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씨 호밀밭 소설선 3
강동수 지음 / 호밀밭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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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덩 이 와   히 아 신 스   :




 

 



문학적 영감에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추



 


 


          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A 제자를 꽃에 비유하며 A에게 카카오 메시지 500건과 문자 45건을 보냈다가 학교로부터 교원 품위 훼손에 따른 징계로 정직 3개월 결정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교수가 지속적으로 보낸 문자가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해당 교수는 극렬히 반발하며 문학적 영감(시 창작 수업)일 뿐이라고 행정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근엄한 목소리로 영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_ 라는 지청구를 날렸다.

이 늙은 영감은 A에게 가장 좋아하는 꽃( : 그녀는 히아신스라고 답했다)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 히아신스 > 라는 제목의 시를 보낸다. " 엉덩이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있다 / 그녀는 엉덩이가 전부다 / 엉덩이로 생각하고 엉덩이로 꿈을 꾼다 / 엉덩이로 말을 하고 / 엉덩이로 사랑할 줄 아는 히아신스 "  히아신스를 보며 여자의 엉덩이가 떠올라 몸이 달아오른, 이 문학적 영감 머릿속에는 온통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엉덩이. 오오오오오 !  엉덩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에게 엉덩이는 뮤즈인 셈이다. 이 얼마나 아스트랄한 문학의 변증법적 상상력인가 ! 웃지 않을 수 없어서 웃는다. 그런가 하면 평창올림픽 때 전문 인력-들이 여성 자원봉사자에게 " 꽃은 물을 줘야 한다 " 며 성희롱을 일삼아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처럼 꽃은 꼰대들의 문학적 영감'이다. 하지만 꼰대들에게 있어서 꽃보다 더 자극적인 성적 오브제는 과일이다. 속된 말로 남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 여자를 따먹다 " 에서 여자는 과일로 환유된다. 강동수 작가의 단편소설집 << 언더 더 씨 >>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단편 < 언더 더 씨 > 는 세월호 희생자(女)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소설이다. 문제가 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앱 " 누가 봐도 이 문장에 사용된 단어들은 성적 암시에 중요하게 쓰이는 단골 낱말들이다.

< 단단하다 > 는 형용사는 발기를, < 탱탱하다 > 는 젊은 피부를, < 과육 > 은 성욕의 식욕화를 환유하는 방식으로, < 앞니를 박아 넣었다 > 는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은유이다. 그리고 " 박아 넣은 ㅡ " 결과 "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ㅡ" 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화장실 벽낙서에 자주 등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전형이다. 이 문장을 읽은 많은 이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성적 대상화했다며 반발하자 작가는 일부분만 발췌해서 전체 맥락을 훼손한다며 화를 냈지만 전체 문맥을 살펴도 달라질 것은 없다.


“ 지금쯤 땅위에선 자두가 한창일 텐데. 엄마와 함께 갔던 대형마트 과일 코너의 커다란 소쿠리에 수북이 담겨있던 검붉은 자두를 떠올리자 갑자기 입속에서 침이 괸다. 신과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 성화에 엄마는 눈을 흘기면서도 박스째로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오곤 했는데......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큼한 즙액.”

 

나는 작가가 음흉한 생각으로 이 문장을 썼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고착된 여성성(성적 대상화)이 은연 중에 드러난 결과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는 이 논란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변명하기에 앞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남성 욕망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했다. 남성 작가라면 남성 화자'가 1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심리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여성 화자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17살 여성 < 나 > 와 남성 작가인 늙은 나를 접선(빙의)시켜야 하는 난이도 높은 기술인데 말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작가는 1인칭 < 나 > 로 빙의하는데 실패한다.  여자라면 어느 누구도 자두를 먹으면서 내 젖가슴이 탱탱한 자두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앞니를 박아 넣지는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남자라면 어느 누구도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서 포경인 자신의 성기를 상상하며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만약에 미성년인 여자가 크기가 작은 자두를 자신의 젖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하거나 미성년인 남자가 바나나를 자신의 좆과 동일시하면서 성욕을 식욕으로 변주했다면 그 심리적 기저에는 동성애적 성적 취향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자두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 신체에 대한 상상력일 뿐이다.  

여성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여성은 여성 스스로 자신을 꽃이나 과일에 비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의 1인칭 < 나 > 는 외피는 소녀이지만 내피는 문학적 영감의 늙은 목소리일 뿐이다. 이 소설은 소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늙은 남자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진혼 굿을 차용한 애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핍진성이 제거된 불가능한 성대 모사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완벽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실패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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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1-16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오십대 후반의 작가가 (고도의 관찰력과 감응력 없이) 십대 소녀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는 데서 이 소설의 문학적/윤리적인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작가 본인과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서 솔직함과 진실성을 갖출 줄 알았다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1-16 16:21   좋아요 0 | URL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오만함이 이런 비극을 낳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