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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에서 가족이라는 키워드는 만병통치약'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가족이다. 뭔가 막힌다 싶으면 " 가족이잖아 ! " 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을 풀린다. 그래서 일일드라마'는 가족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른다.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는 이명박 각하 시대의 불행이 엄마를 무시한 죄'라고 은연 중에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복원된다고 상황은 달라질까 ?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계급이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무시했다. 가족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득재의 <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는 제목 그대로 " 가족 신화 " 의 허구를 살벌하게 폭로한다. 그가 가족 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이다. 싸돌아다녀야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말이다.

 

 


 

 

 

 

 

< 7번 방의 선물 > 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동네 바보 용구'가 천만 관객을 울린 것이다. 흥행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 중년의 남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으니 " 부성애의 재발견 " 인 것은 확실하다. 이 영화를 본 그날의 가족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다 큰 자식들은 아빠'를 쇼파에 앉히고는 이런 율동을 선보였을 것이다.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 참새처럼 글썽거리면서, 물개처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부르는, 다 큰 딸은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고,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은 곰 같은 몸으로 촐랑거리면서, 아.... 이런 슬픈 가족의 풍경 !

 

 

그런데 < 가족의 재발견 > 은 용구 아빠'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우리는 " 엄마가 필요해 ! " 를 외쳤다. 그 촉매제'는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였다. 책만 보면 쳇 ! 이라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도 이 책은 사서 읽었다. 이 책의 서평 란에는 온통 눈물 바다'다. 종종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이상한 감상평이 올라오기는 하나 주류는 엄마에게 잘하자, 이다. 그러니깐 이명박 정부는 엄마의 재발견으로 시작해서 아빠의 재발견'으로 끝나는, 매우 독특하며, 꽤나 신파적인, 일일 드라마 가족극에 충실한, 복고 취향의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각하는 (기업)프렌들리'가 아니라 (가업)페밀리'적이다. 아마도 이명박이 욕심을 부려서 정권을 5년 더 연장했다면 오빠, 언니, 누나, 여동생은 물론이고 당숙에 당숙 조카의 재발견 시리즈'가 미친듯이 이어졌을 것이다. ( 아, 잡담은 집어치우자 ! 아빠는 사형을 당하고, 엄마는 집을 나갔는데 잡담이 웬 말인가. )

 

 

현상'이란 결핍'의 결과이다. 영화 < 배트맨 > 에서 고담 시민들이 초인적 영웅'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초인적 영웅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병든 고담 시티'를 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간절히 원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건강한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 없이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지 않던가 ? 그것이 진정한 지방자치요, 풀뿌리 정치'이다. 건강한 사람의 면역 기능처럼 말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다고 펑펑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 가족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결핍의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호명해야 한다. 그래서 다 큰 어른들이 엄마와 아빠 앞에서 슬픈 동화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 가족 " 이 강박적으로 호명되는 현상은 징조가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마치 휴머니티의 복원이라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한 섬세한 증후'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이 아니라 빨간 신호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당 환자'가 급히 초콜릿'을 찾는 이치와 비슷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행기를 뉴욕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면 콘돔은 많이 팔린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재난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맞는 말이다. 가족 서사'가 강조된다는 것은 재난이 발생할 때이다. 헐리웃 모든 재난영화는 사실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는 가족영화이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된다는 것은 이미 위기에 봉착했거나 위기일발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처럼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위기의 증후'인 것이다.

 

 

< 7번 방의 선물 > 에서 용구'는 바보'로 나온다. 착하고 착한 우리 용구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딸. 하지만 용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아, 시발 ! 이 지점에서는 동네 굴다리 아래 컨테이너'에 살던 해병전우회 마초들도 눈물을 흘리고, 어버이 연합 가스통 할배'들도 눈물을 쏟는다. 안경을 고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눈물을 훔친다.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눈물뿐이로구나. 아, 아아아. 보아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성애냐. 그런데 이 슬픔'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멜랑꾸리'하기는 한데 뭔가 야리꾸리'하다. 대한민국 사람은 바보'가 나오는 영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 포레스트 검프 > 는 워낙 세계적인 흥행작이니 그렇다고 쳐도, 숀 펜이 나온 < 아이 엠 샘 > 은 수입사마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었다. 본토에서는 별 볼 일 없어서 천대를 받던 영화가 한국에 오면서 대박을 친 것이다. 바보 코드는 먹힌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맨발의 기봉이는 어떤가 ? 백만불짜리 다리'를 외치던 조승우는 ? 영구의 원조인 < 여로 > 는 ?

 

 

한국인은 바보가 어눌하게 말하면 감동하고, 일반인이 잘못을 또박또박 지적하면 화를 낸다. 하지만 무조건 바보'에게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착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 사람이 착하기만 하면 못 써 ! 독한 구석이 있어야 돼... "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바보는 백치일 만큼 착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착할수록 눈물은 곱하기'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불쾌한 이유는 바보'나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 때문이다. 리퀘스트 방송은 집요하게 마음씨 착한 장애인'을 부각시킨다. 아파도 엄마 마음 아플까 봐서 내색도 못하는 자녀의 깊은 성정'을 나레이터는 앵무새처럼 읽는다.

 

 

이 지점에서 반대로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질 고약한 장애인은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일까 ? 만약에 둘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의 열매를 주어야 할까 ? 사람들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착한 장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지의 기본이다. 성질 고약한 장애인 대신 착한 장애인에게 기부하는 행위'가 당연하다고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편애는 장애인 주제에 성격마저 고약하네, 라는 태도가 은연 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시대가 지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어쩌면 각하'야말로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셀프 무비-바디'였다. 국민 대다수인 에브리바디를 혼자서 웃기고 울렸으니깐 말이다. 코미디 정권이라기보다는 신파 정권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 같다. 이명박 시대의 서사가 어머니 신파라면, 박근혜는 시대는 아버지 신파'로 첫 번째 문장을 찍었다. 나는 그녀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동안 아버지 신드롬'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란 시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공하길 바란다. 진심이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캄캄한 어둠뿐이란 사실을 잘 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글 속에 늘 작은 반전을 숨겨두고는 했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서평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는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

자기계발서의 경우는 한 권만 읽으면 읽지 않은 천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목만 바뀌었지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디테일이 중요하다 > 란 책과 < 사소한 것에 목숨 걸자 >라는 책이 있다.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자기계발서(들) 같지만 사실은 디테일과 사소한 것은 같은 말이다. 일처리가 꼼꼼해야 된다는 주문 아닌가 ? <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경영 철학 > 이란 책은 어떤가 ? 자상함이란 키워드는 결국 꼼꼼하다는 뜻이다. < 중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인간이다 > 이라는 책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전혀 읽지 않는 이유이다. 만약에 자기계발서'를 백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놈은 멍청한 놈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으나 그 책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도 읽지 않은 책이다 !! 내가 이 글에 숨겨둔 반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피에르 바야르의 책마저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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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린 무기를 찾아서

 

 

 

 

 

 

 

 

 

 

 

 

 

영화사를 써내려갈 때 우리는 대부분 세계 3대 영화제를 중심으로 한 걸작의 목록을 훑는다. 하지만 로빈 우드는 <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 에서 7,80년대 미국 영화사'를 B급 싸구려 오락 영화 중심으로 풀어낸다. 대중의 욕망을 읽는 것이다. 로빈 우드가 보기에 레이건은 대중 마초의 상징적 존재였다. 수잔 재퍼드의 < 하드바디 > 도 같은 맥락으로 70년대 스타워즈'를 분석한다. 착한 사람의 손에 든 권총은 안전하지만 악당의 손에 든 권총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유포한다. 뻔뻔한 논리이다. 이와 함께 하워드 진의 < 오만한 제국 > 을 읽으면 당신은 그때부터 쌍욕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추악한 제국을 향한 꼿꼿한 지식인의 고백이 꽤 우렁차다.

 


 

 

 

Star Wars by Leon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동시상영관을 들락날락거렸다. 당시 내가 버스를 타고 활동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극장만 해도 그 수'가 많았다. 버스를 탄다고 해봐야 모두 은평구 안'이었다. 나열하면 이렇다 : 1. 홍제극장 2. 도원극장 3. 신양극장 4. 양지극장 5. 수색 극장 ! 과장해서 말하자면 은평구에 있는 극장 수는 교회의 수'보다는 적었지만 성직자다운 진짜 목사의 수'보다는 많았다. 은평구는 극장이 먹여살렸어, 야호 ! 당시의 동시상영관은 1+ 1 시스템이었다. 메인 영화 한 편에 보너스로 한 편의 영화'를 더 보여주는 식이었다. 관람 비용도 저렴해서 점심값이면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주말이 되면 10편의 영화가 새롭게 선보였다. 물론 이중에는 서로 겹치는 영화도 있었으나 메인 영화의 경우는 모두 달랐다. 굳이 종로에 있는 개봉관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돌고 돌아서 계절이 두 번 바뀌면 종로에 걸렸던 불후의 명작은 다시 동네 변두리 극장에서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부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 영화 " 라는 이름을 가진 창녀의 슬픈 운명과 비슷했다. 한참 젊고 아름다울 때는 588에서 제값 받다가 늙고 병들면 철원 변두리 티켓 다방으로 팔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영화 씨는 온힘을 다해서 자신의 예술 혼을 빛냈다. 가끔은 필름이 끊기고 몸은 온통 스크래치로 더렵혀졌지만 그래도 변두리 헐리웃 키드인 나에게는 위대했다. 그땐, 몰랐다. 섹스가 영화보다 재미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 당시엔 영화가 제일 재미있는 쾌락이었다. 당신이 그 사실을 알랑가 모르것다. 하지만 헐리웃과의 허니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맑스의 < 자본론 > 은 자본주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영화는 가짜다, 더군다나 헐리웃 영화는 진짜 가짜다 ! " 이 글은 한때 헐리웃 키드였던 자의 헐리웃 배신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헐리웃 영화는 뻔뻔하다. 전설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트 시리즈'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 치명적 물건' >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 스타워즈 ] 에서는 " 데스스타 " 라는 이름의 치명적 물건'이 등장한다. [ 인디아나존스 ]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시리즈마다 보물이 등장하는데 보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압솔루트 파워'다. 1편인 레이더스'에서는 성궤'가 그 치명적 물건이다. 이 물건 또한 악의 차지'가 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친다는 줄거리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 반지의 제왕 '] 은 어떤가.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하나다. 치명적인 물건'을 악이 소유하게 되면 치명적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치명적 물건은 착한 집단이 보관해야지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여기서의 착한 집단은 누구인가 ? 백인이다, 해리슨 포드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앵글로색슨 혈통이다. 결국은 이들이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한편 웅이네 가족은.... ( 천일염보다 저렴한 나트륨에 중독된 어리석은 백성으로 인하야, 한반도 각하 정권이 탄생하게 되는데....... 과연 한반도 은하제국의 운명은 ! )

 

 

여기에는 교묘한 제국의 우생학이 자리'를 잡는다. " 이눔아, 내가 니 애비여 ! " 라는 인류 최대의 유행어'로 먼 나라 이웃 나라 한국에서 엘티이 와프 광고'를 땄던 다스베이더'는 자세히 보면 유색인종을 형상화한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낮은 코,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다스베이더와 킹콩의 모습이 닮았다는 점은 과연 우연일까 ? 킹콩은 명백한 아프리칸 흑인의 은유가 아니었던가. 치명적 물건이 이들 유색인종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치명적 무기가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반복하는 서사의 핵심은 무엇일까 ? 팍스아메리카'다.

 

 

여기서 치명적 물건'을 핵무기'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 핵 정책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잣대'가 고스란히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적용된다.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동안 미 군사 전략가나 외교 통상부 혹은 정치평론가들이 하도 잰 체하며 핵 정책에 대해 설레발을 쳐서 그렇지 핵심은 이거다. " 에헴 ! 핵은 위험한 물건이오.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가면 뭔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우리 같은 신사들이 보관하겠수다. " 여기서 질 나쁜 양아치는 김정은'이다. 보안관의 손에 든 총은 치안이지만 정은이의 손에 총이 주어지면 위험하다는 논리이다. 놀라지 마시라.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만 개에 육박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미국인은 보안관이고 나머지는 악당이다. 세상에 이런 논리가 어디 있나.

 

 

이러한 억지 주장을 우리는 헐리웃 영화에 의해 세뇌'를 당한다. 관람자인 우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이 치명적 무기는 미국인이 보관해야 안전하다는 믿음을 배운다. ( 적어도 이 무기는 엘티이 와프 모델이 손아귀에 쥐면 안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고작 이런 엉터리 세뇌를 받으려고 돈 내고 영화를 본 것인가 ? 미국인이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이유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천일염보다 저렴한 나트륨에 중독된 대한민국만 보아도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미국 역사 교과서는 담을 것이 없다. 우리가 박혁거세 신화를 거들먹거릴 때, 그들은 몇 백 년 전에 서부 개척 시대를 미국의 원년으로 소개하는 수준에 그친다. 정통성 없는 뼈대 없는 멸치 가문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처럼 비천하니 그들은 역사'를 미래로 틀어버리는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것이 바로 스타워즈'다. 미래가 배경이지만 사실은 미국의 건국신화이다. 우리가 새 알에서 깨어나고, 곰이 마늘 먹고, 막, 막막 삼켜서 힘들게 인간이 될 때, 미국인은 광선검에 최첨단으로 꾸며진 우주선 안에서 개국 신화'를 연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며 미국을 동경했다. 속은 것이다. 깨끗하게 속은 것이다. 재미있으면 장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극우적 메시지'이다. 레이건이 괜히 스타워즈'에 열광한 것이 아니다. 부시는 어떤가. 노골적으로 스타워즈의 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시가 벌인 전쟁의 명분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치명적 무기'를 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의 땅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시는 말했다. " 음마... 이 산이 그 산이 아닌갑소 ! " 이 전쟁으로 인하여 그 무수한 아이들이 죽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이 산 저 산 한계령 타령이다. 그가 찾고자 했던 살상 무기'는 [ 레이더스 ] 에 나오는 잃어버린 성궤'를 닮았다. 고로 부시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재앙이 몰아닥친다는 망상으로 열심히 채찍을 휘두르며 성궤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나는 해리슨 포드'를 닮았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의 보안관이라고 말했으나 한갓 전쟁광에 지나지 않는다. 총은 악당이 가지고 있을 때에만 위험한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건/gun'은 bad man이건 good man이건 똑같이 위험한 무기이다.

 

 

 

 

 

 

+

요즘 " 씐나 ~ " 라는 표기가 자주 보여서 뭔가 하고 조사했더니 < 신나다 >를 SNS 식 용어로 " 씐나 " 라고 하는 모양이더라. 갑자기 열받았다. 적어도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표기법의 원조는 바로 나다. 나는 그동안 V를 < 븨 > 로 썼기 때문이다. 티브이'는 반드시 티븨'로 표기했고, 태권 브이도 태권 븨'로 썼고 브이 티 알은 븨티알'로 표기했다. 뿐만 아니라 < 희한하다 > 에서 ㅎ 이 연속 세 개'가 나열되어서, 진정으로 희한한 단어'임을 과학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앞으로는 씐나'보다는 븨'를 더 많이 애용해 주시기 바란다. 씐'은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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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영화를 위한 새빨간 다이알로그

 

 

 

 

 

 

 

 

 

 

 

 

 

 

홍상수의 14번째 영화 < 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을 보다가 묘한 기시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준상과 예지원'이 나누는 대화'에서다. 그들은 안개 낀 남한산성'을 오르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본다. 예지원이 그 깃발을 바라보며 말한다. " 깃발이 얼마나 멋진 발명품이야, 이게 있으니 바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 명대사'다. 깃발은 사람이 바람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발명품이란다. " 멋지다, 홍상수 ! "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대사에 대한 묘한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었을까, 아니면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 에 나오는 문장이었을까 ? 의문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엘리어스 카네티의 < 군중과 권력 > 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 깃발은 보여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바람이다. 깃발은 구름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과 같은 것이다. 다만 구름보다 더 가깝고 색깔이 요란한 뿐이다. 그리고 깃발은 한곳에 매어져 있고, 그 형태도 언제나나 일정하다. 정말 그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될 때는 그것이 펄럭일 때이다. 여러 민족들은 마치 그들이 바람을 쪼개기라도 할 수 있듯이 그들 머리 위의 대기를 자기의 것을 규정짓기 위해서 깃발을 이용하는 것이다.  

 

- 군중과 권력 中

 

우연일까 ? 홍상수는 이 책을 과연 읽었을까 ?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알라딘의 기준에 따르자면 < 사회학 일반 > 으로 분류되는 이 책'은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우며, 문장은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카네티가 소설가이면서 시인이었고, 극작가였으며, 인류학자 그리고 사회과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은 풀린다. (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상가였다. ) 이러한 전방위적 재능'을 나는 아름다운 짬뽕이라 부르고 싶다. 프랑스에 롤랑 바르트가 있다면, 독일에는 엘리어스 카네티'가 있다. < 군중과 권력 > 은 독일판 < 텍스트의 즐거움 > 이라 할 만하다.

 

 

+  해원이 도서관에서 읽고 있는 책은 엘리아스의 <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이다.

 

 

 


 

 

 

1.

 

내가 옛날에 시나리오 속에 꿈 장면을 자주 집어넣었더니 누가 그러더군. 꿈은 레이몬드 챈들러'가 말하는 총잡이와 비슷하다고 말이야.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챈들러가 건들건들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 소설이 막힌다 싶으면 느닷없이 총잡이 등장시켜서 총 쏘고 사라지라구 ! " 꿈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막히면 그냥 꿈 장면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아마츄어나 하는 짓이라고 ! 챈들러 같은 거장이니깐 느닷없는 총잡이 타령이 먹히는 거지. 좆밥들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야. 정말 맞는 말이다. 꿈 장면이란 적재적소에 등장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냥 궁여지책으로 꿈이 등장하면 나쁜 효과만 초래해.

 

 

홍상수 영화를 보면 말이야. 꿈이 자주 등장하잖아. 작법의 정석대로 보자면 홍상수 시나리오는 빵점에 가깝지만 홍상수니깐 가능한 거야. 챈들러니깐 가능한 것처럼 말이지. 임재범의 삑사리'는 임재범이니깐 용서가 되는 거야. 개인적인 취향을 전제로 깔자면... 홍상수의 최고 걸작'은 [ 옥희의 영화 ]이거나 [ 북촌방향 ]이 될 거야. 세련된 맛으로 치자면 [ 북촌방향 ] 에 한 표를 던지겠어. 개인적으로 흑백 화면을 좋아하거든. 단지 그 이유야. 요즘은 애들이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진 것 같아. 홍상수 하면 온통 차이와 반복 그리고 변주'를 이야기하더군. 좀 배웠다 하는 놈들은 들뢰즈와 데리다'를 거론하기도 하지.

 

 

또 어떤 놈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거론하며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해. 모두 맞는 말이야. 어차피 텍스트란 수용자의 몫이니깐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들의 글에서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글을 어렵게 쓴다는 점이야. 차이, 반복, 변주, 원본 없는 복제의 용어를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나랏말쌈이 어려워서, 서로 사맛디 아니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 이에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맹가노니 7일째 되는 날 보기에 좋으셨던 거지.

 

 

내가 보기엔 홍상수 영화의 근작'들은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 효성 깊은 나뭇꾼은 한시 바삐 고개를 넘으려고 하지,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잖아. 사람들이 나뭇꾼을 말리지. 그 산은 밤에 귀신이 나온다고 말이야. 하지만 효심 깊은 나뭇꾼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나. 곧 산길은 어둠에 젖어들고.... 그런데 말이야. 가도 가도 계속 첩첩산중'이야. 아이구야, 갈 길 먼데 똥줄이 타지. 보다 빠른 종종 걸음으로 걸어도 상황은 벗어나질 못해. 나뭇꾼은 지쳐서 소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다가 깨닫게 되지. 저 소나무를 열 번 넘게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깐 나뭇꾼은 제자리를 계속 돌고 있었던 거야 !

 

 

홍상수 영화는 바로 < 귀신들린 숲 > 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 북촌 방향 ] 에서의 북촌'은 일종의 " 귀신들린 골목 " 이야. 왔던 길을 계속 다시 오게 돼. 하지만 유준상은 자신이 왔던 길이라는 것을 잘 몰라. 귀신이 괜히 귀신이겠어. 홀리면 끝장 ! 바로 이 지점에서 반복'이 만들어지는 거야. 유준상은 귀신에 홀린 거야.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국은 북촌'으로 돌아오지. 이 기본 서사'가 반복되면 복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복제'가 재생산되면서 약간씩 변형이 이루어지면 변주가 되는 것.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나뭇꾼의 태도'를 봐. 지나친 길을 또 지나가지만 그의 태도'는 전과는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하잖아. 세 번째 반복에서는 땀을 닦고 지나가다가, 다섯 번째 반복에서는 털썩 주저앉으면서 에라이, 시부랄 ! 이라고 숨을 헐떡이거든. 이것이 바로 변주'야 !

 

 

어때, 이해하기 쉽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 나오는 서촌도 이 < 귀신들린 숲 > 과 비슷해.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일종의 특정 좌표'야. 나뭇꾼이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소나무로 돌아오듯이 해원은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좌표'로 돌아오는 것이지.

 

 

자, 이제 마무리하자. 그렇다면 홍상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을까 ? 내가 보기엔 홍상수는 시지푸스 신화의 궤적'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양이야. 사실 나뭇꾼과 시지푸스는 동일인물이야.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헛된 희망을 반복하고 있거든. 나뭇꾼은 계속 소나무 아래'로 돌아오고, 시지푸스의 바위 또한 계속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은 계속 헛된 노동에 지쳐가고 있는 중이야.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독이지. < 고도 > 는 오지 않아, 바위는 계속 구르고, 다시 소나무 아래'이지. 달라지는 건 없어.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야. [ 북촌방향 ] 에서 유준상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자신이 귀신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가 북촌 거리에서 고현정'과 만났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아, 나는 지금 귀신들린 북촌 거리를 헤매고 있었구나. 그러니깐 이 영화에서의 고현정은 소나무 같은 오브제'이지.

 

 

인간은 누구나 혼자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처럼 말이야. 혼자 이 귀신들린 산'을 빠져나와야 하고, 바위를 굴려야 하지. 존재론적 슬픔은 바로 이 고독에서 오는 것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이 미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서 해원은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읽고 있었어. The Loneliness of the Dying / 죽어가는 자의 고독. 우린 그렇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죽어가는 거야. 외롭게 말이야.

 

 

깃발은 바람을 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 아니야. 하늘을 보도록 고안된 발명품이지. 깃발을 쳐다보면 반드시 하늘을 보게 되어 있잖아.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태극기 아니겠어 ? 결국 깃발이란 가장 먼 곳을 보라는 뜻이야. 하늘보다 더 먼 곳은 없으니깐 말이야. 유치환의 < 깃발 > 이란 시가 생각나네. 후훗..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했던가 ? 나는 자꾸 저 푸른 옷을 입은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깃발로 읽혀. 무슨 뜻이냐고 ? 아이구야, 아무 의미 없어.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보진 말자구.

 

 

 

2.

 

홍상수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시니컬한 경멸은 어느 순간 인간에 대한 위로'를 품기 시작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 하고 싶은 영화를 눈치 안 보고 맘껏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홍상수가 유일할 것이다. ( 예외가 있다면 김기덕 정도 ! ) 더군다나 그의 영화라면 노 개런티'라도 불사하는 배우들이 줄을 선다. 그리고 1000만 관객 동원 시대에 10만 관객만 동원해도 나름 선방이니 홍상수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감독이다. 그러니 굳이 삐딱하게 세상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삐딱한 세상은 김기덕이 쫙 쥐고 있으니 수컷들의 쪼잔한 세상은 홍상수의 몫이다. 어떤 사람은 홍상수 영화가 항상 똑같은 상황극'이어서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하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몇 년 사이의 근작들은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홍상수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여자 만나 낮술 마시다가 모텔에서 따먹는 이야기의 무한 반복'은 그것이 바로 서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천일야화 > 에서 세헤라쟈데'는 1001일 동안 1001 개의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변주의 방식을 통해서 천 개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 수컷은 여자 만나 술 마시며 즐겁게 놀다가 모텔 가서 따먹는 서사'가 가장 스펙타클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것은 슈퍼 영웅의 몫이지, 찌질한 수컷의 서사가 아니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가 난해하다는 불만도 잘못된 지적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고도의 상징성이 압축된 형태'가 될 때 발생하게 된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상징을 풀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 상징 > 은 존재하는 것일까 ? [ 북촌방향 ] 에서 북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 다른 나라에서 ] 우산이라는 오브제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

 

 

정성일처럼 비비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 다른나라에서'의 우산은 핵 전쟁에 대한 공포에 대한 은유죠. 핵우산을 상징하는 겁니다. " 좆 까라 그래라. 박찬욱의 영화는 고도로 응축된 상징의 세계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그런 상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촌은 그냥 북촌이다. 문성근이 쏟아낸 문어'는 엘리트 먹물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이런 상징 해석을 걷어내고 볼 때 흥미진진해진다. 14번째 작품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은 [ 북촌 방향 ]의 속편 같은 소품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대신 [ 서촌 방향 ] 이라고 영화 제목을 정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 북촌 방향 ] 이 유준상의 남산 아래 북촌 유람이라면, [ 누구의 딸... ] 은 정은채의 남산 아래 서촌 유람'이다. 이래저래 생각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필요 없다.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 대상 분리 불안 장애' > 다. 홍상수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심리적 고아'다. 그들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노마드의 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 생활의 발견 ] 에서의 경주와 춘천, [ 밤과 낮 ] 에서의 프랑스, [ 북촌방향 ] 에서의 북촌은 주인공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그것은 노마드적 유람의 흔적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에서의 해원'도 제목이 말해주듯이 심리적 고아의 지위를 얻는다. 뿌리를 내린 삶이 가족의 형태라면, 뿌리없이 떠도는 노마드적 삶은 전형적인 떠돌이의 방식이다. 그래서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떠남과 도착 그리고 다시 떠남'을 반복한다. 길 위의 영화인 셈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는 매우 이상한 방식의, 한정된 로드 무비'다. 이 길'은 카프카의 출구 없는 미로이기 보다는 보르헤스의 미궁에 가깝고, 토속적인 말투를 빌리면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이다.

 

 

[ 누구의 딸... ] 에서 담배꽁초가 버려진 거리는 마치 귀신 들린 숲속 길'과 비슷하다. 나무꾼이 이 숲속을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해원 또한 담배꽁초가 버려진 그 거리로 다시 온다. 어쩌면 [ 북촌방향 ] 이후의 길들은 모두 귀신들린 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환이며 동시에 반복이다. 왔던 길을 다시 오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냥 막연한 기시감에 시달릴 뿐이다. 그것은 귀신들린 숲을 헤매는 나뭇꾼과 비슷하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뭇꾼은 자신이 왔던 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북촌방향 ]의 마지막 장면은 유준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같은 표정으로 끝난다. 나는 지금 왔던 길을 계속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지긋지긋한 허무'이다. [ 북촌방향 ] 의 주인공이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길 위에 서 있듯이, 해원은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인생이란 다람쥐 첫바퀴이고, 고상하게 말하자면 시지푸스적 궤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죄다 먹물 티'를 내니 나 또한 loneliness한 시지푸스적 존재의 고독한 궤적'이라고 쓰겠다.

 

 

해원은 엄마가 캐나다로 떠남으로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되었다. loneliness 한 해원이다. 해원은 이 분리'를 보상받기 위해서 성준과의 불륜 관계'를 다시 시작할 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 곁'> 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애착 대상'에 대한 분리 불안'을 대체할 보상 심리 욕망인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침대에서 쫒겨난 여자아이가 애착 관계인 엄마 대신 품고 자는 곰인형'과 비슷하다. 해원에게 성준은 그런 존재'다. 성준은 엄마를 대신할 곰인형이다. 하지만 해원은 다섯 살 계집애'가 아니지 않은가 ! 그녀는 사춘기가 다가오면 이제 곰인형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 커서도 쪽팔리게 곰인형을 껴안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기주봉'이다. 이제 그는 홍상수 영화의 간달프 같은 존재이다. 압도적인 인장이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으로 나와서는 항상 잽을 던지듯 툭툭 말 한 마디 던지고 간다. 마치 늙은 남자 요정 같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예지원과 유준상이 깃발을 보며 던진 대사'다. 깃발은 좋은 발명품이지. 유준상이 말한다. 예지원은 잠시 깃발을 보다가 말한다.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들어요 ! 하지만 나는 예지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바람을 보게 만드는 것은 깃발 외'에도 많다. 갈대도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고, 나뭇잎도 바람의 길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다. 왜냐하면 깃발을 보면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 이토록 시적인 심상이라니. 내가 왜 아직도 애인이 없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겠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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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 2013-06-1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여긴 댓글에도 비밀번호가 있네요. ㅋㅋ

저도 <해원>전에는 <북촌방향>이 가장 좋았어요. 시간이 뒤틀리고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 들어 홍상수의 영화가 왠지 알 수 없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귀신들린 숲'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서울 북촌, 서촌에서 벌어지는 <블레어 윗치>같기도 하고. ㅋㅋ. 점점 더 흥미로워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부코스키가 있는 이야기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세상 모든 똥구멍 !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

 

 

- 찰스부코스키, POST OFFICE

 

 

 

 

 

지상파 방송 3사 프로그램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경멸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 생활의달인 > 이다. 일종의 < 육체 노동 만만세 !> 전파 방송이다. 자전거 짐칸에 탑처럼 상자를 쌓고 달리기, 뚝배기가 담긴 쟁반을7층 다보탑 높이로 쌓아 머리에 이고 배달하기 그리고 중국 음식을 최단 시간 안에 배달하는 배달의 기수들이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최단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혼자서 3명 몫을 한다. , . 멋지다. 그들의 팔과 다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단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인다. , ! 멋지다, 신난다, 태권 븨이만만세 !( 지랄한다. )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들 달인의 묘기에 가까운 일 처리 기술은 <대한민국 빨리빨리 > 가 낳은 기형적인 안전불감증처럼 보였다. 자전거 짐칸에 짐을 탑처럼 쌓고 달리는 묘기는 전형적인 과적이 아닐까 ?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짐칸에 적당한 양의 짐을 싣고 달려야 한다고 지적해야 하는 것이 방송의 의무가 아닐까 ?무엇이 그를 위험한 질주로 내몰게 하는 것일까.배달 음식을 최단 시간 안에 배달하는 오토바이 배달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면발이 불기 전에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질주를 감행한다. 그들은 200만 원 남짓한 돈벌이를 위해서 한겨울 얼음 빙판길을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이다. 돌아오는 것은 골병이다.

 

 

 

이처럼 힘든 노동 서사는 곧 가족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 알고 보니, 그 노동자의 힘든 노동은 가족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 한몸다 바쳐서 >. , 꽃을 태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열꽃. 이제 노동의 의미는 숭고한 자기 희생과 겹친다. 파토스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진기명기에 신기하다며 박장대소하다가 시청자는 가밪기 숭고한 감동을 느낀다.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손은 어느새 아버지의 손으로 바뀐다. 문제 제기는 지금부터다.

 

 

왜 주류 사회는 노동의 날 것 그대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을 금지시킬까 ? 한나라-어버이-연합-수구-꼴통-꼰대-사회이며 북파 공작원 및 해병 전우회애국 사랑 실천 마초 연대 주류는 노동자 아버지의 손은 숭고한 것으로 각인시키면서 정작 노동자 손은 다루지 않는다. < 노동자 아버지 손 > 에서 아버지가 빠지면 갑자기 숭고에서 종북 좌파로 빠진다. ( 지랄이 흉년이다. )

 

 

 

인간의 본성은 개미보다는 베짱이에 가깝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다가가면 노동은 숭고하거나 신성한 것이기보다는 귀찮은 것에 가까웠고, 오히려 숭고한 대상은 놀이와 축제였다. 그것이 노동과 놀이의 맨 얼굴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면서< 생산성 > 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자 주인은 노예에게 노동의 가치를 과대포장해서 세뇌시키기 시작했다. “ 노동은 제주산 활 고등어에요. 신성해요, 신선해요, 싱싱해요 !고로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신성한 존재에요. 게으른 노동자는 죄인이지만 성실한 노동자는 영웅이에요. 깔깔깔. “ 조삼모사요, 눈 가리고 아웅산 수지 다음은 분당 아래 한나라당. 황당무계다. 노동이 형편 없다는 말이 아니다. 노동이란 가치를 미화하지 않고 폄하하지도 않을 때 비로소<노동의 날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 오래된 집단 최면술은 지금까지도 대대손손 내려와서 노예를 바보로 만든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노예다. 속이는 놈도 나쁜 놈이지만 속는 놈도 병신이다. 남들보다 열심히 일해서 이 정도나마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 전에,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적, 계급적, 계층적 모순에 대한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 ?

 

 

 

겉으로 보기엔 < 생활의 달인 > 은 민중 노동 예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주류 기득권 사회인< >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 이 고된 노동 시간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없이 무조건 수긍할수록 입이 째지는 놈 < > 이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짐칸에 짐을 잔뜩 싣고 달리는묘기에 주목하지 말고 과도한 노동 잔혹사에 주목해야 한다. 혼자서 3명 몫의 노동 생산량을 생산해야지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는 점은 육체 노동의 가치가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징한 징후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생활의 달인 > 을 생활 밀착형 다큐로 읽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마 당신은 이 프로를 보며 고생하는 부모 생각에 가슴 찡한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유보하라. 감정이 앞을 가리면 진실을 보지 못하니깐. 소수의 <>이 다수의 <>을 속일 때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 < 가족 휴머니티’> 이다. 슬퍼서 눈물이 앞을 가리면, 말 그대로 정말 보이는 게 없으므로,쪽팔리게 이런 가짜 서사에 울지 마라. 당신이 현명하다면...... 갑돌이 새끼들이 뿌려대는 최루탄에 속지 말도록.

 

 

 

< 생활의 달인 > 을 보느니, 차라리 < 포르노 >를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것이 더 정신 건강에 좋다. 적어도 포르노는 나에게 < G스팟 공략 기술 > 과 클리토리스를 통증 없이 다루는 방식을 가르쳐주었으며, D컵 젖가슴의 황홀한 탄성력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던가 ?누워도 펑퍼짐하게 퍼지지 않는 젖가슴이란 ! , 싱싱한 계란 후라이를 보는 듯해 ! 흰자위는 퍼져도 노른 자위는 퍼지지 않는 그 탄력말이시. 침대에 누워도 퍼지지 않는 노른자위는 정말 아름다웠어.

 

 

 

찰스부코스키의 장편소설 < 우체국 >은 반 노동 소설이다. 노동 찬양 소설은 수없이 봤어도 반 노동 찬양 소설은 본 적이 없으리라. 당연하다. 왜냐하면 반 노동 찬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노동 찬양의 대표적 텍스트가 성경인데 (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 ) 사실 이 말은 종교와 국가가 결탁해서 만들어낸 쉰소리에 가깝다. 예수는 끊임없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공격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 빈둥거리는 예수 > 였다. 일은 하지 않고 선동질만 한다는 비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라는 교회 목사의 말은 뻥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자본가 갑의 편이다.

 

 

 

히틀러도 파시스트이기에 앞서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간이었다.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한 가지.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최대 희생자는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날조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유대인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집단은 집시와 장애인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히틀러는 인간을 생산의 주체로 판단했다. 그는 베짱이처럼 놀고 먹는 떠돌이 집시와 몸이 병신이어서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을 생산 신화의 불량품으로 판단했고 그런 그들을 지독하게 경멸했다. 그는 그들을 생산성이 떨어지는 집단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유대인보다 몇 배나 많은 희생자가 살해되었다. 히틀러는 철처한 자본가 개새끼였다.

 

 

 

그동안 현대 모더니즘 소설이 실존주의와 도덕적 옮바름을 이야기하며 노동의 순수한 가치를 찬양하며 잘난 척할 때, 부코스키는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쳐들며 반기를 들었다. 그가 보기엔 그들의 주장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부코스키의 소설 < 우체국 > 은 우리가 그동안 접했던잘난 양반들이 꼴사납게 쓴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 우편배달부 츠나스키는 도덕적 옮바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는

 

 

 

그냥..... 꼴리는 대로 사는 양반이다. 하루 종일 섹스하고, 놀고, 노름하고, 술에 취해 사는 삶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는 노동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그의 소설은 노동가 예찬이다. 역설적이게도 반 자본주의 소설이다. 문장 또한 어찌나 외설스러운지 여성에 대한 묘사는 가히 성희롱 수준이다. 젖퉁과커다란 엉덩이라는 낱말이 따발총처럼 쏟아진다. 아이구, 시끄럽구랴. 그런데

 

 

 

놀라운 점은 책을 덮고 나면 묘하게 슬픔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우편배달부 츠나스키는 한심한 마초이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에게 동화된다. 당혹스럽다. 그는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웅도 아니며 선량한 사람도 아니지만 바로 그 점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왜냐하면 그 소설을 읽는 당신 또한 특별히 악당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량한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 그의 노동하지 않는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슬프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 스스로가 하층 노동자 계급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다. 노동의 강도가 육체를 제압할 때, 우리는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그것은 불경한 것이 아니다.

 

 

 

소설은 재미있다.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존나>재밌다 ! 재미만 있나 ?! 그렇지 않다. 작품도 좋다. 농담과 음담패설이 쉴 새 없이 쏟아지지만 천박하지 않다. 고상하지도 않다. 고상한 척은 부코스키의친척이 아니다. 차라리 적이다. 그의 소설은 자극적이면서 동시에 담백하다. 믿기지 않지만 정말 그렇다. 그리고 전복적이며 도발적이며 웃기고 슬프다. 그것이 그의 소설의 장점이다. , 아아아아. 그의 소설, 정말 좋다 !시부럴, 색정광 찰스부코스키 할아버지 만만세 !

 

 

환갑이 지났어도 강철보다 단단한 딱딱한 ( 태권븨이처럼 곧게 뻗은 팔처럼 휘지 않은 ) 페니스의 일직선을 간직하셨던 스테미너찰스. 그리고 경마 도박광부코스키 할아버지 만만세 ! 술고래 부코스키, 뿜빠라뿜빠뿜빠바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 병 대신 그에게 위스키술병을 ! 놓지면 후회하는 소설이 있고, 읽지 않아도 후회되지 않는 소설이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읽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소설이다. 헤르만헤세와앙드레 말로가 지겨울 때,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 읽으면 눈에 번쩍 뜨이는 좋은 소설이다.

 

 

 

 

***

 

조이스는 마침내 달팽이를 삼켰다. 그러더니 접시에 담긴 다른 것들도 천천히 살폈다.

- 모두 작은 똥구멍이 달렸어 !끔찍해 !끔찍하다고 !

-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하나 사봐. 거기도 똥구멍은 달렸어 ! 지구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으로 가득 찼어. 대통령도 똥구멍이 있고, 세차장 직원들도 똥구멍이 있어. 판사들도 살인자들도 똥구멍이 있다고. 심지어 자주색 넥타이핀 남자도 똥구멍이 있어 !

- ,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

그녀는 다시 구역질을 했다. 미친년. 나는 사케를 따서 한 잔 마셨다.

 

 

-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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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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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3-05-1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을 제 글과 이어주셔서 순식간에 제 글이 오징어가 되어버렸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3-05-14 06:18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왜 그러십니까...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것 같군요. 방긍 아까운 책'시리즈인가요. 고거 주문하고 오는 길입니다.... 정말 부코스키 형님이 대박나셨으면...
 

 

 

 

 

삑사리의 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 고은, 그 꽃

 

시인 고은은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갈 때 보게 된다. 내려갈 때도 보고 올라갈 때도 보게 되는 < 꽃 > 은 결코 시적 대상이 될 수 없다. “ 내려갈 때 보고 / 올라갈 때도 보았네 / 그 꽃 “ 은 이미 죽은 꽃이다. 당신 심중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겠는가? 김영하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 텔레토비 > 지 < 그 꽃 > 이 아니다.

 

 

 

비극과 희극의 공통점은 바로 어긋남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될 때 비극적 멜로는 탄생한다. 코미디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이 어긋날 때 웃음은 꽃처럼 터진다.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 생활의 발견 > 은 엇박자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가난한 연인들은 삼겹살집에서 “ 우리 헤어져 ! “ 라고 말한다. 이별은 슬픈 서사다. 하지만 이 슬픈 서사를 웃기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왕성한 식욕이다. 배터지게 먹으면서 이별을 선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엇박자다. 나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 결별이 아무리 뼈아픈

 

 

 

통증이라 해도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것 또한 뼈아픈 통증이 아닌가 ! 여자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허겁지겁 닭다리 하나를 뜯다가 웃은 적이 있다. 아, 씨발..... 이 더러운 식욕 ! 경제를 이야기하는데 파리가 앉은 것처럼, 결별을 이야기하는데 닭다리를 뜯다니. 아, 씨발..... 이 더러운 식욕 ! 이처럼 비극과 희극은 유사하다. 조용필이 노래한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가사가 괜히 나온 가사가 아니다. 비와 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밖으로는 민주번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태어난 형제자매다.

 

 

 

고은의 간결한 시’가 시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엇박자’가 주는 팽팽한 긴장감 때문이다. 여기서 오르는 행위 / 올라갈 때’는 탐욕으로, 내려가는 행위 / 내려갈 때’는 내려놓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정말 병신 쪼다 같은 해법이다. 욕심 없이 다 내려놓고 세상을 보니 꽃이 보이더라, 라는 깊은 산속 옹달샘 주지 스님 같은 말투는 개나 줘라. 시를 꼭 그런 식의 방정식으로 풀어야 맛인가 ? 그런 해법 없이도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읽힌다. 이 시는 아름답다.

 

 

 

그런데 이런 성취에 도전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패러디’다. 패러디’란 원본의 아우라에 대한 성취와 권력에 대한 도전 정신이다. 일종의 꼼수’다. 고은의 시를 패러디하면 이렇다. “ 내려갈 때 보지 못했네 / 올라갈 때 꺾은 / 그 꽃 “ 제목은 < 입산 금지’ > 다. 당연히 올라갈 때 꺾었으니 내려갈 때 볼 수가 없다. 좀더 심하게 꺾어 보자.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놈

 

 

 

꽃 대신 놈’이 자리를 차지했다. 고은의 시를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장면이다. 단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확 다르다. 여기서 말한 그 놈은 누구일까 ? 비장의 무기는 바로 제목에 있다. 이 패러디 시의 제목은 < 내 남편의 도봉산 불륜기 > 다. 여기서 그 놈은 바로 내 남편이다. 아내는 주말에도 잔업 때문에 출근한다던 남편을 도봉산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것이다. 더군다나 1301호 여자와 함께. 노스페이스 위아래 깔맞춤으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등산 장비를 착용하고, 두 손 꼭 잡고 앞으로 앞으로 !

 

 

 

< 내 남편의 도봉산 불륜기 > 가 재미있는 이유 또한 뒤통수를 치는 반전과 어긋남의 서사 때문이다. 남편은 회사에 있어야 하는데 도봉산에 있는 것이다. 아, 삑사리 ! 그렇다. 서사의 힘은 엇박자’에 있다. 비극의 힘도 엇박자요, 희극의 힘도 엇박자다. 시도 마찬가지다. 뻔한 시구는 뻔뻔하다. “ 외로운 기러기 한 마리 “ 라고 쓰는 것보다 차라리 “ 속이 쓰려 겔포스 먹는 기러기 “ 가 더 시적이다. 긴장감은 바로 이러한 삑사리에 있는 것이다.

 

 

 

오, 이토록 강력한 삑사리의 힘 !


 


 

http://myperu.blog.me/20127455827 - 삑사리의 대표적 서사, 멜로.

http://myperu.blog.me/20127508076 - 이 시대, 당신은 갑인가 아니면 을인가 ?

http://myperu.blog.me/20080894121 - 새롭게 보는 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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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peru.blog.me/20123242505 - 엄마 아빠들이 즐기는 야간 2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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