전하다 자위대입대, 그리고 사회에 나와 대형 트럭운전사가 되었다고 하루키는 그의 이력을 소설 속에 밝히고 있다.

그런 호시노이니 클래식을 좋아해본 적도 좋아해보려는 의식을 가져본 적도 없는 '노동자'인데 우연히 듣게 된 베토벤에게 제대로 꽂혔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도서관'에 가게 된 호시노는 [베토벤과 그 시대]라는 전기를 골라 읽게 된다.

이 책은 분명 하루키가 본 책이었을 것인데 물론 제목이 실제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다. 하루키는 호시노의 전기 감상을 빠트리지 않는다.

   
 

(생략)

베토벤은 자존심이 강하며, 자기 재능에 대해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계급에게 일절 아부하지 않았다.(중간생략) 그의 음악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비약적으로 폭이 넓어지고, 그와 동시에 조밀하게 내부로 집중되어 갔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었던 건 베토벤이나 되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범한 작업은 그의 현실의 인생을 계속 파괴해갔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격무를 견뎌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위인이란 것도 무척 힘든 것이군" 하고 호시노 청년은 도중에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며 깊이 감탄했다. "

                  - [해변의 카프카], 제40장 도서관 금지구역에서 나눈 밀담, p.282~283 -

"그래요, 꽤 힘든 인생이었어요" 하고 청년이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개는 본인 책임이라구요. 베토벤이라는 사람은 원래 누구와 협조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머릿속에는 온통 자기 일과 자기 음악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사람이 실제로 가까이 있으면 견디기 힘들 겁니다. 나 같아도, '야, 루드비히, 제발 나좀 봐주라' 하고 말하고 싶어질지도 모르지요. 조카가 정신 이상이 된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음악은 훌륭합니다.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거든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 [해변의 카프카], 제40장 도서관 금지구역에서 나눈 밀담, p.285~286 -

 
   

 박홍규 교수가 베토벤 평전을 쓰면서 희망했던 것이 호시노 청년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 아니었을까?

박홍규 교수는 지금까지(2003) 나와 있는 베토벤 전기나 평전 등을 소개하면서 각기 지닌 특성과 한계, 국내 출판 상황을 점검한다. 그런데 하루키가 들고 있는 [베토벤과 그 시대]라는 책과 일치하는 제목은 알 수 없다. 대신 가장 주목할만한 책으로 소개한 메이나드 솔로몬의 1977년 전기는 지난 2006년 한길아트에서 번역 출판되어 있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메이나드 솔로몬 Maynard Solomon, 한길아트, 2006)

솔로몬은 미국 출신으로 음악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이라는 프리즘으로 베토벤의 생애를 들여다본 전기라고 한다. 도서관에도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나중에 보고자 한다.

책 말미에 음악감상은 음악만을 듣는 것이지, 다른 일을 하며, 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음악을 장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고 한다. 오직 음악만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겠지. 그럴 필요가 있겠다 싶다.

저자는 베토벤이 음악사에서는 처음으로 작품을 창조적 노동의 산물로 생각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또한 개인이 홀로 서야 하기에 너무나 외로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2세기가(베토벤은 1770에 태어나 1820년에 죽었다) 지난 지금 이땅에서도 똑같이 시대의 아픔을 살고 있기에 그에게 베토벤은 최초의 현대인이고 동시대인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그가 보는 베토벤의 음악은 어둡고 격렬하다. 시대와 상황에 타협이나 예찬으로 일관한 삶이 아니라 갈등하고 반항했던 '부랑아'로서 베토벤이였기에 그의 음악이 감동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은 낭만파 음악에 속한다. 현실과 무관하게 꿈꾸는 낭만이 아니라, 끝없는 갈등을 낳는 현실을 박차고 나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초월을 꿈꾸는 것, 책의 부제가 '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이다.

베토벤보다 14세 연상이었던 모차르트(1756~1791)와의 차이가 저자에게는 주요한 사고의 맥이었던 듯 하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에 속했다. 혁명 전야의 어지러운 시절을 산 모차르트는 도덕적으로 당연히 자유를 추구했으나, 혁명 후의 베토벤은 혁명에 충실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엄격해야 했다. 그러나 곧 혁명의 배반을 목격한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같은 자유가 아니라 갈등을 경험했다. 그의 도덕도 갈등으로 번민했다. 그의 음악도 갈등으로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는 반항했다. 그리고 그 초월을 위해 끝없이 고뇌했다.(P30)

작곡가의 삶은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음악에 대한 분석과 설명은 쉽지 않은 듯 하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더욱 어려웠을 듯도 하다. 그에 대한 언급도 빠트리지 않고 있긴 하다.

마지막에 저자 나름대로 대표작 30곡을 정리해 놓았는데, 참고할만 하겠다.

첫째, 교향곡. 교향곡은 모두 9곡이나, 처음 2곡은 모차르트의 영향이 강해 베토벤답지 않다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면,

<제3번 영웅>, <제5번 운명>, <제6번 전원>, <제7번>, <제8번>, <제9번 합창>

둘째, 피아노 소나타. 중요 작품은 40세 이전에 쓰여졌다.

<제8번 비창>, <제12번 장송>, <제14번 월광>, <제28번 전원>, <제29번 해머클라비어>, <제53번 발트슈타인>, <제78번 테레제>

셋째, 현악4중주곡

<제7~9번 라주모프스키>, <제10번 하프>, <제15번>

넷째, 현악4중주 외의 실내악, 바이올린 소나타로는 <제5번 봄>, <제9번 크로이처>, 첼로 소타나로는 <제3번>

다섯째, 콘체르토(협주곡). 피아노협주곡으로는 <제5번 황제>, 피아노 3중주로는 <제7번 대공>, 바이올린 콘체르토는 유일한 <작품 61번>

여섯째, 오페라는 <피델리오> <콜리오란 서곡>과 <에그몬트 서곡>

일곱째, 종교음악. <장엄미사곡>

여덟째, 가곡 <멀리있는 연인>

대표곡으로 정리한 것일 뿐 저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베토벤이 수용되는 국내외,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도 유익할 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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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나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하여 책을,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요 몇 년 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법률관계의 책이나 혹은 통근 지하철 안에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 뿐이었다. 누군가가 정한 것도 아닌데,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인간이 많건 적건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은 품행이 좋지 못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다지 바람직한 행위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책이 내 가방 안에, 혹은 서랍 안에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아마 피부병에 걸린 개를 보듯이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곤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 "그렇구나, 너는 소설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소설을 좋아해. 젊었을 때는 곧잘 읽었지" 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소설이란 젊을 때 읽는 것이다. 마치 봄에는 딸기를 따고 가을엔 포도를 수확하듯이.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 1](문학사상사)  P53 -

 
   

요즘 소설을 읽고 있다. 좀체 소설이 잘 들어오지 않던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요즘 갑자기 소설이 그리워졌다.

나란 인간이 좀 그런 편인데, '~현상, 신드롬' 따위가 한 풀도 아니고 두, 세풀 꺾인 후에 느닷없이 어느날 새삼스레 뒷북을 치게 된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딱 그렇다.

그의 문학세계나 작품성을 따지고 싶지도 않고, 뭐라 쓸만큼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니 내 능력 밖이다. 다만, ... 재밌다. 그렇게 줄줄이 써댈 수 있는 그의 재주가 신기하고 부럽다. 단편을 논외로 하고 그의 소설을 보라. 분량 엄청나다. [태엽감는 새] 1권을 보고 있는데, 나는 8장 '가노 구레타의 장황한 이야기*고통에 대한 고찰'을 읽으면서 실실 웃었다. 와, 이건 완전 '구라'다. 나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얘기를 시침 딱 떼고 주절주절 해낼 수 있는,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뽑아내는 능력도 놀랍더라.

추석 연휴 때 의무처럼 가족모임을 끝낸 후 돌아와 [해변의 카프카]를 완독했다. 2003년도 가을 무렵인가 지인의 책을 빌려 읽었었는데 ... 다시 읽은 이 책은 내겐 완전히 새로운 책이었다.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책처럼 그렇게 읽었다. 이렇게 가끔씩 한심하고도 멍청한 나를 만나는 때가 있다. 읽었던 책임에도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봤던 영화임에도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분명 예전에도 맞닥뜨렸던 문제였음에도 완전 생경한 어려움처럼 또 다시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절망감 같은 것이 있다. 내가 해온 일과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된단 말인가? 부질없는 도로에 불과한 시간 아니었던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거 아닌가? 시간들여 공들여 뭔가를 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내 인생이란 게 따지고 보면 스펀지 같은 거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헛공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 그래서 죽을 때까지 헛공간만 자꾸 늘여가는... 지대한 충격이 와도 멍~하니 움츠러들었다 다시 그 모양 그 꼴이 되곤 하는 그런 쓸데없는 스펀지. 꾹 짜면 내 인생만큼 빨아들인 시간이 하릴없이 뚫린 헛공간에서 고작 떨어지고 말 그런 스펀지.

어쨌든..., [해변의 카프카]에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대공>(op.97)을 계기로 베토벤 생애와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이와 관련되어 또 다시 나의 멍청한 과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때 뭣 때문이었는지 베토벤의 곡들을 열심히 들었었던 때가 있었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도무지 기억에 없다. 그 땐 카세트 테이프였다. 다시는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지금보다 한참 젊었을 때 사 모았던 카세트 테이프들을 상자에 쓸어모아서 어따 쑤셔 박아뒀었는데 2008년 추석 연휴 마지막날 집안을 뒤졌다. 테이프와 플레이어를 함께 두지 않아서 테이프를 찾은 뒤에는 플레이어를 찾아 또 한참 들쑤셨다. <대공>은 분명 있었다. 이어폰으로 잡음 섞인 음악을 듣고 있어보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무덤덤하긴 마찬가지였다.

현악4중주곡들도 있는대로 다 샀었나보더라. 역시 열심히 들었다. 베토벤 음악 중에서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건 작품번호 73, <황제 콘체르토>이다. 시원해서다. 그리고 이른바, <월광> <비창> 등의 극적이면서도 피아노 특유의 차갑고 냉정한 음색이 잘 드러나는 곡들이다.

베토벤 생애가 나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박홍규 교수의 [베토벤 평전](가산출판사, 2003)이다. '음악노동자'로서 베토벤이라 규정한 것이 흥미롭기도 했다. 책은 인덱스까지 해서 333페이지로 적당한 분량이었고 작품해설이 구구절절한 것도 아니어서 가볍게 읽어볼만했다. 박홍규 교수가 이 책에서 애써 알리고자 한 베토벤은 세뇌되다시피한 신화적 베토벤이 아니라 '인간 베토벤'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을 뒤흔들고 있던 새로운 시대의 와중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품활동을 해야 했던 시대적 인간 베토벤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평이하고 쉽게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은 있되 읽는 맛은 없는 팜플렛 같은 느낌이 강하다.

공교롭게 최근 닥본사하는 드라마가 <베토벤 바이러스>이다. 일본 드라마(영화?)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판이라고 하는데 <노다메...>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여튼 아직까지는 작가인 홍자매의 발랄함은 있으나 연출력이 좀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이런 드라마나 영화제작의 노하우나 인프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베토벤 vs 모차르트,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구도이지만 인간사 어쩔 수 없는 구도 아니겠는가.

드라마에서도 강마에(김명민)는 말한다. "나는 모차르트가 싫어!"  웃기지만 슬픈 얘기다. 세상의 모든 비모차르트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P.S. [해변의 카프카]를 읽다가 김훈의 소설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문장, 단어를 구사한 것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하권의 P.366페이지에서는

"베개에서는 햇빛 내음이 난다" 같은 문장에서 '햇빛내음'은 김훈이 종종 쓰곤 하는 '햇빛냄새'와 똑 닮았다. 작가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응하는 단 하나의 단어만을 쓸 수 있다고 했을 때, 이렇게 비슷한 계통의 단어를 쓴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비슷한 감성에서 비슷한 단어를 고르고 조합한다는 게.

김훈과 하루키는 어딘가 닮아 있다. 물론 '밥벌이'의 삼엄함과 엄중함을 중요시하는 김훈과 '나' 혼자만의 생활로 그럭저럭 잘 버텨나가는 하루키의 생계의 경중은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3인칭을 힘들어 하는 점에서도 닿는 점이 있고. ... .

김훈은 1948년생이고 하루키는 1949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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