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 편


 

 


 


1. 넘버3

유한계급은 재산이 많아서 생산 노동 활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한가롭게 백수 생활을 하며 유희와 쾌락에 탐닉하는 계급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불한당이 바로 유한계급이다. 불한당(不汗黨)이라는 단어가 땀(汗)을 흘리지 않는(不) 무리(黨)를 뜻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유한계급과 불한당은 닮았다. 인간 고라니 가족 대한항공 JOSSY FAMILY'(조씨 패밀리)가 대표적인 불한당'이다. 한국의 재벌 상류층은 유한계급이자 불한당이며 조폭이고 양아치'이며 무산 계급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층이다. 대한민국 노블레스 계급의 현주소이다. 피 빨아먹는 고라니라니. 당최, 이게 뭐라니 ?              << 유한계급론 >> 의 저자 베블린은 " 유한계급은 평화에서 호전적 생활 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출현했다 " 고 지적한다. 소수인 유한계급이 다수인 노동계급 사회 전체를 자지우지(좌지우지)하는 현상은 곧 한국 사회가 " 평화적 ㅡ " 이라기보다는 " 호전적 ㅡ " 문화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태왕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였고, 자라나는 청소년의 꿈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다. 조물주를 섬기는 목사조차 그의 장래희망은 대형교회 건물주'다. 그들은 조물주를 팔아서 건물주가 되고자 열심히 평화를 외친다.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건물주는 무노동의 환상을 도착적으로 현실화하려는 욕망의 투사 대상이 되었다. 이제 한국인의 장래 희망은 불한당이 되는 것이다 !  영화 << 넘버 3 >> 는 유한계급이 되기 위한 하빠리-들의 무간지옥을 다룬다. 이 영화가 뛰어난 점은 한국 사회의 병폐를 꿰뚫는 송능한 감독의 통찰과 성찰에 있다. 영화 << 하녀, 1961 >> 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컬트라면, << 넘버 3 >> 는 당대의 유이무이한 컬트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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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밀양

영화 << 밀양 >> 에서의 " 미용실 "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골머리를 앓던 행간이었는데, 김영민은 이것을 신애가 반만 용서하는 행위(영화 속에서 신애는 머리를 반만 깎인 상태에서 미용실을 뛰쳐나온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실패도 아니고 성공도 아닌, 중단이다. 용서는 중단되었지만 그렇다고 용서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원수를 완벽하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만지는 일이 워낙에 금기와 관련된 탓에 원수의 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도록 용인하고 그 절반을 자르도록 허락한 것은 용서의 의도가 있었으나 중간에 중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학원 원장과 신애의 관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였다면, 신애와 학원 원장 딸의 관계에서 신애는 더 이상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학원 원장 딸은 신애보다 더 낮은 약자의 위치에 있다. 살인자의 딸은 도시의 한켠 구석에서 또래 남자애들에게 얻어맞는다. 그는 살인자의 딸이기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다. 신애가 약자라면 원장 딸은 그보다 낮은 희생양이다. 그렇기에 신애는 원장 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위대한 한국 영화 한 편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 영화를 선정하겠다. 보면 볼수록 사유의 폭이 넓고 깊다.   






3. 기생충

노릇은 롤(: ROLE )에 가깝고, 버릇은 룰(: RULE )에 가깝다. 무릇, 노릇은 역할 놀이이다. 아비 노릇, 자식 노릇, 사위 노릇 따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릇은 직위에 대한 책무의 무거움이 투사된 낱말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 대통령 못해 먹겠다 ! " 라고 한 소리도 알고 보면 < 노릇 > 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하소연인 셈이다. 반면에 버릇은 습관이 고착화된 행위 일반이다. 그렇다면 노릇과 버릇은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다. < 노릇 > 은 나이가 듦에 따라 역할이 바뀐다. 자식일 때는 자식 노릇을 해야 하고, 아비일 때는 아비 노릇을 해야 한다. 만약에 아비 노릇을 해야 할 때 자식 노릇을 하면 철없다는 소리 듣기 쉽다. 즉, 직위(노릇)에 따른 책무도 나이가 듦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반면에 버릇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노릇을 해야 하는, 인간으로 둔갑한 천 년 여우가 밤마다 닭의 생간을 먹는 것은 생래적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버릇의 불변을 상기시킨다. 바디 체인지'를 다룬 영화 << 내 안에 그놈, 2018 >> 은 노릇과 버릇이 충돌하는 영화이다. 양아치 아재와 겁쟁이 고딩이 우연한 사고로 인해 몸이 바뀌게 되는데, 이런 류의 영화는 노릇과 버릇이 혼동을 일으키며 발생하게 되는 왁자지껄을 다룬다. 겁쟁이 고딩의 몸으로 들어간 양아치 아재'는 고딩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만 아재 때 습속을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양아치 아재의 몸으로 들어간 겁쟁이 고딩은 아재 노릇에 충실해야 하지만 부지불식 간에 고딩 때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다. 영화 << 기생충 >> 도 일종의 노릇과 버릇이 뒤섞일 때 발생하게 되는 곤경을 다룬다. 하류층 가족이 상류층 가족과 동화되기 위해서는 하류층의 버릇을 감춘 채 상류층 노릇을 모방, 흉내, 척하기와 같은 연기를 해야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불쑥 하류층의 버릇이 튀어나온다. 상류층도 마찬가지'이다. 상류층은 종종 부지불식간이 상류충(ㅡㅡ蟲)을 드러낸다. 뭐, 아님 말고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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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 기생충 >> 과 관련된 리뷰는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보지 않고 쓴 글이다( 영화 예고편 한 편 본 게 전부다. 이 영화와 관련된 리뷰나 기사 그리고 평론도 읽지 않았다 ). 읽지 않고 읽은 척하는 기술을 터득하다 보면 보지 않고도 본 척하는 내숭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김영민은 알면서 모른 척하라고 충고하지만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보다 상위는 "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 이다. 그거시 바로 관심법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본 척하는 글에 화가 나서 가래침을 툭 내뱉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 누가 지금 가래침 뱉는 소리를 내었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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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19-06-15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곰발님의 재치는 이미 스타일이 되었군요.
저는 어떤 글이 좋은가... 그런 것들을 구별하지 못해요. 대개 책을 읽을 때도 읽기 어려우면 필사를 하고 읽을 만 하면 그대로 읽고 하는데, 곰발님 글을 읽을 때는 음성 지원이 되는 경험을 해요. 곰발님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저도 뭔가 스타일을 만들어 볼까 봐요. 야무진 꿈이지만요.
(하나 물어도 될까요? 김영민 씨의 ‘알면서 모른 척‘이 어떤 맥락일까요. 곰발님이나 김영민 씨는 어떤 때 알면서 모른 척할까요. 곤란한 질문이라면 이 글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15 18:2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반갑네요. 초원 님 ! 잘 지내십니까, 저는 늘 그렇습니다..




공자는 셋이 길을 걸으면 반드시 한 사람은 스승으로 모실 만하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공자는 사람의 관계를 스승으로 모실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별을 하는데 이것은 곧 인간 관계를 수직 서열화하는 태도인데, 김영민은 그렇게 되면 셋이 동무가 될 수 없다면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15 17:58   좋아요 0 | URL
글구보니 누군가 초원 님과 똑같은 소리를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내 글이 음성지원되는 독특한 문장이라고 하더군요 ^^

초원 2019-06-17 21:08   좋아요 1 | URL
답변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목소리 들려주세요.

*몇 마디 더 덧붙여였었는데,
제가 더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서 댓글을 수정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주의할게요.

수다맨 2019-06-2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곰곰발님 서재에 들렀습니다.
저는 시간이 좀 지나서 이 영화를 볼 생각입니다. 지금 이 영화를 보았다가는 특정한 명예(황금종려상)와 특정한 열정(천만 관객 돌파 초읽기)을 의식해야 하기에 오독과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현재 이 영화에 낀 거품이 좀 빠지면, 보다 차가운 눈으로 시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괴물 [VCD]
봉준호 감독, 고아성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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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괴물에 대하여    :



 




잔디밭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너무 빨리 다가온 타자는 괴물이 되고 영영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1)


 

 

 

 

                                                                                                    조용필과 괴수(물)의 공통점은 둘 다 피날레를 풀샷으로 장식한다는 점이다. 내가 기억하는 조용필은 피날레 무대에 올라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하늘에서는 박이 터지며 색종이 날리고, 무대에서는 박수 터지며 환호를 날린다.

삼 파장 발광 다이오드적 극성이 내장된 럭키금성 티븨 모니터 화면에 엔딩 자막이 뜬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  다음에 또 만나요 !  괴수(물)가 등장하는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괴수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저잣거리를 염탐하는 < 거리 두기 방식 > 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관객이 괴수의 전신을 보기 위해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장르적 약속이자 관습이다. 관객은 절정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괴수 신체의 편린-들'만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전부가 아닌 부분만 살짝살짝 보여주는 열쇠 구멍 수법은 " 감질나 " 지만 또 나름 그것이야말로 괴수물의 " 감칠맛 " 이기도 하다. 그래, 이 맛이야 !

일종의 절편음란증적 관습을 즐기는 경우이다.  장르 마니아라면 장르 영화 패턴이 똑같다며 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익숙함에 대한 무저항이 바로 장르 마니아의 미더덕'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괴물, 2006 >> 은 장르의 익숙한 순서를 180도 뒤집는다. 괴물은 영화가 시작한 지 20분이 채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낮에 보란듯이 전신을 드러내며 한강 공원의 고른 잔디밭을 들쑥날쑥한 쑥대밭으로 만든다. 여담이지만  :  한강 공원 잔디밭이 딸기밭이라 한들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보고 있나, 신 작가 !     관객은 예상치 못한 등장에 당황하게 된다. 장르적 습속에 익숙했던 관객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불쑥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물에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 빨리 다가온 타자는 괴물2)이 되고,  영영 오지 않는 타자는 메시아가 된다는 점에서 봉준호의 << 괴물 >> 은 너무 빨리 등장한 타자이다. 감독은 관객이 방심하고 있을 때 허를 찌른 후 냅다 도망친다. 일격인 셈이다. 봉준호의 치밀한 전략 앞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절정이 맨 앞에 배치되다 보니 김 빠진 전개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하지만,  영화가 장르적 재미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괴물의 한강 공원 난입 사건이 사실은 진짜 절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영화 제목은 << 괴물 >> 이지만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이다.

진짜 오르가슴이라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가짜 오르가슴이라고 밝혀졌을 때 관객은 일종의 보너스를 얻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관객 마음을 사로잡는 < 가짜 오르가슴 > 은 노래방에서 마지막 노래를 열창하고 나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노래방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마음씨 좋은 노래방 주인이 보너스 타임을 넉넉하게 넣어줄 때의 환희와 같다.





​                              

1)   김영민, 집중과 영혼 962쪽  

2)   인간과 짐승은 모두 < 곁 > 이라는 이름의 고유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이 영토(거리감)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법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친밀하지 않은 낯선 타자가 자신의 동의 없이 곁을 침범하며 팔짱을 끼거나 허리를 감싸는 행위는 불법인 것이다(성범죄가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너무 빨리 다가오는 타자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봉준호의 괴물은 그 어떤 동의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곁을 공격하고 파괴한다. 괴물이 너무 빨리 다가온다면 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신이 인간의 권선징악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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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문  과     잡  문     사  이  : 

 

 

 

 

 

 

 

 

더 나쁜 쪽으로  :  숙주와 기생충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을 순수 문학(純粹 ) 이라고 한다. 그리교양이 비교적 낮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여 흥미에 중점을 둔 내용으로 평이하게 쓴 문학을 통속 문학(通俗 )이라고 한다.

전자는 한자 純(聖) : 순수할 순 에 방점이 찍혔고 후자는 俗 : 속될 속 에 방점이 찍혔다. < 순수 > 가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순수 문학이냐 / 통속 문학이냐라는 질문은 곧 뉘 집 자식이니 ?  _  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그 질문의 핵심은 순혈주의'다.  순수 문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평단은 작가에게 혈통이 무엇인지 / 뉘 집 자식인지 / 그리고 아버지는 뭐 하시노 ? _ 라고 묻는다. 문단 어르신의 질문에 우리 아버지, 건달입니더 _ 라고 말하는 순간, 그 결말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 

내가 문단의 이분법적 잣대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신경숙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신경숙 문학은 아무리 봐도 통속 문학에 가까웠다. 아니, 통속문학의 정수였다. 속되도다. 아아,  졸라 속되도다.               그런데 한국 문단은 왜 신경숙 소설을 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누가 봐도 크리넥스 티슈와 다를 바 없는 데 말이다. 나는 신경숙의 촌스러운 쌍팔련도 키친아트적 욕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신경숙은 통속 작가로서 꽤 재능 있는 작가라는 점인 인정한다.  문제는 신경숙이 잡문가가 아니라 순문가'로 둔갑한 데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경숙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잡문가를 순문가라며 띄워 준 집단은 문단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경숙을 앞세워 문단 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경숙은 일종의 가케무사가 아니었을까 ?  이들은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로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죽는 공생'이다. 그렇다고 신경숙을 헤게모니 싸움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 권력의 단물을 만끽한 이는 신경숙이었으니 말이다.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솔잎을 먹고 사는 송충이가 먹을 것을 찾아 갈밭에 내려와 갈잎을 먹는다는 말로 자기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비꼬는 말이다.

순문과 잡문을 순혈의 잣대로 나누는 속된 짓을 하면서도 입만 열면 순문학'을 예찬하는 꼴을 보면 역겹다. 신경숙보다 더 나쁜 쪽은 한국 문단이다. " 나이가 들어도 자라지 않는 비평가의 꼴을 보는 일은 슬프다. " 故 김현 문학평론가의 지적'이다. 한국 문단은 판타스틱하다, 더 나쁜 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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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6-08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경숙은 논외로 하더라도, 백낙청 교수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작게나마 존경의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도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8 17:04   좋아요 0 | URL
수다맨 님, 29일(토)에 한 잔 합시다. 그때 솔방울 님 새로운 전시가 광화문에서 하는데 전시 보고 나서 우리 둘이 오붓하고 한 잔.. 어떻습니까 ?

수다맨 2019-06-10 09:20   좋아요 1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29일에는 제가 선약이 있어서 아무래도 약속을 잡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6-1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 잘 알겠습니다. 나중에 변심이라도 생기시면 알려주시구려..
 

 

 

 

 

 

 

 

 

 

 

 

 

 

                                          

 

코 리 안   데 쓰   드 라 이 브  :


 

 

 

 

 



죽을 맛입니다



                                                                                                한국 사회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 언어 습관을 가진 문화에 속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배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배고파 죽겠고, 목말라 죽겠고, 외로워 죽겠고, 바빠서 죽겠다고 말한다. 뭐, 여기까지는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배 고파 죽을 수도 있고, 목 말라 죽을 수도 있으며 바쁘면 과로사로 죽을 수도 있고, 외로우면 괴로우니 죽을 수도 있는 아이러니. 아니 그러니 ?

그런데 우스워 죽겠고, 행복해 죽겠고, 예뻐 죽겠고, 미워 죽겠고, 심심해 죽겠다 _ 라고 말하면 복잡하다. 죽을 일이 많기로서니 바빠서 죽고, 우스워 죽고, 행복해 죽고, 심심해 죽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양 빠지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미워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은 아스트랄하다. 심심한 상황을 좋아하는 나는 심심해 죽겠다 _ 라는 경고성 멘트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러다가 나 정말 죽는 거임 ?!  이처럼 한국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간다.  주성치 영화를 보며 낄낄거리다가도 웃다가 죽는 꼴을 상상하면 정말 웃기는 상황이어서 몸서리나게 된다.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결국 생에 대한 강한 의지가 표출되는 모양이다.

한국인은 보신을 위해서라면 개불 알까지 뜯어먹을 기세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닥칠지도 모르니 거시기를 뜯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때마다 " ~ 해서 죽겠어 ! "  라는 한국 특유의 죽음 충동(코리아 데쓰 드라이브 ?!)을 자주 언급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은 건강 염려증 환자의 럭키금성 삼 파장 발광 다이어드적 초정밀 극성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아따, 참말로 찌릿찌릿하다. 오호통재다. 자주 죽는 남자가 있다. 유덕화는 영화 속에서 자주 죽는다.  << 천장지구 >> 에서 코피를 흘리며 죽기 시작하더니 << 복수만가 >> , << 지존무상 >> , << 용재강호 >> , << 결전 >> , << 삼국지 : 용의 부활 >> , << 무간도 >> 에서도 죽는다.

대부분 장렬하게 죽지만 때론 비렬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장렬하게 죽는다. 그는 멋지게 죽는 데 최적화된 배우이다. 그의 연기 철학은 목련처럼 지저분하게 죽느니 동백꽃처럼 단칼에 죽는 연기력을 선보인다. 입만 열었다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징징거리는 캐릭터라면 이룰 수 없는 폼사의 경지'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 죽을 맛 " 이라고 하는가 보다. 제작자가 이 사실을 놓칠 리 없다. 그래서 유덕화는 자주 죽는다......        폼생보다 어려운 것은 폼사'다. 그는 영화 속에서 언제나 폼생폼사한다. " 폼生 " 은 자기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지만 " 폼死 " 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다. 사람들은 개똥밭에서 뒹굴지언정 멋지게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니 말이다. 살아서 " 폼생 " 을 성취할 기회조차 없었던 나는 유덕화가 멋지게 죽을 때 항상 감탄하게 된다. 나에게 폼생폼사는 불가능한 판타지이기는 하나 적어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다는 생의 의지는 없다. 적멸(寂滅)하는 것이 내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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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8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극지왕(우리엔터연말행사)(King Of Comedy)
우리엔터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                                         

 막   간   에         울    다    :


 




킹 오브 코미디


 

 

 


 


                                                                                               민둥산 같던 주둥이에 털이 듬성듬성 자라기 시작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  나는 주로 A급 영화'만 보았다.  칸느,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따위의 명성 자자한 영화제는 물론이고 기타 각종 유수 영화제 수상작만 골라 보았다.

그때는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또래들이 에로 영화에 발기탱천하고 친구들은 나이 제한 때문에 에로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애로 사항을 내게 하소연하곤 했다.         총질에 삽질할 때  나는 격조 높은 영화를 보며 도도한 삶을 꿈꿨다.  도도한 이상과는 달리 노동자로서 나는 점점 미미하고 시시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상은 도했으나 성격은 개걸스러웠으며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바다 짠물을 잔뜩 먹은 솜옷처럼 축 늘어진 인생이었다. 나는 외쳤다.  대한민국, 다 (엿) 먹어라 그래  C !           (뭐), 이런 삐딱한 심정, (뭐) 이런 (욱)하는 마음.

격조 높은 영화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는 개똥밭에서 뒹구는데 너무나 향기로운 높은 성에서 사는 꿈을 꾸고 있었구나. 그때부터 B급 병맛 영화를 즐겨 보게 되었다.  병맛 영화는 소프트 바디와 하드 바디가 모두 뛰어난 배우보다는 나와 비슷한 만무방이 나와서 쓴맛, 단맛, 병맛을 모두 경험한다는 점에서 내 루저 취향을 저격했다.  병맛의 참맛을 알게 해준 사람은 주성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병맛을 알아 ?   주성치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 희극지왕, 1999 >> 이다.  이 영화는 주성치가 영화판에서 7년 동안 무명배우로 뒹굴면서 느꼈던 서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 영화'였다.


 

▶ 영화 오프닝 장면은  한 남자(주성치 분)가 바다를 향해 자기계발서에서  단골로 사용되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작한다. 나는 이 맬랑꼴리하며 블루스한 오프닝에 당황했다. " 투머치 슬랩스틱 오버 코미디 영화 " 에서 타이틀이 채 뜨기도 전에 쓸쓸한 < 뒷모습 > 을 보여준다는 것은 일종의 변칙이자 변종이다.  이 영화는 앞모습에 가려진 뒷모습에 대한 영화이다.

 


 

 

그는 시종일관 관객을 웃기려고 노력했으나 슬랩스틱 너머에 내재된 파토스는 숨길 수 없었다( 정극 배우의 슬픈 연기보다 희극 배우의 슬픈 연기가 더욱 돋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이는 찰리 채플린이었다. 그가 << 라임라이트 >> 란 영화에서 거울 앞에서 화장을 지우며 표정 없이 카메라 정면을 응시했을 때,  나는 까닭 모를 연민에 허우적거렸다 ).  그리고 피우피우 역을 연기한 배우가 택시 안에서 12월에 내리는 눈처럼 펑펑 울 때에는 나도 모르게 그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럭키금성의 삼 파장 초정밀 발광 다이오드적 극성에 가까운 주성치의 유치찬란한 투머치 오두방정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 를 보다가

 

싱싱한 가거도 우럭처럼 울컥한 감정이 찾아오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때 피우피우 역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장백지'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술집 여자'로 등장한다(그녀는 이 영화로 데뷔했다).  영화 줄거리를 당신에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성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맥락이 아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배운 것은 연극(적)이 때로는 최상의 현실성이며 삶의 진정성을 표현하기에 좋은 수단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허술하고 서툴지만 주성치의 진심이 담긴 멜로'이다. " 유치찬란 " 한 삶도 때로는 " 유치하지만 찬란한 삶 " 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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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9-06-05 23:54   좋아요 0 | URL
요즘 세대에게도 잘 통할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아해들이 잘 몰라 그렇지 알게 되면 다시 주성치형아 전성시대가 열릴 지도 모르는데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6 14:36   좋아요 0 | URL
주성치 영화가 좀 마니아적이기는 하죠... 불량식품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