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0분이다. 식당에서 한 끼 밥을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소설 한 편을 다 읽는 셈이다. 시간만 비슷한 게 아니다. 한 끼 밥을 먹는 것과 단편소설을 읽는 것은 경험의 내용도 비슷하다. 된장찌개를 먹는다면 빨리 먹든 천천히 먹든 시작부터 끝까지 된장찌개를 먹는 경험으로 일관돼야 한다. 시작은 된장찌개였는데 먹다 보니 스파게티인 데다 더군다나 다 먹고 나서 보니 내가 먹은 게 카레였다면, 혹은 세 가지 음식 맛이 한꺼번에 느껴진다면 이건 식사라기보다 벌칙에 가까워진다.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된장찌개든 스파게티든 카레든 한 가지 맛으로 일관돼야 다 읽고 나서, 마치 입 안에 감도는 뒷맛과도 같은 여운을 즐길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뒷맛 같은 여운은커녕 쓴맛만 보게 된다. 장편소설이 오랜 성찰과 노동의 산물이라면 단편은 훈련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장편이 더하기의 미학이라면 단편은 빼기의 미학인 셈이랄까. 훈련을 통해 얻어진 감각으로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덜어내느냐로 성패가 갈리는 게 단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된장찌개를 선택했다면 작가 스스로는 물론 독자에게서도 스파게티나 카레를 먹을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을 덜어내야 한다.
그러니 단편을 읽다 간혹 뭔가 결이 맞지 않는 문장이나 단어가 반복되며 모티브로 기능하는 것을 접하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잘못 끼워넣은 것이 아니라, 작가가 미처 버리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잘 읽히는 데다 뒷맛 같은 여운을 남긴다면, 그 작가는 잘 훈련된 작가라고 봐야 하는 것 역시 틀림이 없다.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12)에 실린 김미월의 「프라자 호텔」이 그런 경우다. 휴가를 시내 호텔에서 보내는 30대 부부 얘기다. 이번에 고른 호텔이 바로 프라자 호텔인데, 이 호텔 위치가 심상치 않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되었고 노제가 열렸던 시청 앞 광장을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대학 동기인 이 부부는 가두시위를 나갔다가 시청 앞 프라자 호텔 근처를 헤맨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3분의 2쯤 읽었을 때 엉뚱한 문장과 맞닥뜨렸다. 여대생이었던 여자가 프라자 호텔을 올려다보며 저기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인데, 해외로 입양되었다가 생부모를 찾아 고국에 돌아온 누군가가 프라자 호텔에 묵으며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을 마치 이방의 도시인 듯 바라보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란다. 3분의 2나 써놓고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런 작품이 뽑혔단 말이야? 내 반응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의외로 문제 없이 잘 읽혔고 여운도 남았다. 이럴 땐 당연히 궁금해진다. 어떻게 한 거지?
궁금하면 분해해보는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장난감을 들여다보며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어지면 낱낱이 분해해보는 것처럼. 작가노트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버스를 타고 시청을 지나다가 프라자 호텔 16층의 한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목격했단다. 그때 작가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문제의 입양아 얘기였다. 친구가 프라자 호텔 16층을 예약하고 작가를 불렀단다. 친구 복도 많다. 두 젊은 여성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며 신나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잠들었는데 새벽녘에 깬 작가가 호텔 복도를 서성이다 역시 그 느낌에 사로잡혔단다. 고국을 찾은 입양아가 된 기분. 친구와 공유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작가가 왜 프라자 호텔에 묵고 싶다고 했는지조차 잊었단다. 그 체험에서 이 소설이 쓰여질 수 있었다.
자, 작가는 죽어도 입양아 모티브를 버릴 생각이 없다. 순전히 그 때문에 「프라자 호텔」이라는 소설을 쓰는 셈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친구와 보낸 하룻밤을 소재로 쓰기도 뭐하다. 거기에 입양아 모티브를 살린다고 해도 프라자 호텔이 의미를 잃게 된다.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이 어디 프라자 호텔뿐이겠는가. 게다가 시청 앞 광장이라는 상징성도 버릴 수 없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친구를 버리고 부부를 선택했다.
단편에서 부부나 친구 혹은 연인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면 따라야 할 법칙이 있다. 상황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 한쪽이 화자로 등장하여 일방적인 서술로 진행되더라도 화자가 제대로 된 서술자가 되려면 상대편에게도 주고받는 역할을 맡겨야 한다. 서술자란 화자와 달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상정된 가상의 제3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합의를 이룰 때 우리가 늘 머릿속에 상정하는 바로 그 제3자.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입양아 얘기를 누구의 입을 통해 꺼낼 것인가. 남편? 아내? 둘 다 마땅치 않다. 주인공인 두 사람에게 맡긴다면 입양아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그러면 된장찌개가 스파게티가 되고 카레가 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프라자 호텔이 죽는다. 제3자에게 시켜야 한다. 다른 남자? 다른 여자? 다른 여자가 낫다. 남자라면 자칫 수작으로 비쳐질 수 있다. 결국 남편이 화자인 ‘나’가 되고 입양아 얘기는 남편의 ‘다른 여자’의 입을 통해 꺼내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렇다면 아내는? 아내를 제3자로 만들어버리면 소설은 꼬여버린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다른 여자’가 결국 아내였다고 밝히는 것이다. 다만 돌올하게 드러나는 반전이어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프라자 호텔과 입양아 얘기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처리되어야 한다.
첫 문장이 중요하다. 아니 최소한 처음 세 문장에 두 사람과 프라자 호텔을 담아야 하고 그들이 프라자 호텔을 상관물로 상황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선택된 첫 문단은 이렇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아내 몫이었다. 이번에는 프라자로 가자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즉각 컴퓨터 전원을 켰다. 목적지에 예약을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으므로.”
시작이 좋다. 세 가지 모두를 담은 데다가 복선까지 실었다. 남자인 ‘나’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한다. 이 상황이 바로 두 인물이 주고받는 내용의 다다. 말하자면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자가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하는 상황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인 셈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상황이 반복될 거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든 과거의 일이든. 게다가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아내와 ‘나’다. 남편을 화자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여자’가 등장할 여지를 만들어두었다.
그 다른 여자가 대학에서 만난 윤서다. ‘나’는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생전처음 서울에 와본 촌놈이다. 어느 정도냐면 입학식도 아니고 예비소집일에 아버지가 마련해준 양복을 차려입고 나타날 정도다. 학교 방송국 피디로 일하는 윤서가 학우와의 대화 시간에 나와줄 것을 요구하자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나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를 신청곡으로 생각하고 나갔다가 이런저런 정치문제를 질문 받고 버벅대는 바람에 통편집돼버린다. 그날 방송에 나간 노래는 노찾사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였다. ‘나’는 중얼거린다. “말이 돼? 마른 잎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 예수야?”
이런 ‘나’이니 서울은 그야말로 별천지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서울내기인 윤서에겐 서울이 답답하고 지겹기만 하다. 통편집한 미안함에 ‘나’의 데이트 신청에 마지못해 응한 윤서가 시청 앞에서 대뜸 프라자 호텔을 올려다보며 저기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여기가 정확히 3분의 1 지점이다. 그렇다면 3분의 2 지점에서 다시 한 번 프라자 호텔이 언급되어야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거론되어야 한다. 주고받아야 하니까. 공식이랄 것까진 없지만, 독자에게 설득력을 주려면 그러는 것이 좋다. 가령 현재와 과거 회상이 교차되는 소설이라면 현재의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과거는 최대화한다든가, 현재의 시간은 최대한 단축하고 과거의 시간은 최대한 길게 한다는 식의 공식 아닌 공식 같은 것이랄까.
작가는 그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3분의 2 지점에서 5.18을 맞아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전경에게 쫓기는 윤서의 손을 잡고 뛰어간 곳이 덕수궁 뒷길이었고 시청 앞까지 터덜터덜 걸었을 때 왜 그때 프라자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싶다고 했냐는 ‘나’의 물음에 윤서는 문제의 입양아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다면 다음 프라자 호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된장찌개가 스파게티가 되고 카레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입양아의 경험을 누군가가 직접 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 말고 누구겠는가. 윤서에게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청하고 뭐 그러지, 하는 승낙을 얻어내자 촌놈인 ‘나’는 덜컥 프라자 호텔에 예약을 한다. 3개월 치 생활비를 톡톡 털어서. 하지만 윤서는 7개월 전에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만다. 잊지 않았다고 해도 ‘나’와 크리스마스를 보낼 이유가 있겠는가.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꿈꾸지 않는다면.
혼자 프라자 호텔 16층 방에서 밤을 지새다가 새벽녘 복도에서 ‘나’는 입양아의 처지를 겪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이 별천지 같은 촌놈이 서울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묵지 않는 프라자 호텔에서 그것도 혼자 밤을 보냈으니, 내 나라이지만 어쩐지 이국의 도시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간간이 현재의 시점에서 월드컵 열기며 촛불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용산참사 등을 거론하며 두 사람이 지나온 시대의 두께를 환기시킴으로써 그 낯선 경험이 현재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걸 드러내주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단은 이렇다.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이야기를 한다면 그녀는 믿을까. 그때의 일을 기억이나 할까. 내가 바로 그때의 나라는 걸. 우리가 바로 그때의 우리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빗속을 뚫고 가서 사온 아이스 커피를 건네며 슬쩍 얘기해봐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내가 믿지 않아도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겠다.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휴가의 첫날. 우리에겐 아직 여러 날이 남아 있었으므로.”
윤서가 아내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내가 그때의 내가 되는 순간이고 우리가 그때의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이로써 작가는 프라자 호텔, 시청 앞 광장, 입양아 모티브, 부부의 주고받음에 절묘한 반전까지 살려낸 것은 물론, 부부와 함께 소설을 읽는 독자마저 우리로 묶어내는 데도 성공한 셈이다. 잘 훈련된 작가임에 틀림없다.