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야 했지만, 손에 쥔 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사흘걸렸다. 내딴에는 열심히 읽었다. 이 소설을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리고 페이퍼를 남겼다.

(http://blog.aladin.co.kr/mysty/6539608)

어설펐다.

 

하루키와 이시구로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보고 싶어서 찾아 읽었던 책인데, [창백한 언덕 풍경][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남아있는나날]을 다시 읽으니 왜 하루키가 아니라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는지 수긍하게 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건 상상이 잘 안된다. 이후 진짜 그가 늘 소망했던 '종합소설'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모를까.. 근데 그게 잘 상상이 안된다._)

예전에 읽을 때 알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으니 기가막히게 구성을 잘 쓴 소설이었다. 1인칭 화자의 회상이라는 도구도 이만하면 정말 잘 쓰는 축에 속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될 수록 스티븐스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앞에 서술된 진술들이 바로바로 부정당하며 스티븐스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밝혀진다.

그 절정이 예전 포스팅에서도 썼던 '아치 밑 자리'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븐스 클로즈업에서다.

아, 정말이지 그장면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다시 홀을 가로질러 아치 밑 내 자리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한 시간쯤 흐른 뒤 마침내 신사분들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내가 자리를 떠야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던 시간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승리감이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이 감정을 어디까지 분석해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날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다지 설명하기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나는 극도로 힘든 시간들을 거의 마무리한 직후였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p.282) 

 

 

그런데 마지막에 이시구로는 왜 스티븐스에게 독백을 하게 했을까.

물론 선창에서 만난 상대가 있었지만 급작스럽게 스티븐스는 그 남자에게 얘기하듯 꺼내지만 실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독백이자 고백을 한다. 전문가적 실존이 아니라 사적인 실존으로서. 집사라는 가면을 벗고 가면 밑의 배우 자신을 드러내면서.

달링턴 경에게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모두 바쳤다고. 그래서 남은 게 별로 없다고 토로한다.

달리 방법이 없었을까...

이 고백과 체념. 그리고 새로운 각오. 새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농담의 기술' 연마.

나는 마지막의 이 고백이 급작스러웠고 아쉬웠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스티븐스는 새로운 각오를 하지만 아마도 남은 게 별로 없는 그로서는 농담도 시원찮을 것이며, 최고의 집사였을 때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실수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인물들이 나온다. 반성이나 후회없는 뻔뻔함이 있다.

최근에 하루키를 다시 보면서 느낀건데 생각보다 하루키의 상처랄까.. 내면의 어둠이 더 심한 듯하다.

그저 제스처만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역사로부터 얻은 내상이 깊은 편. 물론 그 내상을 소설에 어떻게 담아내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아마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전쟁 당시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느껴진다. 마치 하루키가 샐린저에게 느꼈던 것처럼.

 

하루키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전쟁소설'이라고 평했다.  하루키는 샐린저가 전쟁에서 받은 깊은 트라우마를 콜필드라는 젊은 분신에 의탁해 쓴 작품으로만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소설이라고 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곧 이노센스의 트라우마이다.' (2010년 인터뷰)

 

하루키가 내상을 입은 사람들. 자기에게도 들어앉아 있는 상처를 발견하는 내부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담고 있다면 이시구로는 내상을 입은 줄도 모르는 사람들 또는 내상을 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끝내 드러내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듯.

하루키에게 역사는  중국에서 상관(시스템으로 바꿔도 된다)이 내린 명령, 잘들지도 않는 칼로 사람의 목을 쳐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돌아와 입다문채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할 수 있다면 이시구로는 그보다는 평범하다. 직접적인 행동이 아니라 동조하거나 그 길이 옳다고 믿었을 뿐인 사람들을 얘기한다. ........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좀더 봐야할 것 같다.) 

 

이시구로가 54년생이고 하루키가 49년생이다. 하루키가 고작 다섯살 더 많다. 난 어쩐지 세대가 다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시구로가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교가 얘기가 되는지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너무 늦은 시각이다. 머리가 멈춘듯하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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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2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님의 이 페이퍼!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이 이시구로는 되면서 하루키는 안 되는 건지
님의 생각을 더 알고 싶은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종합소설...?
저도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 게 잘 상상이 안 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죠.
기껏해야 너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노벨문학상의 전례를 보면
그런 작가에겐 잘 안 주잖아요.
그에 비하면 이시구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매번 후보 지명이 되고 있다는 말이죠.
<해변의 카프카>가 이스라엘 문학상인지 뭔지 탓는데 그게 또 노벨상의 전초 격이라고 하더만요.
그런 걸 보면 건강하게 잘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ㅋ

포스트잇 2018-04-25 14:43   좋아요 1 | URL
네. 어려운 문제죠.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게 늘 쉽지 않은데,
앞으로 하루키 관련 페이퍼에 지적하신 주제들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하루키 소설은 늘 조금씩 아쉬움이 있어요. 종합소설은 하루키가 늘 쓰고 싶다고 하는 소설인데요, 19세기 소설, 특히 발자크 소설처럼 세속적인 전체 시대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을 지칭했습니다. 19세기 소설의 자기완결적 소설도 같은 맥락인것같고요. 하지만 하루키가 정말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지, 정작 그의 소설들을 보면 아닌것 같거든요. ...
요즘 들어 부쩍 역사에 대해 발언을 하는 내용이 실제 하루키의 소설에 반영되는지 그것도 의심스럽고요.
이중 플레이를 하는거 아닌가 싶고, 그게 아니면 문학이란 직접적인 발언이 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연구대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