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도련님을 미워했을까 ?









내 생각의 버릇 중 하나는 반대말 연상이다. 예를 들면 < 그녀 > 라는 낱말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 여러분도 함께 고민할 문제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서둘러 말하자면 그녀의 반대말은 < 그 > 가 아니다. 왜냐하면 < 그 > 라는 지시어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통칭해서 아우르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 여교수(여교사) > 라는 낱말의 반대말도 없다. 사전에 남교수(남교사)라는 낱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그렇다면 특정 성별을 콕 짚어서 구별 짓는 욕망은 특정된 성에 대한 우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 알면서 ! 이런 식으로 확장을 하다 보면 속담에 이르게 된다. 내 눈에 포획된 속담은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 이다. 이 속담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 때리는 아버지보다 말리는 남동생이 더 밉다 " 는 없을까 _ 라는 의문이었다. 성별 분포로 보았을 때 폭력을 행사하는 쪽은 여성보다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 말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_ 라는 속담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이었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적은 이라이자이고 달려라 하니의 적은 나애리'다. 나애리, 이 나쁜 계집애 ~  그렇다면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프레임은 작동이 되고 있을까 ?  금시초문이다. 남자는 주로 여자 잘못 만나서 망하는 캐릭터'다. 남자나 여자나 그 적은 여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 악녀 > 라는 단어는 있어도 < 악남 > 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이다(악당은 남성을 지시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 낱말은 특정 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만 보아도 이 프레임은 명약관화하다. 드라마 시청자가 주인공인 아내 몰래 바람피우는 남편보다 더 미워하는 쪽은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 년이다. 나애리, 이 나쁜 계집애 ~  


이처럼 한국 드라마에서 시누이는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해서 시청자 염통을 갈기갈기 찢는다. 이 전략은 무엇을 목적으로 한 계략일까 ? 자, 이제부터 레벨을 조금 더 높여보자. 만약에 이건희가 당신을 무식한 놈이라고 무시한다면 당신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 것이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씩씩거릴 일도 아니다. 그냥 속으로 조까라마이싱이다, 시바 ! 그런데 이웃집 여자와 싸우는데 남편이 자기 편을 들 생각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면 어떤가 ? 아내 입장에서 남편의 무시는 평생 한으로 남을 무시이다. 


그것이 바로 < 수직적 무시 > 와 < 수평적 무시 > 의 차이'이다. 세계사를 놓고 보았을 때, 빈부격차가 심하고 권력을 특정 소수가 장악을 하게 되면 반드시 폭동이 일어났고 혁명이 발생했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무시를 당할지언정 같은 계급인 소작농 이웃에게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같은 계급 내에서 공동체의 원한 감정이 발생하고 이것이 힘이 되어 상부를 향한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수직적 무시보다 수평적 무시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무시하고 여자가 여자를 무시하다 보니 단결된 힘을 과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시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주민이어도 40평 아파트 입주민은 20평 아파트 입주민을 무시한다. 이처럼 같은 계급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니 공동체는 분열되고 계급투표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기득권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계급의 분열만큼 효과적인 갈라치기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부장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 연대이기에 가부장의 망령은 항상 내부의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 여자의 적은 여자 > 라는 프레임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문장이 바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_ 라는 프레임 전략'이다(라고 나는 과감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회초리를 들고 폭력을 행사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에게 더 많은 원한을 투사하는 며느리의 심리는 시어머니는 수직적 무시에 해당되지만 시누이는 수평적 무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그래도 뜯어말리는 시누이가 그나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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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옷 입은 개

그는 술 한 잔 들어가면 여성 편력을 자랑삼아 몇 시간 동안 주절거리는 카사노바'다. 몸에 좋다는 보양식은 먼길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 건강을 챙기는 인물이다. 그는 섹스를 할 때 콘돔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콘돔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주의'다. 촉감이야말로 섹스의 환희인데 고무 라텍스 끼우고 섹스를 하다니요. 내가 그에게 노-콘돔 섹스로 인해 상대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적 없냐고 묻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단호한 어투로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운동 신경을 너무 무시한다나 ?  그런 그는 작은 개 한 마리를 키우는데 개에게 항상 예쁜 옷을 입힌다. 그 정도면 꽃단장'이다. 그가 사진을 보여주며 귀엽죠 _ 라고 묻자 일동 귀여워 !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아마 그 개는 콘돔 낀 자지 같은 기분일 거야 ! " 짐승이 바람 부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스쳐가는 바람이 털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미학적 관점에서 개에게 예쁜 옷을 입히다 보면 좋은 촉감이 차단된다. 과연 그것이 짐승 입장에서 좋을까 ?  추운 겨울, 혹한에 털 없는 개를 산책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개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동물 학대'다. 개의 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코트이다. 노벨상 수상자 콘라드 로렌츠는 동물을 " 의인화 " 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 또한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2 장 애 인

옛날에 애인과 술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 갑분싸 " 한 적이 있다. 내가 패럴림픽은 없어져야 할 운동 대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올림픽과 패럴림픽 모두 없어져야 할 스포츠 이벤트'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때 애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차별주의자 취급을 했다. 그 시절에 일베가 있었다면 일베 보듯 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옛 애인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비난하는 이웃이 있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장애와 싸워 이기는, 인간 승리를 다룬 장애인 올림픽 대회를 볼 때마다 거부감이 든다.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 장면을 통해 얻게 되는 비장애인의 감동은 어딘지 모르게 천박한 구석이 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삶의 의미 따위를 부여하기 위해 소비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장애와 싸워서 이긴 인간 승리의 서사를 찬양하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_ 라고 말한 후 사지 멀쩡한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명사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정말 좆같은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장애는 장애를 극복해야지만 비로소 아름다운 것으로 환골탈퇴하는 대상인가 ? 극복하지 못한 장애는 ?!  장애는 싸워서 극복해야 될 대상이 아닐 뿐더러 장애는 대부분 싸워서 극복되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결국 장애는 극복의 대상도 아니고 연민의 대상도 아니다. 장애는 그저 장애일 뿐이다. 당신의 그 싸구려 연민 따위는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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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1-18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애를 이겨내야할 대상이나 한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이 불편을 최소한으로 느끼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더 힘써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조금 운 좋은 사림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큰 차이 없을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1-19 15:50   좋아요 1 | URL
성공도 따지고 보면 운에 기반한 선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잘라서 성공한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설치다가는 설치류되기 딱이죠..
 















​                               


책의 비평  부록에  대하여 :







독해를 독점하려는 전문가에게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 살인자의 기억법, 51쪽









미국의 물리학자이며 뉴욕대 교수인 앨런 소칼은 1996년 미국 문화 연구 전문지 < 소셜 텍스트 > 에 << 경계선을 넘나들기 : 양자중력의 변형 해석학을 위하여 > 라는 논문을 싣는다. 


각주가 100개 이상 달리고 참고문헌만 200개가 넘는,  넘나 읽기 어려운 논문이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앨런 소칼 교수가 며칠 동안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뒤지며 휘뚜루마뚜루 짜집기한 아무말 대잔치였다. 의도적으로 만든 엉터리 논문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논문이 엉터리라는 점을 지적하는 지식인이 아무도 없었다는 데 있다. 왜 ?!   이 논문의 저자인 앨런 소칼은 과학 분야에서 매우 명망 높은 전문가였기에 어느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앨런 소칼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종신 교수이자 뉴욕대학교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그가 비판하고 싶었던 목적은 전문가의 지적 사기였다. 전문용어나 참고문헌을 제멋대로 인용하고는 제대로 된 결론도 내지 못한 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적 사기극은 < 소칼 사건 > 으로 불리며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계를 붕괴붕괴 직전까지는 아니어도 프랑스 좌파 지식인을 붕가붕가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것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용어'였다. 전문가들은 비전문가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애매한 전문 용어를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버릇이 있다. 이 간극이 심할수록 전문가의 권위는 높아진다. 


쉬운 예를 들자면 :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법정 용어가 대표적이다. 세종대왕이 나랏말쌈이 듕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 해서 만든 한글로 작성된 법조문이지만 법조인이 아니라면 법률가의 자문을 얻어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사법 독점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평론가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적 허세'다. 신형철과 함께 문학동네 쌍철 중 한 명인 권희철은 김영하의 << 살인자의 기억법 >> 을 비평하면서 " 눈에 띄는 단점이 있다면 너무 잘 읽힌다는 것이다 " 고 말한다.  그리고는 " 이 책이 쉽게 읽힌다면, 


당신은 이 책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 』에 대한 김영하의 코멘트) " 라는 김영하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강조한다. 권희철은 전문가의 해석 도움 없이 읽을 수 있는 독자의 독해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이 소설을 쉽게 읽은 독자를 나무란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적 없었는데 권희철의 해설을 읽다가 갑자기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그는 문학을 법률가의 자문을 얻어야만 해석이 가능한 법조문 따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동안 평론이랍시고 싸질러놓은 권희철의 난해한 비평을 읽을 때마다 앨런 소칼이 휘뚜루마뚜루 작성했던 아무말 대잔치 논문과 그것에 반응하는 전문가 사회가 떠오른다. 


의미 없는 말을 나열하는 문장과 그 문장을 독해하려고 똥을 쌌던 전문가와 전문가의 권위에 주눅이 들어서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독자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그 지적 사기 말이다. 책 본문 뒤에 붙는 문학평론가의 부록은 일종의 출판사가 독자에게 주는 전문가의 (조언) 공짜 서비스다.  말이 좋아 서비스이지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의 독점권 선포나 다름없다. 독자가 그 전문가의 독해를 거부하면 권희철에게 이런 소리 듣기 쉽다. " 이봐요, 독자 양반 ! 이 책이 쉽게 읽힌다면 당신은 이 책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아. 나, 서울대 나온 남자야 !!! " 주눅 들 필요 없다. 당당하게 말하라. 조팝에 볍씨 쌈 싸 먹는 소리하지 마세요. 


" 전문가들은 우리를 불구로 만든다. " 이반 일리치의 말이다. 전문가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무능력한 사회'다. 공자는 말했다. 공짜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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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1-15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록으로 딸려오는 그런 글을 뭔가 있는가 싶어서 읽을때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뭔 개소리여 하며 읽지 않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1-16 13:02   좋아요 0 | URL
소설 뒤에 붙는 해설 볼 때마다 전자제품 사용설명서 생각이 납니다. 열정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수다맨 2020-01-17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해설이 필요한 소설집/장편소설은 크게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문학사적 평가가 완전히 끝나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것이 왜 불후의 명저가 되었는지를 작가론적 비평사적 의미에서 고찰하는 해설)이고, 다른 하나는 박상륭이나 이인성처럼 일반 독자들은 도저히 읽어내기가 어렵기에 평론가의 도움이 필요한 관념소설(작가의 난해한 서사 전략과 창작 방법론을 알기 쉽게 짚어주는 해설)들이지요.
막말을 하자면 김영하나 박민규, 김애란의 글에 해설을 다는 것은 작가 칭찬(에 더해 자기 학식 자랑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1-18 20:06   좋아요 0 | URL
한국 문학 출판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아니 무슨 신작에 해설이 붙습니까 ? 수다맨 님 말씀대로 문학사적 평가가 끝나서 그것을 비평적 관점에서 다룬 해설이라면 100번 환영합니다. 그런데 신작에 해설이 붙는다 ?! 이게 무슨 궤변인지...
 











두근두근 네 인생 !











부모의 자식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부모의 자식 사랑은 어딘가 유별난 구석이 있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관계'라고나 할까 ?  한때 침 좀 뱉고 껌 좀 씹던 한국의 자식들이라면 아마도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 뼈 빠지게 고생해서 키웠더니..... " 일 것이다. 고생에도 레벨이 있나니 한국 부모의 내리사랑은 " 탈골의 지경 " 에 가깝다. 그런데 이 말투는 상당히 계산적이다. 자식을 투자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을 자식에게 투자했는데 자식이 기대에 엇나갔을 때 내뱉는 정서가 배은망덕이다. 


성은이 망극을 기대했던 부모는 실망이 이망저망 !  부모 자식 관계를 투자자와 투자 대상으로 삼다 보니 한국 부모는 자식의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관계대명사 안에 가두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식에 대한 간섭과 개입이 시작되고 시월드라는 해괴 망칙한 월드비전이 이십 색의 총천연색으로 펼쳐진다. 투자 금액이 높으면 높을수록 상품에 대한 기대도 높은 법이어서 하층민보다는 상류층 부모의 (엇나간 자식에 대한) 하악질은 그 수위가 더 높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국의 부모 자식 관계는 < 유사 ㅡ 채권자와 채무자 > 관계'다. 


당연히 소유권과 명령권은 채권자에게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연출자로서 배우에게 자신의 이상적 캐릭터를 요구할 수 있다. 부모 말 잘 듣는, 공부 잘하는, 착하고 예쁜 인형이 되라고 명령한다. 만약에 이 장면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으면 형편없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를 만난 감독처럼 화를 낼 것이다.  괜찮아요 ??  많이 놀랐죠 ??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조로 병에 걸린 17살 소년 나(아름)의 1인칭 시점 소설이지만 사실은 3인칭 어르신의 욕망이 투영된 소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소설 속 화자인 < 나 > 는 소년의 말투가 아니라 어르신의 말투일 수밖에 없고 그 욕망 또한 어르신의 욕망이다. 


그러다 보니 " 아름 " 은 외피는 아이이지만 속내는 어른의 욕망이 반영된 인물이 되고 만다. 아름은 " 어른스러운 아이 " 가 아니라 " 어른스러운 아이를 연기하는 어르신 " 이다. 아름은 부모 말 잘 듣고, 똑똑하며, 배려심 많은 예쁜 인형'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을 더럽게 만든다. 이 소설이 기만적인 이유는 가난이 배경이지만 빈곤은 외화면에 가두고 고통에 대한 직시보다는 슬픔의 낭만성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가난 포르노의 전형적 형태'다. 문제는 이런 작품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비평가의 태도다. 


평론의 두 거목 신형철과 권희철 어르신의 조곤조곤한 알랑방귀 비평을 볼 때마다 닭살이 돋는 까닭은 그 칭찬들이 한국 문학을 죽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 문학비평에 대하여 >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칭찬하는 일이 지닌 위험성은 비평가가 자신의 신용을 잃게 된다는 데 있다. 모든 칭찬은 전략적으로 볼 때 백지수표다. 






+


학동네의 두 슈퍼스타 신형철과 권희철의 공통점은 " 사랑-뽕 " 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다정도 병인 양하여 몸져눕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아래 개미 똥구멍이다. 그들은 주로 이런 문장을 사용한다. 어찌 이것이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_ 라거나 사랑의 글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그러니까 사랑에 미친 사람처럼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것이 제어불가능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_ 라고 쓴다.  이름을 가리고 읽다 보면 누가 신형철이고 누가 권희철인지 헷갈린다. 이분들, 왜 이러는 걸까요 ? 이들이 심심할 때마다 끼워넣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치 백종원의 만능양념장 같다. 심형래의 << 디워 >> 도 이들이라면 곡진한 사랑 타령가로 뽑을 것이다. 가령, 도시의 폐허에서 서로 뒤엉켜 꿈틀거리는, 그러니까 제어 불가능한, 상승이 좌절된 하강의 세계가 지금 이곳이라면,  폐허의 욕망을 우리는 과연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어때요, 문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몇 개 쑤셔 넣으니 꽤 그럴싸하쥬 ? 도대체 언제부터 문학비평은 사랑학 개론이 되었을까. 통탄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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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4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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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 김애란 그리고 당신 







                                                                                                        산타클로스는 선택적 복지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누가 착한 애이고 누가 나쁜 애인지를 분류한 후에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다. 다시 말해서 착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나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늙은 할배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세 말 하지 않겠어. 내 입만 아프니까),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고 했을 때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따라 < 받을 자격 > 을 논하면서 선별적 시혜를 하겠다니 웃긴 꼴이다. 더군다나 예수님 생일에 말이다. 만약에 예수가 산타 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 주셨다면 웃는 아이와 우는 아이를 구별했을까 ?  지난 정권 때 중학교 무상 급식을 두고 < 선별적 복지 > 와 < 보편적 복지 > 논쟁이 뜨거웠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유한국당은 산타클로스의 정신을 계승한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방송에 노출시키는 방식을 보면 역겨운 점이 많다. 비단,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특수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동네 주민 따위(특수 학교 설립 반대를 외쳤던 동네 주민은 히틀러와 견줄 만한 악마의 성품을 지녔다)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김애란의 장편소설 << 두근두근 내 인생 >> 을 비판했던 대목은 김애란이 소설에서 장애인을 다루는 태도와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다루는 방식이 그닥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장애인을 단순하게 연민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대중으로부터 동정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착한 장애인 서사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보수적이며 퇴행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은 왜 항상 " 착한 장애인 " 이어야 하는가 _ 라는 점이다. 나쁜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의료 도움을 받으면 안되는 것일까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품을 두고 입에 거품을 내며 "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 ? " 라며 온갖 성찬을 늘어놓았지만 그가 보다 총명한 비판적 사고를 가진 문학평론가라면 묻지 마 사랑가 타령 대신에 " 17살 소년 아름은 왜 반드시 착한 장애인이어야만 했는가 ? " 라는 질문을 던졌어야 한다.  그것이 비평가의 태도다. 


김애란은 독자가 아름'에게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주인공 소년을 착한 아이로 만들었는데 이 태도는 산타클로스의 선별적 복지 태도를 닮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 착한 아이의 착한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썅팔련도패밀리플롯의 거대한 착각 " 이라는 점에서 구질구질한 최루성 신파'다. 적어도 착한 아이만큼은 사회적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는 다음과 같은 기만이 숨겨져 있다(아래 발췌한 글은 허허 님 블로그에서 인용했다).

 


작년 겨울에 기초수급 가정의 학생에게 개인 후원을 하던 사람이 인터넷에 후원 후회의 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봤다. 후원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십만 원의 돈을 한 학생에게 후원해왔다고 한다. 돈 대신 학생이 원하는 물품으로 주기도 했단다. 그해 겨울엔 00 금액 한도 내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냐고 하니 학생이 '롱패딩'을 말하더란다. 한 몇 년간 '국민 교복'이었잖나. 거리엔 걸어 다니는 김밥(검정롱패딩)과 떡가래(흰롱패딩)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의 학생도 친구들과 같은 옷을 한 번 입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원자는 그 학생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기가 찬다느니, 나도 롱패딩 없다느니 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 밑엔 그 글에 동조하는 기초수급자 가정을 비방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가난뱅이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국가 보조금과 문화카드를 받아 영화 보고 미술 학원 가더라, 우리보다 낫다..... 류의 댓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자들의 연민 중

 





이 사례에서 후원자가 원했던 것은 " 롱패딩 " 이 아니라 병든 할머니에게 드릴 " 보약 한 첩 " 따위가 아니었을까 ? " 키다리 아저씨, 무람된 말씀이오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주셔야 하신다면 저의 롱패딩보다는 할머니의 영양제를 부탁드립니다아. 할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저는 헌옷 입어도 상관 없어요. 키다리 아저씨의 따스한 후원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소녀 올림 " 후원자가 보기에 < 롱패딩 > 이라는 기표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동정과 연민을 배신하는 철딱서니에 불과한 것이다. 


후원자는 가난한 아이가 자신을 물주 취급한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이 폭로에서 드러나는 것은 후원을 가장한 도덕적 허세의 날것이다. 후원자가 후원하는 아이가 자신을 " 물주 " 취급하는 것 같다며 화를 내는 태도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그 아이를 " 물건(예쁜 인형) " 취급하는 마음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후원 행위가 후원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졸라 염치 없는 마음이다. 김애란의 << 두근두근내인생 >> 은 이 후원자의 마음에서 쓰여진 소설 같다. 소설 속 아름은 후원자인 김애란의 마음이 반영된 예쁜 인형이다. 


그렇기에 아름은 롱패딩 입고 싶어용 _ 따위의 철딱서니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애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도 그 후원자의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 대하여 대한민국 문단이 앞다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이 소설은 < 가난 > 이 배경이지만 정작 " 빈곤 " 을 다루지 않고,  < 아픔 > 을 다루지만 항상 " 고통 " 은 외면한다. 전형적인 가난 포르노이다. 나는 롱패딩 입고 싶다고 고백한 그 11살 여자아이의 철딱서니를 지지한다. 


하여, 나는 “ 나쁜 생각 을 지지하련다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지하며장애인이 보행권을 문제 삼아 시민 사회를 향해 지랄을 떠는 태도를 지지하며도움이 필요한 주폭도 지지한다가진 것이 없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나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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