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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0분이다. 식당에서 한 끼 밥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소설 한 편을 다 읽는 셈이다. 시간만 비슷한 게 아니다. 한 끼 밥을 먹는 것과 단편소설을 읽는 것은 경험의 내용도 비슷하다. 된장찌개를 먹는다면 빨리 먹든 천천히 먹든 시작부터 끝까지 된장찌개를 먹는 경험으로 일관돼야 한다. 시작은 된장찌개였는데 먹다 보니 스파게티인 데다 더군다나 다 먹고 나서 보니 내가 먹은 게 카레였다면, 혹은 세 가지 음식 맛이 한꺼번에 느껴진다면 이건 식사라기보다 벌칙에 가까워진다.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된장찌개든 스파게티든 카레든 한 가지 맛으로 일관돼야 다 읽고 나서, 마치 입 안에 감도는 뒷맛과도 같은 여운을 즐길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뒷맛 같은 여운은커녕 쓴맛만 보게 된다. 장편소설이 오랜 성찰과 노동의 산물이라면 단편은 훈련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장편이 더하기의 미학이라면 단편은 빼기의 미학인 셈이랄까. 훈련을 통해 얻어진 감각으로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덜어내느냐로 성패가 갈리는 게 단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된장찌개를 선택했다면 작가 스스로는 물론 독자에게서도 스파게티나 카레를 먹을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을 덜어내야 한다.

 

 그러니 단편을 읽다 간혹 뭔가 결이 맞지 않는 문장이나 단어가 반복되며 모티브로 기능하는 것을 접하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잘못 끼워넣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미처 버리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잘 읽히는 데다 뒷맛 같은 여운을 남긴다면, 그 작가는 잘 훈련된 작가라고 봐야 하는 것 역시 틀림이 없다.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12)에 실린 김미월의 「프라자 호텔」이 그런 경우다. 휴가를 시내 호텔에서 보내는 30대 부부 얘기다. 이번에 고른 호텔이 바로 프라자 호텔인데, 이 호텔 위치가 심상치 않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되었고 노제가 열렸던 시청 앞 광장을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대학 동기인 이 부부는 가두시위를 나갔다가 시청 앞 프라자 호텔 근처를 헤맨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3분의 2쯤 읽었을 때 엉뚱한 문장과 맞닥뜨렸다. 여대생이었던 여자가 프라자 호텔을 올려다보며 저기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인데, 해외로 입양되었다가 생부모를 찾아 고국에 돌아온 누군가가 프라자 호텔에 묵으며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을 마치 이방의 도시인 듯 바라보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란다. 3분의 2나 써놓고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런 작품이 뽑혔단 말이야? 내 반응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의외로 문제 없이 잘 읽혔고 여운도 남았다. 이럴 땐 당연히 궁금해진다. 어떻게 한 거지?

 

 궁금하면 분해해보는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장난감을 들여다보며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어지면 낱낱이 분해해보는 것처럼. 작가노트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버스를 타고 시청을 지나다가 프라자 호텔 16층의 한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목격했단다. 그때 작가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문제의 입양아 얘기였다. 친구가 프라자 호텔 16층을 예약하고 작가를 불렀단다. 친구 복도 많다. 두 젊은 여성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며 신나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잠들었는데 새벽녘에 깬 작가가 호텔 복도를 서성이다 역시 그 느낌에 사로잡혔단다. 고국을 찾은 입양아가 된 기분. 친구와 공유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작가가 왜 프라자 호텔에 묵고 싶다고 했는지조차 잊었단다. 그 체험에서 이 소설이 쓰여질 수 있었다.

 

 자, 작가는 죽어도 입양아 모티브를 버릴 생각이 없다. 순전히 그 때문에 「프라자 호텔」이라는 소설을 쓰는 셈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친구와 보낸 하룻밤을 소재로 쓰기도 뭐하다. 거기에 입양아 모티브를 살린다고 해도 프라자 호텔이 의미를 잃게 된다.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이 어디 프라자 호텔뿐이겠는가. 게다가 시청 앞 광장이라는 상징성도 버릴 수 없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친구를 버리고 부부를 선택했다.

 

 단편에서 부부나 친구 혹은 연인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면 따라야 할 법칙이 있다. 상황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 한쪽이 화자로 등장하여 일방적인 서술로 진행되더라도 화자가 제대로 된 서술자가 되려면 상대편에게도 주고받는 역할을 맡겨야 한다. 서술자란 화자와 달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상정된 가상의 제3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합의를 이룰 때 우리가 늘 머릿속에 상정하는 바로 그 제3자.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입양아 얘기를 누구의 입을 통해 꺼낼 것인가. 남편? 아내? 둘 다 마땅치 않다. 주인공인 두 사람에게 맡긴다면 입양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그러면 된장찌개가 스파게티가 되고 카레가 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프라자 호텔이 죽는다. 제3자에게 시켜야 한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 다른 여자가 낫다. 남자라면 자칫 수작으로 비쳐질 수 있다. 결국 남편이 화자인 ‘나’가 되고 입양아 얘기는 남편의 ‘다른 여자’의 입을 통해 꺼내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렇다면 아내는? 아내를 제3자로 만들어버리면 소설은 꼬여버린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다른 여자’가 결국 아내였다고 밝히는 것이다. 다만 돌올하게 드러나는 반전이어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프라자 호텔과 입양아 얘기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처리되어야 한다.

 

 첫 문장이 중요하다. 아니 최소한 처음 세 문장에 두 사람과 프라자 호텔을 담아야 하고 그들이 프라자 호텔을 상관물로 상황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선택된 첫 문단은 이렇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아내 몫이었다. 이번에는 프라자로 가자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즉각 컴퓨터 전원을 켰다. 목적지에 예약을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으므로.”

 

 시작이 좋다. 세 가지 모두를 담은 데다가 복선까지 실었다. 남자인 ‘나’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한다. 이 상황이 바로 두 인물이 주고받는 내용의 다다. 말하자면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자가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하는 상황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인 셈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상황이 반복될 거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든 과거의 일이든. 게다가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아내와 ‘나’다. 남편을 화자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여자’가 등장할 여지를 만들어두었다.

 

 그 다른 여자가 대학에서 만난 윤서다. ‘나’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생전처음 서울에 와본 촌놈이다. 어느 정도냐면 입학식도 아니고 예비소집일에 아버지가 마련해준 양복을 차려입고 나타날 정도다. 학교 방송국 피디로 일하는 윤서가 학우와의 대화 시간에 나와줄 것을 요구하자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나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신청곡으로 생각하고 나갔다가 이런저런 정치문제를 질문 받고 버벅대는 바람에 통편집돼버린다. 그날 방송에 나간 노래는 노찾사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였다. ‘나’는 중얼거린다. “말이 돼? 마른 잎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 예수야?”

 

 이런 ‘나’이니 서울은 그야말로 별천지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서울내기인 윤서에겐 서울이 답답하고 지겹기만 하다. 통편집한 미안함에 ‘나’의 데이트 신청에 마지못해 응한 윤서가 시청 앞에서 대뜸 프라자 호텔을 올려다보며 저기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여기가 정확히 3분의 1 지점이다. 그렇다면 3분의 2 지점에서 다시 한 번 프라자 호텔이 언급되어야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거론되어야 한다. 주고받아야 하니까. 공식이랄 것까진 없지만, 독자에게 설득력을 주려면 그러는 것이 좋다. 가령 현재와 과거 회상이 교차되는 소설이라면 현재의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과거는 최대화한다든가, 현재의 시간은 최대한 단축하고 과거의 시간은 최대한 길게 한다는 식의 공식 아닌 공식 같은 것이랄까.

 

 작가는 그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3분의 2 지점에서 5.18을 맞아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전경에게 쫓기는 윤서의 손을 잡고 뛰어간 곳이 덕수궁 뒷길이었고 시청 앞까지 터덜터덜 걸었을 때 왜 그때 프라자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싶다고 했냐는 ‘나’의 물음에 윤서는 문제의 입양아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다면 다음 프라자 호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된장찌개가 스파게티가 되고 카레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입양아의 경험을 누군가가 직접 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 말고 누구겠는가. 윤서에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청하고 뭐 그러지, 하는 승낙을 얻어내자 촌놈인 ‘나’는 덜컥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한다. 3개월 치 생활비를 톡톡 털어서. 하지만 윤서는 7개월 전에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만다. 잊지 않았다고 해도 ‘나’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이유가 있겠는가.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꿈꾸지 않는다면.

 

 혼자 프라자 호텔 16층 방에서 밤을 지새다가 새벽녘 복도에서 ‘나’는 입양아의 처지를 겪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이 별천지 같은 촌놈이 서울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묵지 않는 프라자 호텔에서 그것도 혼자 밤을 보냈으니, 내 나라이지만 어쩐지 이국의 도시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간간이 현재의 시점에서 월드컵 열기며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용산참사 등을 거론하며 두 사람이 지나온 시대의 두께를 환기시킴으로써 그 낯선 경험이 현재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걸 드러내주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이렇다.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이야기를 한다면 그녀는 믿을까. 그때의 일을 기억이나 할까. 내가 바로 그때의 나라는 걸. 우리가 바로 그때의 우리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빗속을 뚫고 가서 사온 아이스 커피를 건네며 슬쩍 얘기해봐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내가 믿지 않아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겠다.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휴가의 첫날. 우리에겐 아직 여러 날이 남아 있었으므로.”

 

 윤서가 아내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가 그때의 내가 되는 순간이고 우리가 그때의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이로써 작가는 프라자 호텔, 시청 앞 광장, 입양아 모티브, 부부의 주고받음에 절묘한 반전까지 살려낸 것은 물론, 부부와 함께 소설을 읽는 독자마저 우리로 묶어내는 데도 성공한 셈이다. 잘 훈련된 작가임에 틀림없다.



 
 
다락방 2012-05-24 08:15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다른 단편집에서 후와님이 말씀하신 이 단편을 읽었어요. 그런데 그 단편집이 뭐였는지...[서울, 밤의 산책자들]이었나...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결제를 자꾸 미루고 있거든요. 제가 읽은 단편이 몇 편 들어가 있는것 같아서요. 어때요, 후와님? 다른 작품들도 썩 괜찮은가요? 추천할만 해요?

후와 2012-05-25 03:10   URL
분명 단편집을 검색했는데... 그새 제목을 잊었네요ㅎㅎ 모두 7편이 실려 있습니다. 만일 다락방님이 이미 보신 작품이 4편 이상이라면 구입하시기가 좀 그렇겠군요. 다른 작품들도 다 좋았습니다. 사실은 이 작품이 좀 애매했는데 잘 마무리했더군요^^

반딧불이 2012-05-24 11:06   댓글달기 | URL
어제 김영하의 '거울에 대한 명상'을 읽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는데 오늘 후와님 글을 읽으니 그가 '잘 훈련된 작가'라는 걸 깨닫게 되네요.
'궁금하면 분해해보는 수밖에 없다'하셨는데..분해능력도 없는 저는 후와님 글로 대신합니다.ㅎ

후와 2012-05-25 03:12   URL
김영하야 뭐 워낙 잘 쓰니까요ㅎㅎ 분해라고 해봐야 이리저리 궁글리면서 노는 겁니다^^

한수철 2012-05-24 12:33   댓글달기 | URL
전 손보미, 김미월, 김성중의 작품을 선택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맨유 출신 축구선수로 비유하자면
손보미는 호날두
김미월은 비디치
김성중은 나니 같아요.

온당한 근거는 없지만요.ㅎ

후와 2012-05-25 03:12   URL
그럼 박지성은...ㅎㅎ

한수철 2012-05-25 11:24   URL
정녕 저 저 저 댓글을 제가 쓴 게 맞나요 후와 님?^^

아우 부끄러워라... 뭐야 저게...ㅎㅎ

후와 2012-05-25 12:52   URL
왜요? 속으로 역시! 하고 감탄사를 내뱉게 만든 댓글이었는걸요ㅎㅎ

웬디양 2012-05-25 14:27   URL
책을 다 읽었는데 왜 이해를 못하나. 어쩐지 오늘은 (다 읽은 책이 나와서) 운수가 좋더라니!


축구를 몰라서 울고 싶어졌어요.

poptrash 2012-05-24 22:27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는데, 저는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분해는 커녕 남의 집 앞 마당 쓸듯 대충 글자 위를 훑고 지나가느라 바빴네요. 덕분에 다시 한 번 읽게 되었습니다. ^^

후와 2012-05-25 03:14   URL
입양아 얘기를 읽는데 안타깝더라구요. 그걸 버리지 못해서 이 모양을 만들었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나름 마무리를 잘해서 그게 외려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차달 2012-05-25 00:10   댓글달기 | URL
댓글로 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읽어 보고 싶긴 합니다. 라고 쓰려다가 하도 바빠서 못썼는데 역시 후와님은 명문이시다 하는 생각만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추천은 누르고 갔습죠.

후와 2012-05-25 03:16   URL
약간 구멍이 있는 소설들이 소설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 아주 좋은 재료가 되곤 합니다. 그래도 부러 읽으실 필요까진 없지 싶은데요ㅎㅎ

웬디양 2012-05-25 01:38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 작품이 오히려 윤서가 아내가 되는 순간 때문에 식상해졌다고 생각했어요. 프라자호텔이라는 장소를 포착한 것 자체는 무척 좋았고요. 프라자호텔에는 확실히 저도 오묘한 느낌을 갖고 있긴 하거든요. 입양아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건, 작가가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아일랜드>의 영향이 좀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거기서 이나영(극중 입양아인 이중아 역할을 맡아요)이 고국을 방문해서 처음 묵었던 호텔이 프라자호텔이었거든요. 무의식중에 드라마의 영향으로 그런 이미지를 떠올려낸 건 아닌가 싶고. ㅎ

암튼 저는 정소현의 작품을 무척 재밌게 읽었었는데 (정소현의 첫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봐야지, 할 정도로) 후와님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

후와 2012-05-25 03:24   URL
전반적으로 좀 식상하긴 합니다. 구멍도 좀 보이구요. 그런데 프라자 호텔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거... 이게 우선 마음을 끌었고(다루기 쉬운 소재는 아니니까요) 만약 제가 작가였다면 중간에서 접었을 텐데 끝까지 끌고 가서 마지막 반전까지 만드는 걸 보니 신뢰가 가는 작가다 싶었달까요ㅎㅎ 정소현의 작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작품에 대해서도 써볼까 궁리 중입니다^^
 

 

 시간이 볼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실은 대부분의 시간들이 그렇다. 돌올하니 자신을 드러내며 흘러가는 시간들. 그럴 땐 내가 한없이 오목해진다. 개인사란 말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내게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생각은 나를 위한 생각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각일까. 가끔 궁금하다. 어차피 나는 다 잊게 될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내겐 그저 오목한 시간이 있고 볼록한 시간이 있을 뿐인데. 가령 과학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실은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면 경험에서 우리는 볼록한 시간을, 서술에서 우리는 오목한 시간을 갖는 것처럼.

 

 내가 알 수 있는 나는 단지 오목한 시간의 나일 뿐이다. 자신만의 문법으로 스스로를 서술하는 존재. 그게 나다. 나는 무엇을 서술하는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목한 시간들. 이를테면 호출기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 재래식 화장실의 그 어둡고 깊은 구멍, 마중물을 넣는 수동식 펌프의 오목한 공간, 다락방의 먼지 냄새 나는 구석, 우우 하는 소리가 울려나오는 우물 속 저 깊디깊은 바닥, 오래된 냄새가 나는 아궁이 속, 고사리 같은 손을 쑥 집어넣고 싶게 만드는 벽 틈,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불려 들어간 뒤 어린 동생과 단둘이 남은 저녁의 놀이터, 우체부를 기다리는 시간, 쥐가 숨어들어간 구멍, 좀처럼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 할머니와 마주앉아 민화투를 치던 어린 날의 문간방, 틀니를 빼면 할머니 입가에 새겨지던 깊은 주름, 실비집 구석자리에 앉아 대낮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던 친구의 슬픈 눈빛, 대치상황에 전투모 안으로 보이던 앳된 전경의 겁먹은 표정, 사창가 골목을 지나야 갈 수 있었던 미아리 친구의 자취방, 늘 어두웠던 학교 앞 문방구, 낯선 방에서 깨어나 처음 쳐다보는 천장의 무늬, 무엇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허기, 옥탑방에 살 때 “그런데 아저씨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네요”라는 내 말에 “우리 아저씨요? 나 싫다고 집 나가서 다른 여자랑 살아요” 하고 웃으며 말하던 주인집 아주머니, 옥탑방을 나와 우연히 어머니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에 그 아주머니가 실은 내 어머니의 고향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날 오후, 어두운 병실 침대 위에서 당신이 한쪽 몸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고 내 이름을 반복해 부르던 어머니의 메마른 목소리, 내게 담배를 빌리고는 “그런데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내 물음에 “폐암이에요”라고 덤덤히 말하던 사내의 무심한 표정, 아이처럼 엉엉 울며 내 옆을 지나던 노점상 주인아주머니, 그 모습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얼굴을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리던 내 모습, 앞다리를 세우고 먼 곳을 쳐다보는 고양이의 시선, 도서관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누군가의 집 옥상에 걸린 빨래들, 퇴근길 지친 몸으로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풍경, 그리고 소설을 읽는 시간들. 저 모든 오목한 시간들.



 
 
한수철 2012-05-18 03:01   댓글달기 | URL
오목한 시간들... 오목한 시간들... 입에 착 기분 좋게 들러붙네요.^^


후와 2012-05-18 12:57   URL
어쩐지 오목한 곳에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

다락방 2012-05-18 09:25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입니다, 후와님.
후와님과 한수철님이 소설을 써주시기를, 소설책을 내주시기를 바라고 있어요. 두 분의 앞으로 할일에 그것이 계회에 있든 없든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후와님의 글은 진짜 짱이에요. ㅠㅠ

후와 2012-05-18 13:03   URL
한수철님이 쓰시면 저는 페이퍼를 담당하겠습니다! 물론 다락방님이 책을 내셔도 마찬가지구요ㅎㅎ
유쾌하고 즐거운 기운을 전해주는 페이퍼는 쓰지 못하고 늘 칙칙한 글만 올려서 찜찜했는데 예쁘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2-05-18 09:47   댓글달기 | URL
모니터 화면이 오목하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해주시네요.

후와 2012-05-18 13:04   URL
그런 오목함도 있었군요ㅎㅎ 고맙습니다^^

구차달 2012-05-19 09:51   댓글달기 | URL
문장에 시대가 담겨 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역시...

후와 2012-05-19 13:57   URL
시대라고 하시니 갑자기 부끄러워지네요ㅎㅎ
 

 

 박지선이라는 희극배우가 있다. <개그 콘서트>에 나온다. 가끔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해줄 때 유심히 보게 되는 배우다. 개그우먼이라고 불리지만 나는 희극배우라고 부르는 편이다. 어쩐지 배우 같아서 그렇다. 웃기는 데 목숨 건 여느 개그맨들과 달리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늘 민낯으로 나와서 그런가, 혼자 생각했다. 아무리 ‘웃기게 생긴’ 개그우먼이더라도 분장을 하고 더러 화사하게 화장을 한 얼굴로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기도 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말 그대로 연예인 같아지기 마련인데, 늘 같은 모습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저 배우는 심심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라고 혼자 생각했더랬다. 말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 개그맨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 없이 공채에 떨어져가며 고생고생하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경우는 아니겠다 싶었다. 좋게 말하면 그런 그악스러움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프로’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겨레> 주말판에 실리는 김두식 선생의 ‘김두식 고백’이란 인터뷰 기사의 이번주 주인공이 박지선이었다. 유심히 봤다. 내 짐작이 맞았다. 다만 아픔이 전혀 없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피부질환을 앓아 고등학교 땐 휴학까지 해야 할 지경이었단다. 분장은커녕 화장도 할 수 없고 로숀 같은 것만 발라도 얼굴이 ‘뒤집어’진단다. 햇빛 알레르기도 그래서 생긴 거라고. 민낯의 비밀이 여기 있었다. 여자로선 치명적인 상처겠지만 이른바 ‘예쁜’ 여배우가 아니니 큰 지장은 없는 모양이다.

 

 그밖에는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끼가 넘쳐 오락부장을 전담하거나 소풍 때마다 전교생들 앞에서 그 끼를 맘껏 발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단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공부 잘하면서 주변 친구들 서너 명을 가끔 웃기곤 하는 학생이었던 모양이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나와 임용고시 준비를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개그맨 공채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을 사람이다. 공채도 한 번에 붙었고 특별한 의욕도 보이지 않아 “저거 공부하다 미쳐서 왔나보다” 하는 평을 받았단다. 태어나서 고3 때까지,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다니 일단 3대가 한 집에서 살았을 테고 그만큼 화목한 가정이었겠다 싶다. 남다른 사춘기를 보낸 것 같지도 않고 아직 연애 한 번 못해봤다니(물론 짝사랑도 가슴 아픈 경험이긴 하겠지만) 가슴을 깊이 베인 듯한 실연의 상처도 아직은 없겠다. 심심하게 살아온 거, 맞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배우나 가수, 작가 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누가 봐도 배우나 가수 혹은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산 데다 본인 또한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길을 달려온 사람들은 어쩐지 부담스럽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굳이 나 같은 인간이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아해줄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본인들이 관리를 좀 잘하겠는가.

 

 그런 프로페셔널보다 아마추어 냄새가 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끌린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배우나 가수 혹은 작가가 돼 있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끊임없이 회의하며 연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소설을 쓰다가 역시 어느 날 문득 다른 직업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청량감이 있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개인적으로 유감이 많다. 아마도 가수 같지 않은 가수, 배우 같지 않은 배우들이 양산되는 데다 이 사회에 ‘공정성’ 바람이 분 탓에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 싶은데, 그래도 그렇지 이 사회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댈 데가 그리도 없단 말인지. 작가도 다르지 않다. 이 사회에선 자신이 꾸준히 써온 작품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출판사에 보내 책을 내고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중앙 문단으로 진출하는 게 아니라, 중앙 문단의 평론가들로부터 사전에 작품 한두 편을 미리 평가 받고 작가로 ‘뽑힌다’. 오죽하면 당선용 작품을 따로 쓴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러고는 ‘공정한 평가’ 운운한다.

 

 말하자면 앨범도 내지 않고 관계자들의 평가에 따라 가수가 되고, 작품에 출연하지도 않고 배우가 되고, 책 한 권 내지 않고 작가가 되는 것이다. “어머, 가수세요?” “예, 공인 받은 가수입니다.” “그럼 대표곡이?” “아직 앨범은 내지 않았습니다.” “우와 배우시라구요?” “예, 공인 받은 배우입죠.” “그럼 대표작이?” “아직 출연한 작품은 없습니다.” “이거 작가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공인 받은 작가랍니다.” “그럼 작품집 제목이?” “아직 작품집은 못 냈습니다.”

 

 시청자들을 배심원으로 거느리고 공정한 평가 기준을 들이대야 할 대상은 가수나 배우, 작가 지망생이 아니다. 대체 뭘 공정히 평가하겠다는 것일까. 설사 오디션을 거쳐 뽑더라도 이처럼 중인환시리에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가며 뽑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편향된 기준으로 뽑을 수도 있다. 작가라면 해당 출판사나 편집자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야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것 아닌가. 일률적인 기준으로 뽑아놓고 개성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부족하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일부 평자들의 말을 들을 때면 “이게 다 니들 때문이야 인마!”라고 한마디해주고 싶다.

 

 그러니 내 눈엔 그저 관계자들이(시청자까지 포함한 사회 전체가) 이들을 사전검열하겠다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작 수많은 시청자들을 배심원으로 거느리고 엄격한 공정성을 구현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내부인들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쇼를 마감해버리거나(공직자 청문회) 깽판을 치고도 떳떳하다고 큰소리를 내면서(통합진보당의 작태), 외려 창조성이 생명인 분야에는 공정한 평가 기준을 들이대니, 이럴 거면 아예 국가고시를 치르는 게 어떨까 싶어지기도 한다. 정치인국가고시, 가수국가고시, 배우국가고시, 작가․시인국가고시. 매년 수석 합격자들을 언론에서 빵빵 터뜨려주고 특정 점수 이상의 합격자들을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 아닌가?

 

 가수가 될 자격이란 노래 부르는 걸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뿐이고 그건 배우나 작가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불꽃을 피울 만한 시기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수가 되고 배우가 되고 작가가 될 수 있다. 그 과정이 공정한가 아닌가를 거론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일 뿐이다. 그들은 태어나서 성장해가는 존재들이지 경쟁에서 뽑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공정하게 태어난 것인지를 따지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가만, 난 공정하게 태어났던가?

 

 무엇보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들과 달리, 이들이 공정하게 뽑히지 않는다고 작게는 지역주민이 크게는 국민 전체가 불행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그다지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가수가 되고 배우가 되고 작가가 된다고 해서 나나 당신의 삶이 불행해지는가? 전혀 아니다. 정 기분 나쁘면 그 가수의 노래를 듣지 않고 그 배우의 연기를 보지 않고 그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러니 과잉반응이다. 사회 전체가 이상한 데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이에 정작 공정하게 관리되었어야 하는 부분에선 치명적인 균열이 발생해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있다. 통합진보당 얘기다. 이정희 대표는 당의 문제이니 국민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투의 말을 했단다. 민주노동당 시절까지 치면 한 나라의 공당으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저들은 마치 느닷없이 급습을 당한 비밀결사집단이나 특정 종교집단처럼 굴고 있다. 이 나라의 국민인 내가 통합진보당의 당원이 되려면 아주 비밀스러운 입당 과정을 거치거나 이상한 형식의 세례라도 받아야 할 모양이다. 어쩐지 이 사회가 <개그 콘서트> 녹화장 같다. 이런, 끊임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땀 흘려가며 애써서 한 편 한 편 무대에 올리는 개그맨들을 욕되게 했군. 취소해야겠다.

 

 다시 박지선으로 돌아가면, 인터뷰는 무산될 뻔했단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박지선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니, 늘 카메라 세례를 받는 연예인이 사진을 찍지 못하겠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사정은 이렇다. “멀리서 찍는 거나 동영상은 괜찮은데 사진 찍는다고 ‘이제 찍어요, 지선 씨 포즈!’ 그러면 얼어버려요. 사람 만나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사진 찍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동안 인터뷰도 많이 안 했어요.” 배우 맞다.

 

 훌륭한 희극배우로 계속 성장하겠지만 중간에 느닷없이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돌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그는 아마 민낯일 것이다. 부럽다.

 

 진보세력의 무기는 도덕성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답답하다. 도덕성은 상대보다 자신을 더 화사하게 치장하기 위해 하는 화장이나 분장이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마치 피부질환이나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화장을 하지 못하는 박지선의 민낯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명이자 굴레인 것이다. 무기로 삼을 것도 못 되고 자랑할 것도 못 된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냥 얼어버릴 만큼 밖으로 드러내기 뭐한 것이지, 얼짱 각도로 온갖 포즈를 취하며 포장할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화장을 지우고 포즈를 거두고 나면 금방 드러날 찡그린 표정을 감추기 위한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박지선의 민낯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얘기일 뿐이다.



 
 
2012-05-14 04:37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4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4 07:1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4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5-14 08:23   댓글달기 | URL
아마도 후와님은 [하이킥 맨발의 역습]이란 시트콤을 안 보셨을 것 같은데, 저는 그 시트콤에서 박지선을 제일 좋아했어요. 그 캐릭터가 바로 박지선의 모습이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거든요. 그 시트콤에서 박지선은 결국 프랑스 남자 쥘리앵과 연인이 되요. 정말 정말 잘됐다고..그녀는 진짜 멋진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저는 막 감정이입 백프로 되가지고....

며칠전에 친구가 김두식 선생이 박지선을 인터뷰 했다고 했는데 아직 찾아보질 못했거든요. 후와님의 페이퍼에서 또 한번 이 소식을 듣게 되네요. 이젠 찾아봐야겠어요.


후와 2012-05-14 23:59   URL
안 그래도 인터뷰에 시트콤 얘기가 나오더군요. 기회가 되면 한번 보고 싶네요ㅎㅎ

북극곰 2012-05-14 09:00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후와님!

후와 2012-05-14 23:59   URL
고맙습니다, 북극곰님!

한수철 2012-05-14 11:53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글을 끝까지 다 읽다니!

후와 2012-05-15 00:00   URL
그러게 말입니다. 공연히 길어지기만 했네요!^^

잉크냄새 2012-05-14 12:07   댓글달기 | URL
네, 자연스러움이 있는 개그맨입니다. 예전에 자주 등장하더니 요즘은 좀 잘 안나오거나 단역으로만 나오는것 같네요.

후와 2012-05-15 00:01   URL
보고 있으면 억지스럽지 않아 그런지 편안하게 웃을 수 있어서 좋더군요ㅎㅎ

구차달 2012-05-14 12:24   댓글달기 | URL
역시 아무리 봐도 후와님의 글은 칼럼입니다. 내가 페이퍼를 읽고 있는지, 신문지를 읽고 있는지, 신문지를 붙여넣기한 페이퍼를 읽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거든요. 잘 읽고 갑니다.

후와 2012-05-15 00:01   URL
그냥 주절주절 공연히 길어진 페이퍼를 읽으신 겁니다ㅎㅎ

반딧불이 2012-05-14 12:47   댓글달기 | URL
후와님의 글도 박지선의 '민낯'과 다르지 않은데요.

후와 2012-05-15 00:02   URL
저야 뭐 분장이나 화장할 일은 없으니까요ㅎㅎㅎ

2012-05-14 17:31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1:09   댓글달기 | URL
주말에 김두식의 박지선 인터뷰 편 저도 재미나게 읽었답니다.
박지선, 전 그저 좋아도 싫어도 하지 않는 괜찮은 희극인이다 정도였는데
그 기사 보고 좀더 좋아지더라구요.^^
후와님의 좋은 글을 보니 민낯에 대한 생각에 다시 잠기게 되네요.^^

후와 2012-05-16 14:35   URL
그래서인지 이제까지 인터뷰에 등장한 인물 중 유일한 연예인인데 사진은 가장 멀리서 뿌옇게 찍었더라구요ㅎㅎㅎ

poptrash 2012-05-17 06:31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고성에 갑니다!

후와 2012-05-17 13:41   URL
여긴 오전에 천둥 치고 비오다가 이젠 화창하게 갰는데 그쪽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읽다가 문득 수전 손택의 글이 생각나서 찾아 읽었다. 『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옮김, 이후, 2002)에 실린, 「카뮈의 『작가수첩』」이란 제목의 글. 1960년대 초반에 쓰였으니 1960년 카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쓰인 글인 모양이다. 나름대로 카뮈를 추모하거나 추억하는 글이겠다. 그래서였을까. 첫 문장이 묘하다.

 

 “위대한 작가는 남편 아니면 애인, 둘 중 하나다.”

 

 혈기를 앞세우는 이십대 청춘이라면 편향된 시각 운운하며 거품을 물었을 만한 문장이다. 삼십대의 기혼자라면 묘하게 균형을 맞춘 글이라며 키득거렸을 테고. 저 문장은 “위대한 작가는 모두 연적(戀敵)이다”라는 남성용 버전을 감추고 있는 거야, 위대한 작가란 모든 여성의 심장박동 소리를 연인보다 먼저 듣는 자들이니까 말이야, 하긴 니들이 뭘 알겠니. 거품을 무는 이십대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으려나. 그나저나 여성들은 왜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건지.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살고 나면 감흥보다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이 양반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써놓고 어떻게 글을 이어가려는 건지 그게 걱정되어서다. 노파심이란 말이 공연히 생긴 건 아닌 모양이다.

 

 신소리는 이쯤 해두자. 아무렴 수전 손택이 위대한 작가들을 늘어놓고 뚜쟁이들처럼 남편감에 어울리는지 애인감으로 적당한지 저울질했겠는가. “남편 아니면 애인, 둘 중 하나다”라는 저 첫 문장의 의미는, 문학의 공간에서 그 자장 안에 놓인 사람들을 부양하며 가치를 지켜나가려고 애썼느냐, 아니면 비록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어도 늘 가슴속에 품고 있는 갈망, 즉 이 답답한 문학이란 공간을 훌쩍 뛰어넘고 싶은 불온한 욕망을 건드렸는가를 기준으로 이른바 ‘위대한’ 작가들을 분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카뮈는 문학의 남편감으로 어울린다는 것이고. 손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시대를 제외한 모든 위대한 문학적 시기에는 남편이 애인보다 훨씬 많았다. 오늘날, 문학이라는 허구의 집에는 미친 연인, 명랑한 강간범, 거세된 아들이 넘쳐난다―그렇지만 남편은 몇 명 안 된다. 남편들은 어딘가 떳떳하지 못하며, 모두 애인이 되고 싶어한다. (중략) 그러니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작가, 그러나 분명히 천재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가가 오롯이 일어나 대담하게 건전함을 책임진다면, 그가 그의 순수한 문학적 가치를 넘어서는 갈채를 받는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엄청난 재능을” 지녔지만 “천재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가”가 바로 카뮈라는 것. 거꾸로 말하면 ‘엄청난 재능을 지녔거나 천재인’ 작가들은 애인에 속하겠다. 이를테면 사르트르와 카프카 같은 작가들. 작은 키에 사시거나(사르트르) 좀비 같은 외양을 지녔지만(카프카), 카뮈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탁월한 사상가이거나 천재 작가였던 그들. 그렇다면 카뮈는? 어느 쪽으로도 애매하다. 이념과 행동에서는 사르트르를 따라가지 못했고 자기만의 문학세계에서는 카프카에게 미치지 못했다. 말하자면 광장에서도 자기만의 방에서도 그는 일인자가 되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손택은 이렇게 말하며 카뮈를 옹호한다.

 

 “카뮈의 생애와 작품은 도덕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 태도의 비애감에 관한 것이다. 이 비애감이 카뮈의 현대성이다. 이 비애감을 위엄 있고 남성적으로 겪을 줄 아는 그의 능력 때문에 독자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도덕적 태도의 비애감이라. 이거야말로 남편들의 몫이다. 애인들이란 자고로 도련님 같은 존재들이니까. 사르트르와 카프카처럼. 늘 ‘독고다이’처럼 굴지만 어쩐지 여성과 가정을 꾸리는 걸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겁쟁이들인 셈이다. <황야의 7인>에서 찰스 브론슨이, 마을의 악당들을 해치우고 떠나는 자신들을 따라나서려는 꼬마에게 들려주는 명대사처럼. “우리가 왜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줄 아니? 그건 겁쟁이기 때문이야. 네 아버지처럼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할 용기가 없어서지. 그러니 진짜 영웅은 우리들이 아니라 네 아버지란다.” 도덕적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나 떠들어댈 수 있지만, 도덕적 태도의 비애감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독고다이’처럼 굴지만 겁쟁이에 쪼다인 나 같은 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자꾸 신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려고 페이퍼를 쓴 게 아닌데. 문제는 희곡이었다. 손택의 글을 찾아 읽은 것은 손택답게 희곡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는데 이상하게 일언반구도 없다. 내 생각엔 소설이나 철학서만으로 세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지 싶다. 무엇보다 나머지 두 사람과 달리 카뮈는 배우였다. 카뮈 하면 떠오른 것은 알제리의 태양, 폐결핵, 부조리 등이라지만, 이건 문학적으로 포장된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를 키운 건 젊은 날의 스승과 장학금 그리고 축구와 연극이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시골 선생이나 하면서 늙어갔을 것이고, 축구와 연극이 아니었다면 더 이른 나이에 죽었거나 아니면 작가가 아니라 기자로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연극에 대한 카뮈의 사랑은 거의 중독 수준이었노라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지독했다. 함께 몸을 부딪히며 작품을 완성해간다는 것의 매력은 축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머지 두 작가와 카뮈를 구분해주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에게는 정신만큼이나 몸도 중요했다. 그러니 사르트르와의 비교도(카프카는 어쩔 수 없고) 희곡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공정해 보이는데(사르트르 또한 연극에 대해서는 ‘조절이 필요할 정도로’ 중독 수준이었다니까), 검색을 해보니 사르트르의 희곡을 구할 수 없다. 1997년에 나온(!) 『무덤 없는 주검』이나 『닫힌 문, 존경할 만한 창녀』(공손한 창녀)가 고작이다. 대표작이랄 수 있는 「파리 떼」나 「네크라소프」는 아예 번역된 적도 없는 모양이다. 2008년에 나온 『상황극』(박형범 옮김, 영남대학교출판부)이 그나마 사르트르의 연극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인데 여기에도 희곡은 수록되지 않은 듯하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우리말로 된 사르트르 전집이 없다는 것. 카프카 전집도 있고 카뮈 전집도 있는데 사르트르 전집이 없다니! 내가 못 찾는 건가? 남편인지 애인인지 판단하려면 비교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어쩌란 말인지.

 

 그러니 신소리나 한마디 더 해야겠다. 상대가 남편감인지 애인감인지 저울질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반증이다. 그때의 저울질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두고 하는 것이니까. 사랑이 필요하다기보다 삶의 울타리가 필요하거나 뭔가 새로운 놀이가 필요한 상태. 그러니 그들이 내뱉는 대사는 비록 세련되고 로맨틱하더라도 사랑과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사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이리라.

 

 “(당신을 만나기 전엔) 사랑이 이런 건지 미처 몰랐어요. 그리고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 대사를 문학에 적용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당신을 만나기 전엔) 문학이 이런 건지 몰랐어요.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번역된 작품이 없어서 당신을 만나지 못하니, 문학에서는 정말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이라면 당신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겁날 건 없겠다. 그럴수록 더 안심이 되는 게 사랑이니까.

 

 



 
 
반딧불이 2012-05-06 00:39   댓글달기 | URL
희곡에 대한 얘기가 없는 건 이 글이 까뮈의 <작가수첩>에 관한 글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건 <우울한 열정>에 실려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마지막 문장에서 후와님은 사랑에서는 '애인'이나 '남편'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것 같은...ㅋㅋ

후와 2012-05-07 02:12   URL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ㅎㅎ <우울한 열정>은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 검색해봤더니 반딧불이님의 페이퍼가 나오더군요^^

2012-05-11 17:22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2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4 0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3학년 때던가. 워낙 멍한 채로 지내기 일쑤여서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게 장기 아닌 장기였던 시절이다. 실내화 주머니에 실내화는 물론 우산이며 필통, 장갑 등등 그 당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모으면 문구점 하나는 거뜬히 차렸을 것이다. 겨울이면 장갑은 벙어리장갑이든 손가락장갑이든 무조건 끈을 달아 목에 걸고 다녔는데, 어김없이 한 짝씩 잃어버리곤 했다. 내 물건을 갖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중엔 두렵기까지 했다. 세상에 내 것이란 게 없었으면 싶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대문을 열기 전 실내화 주머니며 가방이며 가방 속에 든 학용품까지 머릿속으로 모두 점검을 하고 나서 내심 안심하고 대문을 열었는데, 수돗가에서 나를 맞던 어머니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소리쳤다. “야, 너 신발 한 짝 어쨌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던 걸까. 아무리 돌이켜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 내 모습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런 내 모습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는 반에서 논다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늘 소심해서 존재감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학생이었는데, 그 한 학기 동안은 보통 까불면서 지낸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말문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끊임없이 떠들고 욕하고 싸움질을 하며 지냈다. 한번은 반에서 쌍둥이 형제와 싸움이 붙었는데 나는 허리띠까지 풀러가며 “둘 다 죽여버릴 거야!” 하고 고래고래 소리치기도 했다. 나중에 친구 녀석이 “너 눈빛이 정말 사람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어” 하고 내게 소곤거렸더랬다. 그런데 2학기 때는 다시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무섭도록 조용해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역사라는 게 시원부터 현재까지 균일한 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만큼 엉뚱한 환상도 없으리라. 차라리 그것은 단속적(斷續的)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가 있는 게 아니라 역사‘들’이 있는 셈이다. 개인사라고 다를까. 가령 내가 누구보다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전혀 기억을 못해요?” “초등학교 동창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에요.” “기억하기 싫을 만큼 특별히 나쁜 일을 겪었던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도 않아요.” “그럴 수도 있군요.” “그러게 말예요.”

 

 단속적이다. 일관된 ‘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수한 나‘들’이 단속적으로 연결된 게 바로 ‘나’다. 그 나‘들’을 하나의 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마도 비인칭으로서의 ‘나’일 것이다. 르네상스시기에 발명된 원근법의 소실점을 바라보는 바로 그 ‘나’. 소실점의 반대쪽에 놓인 비인칭으로서의 나인 만큼 그 나야말로 소실될 수밖에 없는 나일 뿐이다. 『말과 사물』에서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분석하는 글로 첫 장을 연 것도, 18세기에 발명된 인간이 결국은 바닷물에 씻기듯 사라져갈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은 아닐는지. 그때의 인간은 아마도 소실점을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인간일 것이다. 그게 나라면 아마도 가장 나답지 않은 나, 텅 빈 자리에 유령처럼 서 있는 나, 그러면서도 무수한 나‘들’을 단 하나의 나라고 윽박지르는 나일 것이다.

 

 감기 때문에 골골대면서 따문따문 읽고 있는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김경연 옮김, 열린책들, 2007) 때문에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 편의 소설이 두 권에 담겨 있는데 하권의 세 번째 소설을 읽는 중이다. 독특한 소설이고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르네 지라르나 『말과 사물』의 미셸 푸코, 『계몽의 변증법』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 이어질 이 거장들의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섬유공학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섬유공장을 물려받아 착실히 경영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이런 소설을 썼단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은 것은 헤르만 브로흐인 셈이다. 역사‘들’, 문학‘들’, 가치‘들’, 그 모든 ‘들’의 단속적인 결합을 절묘한 형식을 통해 구현해낸 소설‘들’.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생각을 했을까.

 

 복수형 접미사 ‘들’에 대해 생각하다 떠오른 다른 소설은 1970년대 교련 반대 투쟁을 다룬 최인호의 중편 「무서운 복수(複數)」이고 그 소설에서 작가가 제사로도 쓰고 시구 중에서 제목을 따온 황동규의 시 '철새'였다. 하여 이 페이퍼의 제목은 여러 경로를 거쳐(‘들’을 거쳐) ‘무서운 복수(複數)’가 되었다. 무서운 복수라. 그렇다. 나‘들’을 잊는다면 나는 무수한 나‘들’, 그 무서운 복수(複數)에게 무서운 복수(復讐)를 당할 것이다.

 

 



 
 
구차달 2012-04-25 15:12   댓글달기 | URL
'나'를 혐오하는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가에 관하여 좀 생각하다가 혐오스러운 '나'의 위선적인 '나'를 향한 복수가 글쓰기라면 위선적인 '나' 의 혐오스런 '나'를 향한 복수는 술 마시기가 아닐까, 그런데 그 둘은 자리를 바꿔도 크게 어긋남이 없어 보이는 모호함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하다가 갑니다. 이미 감기에 걸리셨군요. 감기 바이러스 퇴거 승인 요청을 급히 올려야겠네요. 그런데 어디다가.

후와 2012-04-26 01:09   URL
그 두 가지 '나'는 화해할 길이 정녕 없는 걸까요? 그게 고민입니다... 쩝ㅎㅎ 감기는 이제 거의 나았습니다. 지난주부터 시작해서 이번엔 아주 호되게 앓았네요. 구차달님도 조심하셔요^^

poptrash 2012-04-25 15:59   댓글달기 | URL
오늘 오랜만에 외출을 했어요. 어느 사무실에 놀러갔는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다른 회사에 다니시던 분이 거기 있어서 순간 깜짝. 인사를 하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당황.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모 중고서점에 들렸는데 예전에 같이 일하던, 그러나 부서가 달라 담배 필때 목례만 하던 분이 계셔서 또 깜짝. 마지막으로 들른 도서관에서 책 몇 권 들고 나오는데 이번엔 열람실에서 나오던, 학창시절 언젠가 같은 반이었던, 그러나 그게 언제였는지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눈이 마주쳐서 또또 깜짝. 몇 초 쯤 눈이 마주친 채로 서로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비바람이 불었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문장들을 쓰고 있는 거죠?

구차달 2012-04-25 17:22   URL
(주인보다 먼저 댓글 달기가 좀 꺼려졌지만 후와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주실 것으로 믿고 ...)

아마도 참을 수 없는 필력의 꿈틀거림 때문이 아닐까요. 팝님의 이야기를 보여 주세요. 후와님도 아마 같은 생각이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하.

후와 2012-04-26 01:13   URL
구차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ㅎㅎ 덧붙이자면 단속적인 여러 나'들'과의 만남이었군요. 그것도 하루 만에 말이죠. 지금쯤 팝님의 그 여러 나'들'이 모두 편히 숙면하고 있기를...^^

dreamout 2012-04-25 21:44   댓글달기 | URL
미셸 푸코를 떠올리셨다니, 어떨지 궁금하네요.

후와 2012-04-26 01:20   URL
립서비스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인터뷰에서 푸코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들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자신의 연구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던데, 그가 초기에 품었을 법한 생각의 단초들이 이 소설에도 보이더군요. 물론 제가 느낀 인상이 그랬다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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